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시옹 프랑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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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시옹 프랑세즈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혼란 속에서 결성된 극우 정치 단체이다. 앙리 보주아와 모리스 푸조가 1899년 기관지 「액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며 시작되었으며, 샤를 모라스, 레옹 도데, 자크 뱅빌 등이 합류하여 이끌었다. 모라스의 '완전한 민족주의'와 군주제를 지향하며,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고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반프리메이슨 등의 이념을 표방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세력을 확장했고, 1905년 정치 단체로 발족, 1908년 일간지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을 비판하며, 비시 정권에 협력하기도 했으나, 1944년 해산되었다. 이후 재건되었으며, 현재도 유럽 연합에 반대하며 세습 군주제를 지지하고 있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파시즘과의 연관성, 샤를 모라스의 사상, 주요 활동가, 그리고 역사적 평가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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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시옹 프랑세즈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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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혼란과 분열을 겪었다. 특히 제3공화국 시기에는 공화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고,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등 반가톨릭 움직임이 거셌다.[48] 이에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새로운 사태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정치 조직화를 촉구했다.[48]
샤를 모라스는 왕당파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완전한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군주제가 프랑스 사회 통합의 유일한 제도라고 생각했다.[49] 그는 가톨릭 교회를 사회적 응집력과 안정성의 요소로 옹호했다. 모라스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반드레퓌스편에 섰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예수회의 논리를 따랐다.[49]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위증했다 자살한 앙리 소령을 칭찬했고, 악시옹 프랑세즈에 목적 달성을 위해 뇌물, 매수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49]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알베르 드묑과 라투르 뒤팽 후작은 가톨릭 노동자 클럽을 조직하여 사회기독교당 창당을 지지했고, 마르크 상그니에는 밭고랑(Le Sillon)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48] 보수주의자들은 라 크로와 신문과 성모마리아승천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우파 가톨릭 당을 구성하려 했다.[48]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더욱 분열시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반드레퓌스 진영을 결집하여 악시옹 프랑세즈가 탄생했다.[48] 철학 교수 앙리 보주아(Henri Vaugeois)와 저널리스트 모리스 푸조(Maurice Pujo)는 1899년 기관지 「액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했다.[44] 이후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레옹 도데(Léon Daudet), 자크 뱅빌(Jacques Bainville) 등이 합류하여 악시옹 프랑세즈를 이끌었다.[44]
1905년에는 정치단체 "악시옹 프랑세즈"가 발족되었고, 1908년에는 기관지 「액시옹 프랑세즈」가 일간지로 발전했다.[44] 관련 단체인 "까멜로 뒤 루아(Camelots du Roi)"는 가두 판매원 조직으로 시작했으나, 후에 공화파와 좌익 단체를 습격하는 폭력 조직으로 변질되었다.[44]
3. 이념
악시옹 프랑세즈의 이념은 모라시즘의 원리에 따라 샤를 모라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 운동은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복고와, 1905년 국가와 교회 분리법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국교 지위 회복을 지지했는데, 이는 부패하고 무신론적이라고 여겨졌던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차별화를 위한 구심점이었다.
이 운동은 분권화("연방 군주제")를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자유를 고대 주(혁명 당시 현행 제도로 대체됨)에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아마도 과도적인 권위주의 정부를 수반하는 ''쿠데타''를 통해 복고를 달성하고자 했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프랑스에 닥친 문제의 음모론적 원인으로 특정 사회 집단이나 정치 집단을 비난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프랑스 극우의 여러 집단은 유대인, 위그노(프랑스 칼뱅주의자), 그리고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라스는 여기에 ''앙시앵 레짐'' 아래 프랑스 법의 적용을 받지 않던 프랑스에 거주하는 특정되지 않은 외국인들을 추가했고,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따온 모욕적인 이름인 ''메테크''를 고안해냈다. 모라스는 이 네 집단을 "내부 외국인"인 ''레 콰트르 에타 콩페데레(les quatre états confédérés)''라고 부르며 모두 "반프랑스"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10월 혁명에 반대했지만, 이에 대한 적대감은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악시옹 프랑세즈는 여전히 왕당파, 민족주의, 그리고 반혁명(프랑스 혁명의 유산에 반대) 정치 운동이다. 그 목표는 "자국의 통치 기능을 완전히 행사하는 주권 국가"를 프랑스에 복원하는 것으로, "지속적인 권력의 정당한 행사"를 보장하는 분권화되고 대표적인 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 운동은 부르봉-오를레앙 왕가를 중심으로 "고대 질서로의 복귀가 아니라 현재 문제에 대한 진지한 대응인, 우리 시대에 맞는 군주제"의 수립을 주장한다. 또한 이 운동은 군주제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적 타협"이라는 생각을 지지한다.[29]
악시옹 프랑세즈는 유럽 연합에 강력히 반대하며, 그것을 단일하고 유토피아적인 정신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EU는 중앙 집권적 연방 시스템을 구축했을 것"이며, 국가의 주권을 유럽 기구로 이전하는 것이다.
"당파 정치"를 거부하는 악시옹 프랑세즈는 그들의 슬로건인 "모든 국민적인 것은 우리의 것이다"에 따라 모든 개인적이고 당파적인 이익보다 국가의 구원을 우선시한다. 샤를 모라스의 이데올로기의 계승자로서, 이 운동은 반의회주의적이다.
