악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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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세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 가능성에 대비하여 독일이 계획한 군사 작전이다. 히틀러는 무솔리니 정권의 불안정성을 우려하여 이탈리아 침공 계획을 세웠으며,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한 후 악세 작전을 발동하여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괴뢰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무장 해제되었고, 많은 이탈리아 군인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선 개시를 늦추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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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세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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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악세 작전 (Fall Achse, 독일어) |
다른 명칭 | 운터네멘 알라리히 (Unternehmen Alarich, 독일어) |
일부 | 이탈리아 전역 |
기간 | 1943년 9월 8일 – 9월 23일 |
장소 | 이탈리아, 발칸반도, 프랑스 남부 |
결과 | 축의국 승리 |
점령 | 독일의 이탈리아 북부 및 중부 점령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수립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이탈리아 왕국 |
교전국 2 | 나치 독일 크로아티아 독립국 루마니아 왕국 |
지휘관 | |
이탈리아 왕국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피에트로 바돌리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마리오 로아타 에치오 로지 마리오 베르첼리노 |
나치 독일 | 알베르트 케셀링 에르빈 롬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알렉산더 뢰어 |
크로아티아 독립국 | 미로슬라브 나브라틸 |
루마니아 왕국 | 호리아 마첼라리우 |
병력 규모 | |
이탈리아 왕국 | 60개 사단 (이탈리아 26개, 발칸반도 31개, 프랑스 3개) |
추축군 | 40개 사단 (이탈리아 17개, 발칸반도 19개, 프랑스 4개) |
피해 규모 | |
이탈리아 왕국 | 사망: 20,000–30,000명 무장 해제: 1,006,370명 독일군에 의해 노획됨: 장갑차: 977대 차량: 16,631대 야포 및 박격포: 17,058문 다수의 군함 루마니아군에 의해 포획됨: 포로: 496명 소형 잠수함: 5척 |
추축군 | 알 수 없음 |
2. 독일의 이탈리아 침공 계획
1943년 5월, 튀니지 전역에서 튀니지가 함락된 직후, 독일은 이탈리아가 배신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여러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OKW는 이탈리아 최고사령부에 3개의 새로운 독일 부대를 편성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 부대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철수한 2선급 독일 부대를 주축으로 편성될 예정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지원이 필요한 약한 부대이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두 개의 독일 사단을 더 보낼 것이라고 설득했다.[1]
5월 19일, 한스 후베 장군의 제14 기갑군단 사령부가 프랑스에서 남부 최고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지휘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5월 20일,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정과 동맹 붕괴 위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이탈리아 붕괴나 무솔리니 전복에 대비한 상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1]
5월 21일, OKW의 수장인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한 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에는 다음과 같은 작전들이 포함되었다.[1]
- 알라리히 작전: 이탈리아 본토 침공
- 콘스탄틴 작전: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의 무력화
- 지크프리트 작전: 프랑스 남부의 이탈리아의 프랑스 점령 지역 점령
- 뉘른베르크 작전: 프랑스-스페인 국경 경계
- 코펜하겐 작전: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의 고개 통제
한편, 독일 예비군은 지중해 전역의 잠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재배치되었다. 제1 기갑사단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보내기로 결정되었고, 히틀러는 정예 무장친위대 기갑 사단 3개를 이탈리아로 보낼 것을 고려했다.[1] 6월 17일, 무솔리니는 연합군에 맞서기 위한 지원 병력으로 두 개의 독일 기갑 사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변덕과 이탈리아군 참모총장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장군의 반대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히틀러는 제3 기갑척탄병 사단, 제29 기갑척탄병 사단, 제26 기갑사단을 추가로 파견했다.[1]
2. 1. 초기 계획 수립
아돌프 히틀러는 파시스트 정부의 정치적 안정성과 이탈리아 동맹국의 붕괴 위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이탈리아 국민들의 사기 저하와 전문직 및 군대 내 친영국 정서 확산에 주목했다.[1] 그는 지중해 상황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탈리아의 붕괴 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복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확신했다.[1]1943년 5월 21일, OKW의 수장인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된 지침을 발표했다.[1] 이 계획에는 이탈리아 본토 침공을 위한 알라리히 작전,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의 무력화를 위한 콘스탄틴 작전 등 다양한 전역에서의 일련의 작전이 포함되었다.[1]
히틀러는 정예 무장친위대 기갑 사단 3개를 이탈리아로 보낼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 그러나 무솔리니의 요청과 판텔레리아 함락 등의 상황으로 인해 히틀러는 제3 기갑척탄병 사단, 제29 기갑척탄병 사단, 제26 기갑사단을 추가로 파견했다.[1]
에르빈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의 배신 시 개입하기 위해 바이에른에서 조직되는 군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알라리크 작전"),[1] 7월 21일, 히틀러는 "알라리크" 계획을 중단하고 독일 증원을 이탈리아로 보낼 것을 결정했다.[1] 코드명 "알라리크"는 나중에 이탈리아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악세"로 변경되었다.[1]
2. 2.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회담
1943년 7월 19일 펠트레에서 열린 회담에서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만나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다.[4] 같은 날, 로마는 500대 이상의 연합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군주주의자, 고위 군 장교, 심지어 파시스트 지도부 일부까지 전쟁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게 만들었다.[4]펠트레 회담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의 위중한 상황을 설명하고 전쟁에서 철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솔리니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독일의 지원만 더 요청했다.[4] 반면 히틀러는 끝까지 싸우자는 연설을 하며 더 많은 육해공 지원을 요청하는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했다.[4] 또한 요들, 카이텔, 바를리몬트의 격렬한 요청도 무시했다.[4] 이들은 독일 통제하에 이탈리아에서 통일된 지휘 체계를 만들고, 북부 이탈리아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며, 작전 지역의 추축군 지휘권을
회담 후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사기를 북돋았다고 확신했다.[5]
2. 3. '알라리히 작전'과 '악세 작전'
베니토 무솔리니 실각 전, 아돌프 히틀러는 '알라리히 작전'을 중단하고 이탈리아에 병력을 증파했다. 이후 작전명은 '악세 작전'으로 변경되었다.1943년 5월 21일,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한 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에는 이탈리아 본토 침공을 위한 '알라리히 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1]
무솔리니의 실각과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새 정부의 등장은 독일의 이탈리아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키웠다. 새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한다고 발표했지만, 비밀리에 연합국과 협상을 시작했다.[2]
이탈리아 지도부는 독일군의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독일군이 자국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8월 6일 타르비시오 회담과 8월 15일 볼로냐 회담에서 양측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3]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의 저항을 예상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남부 자원 약탈 및 군사 시설 파괴 계획까지 준비했다.[4]
한편, 알베르트 케셀링은 OKW의 명령에 따라 시칠리아에서 철수한 독일군 부대를 칼라브리아와 나폴리, 살레르노 지역에 재배치했다.[5] 9월 3일,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휘하의 영국군이 칼라브리아에 상륙했지만, 독일군은 교전을 피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6]
3. 이탈리아의 항복과 독일의 대응 (1943년 9월)
1943년 9월 8일, 카시빌레 휴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바돌리오 선언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다.[7] 독일은 이탈리아의 항복에 대한 대응으로, 사전에 계획된 '악세 작전'을 즉시 발동했다.[7]
이탈리아 고위 지휘부는 휴전에 이르기까지 몇 주 동안, 독일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여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전쟁에서 철수하고 행동 요령을 지시했다. 여기에는 8월 10일 이탈리아 육군 참모부가 발행한 명령 제111호, 8월 26일 마리오 로아타 장군이 주요 주변 지휘부에 발송한 OP 44 각서, 9월 6일 최고 사령부가 3개 군 참모부에 발송한 제1호 및 제2호 각서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은 세부 사항이 부족하고 거의 적용할 수 없었으며, 9월 8일 저녁 바돌리오의 모호한 메시지와 함께 이탈리아군의 주변 지휘부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1]
9월 8일 19시 50분, 바돌리오의 발표 직후 독일은 암호명 "악세"를 통해 이탈리아군을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탈리아군의 상황은 8월 8일 저녁 암브로시오가 발령한 상반된 지침으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는 독일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조치로만 모든 주도권을 제한했고, 9월 9일 밤 로아타는 특히 병사들 사이의 소란과 '반란'을 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1]
독일군의 위협과 협박에 대부분의 이탈리아 지휘관들은 저항 의지를 포기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명령도 지도자도 없이 남겨진 병사들은 종종 흩어졌다.[1]
C 집단군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은 연합군의 애벌런치 작전 상륙과 로마 점령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케셀링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그의 부대는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싸웠다. 에르빈 롬멜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신속히 철수하여 라스페치아–리미니 선으로 후퇴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케셀링은 자신의 부대가 고립되어 파괴되는 것을 피하고 살레르노의 연합군 교두보에 문제를 일으키고 반격을 가한 다음, 나폴리 북쪽으로 최소한의 손실을 입고 후퇴하는 동시에 "악세" 계획을 실행하고 일부 부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
3. 1. 무솔리니 실각과 바돌리오 정부 수립
1943년 7월 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군사 정부가 수립되었다.[7] 바돌리오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독일과 함께 전쟁을 계속할 것을 선포했지만, 비밀리에 연합군과 협상을 시작했다.[7] 이탈리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독일군 동맹국에 이탈리아 반도 방어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청하여 더 많은 독일 사단의 도착을 요구했지만, 이는 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악화시켰다.[7]이탈리아 지도부는 도움 요청과 진입하는 독일군에 대한 방해 행위, 독일 사단을 최전선인 남부에 배치해달라는 요청을 번갈아 가며 어려운 국면을 유지하려 했다.[7] 7월 31일, 암브로시오와 케셀링의 회담에서 새로운 독일 사단의 배치와 역할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7] 8월 6일 타르비시오에서 이탈리아 외무장관 라파엘레 구아릴리아, 암브로시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카이텔 간의 회담에서 상호 불신이 명백해졌다.[7] 암브로시오는 독일 사단을 9개에서 16개로 증강하되 연합국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남부에 배치할 것을 요청한 반면, 카이텔과 발리몬트는 새로운 독일 부대가 전략 예비대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에 배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7]
8월 15일 볼로냐에서 로아타 장군과 요들 장군 사이에 마지막 회담이 열렸는데, 독일군은 제4 이탈리아군의 일부를 남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소환하는 데 동의했지만, 로아타의 독일군 배치 계획에 경고를 받았다.[7] 회담은 실패로 끝났고, 독일 장군들은 이탈리아의 배신이 임박했음을 확신했다.[7] 회담 분위기는 너무 긴장되어 독일 대표단은 이탈리아 측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음료를 거부했는데, 독살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7]
이후 이탈리아의 배신에 대한 대비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7] 독일 지도부는 이탈리아 군대의 약한 저항만을 예상했고, 상황을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7] 8월 말, 히틀러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대표들을 보냈다.[7] 외교관 루돌프 라한과 루돌프 투생 장군이 군사 무관으로 폰 린텔렌을 교체했다.[7]
주세페 카스텔라노 장군은 8월 12일 마드리드로 가서 영국 대사 새뮤얼 호어 경과 만났고, 8월 17일 리스본에서 연합국 사절인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 정치 고문 케네스 스트롱 및 조지 F. 케넌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7] 7월 말 연합국 정부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 연합국의 요구는 완전 무조건 항복이었다.[7] 8월 31일, 카시빌레에서 열린 카스텔라노와 베델 스미스의 새로운 회의에서 이탈리아 특사는 연합 작전 세부 사항에 포함시켜 달라고 다시 한번 간청했지만 실패했다.[7] 로마와 이탈리아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미국 공수 사단의 개입(자이언트 2 작전)이 합의되었다.[7] 9월 1일, 국왕, 과릴리아, 암브로시오 사이의 협의 후, 연합국은 휴전 조건의 수락을 무선으로 알렸다.[7]
9월 3일, 카스텔라노와 베델 스미스는 카시빌레 휴전에 서명했다.[7] 그러나 이탈리아 항복 발표 시기에 대한 심각한 실수가 있었다.[7] 바돌리오 정부는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조직할 시간을 더 벌기 위해, 적어도 9월 12일까지 발표를 늦추기를 희망했다.[7] 8월 8일 밤에야 바돌리오는 82 공수 사단의 부사령관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으로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바로 그날 저녁 발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7] 바돌리오는 항의했고, 또 다른 지연을 얻으려고 헛되이 시도했다.[7]
8월 8일 18:00에, 퀴리날레 궁전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7] 아이젠하워가 전달한 명확한 지시와 외국 라디오에서 휴전에 대한 첫 번째 비방이 새어나오는 것을 직면한 이탈리아 지도부는, 마침내 그들이 연합국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결정했다.[7] 18:30에, 아이젠하워 장군은 알제 라디오에서 연설하며 공식적으로 휴전을 발표했고, 19:42에 바돌리오는 바돌리오 선언을 공영 방송사인 EIAR을 통해 발표했다.[7]
초기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정확하게 계획되고 상세하게 조직된 독일의 대응은 신속하고 효과적이었다.[7] 9월 8일 19:50에, 바돌리오가 발표를 마치고 몇 분 후, 요들 장군의 보좌관은 모든 부대 사령부에 암호화된 단어 "악세"를 방송했다.[7] 그것은 독일군이 지중해의 모든 전장에서 이탈리아군을 공격하라는 신호였다.[7]
3. 2. 독일의 '악세 작전' 발동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가 항복을 발표하자 독일은 즉시 '악세 작전'을 발동하여 이탈리아군을 공격했다. 이탈리아 지도부는 독일군을 이탈리아 남부에 배치해 연합군을 상대하게 하려는 의도로 독일군의 진입을 돕는 척하면서 방해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1]독일은 이탈리아의 배신에 대비해 발빠르게 작전을 준비했다. 독일 지도부는 이탈리아군의 저항이 미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자원 약탈과 군사 시설 파괴 계획까지 세웠다.[1]
이탈리아 고위 지휘부는 휴전 직전까지 독일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한 행동 요령을 지시했으나, 이는 세부 사항이 부족하고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지침이었다. 1943년 9월 8일 저녁, 바돌리오가 발표한 메시지는 내용이 모호하여 이탈리아군 지휘부에 혼란을 초래했고, 독일군의 효율적인 대응에 대부분의 이탈리아 지휘관들은 저항할 의지를 상실했다.[1]
C 집단군 사령관 케셀링은 연합군의 상륙과 로마 점령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살레르노에 상륙한 연합군에 반격을 가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나폴리 북쪽으로 후퇴하는 동시에 '악세 작전'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여 로마를 점령했다.[1]
4. 이탈리아군 해체
독일군의 신속한 공격과 이탈리아 지휘부의 혼란으로 이탈리아군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각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무장 해제되었다.
-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에서는 토리노와 노바라의 상급 지휘부가 항복했고, 엔리코 아다미 로시 장군은 민간인 무장을 거부했다. 리구리아에서는 9월 11일까지 독일군이 모든 진지를 점령하고 제16 이탈리아군단이 해산되었으며, 라 스페치아 해군 기지에서는 함대가 출항하거나 자침했다. 밀라노의 비토리오 루제로 장군은 시간을 벌다가 항복 후 체포되었고, 베로나의 구글리에모 오렌고 장군도 저항 후 무장 해제되었다. 알파인 방벽 요새에도 불구하고 트렌티노-남티롤의 이탈리아군은 붕괴되어 브레너 고개 남쪽 부대들이 무장 해제되었다. 에밀리아에서는 제2SS기갑군단이 이탈리아 부대를 격파하고 제3기병사단 "프린치페 아메데오 두카 다오스타"를 무장 해제시켰다.
- 이탈리아 중부: 프리울리와 줄리안 행진에서는 제71독일보병사단이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시켰고, 고리치아에서 제52보병사단 "토리노"가 저항했지만, 트리에스테의 알베르토 페레로 장군은 도시를 버려 병사들이 항복했다. 로마 북쪽에서는 제5 이탈리아군이 해산되고 해안 부대가 붕괴되어 독일군이 그로세토, 리보르노, 피렌체 등에 진입했다. 피옴비노에서는 저항이 있었으나 상급 사령부의 항복으로 진압되었다.
- 이탈리아 점령 지역: B 집단군은 9월 19일까지 중부 및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군 장교 13,000명과 병사 402,000명을 생포했다. 발칸 반도 주둔 이탈리아군은 30개 사단, 50만 명 규모였으나, 혼란과 독일군의 공격으로 해체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일부는 파르티잔에 합류하거나 흩어졌다.[11] 제5 이탈리아군단, 제11 이탈리아군단, 제18 이탈리아군단은 독일군과 크로아티아군에 공격받았고, 피우메와 풀라는 함락되었다.[12] 스플리트에서는 제15 보병 사단 "베르가모"가 파르티잔과 협력해 저항했지만, 항복 후 장군 3명과 장교 46명이 처형되었다.[1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제18 보병 사단 "메시나"가 저항했고, 제32 보병 사단 "마르케"는 두브로브니크를 방어하려 했으나 주세페 아미코 장군이 처형되었다.[13] 몬테네그로에서는 제19 보병 사단 "베네치아" 등이 티토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13] 알바니아 주둔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해산되었으며, 제41 보병 사단 "피렌체"와 제151 보병 사단 "페루자"는 저항했지만 에르네스토 키미넬로 장군과 장교 130명이 처형되었다.[14] 그리스 본토에서 제11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를로 베키아렐리 장군은 저항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려 부대들이 해체되었고, 제24 보병사단 "피네롤로"는 핀도스 산괴로 후퇴했으나 그리스 게릴라와의 협력에 실패했다.[15] 크레타 동부의 제51 보병사단 "시에나" 사령관 안젤리코 카르타는 특수 작전 집행부와 연락하여 이집트로 탈출했다.[16]
4. 1. 로마 함락
이탈리아 지휘관들은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자코모 카르보니 장군이 지휘하는 기동-장갑군단은 다음과 같은 주요 부대로 구성되었다.- 제10 보병 사단 "피아베"
- 제21 보병 사단 "그라나티에리 디 사르데냐"
- 제135 장갑 기병 사단 "아리에테"
- 제136 장갑 군단 사단 "첸타우로"
로마 방어를 담당한 다른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제12 보병 사단 "사사리"
- 제103 보병 사단 "피아첸차" (제17 이탈리아 군단 소속, 지휘관은 조반니 장게리 장군)
- 제13 보병 사단 "레" 및 제7 보병 사단 "루피 디 토스카나"의 일부 대대
총 55,000명의 병력과 200대의 장갑 전투 차량이 로마를 방어했으며, 이는 이 지역의 독일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로마 근처의 독일군은 프라티카 디 마레에 사령부를 둔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의 제11 공수 군단이었다. 이 군단은 제2 공수 사단(발터 바렌틴 장군 지휘)과 제3 기갑척탄병 사단(지휘관 프리츠-후베르트 그라저)으로 구성되었으며, 제26 기갑 사단의 장갑 대대(''캄프그루페 뷔징'')로 강화되었다. 이들은 약 26,000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장갑 전투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9월 8일 저녁, 케셀링에 의해 독일군이 활성화되자, 메조캄미노 연료 저장소를 공격했고, 독일 공수부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이탈리아군의 저항을 극복했다. EUR 지구에 도달한 후, 제2 공수 사단은 오스티엔세 가를 따라 마글리아나 다리에 도달했다. 한편, 제3 기갑척탄병 사단은 북쪽에서 진격했지만 브라차노 호수 근처에서 아리에테 II 사단에 의해 저지되었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9월 9일 새벽 치암피노 공항이 점령되었고, 독일군은 도시 중심부 근처에 도달했다. 점점 더 불안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 정치 및 군사 지도부는 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국왕과 바돌리오는 로마를 떠났고, 카르보니는 민간 복장으로 도주했다가 9월 10일 아침에 다시 도시에 들어갔다. 참모 본부 작전 부서의 책임자인 움베르토 우틸리 장군은 9월 9일 아침에 참모 본부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고 선언했다.
9월 9일 새벽, 국왕과 바돌리오는 고위 관계자들과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한편, 로마의 방어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독일 공수부대는 포르타 산 파올로 근처에 도착했고, 제3 기갑척탄병 사단의 장갑 전투 차량은 진격을 재개했다.
몬테로톤도에 투입된 독일 공수부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이탈리아 육군 본부를 점령했다. 제2 공수 사단의 부대는 포르타 산 파올로를 공격했고, 이탈리아군과 민간 자원 봉사자들이 저항했지만, 9월 10일 아침 로마 중심부에 도달했다.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은 이탈리아 측과 협상을 시작했고, 9월 10일 오후, 로마의 항복을 얻었다. 베스트팔은 도시를 보호할 것을 약속하고 조르지오 칼비 디 베르골로 장군 휘하의 임시 이탈리아 사령부 창설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곧 독일군에 의해 철회되었다. 9월 15일까지 모든 이탈리아군은 무장 해제되었고, 9월 23일 칼비 디 베르골로는 체포되었으며, 독일군과 RSI군은 각각 도시를 장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방 도시"의 지위가 유지된다고 밝혔지만, 연합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티볼리로 후퇴했던 이탈리아 부대는 해산되었다. 로마 점령을 위한 독일군의 사상자는 약 100명의 사망자와 약 500명의 부상자였고, 이탈리아군의 사상자는 984명이었다.
4. 2. 이탈리아 각지의 전투
피에몬테에서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을 빠르게 무력화시켰다. 토리노와 노바라에서 상급 지휘부는 저항을 시도하지 않고 항복했다. 엔리코 아다미 로시 장군은 민간인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것을 거부했고, 독일 장갑 부대가 토리노에 진입하자 항복했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합류했다.리구리아에서는 9월 11일까지 독일군이 모든 진지를 점령했고, 제16 이탈리아군단(제105보병사단 "로비고" 및 제6산악사단 "알피 그라에")은 해산되었다. 독일군은 라 스페치아 해군 기지에 진입했지만, 이탈리아 함대는 이미 출항했고, 출항할 수 없는 선박은 자침되거나 파괴되었다.
밀라노에서 수비대 사령관 비토리오 루제로 장군은 48시간 동안 시간을 벌었으나, 결국 독일군과 합의하여 제5보병사단 "코세리아"를 전투 없이 해산했다. 이 부대는 러시아에서 입은 심각한 손실 이후 재편성 중이었다. 다음 날 무장친위대 부대가 합의를 파기하고 밀라노를 점령했으며, 루제로는 체포되어 독일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베로나 수비대와 사령관 구글리에모 오렌고 장군은 짧은 저항 후 무장 해제되고 추방되었다.
알파인 방벽 요새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부대는 트렌티노-남티롤에서도 빠르게 붕괴되었다. 9월 9일까지 제25 이탈리아군단의 알프스 사단 2개 부대(제2산악사단 "트렌티나"와 제4산악사단 "쿠네엔세")는 동부 전선에서의 궤멸 이후 재건 중이었는데, 브레너 고개 남쪽에 이미 배치된 제44독일보병사단과 "돌하" 여단에 의해 즉시 공격받고 무장 해제되었다. 로베레토에서만 일부 부대가 9월 10일 아침까지 저항하다 항복했다.
에밀리아에서 파울 하우서 장군의 제2SS기갑군단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약한 이탈리아 부대를 어려움 없이 파괴했다. 러시아에서 입은 손실 이후 재편성 중이던 제3기병사단 "프린치페 아메데오 두카 다오스타"는 무장 해제되고 병사들은 포로로 잡혔다.
제71독일보병사단은 프리울리와 줄리안 행진 점령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3산악사단 "줄리아"와 제2보병사단 "스포르체스카"는 러시아에서 궤멸된 후 재편성 중이었지만 곧 무장 해제되었다. 제52보병사단 "토리노"는 고리치아에서 저항했고, 노동자들은 최초의 파르티잔 그룹을 형성했다. 슬로베니아 파르티잔 부대가 이 지역의 일부를 침략하여 이탈리아 민간인들에게 유혈 보복을 가하기도 했다. 71독일보병사단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이탈리아 협력자 병사들의 지원을 받아 이 달 말에 상황을 통제하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격퇴했다. 트리에스테에서 알베르토 페레로 장군은 반파시스트 대표들과의 결실 없는 대화 이후 독일군과 협상을 시작한 다음 도시를 버렸고, 이 지역의 9만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은 명령 없이 버려져 전투 없이 항복했다.
로마 북쪽 중부 이탈리아에서 제5 이탈리아군(마리오 카라치올로 디 페롤레토 장군)은 9월 11일에 해산되었고, 병사들은 무장 해제되어 억류되었다. 제3보병사단 "라벤나" (그로세토)와 북부 티레니아해의 해안 부대가 붕괴되었고, 독일군은 도시로 진입했다. 리보르노는 9월 10일에 점령되었다. 피렌체에서 아르멜리니 치아피 장군은 즉시 독일군이 도시에 진입하도록 허용했고, 아레초의 치아리 대령과 마사의 라우리 대령은 어떤 저항도 시도하지 않고 그들의 부대를 포기했다. 피옴비노의 이탈리아 부대와 민간 자원 봉사자들은 9월 10일과 11일 사이에 독일군의 상륙 시도를 격퇴하여 수백 명의 독일 병사를 죽이거나 생포했지만, 9월 12일 이탈리아 상급 사령부는 도시에 독일군에 항복했다.
B 집단군은 9월 19일까지 임무를 완수하여 중부 및 북부 이탈리아를 모두 점령하고, 이탈리아군의 상당 부분을 무장 해제 및 생포했다. 13,000명의 장교와 402,000명의 이탈리아 병사 외에도 이탈리아군이 이전에 붙잡고 있던 43,000명의 연합군 포로도 생포되었다.
4. 3. 해외 주둔 이탈리아군
발칸 반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및 그리스)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은 30개 사단 이상, 50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1]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파르티잔에 맞서 2년 동안 대게릴라전을 수행했다.[11] 이 지역의 이탈리아군은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에 주둔한 제2 이탈리아군 (마리오 로보티 장군), 알바니아에 주둔하여 에지오 로시 장군 휘하 동부 야전군의 통제를 받는 제9 이탈리아군 (로렌초 달마초 장군,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의 병력도 포함), 그리고 그리스에 주둔한 제11 이탈리아군 (카를로 베키아렐리 장군, 알렉산더 뢰르 장군의 E 야전군 통제)으로 구성되었다.[11]이탈리아군은 대파르티잔 작전을 수년간 수행한 후 지쳐 있었고, 독일군과 9월 9일에 이탈리아와의 모든 관계를 즉시 단절하고 전 동맹국에 대항하여 독일에 합류한 크로아티아 협력 부대가 혼합된 적대적인 영토에 고립되어 있었다.[11] 육상 연결이 없고 혼란스럽고 모호한 명령으로 인해 부대는 빠르게 해체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무장 해제되어 포로로 잡혀 독일로 이송되었다.[11] 그러나 이 지역의 이탈리아 군인들은 이탈리아에 남겨진 부대보다 더 굳건하게 싸웠고 독일 부대의 격렬한 보복과 심각한 사상자를 겪었다.[11]
일부 부대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여 유고슬라비아 또는 그리스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싸웠고, 현지 주민들은 종종 병사들에게 우호적이었고 그들을 도왔다.[11] 병력이 적지만 더 기동성이 뛰어나고 결단력 있고 지휘가 잘 된 독일군은 완전한 제공권을 누리며 빠르게 우위를 점하여 이탈리아의 저항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종종 이탈리아 장교들을 즉결 처형하며 모든 발칸 지역을 점령했다.[11] 393,000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포로로 잡혀 이송되었고, 약 29,000명은 독일에 합류했으며, 20,000명은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고, 57,000명은 흩어지거나 숨어 생존을 시도했다.[11]
제5 이탈리아군단, 제11 이탈리아군단,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에 주둔한 제2 이탈리아군을 구성하는 제18 이탈리아군단은 두 개의 크로아티아 사단과 세 개의 독일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12] 제11 이탈리아군단 사령관 가스토네 감바라는 피우메에서 협상을 시작한 후 9월 14일 부대를 버리고 포로로 잡히게 했다.[12] 풀라 역시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12] 9월 11일, 달마티아에 주둔한 사단들은 평화적인 송환을 바라며 어떠한 저항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예하 부대들은 거부하고 독일군과 교전을 시작했다.[12] 제14 보병 사단 "이손초", 제22 보병 사단 "카차토리 델레 알피" 및 제153 보병 사단 "마체라타"는 해산되었고, 제57 보병 사단 "롬바르디아"와 제154 보병 사단 "무르게"는 수샤크와 카를로바츠에서 저항했다.[12] 제158 보병 사단 "자라"는 9월 10일에 항복했고 사령관들은 추방되었으며, 스플리트에서는 제15 보병 사단 "베르가모"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협정을 맺고 모스타르에서 파견된 제7 SS 의용 산악 사단 "프린츠 오이겐"에 맞서 9월 27일까지 도시를 방어했다.[12] 항복 후, 이탈리아 장군 3명(알폰소 치갈라 풀고시, 살바토레 펠리그라, 안젤로 폴리카르디)과 장교 46명이 처형되었다.[12] 달마티아에 주둔한 제1 기병 사단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는 흩어졌다.[1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제18 보병 사단 "메시나"가 4일 동안 저항했고, 제32 보병 사단 "마르케"는 두브로브니크를 방어하려 했지만 독일군에 의해 저항이 무너졌다.[13] 사단장 주세페 아미코 장군은 회담 중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고, 부하들을 설득하여 항복시키기 위해 석방되었지만 대신 그들을 독일군에 대항하도록 했다.[13] 나중에 재포로된 그는 처형되었다.[13] 몬테네그로에서는 제23 보병 사단 "페라라"가 붕괴되었고, 제155 보병 사단 "에밀리아"는 9월 16일까지 코토르 만을 방어한 후 항복해야 했다.[13] 제19 보병 사단 "베네치아"와 제1 산악 사단 "타우리넨세"의 병사들은 티토의 파르티잔에 합류하여 제182 기갑 보병 연대 "가리발디"를 형성했고, 1945년 3월까지 독일군에 대항하여 싸웠다.[13]
알바니아 주둔 이탈리아군은 제9 이탈리아군(달마조 장군)의 6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부 군 집단 사령부(로시 장군)는 티라나에 있었다.[14] 명확한 명령 없이, 이탈리아 사령관들은 우유부단함과 부족한 전투 정신을 보였다.[14] 반대로, 독일군(2개 예거 사단, 1개 산악 사단, 제1 기갑 사단의 일부를 포함하는 "크로아티아" 상급 사령부)은 신속하고 매우 공격적으로 행동했다.[14] 9월 11일 아침, 동부 군 집단 사령부는 포위되었고 로시 장군은 그의 장교들과 함께 즉시 포로로 잡혔으며, 달마조 장군은 독일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고 저항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독일과 협상을 시작하여 그의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했다.[14]
제11 보병 사단 "브레네로" (사령관 프린치발레 장군은 양면적인 행동을 보였다), 제38 보병 사단 "풀리에", 제49 보병 사단 "파르마" 및 제53 보병 사단 "아레초"는 무기를 넘겨주고 해산되었다.[14] 하지만 브레네로 사단 대원 대부분은 바다를 통해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고, 아레초 사단의 상당수는 탈출하여 파르티잔에 합류했다.[14] 반면 제41 보병 사단 "피렌체" (아르날도 아치 장군)와 제151 보병 사단 "페루자" (에르네스토 키미넬로 장군)는 저항을 시도했다.[14] 피렌체 사단은 크루야 근처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고, 이후 사단은 해산되어 대원들은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다.[14] 페루자 사단은 전투 퇴각 후 포르토 에다로 후퇴했고 일부 대원들은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에 탑승했지만, 알바니아 산맥을 통과하는 고된 행군과 지속적인 공격으로 약화된 사단의 대부분은 9월 22일에 포위되어 항복했고, 이후 키미넬로 장군과 130명의 장교가 처형되었다.[14] 생존자 중 일부는 안토니오 그람시 대대를 형성하며 파르티잔에 합류했다.[14]
15,000명 이상의 흩어진 이탈리아 병사들이 현지 주민들에 의해 보호받았다.[14] 제21 독일 산악 군단은 이미 9월 10일에 티라나에 사령부를 설치했다.[14] 전체적으로 약 90,000명의 이탈리아 병사가 알바니아에서 포로로 잡혔으며, 추가로 45,000명이 체포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졌다.[14] 그들 중 일부는 노동력을 대가로 주민들에게 보호를 받았고, 많은 다른 사람들은 추위와 기아로 사망했다(영국 문서에 따르면 1943-1944년 겨울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 병사들의 사망률은 하루에 약 100명으로 추산되었다).[14]
그리스 본토에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고위 장교들의 불확실하고 양면적인 행동은 독일의 신속한 성공에 기여했다.[15] 이 지역의 이탈리아군은 아테네에 사령부를 둔 제11 이탈리아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병력은 열세였지만 더 효율적인 부대(세 개의 예거 사단, 제1 기갑 사단 일부, 그리고 공군의 야전 사단)를 보유한 뢰어 장군 휘하의 E군집단에 배속되었다.[15] 제11군 사령관 카를로 베키아렐리 장군은 처음에 독일에 대항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9월 9일, 독일이 이탈리아로의 통행증을 보장한다는 말을 믿고, 병사들에게 저항을 피하고 싸우지 않고 무기를 독일에 넘겨주라고 명령했다.[15]
그 결과 대부분의 부대가 해체되었다.[15] 제29 보병사단 "피에몬테", 제36 보병사단 "포를리", 제37 보병사단 "모데나", 제56 보병사단 "카살레" 그리고 제59 보병사단 "칼리아리"는 쉽게 무장 해제되었고, 병사들은 포로로 잡혀 독일로 보내졌다.[15] 테살리아에 주둔한 제24 보병사단 "피네롤로"는 베키아렐리의 명령을 거부했다.[15] 아돌포 인판테 장군은 라리사에서 전투를 벌인 후 핀도스 산괴로 후퇴하여 ELAS 게릴라들의 협력을 얻으려 했다.[15] 처음에는 그리스 게릴라들이 동의했지만, 그 후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기병 연대 "란치에리 디 아오스타"를 공격했다.[15] 인판테는 이탈리아로 떠났고, 그의 부하들은 "''EAM/ELAS의 지시에 따라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흩어져 식량을 공급받고 겨울을 나기 위해''" 배치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전쟁 기간 동안 가혹한 조건 속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이탈리아인이 사망했다.[15]
크레타 동부에 주둔한 제51 보병사단 "시에나" 사령관인 안젤리코 카르타는 부대의 무장 해제 또는 독일 지휘하로의 이전을 명령받은 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16] 그는 사단의 방첩 장교를 통해 특수 작전 집행부 (SOE)에 연락하여, 그와 연합군 지지 성향의 참모들이 섬 동부의 방어 계획과 함께 이집트로 밀항하도록 준비했다.[16] 네아폴리 북동쪽에서 그의 차를 시선을 돌리기 위해 버린 후, 카르타와 그의 동료들은 남서쪽으로 발을 디뎠다.[16] 독일 순찰대와 정찰기를 피한 그는 어뢰정을 타고 1943년 9월 23일 다음 날 오후 메르사 마트루에 도착했다.[16]
4. 4. 이탈리아 해군과 공군
카를로 베르가미니 제독은 프리츠 X 유도 폭탄의 공격으로 기함 ''로마''와 함께 1,393명의 부하들과 함께 사망했다.[6][7][8] ''로마''의 자매함인 ''이탈리아''는 손상되었다. 침몰 후 나머지 함대는 로메오 올리바 제독의 지휘 아래 몰타로 향했다. 구축함과 어뢰정 일부는 ''로마''의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남았고, 이후 발레아레스 제도에 도착하여 스페인 당국에 의해 억류되었다. 그중 ''페가소''와 ''임페투오소''는 마혼 근처에서 억류되거나 연합군에 인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령관들에 의해 자침되었다.[6][7][8] 함대의 대부분(전함 ''이탈리아''와 ''비토리오 베네토'' 및 경순양함 5척 포함)은 9월 10일 몰타에 도착했다. 다른 많은 이탈리아 함선들(주로 어뢰정, 코르벳함 및 잠수함)도 다음 날 몰타로 이동했다. 마지막 이탈리아 전함인 ''줄리오 체사레''는 9월 13일 그곳에 도착했다.이탈리아 해군 대부분의 작전 함선들은 연합군 통제 항구에 도착했지만, 일부는 항해 중에 침몰했다. 침몰한 함선 중에는 구축함 ''퀸티노 셀라'', ''우골리노 비발디'' 및 ''안토니오 다 놀리'' 등이 있었다. 흑해의 이탈리아 소형 잠수함 5척은 루마니아 해군에 의해 압수되었다.[6][7][8] 크레타와 그리스에서는 구축함 2척과 어뢰정 4척이 나포되었다. 또한, 여러 척의 선박이 자침되거나 파괴되었고, 나머지는 나포되었다.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휴전에 완전히 당황했다. 이탈리아 공군 기지는 명확한 명령을 받지 못했고, 독일군은 주도권을 잡고 이탈리아 북부의 주요 공군 기지를 점령했다. 9월 11일에야 모든 부대에 연합군 통제 공군 기지에 도달하기 위해 이륙하라고 명령했고, 로마 공군 기지는 독일에 넘어갔다. 약 800대의 작전 가능 항공기 중 246대만이 연합군 통제 지역에 도달했고, 항공기의 3분의 2는 독일에 넘어갔으며, 43대는 격추되었다. 일부 전투기 부대는 추축국에 남기로 결정하고 국가 공화국 공군의 핵심을 형성했다.
5. 결과 및 영향
"악세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 국방군은 지중해 전역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고, 많은 작전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큰 전략적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독일은 부족한 자원을 보충할 수 있는 대량의 무기, 장비 및 자원을 획득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군에 의해 구출된 후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했다.
독일은 이탈리아 점령 과정에서 수많은 이탈리아 군인들을 포로로 잡아 강제 노역에 동원하거나 학살했다.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총 1,006,370명의 이탈리아군이 무장 해제되었다. 이들 중 60만 명에서 65만 명 사이는 이탈리아 군사 피억류자로 독일 노동 수용소에 남아 있었고, 그중 37,000명에서 50,000명이 사망했다.[9] 1943년 9월 전투에서 20,000명에서 30,000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사망했고,[9] 에게 해에서 포로 수송선 침몰로 13,000명이 더 사망했다.
발칸 반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그리스)에 주둔했던 50만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파르티잔에 맞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일부 부대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여 유고슬라비아 또는 그리스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싸웠고, 현지 주민들은 종종 병사들에게 우호적이었다.
5. 1.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수립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군에 의해 구출된 후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했다.5. 2. 이탈리아 군사 피억류자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은 총 1,006,370명이 무장 해제되었다. 이들 중 60만 명에서 65만 명 사이는 이탈리아 군사 피억류자로 독일 노동 수용소에 남아 있었고, 그중 37,000명에서 50,000명이 사망했다.[9]지역별 무장 해제 병력은 다음과 같다.
지역 | 병력 |
---|---|
북부 이탈리아 | 415,682명 |
남부 이탈리아 | 102,340명 |
프랑스 | 8,722명 |
유고슬라비아 | 164,986명 |
그리스 본토 및 에게 해 섬 | 265,000명 |
이탈리아 군인 중 197,000명만이 독일군과 함께 전쟁을 계속했다. 약 94,000명은 즉시 이 선택을 했고, 나머지 약 103,000명은 독일 노동 수용소의 혹독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구금 기간 동안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폴란드의 쇼켄에 위치한 Oflag 64/Z는 "악세 작전" 동안 독일군에 의해 체포된 대부분의 이탈리아 장성들이 수용된 수용소였다. 1943년 9월 전투에서 20,000명에서 30,000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사망했고,[9] 에게 해에서 포로 수송선 침몰로 13,000명이 더 사망했다.
5. 3.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1943년 9월 10일,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는 이탈리아 군사 기구의 붕괴를 발표했다. 그리스 섬과 발칸 반도, 코르시카, 사르데냐, 풀리아, 칼라브리아 등지에서 이탈리아 부대들이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탈리아 육군의 주력 부대는 며칠 만에 탈영으로 와해되었다.[1]"악세 작전"과 그 부차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 국방군은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고, 많은 작전상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중요한 전략적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독일은 부족한 자원을 보충할 수 있는 대량의 무기, 장비 및 자원을 획득했다. 2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 군인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거의 8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중 13,000명 이상이 에게해 섬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송되던 중 선박 침몰로 익사했다. 나머지는 전쟁 포로 신분을 인정받지 못하고 "이탈리아 군사 구금자"로 분류되어 독일의 전쟁 산업에서 강제 노동에 이용되었다. 최대 5만 명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1]
지중해에서의 목표가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몰아내고 일부 독일군을 묶어두는 정도로 제한적이었던 연합군은, 영국과 미국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전략 계획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붕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 결과, 연합군은 2년 가까이 이탈리아 반도를 진격하는 데 그쳤고, 이는 많은 육군, 공군 및 자원을 소모하게 했다. 그러나 독일은 상당수의 기동력 있고 숙련된 부대를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로 돌려야 했다. 이 부대들은 동부 및 서부 전선에서 더 유용했을 것이지만, 독일 남부 지역에서 전쟁을 막고, 무기 생산에 중요한 산업 지역을 보호하며,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를 창설하는 정치적, 선전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1]
이탈리아 국가와 군대의 갑작스럽고 완전한 붕괴는 주로 정치 및 군사 지도부의 실수, 비현실적인 계획, 연합국의 실제 목표에 대한 오해, 그리고 독일과 싸우지 않고 연합군에게 항복하기로 한 이탈리아 지도부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위 지휘부에 대한 명확한 명령 부재, 무장 세력의 저항 능력 저하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개인적인 안전과 제도적 연속성에 부여된 중요성은, 일부 용감함과 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 없이 독일의 공격과 보복에 버려진 부대의 붕괴를 초래했다.[1]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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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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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2]
서적
Mussolini's Navy: A Reference Guide to the Regia Marina 1930–1945
https://books.google[...]
Seaforth Publishing
2012
[3]
서적
The Wildest Province: SOE in the Land of the Eagle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2017-05-16
[4]
서적
Land of Eagles: Riding Through Europe's Forgotten Country
https://books.google[...]
I.B. Tauris
2014
[5]
서적
Albania at War, 1939–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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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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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 Frigerio, Noi nei lager: testimonianze di militari italiani internati nei campi nazisti (1943–1945), pp. 246–247,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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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ssegna Dell'Esercito 2008 N.3 by Biblioteca Militare – Iss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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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quei generali marciavano, marciavano e moriv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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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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