가족이 국가의 기초이며, 남녀 간의 결혼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악시옹 프랑세즈는 2012년과 2013년에 '''라 마니푸르 투'''(La Manif pour tous)와 "프랑스 봄(le Printemps français)" 시위에 참여하여 프랑스에서의 동성 결혼 합법화, 동성애자 부부에 의한 아동 입양, 대리모, 그리고 의학적 지원 생식에 반대했다.
제브 슈테른헬(Zeev Sternhell)은 저서 『좌도 우도 아닌』(Neither Right nor Left)[38]과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탄생』(The Birth of Fascist Ideology)[39]에서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가 국가 신디칼리즘에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파시즘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슈테른헬에 따르면, 국가 신디칼리즘은 악시옹 프랑세즈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와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의 혁명적 신디칼리즘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 국가 신디칼리즘은 이탈리아로 확산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이념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국가 신디칼리즘이 1930년대의 비순응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슈테른헬은 비순응주의자들 자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비순응주의자들이 사실상 프랑스식 파시즘이었다고 주장했다.
악시옹 프랑세즈의 이념은 초기 지도자 중 한 명인 문학가 샤를 모라스가 오를레아니스트였던 것처럼, 공화정 폐지와 왕정 복고를 핵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 공화정 하의 국수주의·우익 단체들과 달랐다. 하지만 실제로 왕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제3공화정에 대한 비판으로서 군주제를 내걸었다는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노선은 제안 당시 다른 당원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모라스의 열정적인 설득으로 최종적으로 채택되어 반공주의와 함께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1937년에 오를레앙 가문과 대립한 이후로는 공개적인 주장은 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의 국가 파시스트당의 영향을 받아 파시즘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적 측면에서는 보불전쟁 이후 지속된 반독일주의를 내걸었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반유대주의, 반프로테스탄트, 반프리메이슨을 주장하며 국교로서의 가톨릭 지위 회복을 지지했지만, 과격한 언행으로 인해 1927년 바티칸으로부터 파문당했다. 또한 다른 극우 단체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빈번하게 내분을 일으켰다.
3. 1. 샤를 모라스의 사상
샤를 모라스는 왕당파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완전한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군주제가 프랑스 사회 통합의 유일한 제도라고 생각했다.[49] 그는 가톨릭교회를 사회적 응집력과 안정성의 요소로 옹호했다. 모라스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반드레퓌스편에 섰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예수회의 논리를 따랐다.[49]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위증했다 자살한 앙리 소령을 칭찬했고, 악시옹 프랑세즈에 목적 달성을 위해 뇌물, 매수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49]
4. 역사
4. 1. 창립과 초기 활동 (1898-1914)
1898년 앙리 보주아와 모리스 푸조는 프랑스 조국 동맹을 탈퇴하고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설했다.[20] 이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좌파 정치 지식인들의 개입에 대한 프랑스 민족주의적인 반응이었다.[20] 곧 왕당파 활동가 샤를 모라스가 합류하여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 모라스의 영향 아래 이 운동은 프랑스의 군주제를 지지하는 반혁명 운동이자 반의회주의적이며 분권화를 지지하는 운동으로 변모했다.[20] 또한 조합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프랑스 가톨릭 교회인 로마 가톨릭을 지지했다.[20]
초창기 악시옹 프랑세즈는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사상을 전파하려고 노력했으며, 학생 단체와 같은 관련 단체들을 만들었다.[22] 1905년 봄, 정치 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 연맹(Ligue d'Action Française)'이 출범했고,[21] 뤼시앵 모로가 이끄는 악시옹 프랑세즈 학생 연맹도 같은 시기에 출범했다.[21] 1906년에는 악시옹 프랑세즈 연구소가 고등 교육의 대안 기관으로 설립되었다.[22] 1908년에는 기관지 '악시옹 프랑세즈'를 일간지로 발행하고,[20] 청년 조직 '카멜로 뒤 루아'를 결성했다.[20] 카멜로 뒤 루아는 신문을 거리에서 판매하고, 정치적 반대자들과 거리 폭력에 가담하는 준군사 조직 역할을 했다.[22] 신문의 문학적 수준과 논쟁적인 활력은 독자를 끌어들였고, 모라스와 이 운동을 프랑스 정치의 중요 인물로 만들었다.[22] 1914년까지 악시옹 프랑세즈는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활동적인 프랑스 민족주의 운동이 되었다.[22]
4.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1914-1939)
제1차 세계 대전 중 악시옹 프랑세즈는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를 지지하며 독일을 패배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22] 반독일 강경론을 펼치며 독일 제국을 여러 국가로 분할하고 프랑스가 독일의 옛 영토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22]
전후에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한 제재가 미흡하다고 비판하며, 독일을 봉건 국가 시대처럼 여러 소국으로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 구체적으로 프로이센, 하노버, 바이에른, 작센 정부 등의 수립을 제안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해체도 주장했다.
1924년 좌파 연합의 승리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의회에 진출했다.[20][22] 르뷔 위니베르셀(Revue universelle)과 같은 문학 평론지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1926년 교황비오 11세는 악시옹 프랑세즈를 이단으로 선언하고[44], 1928년에는 모라스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이는 악시옹 프랑세즈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많은 회원들이 탈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34년 스타비스키 사건을 계기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여 1934년 2월 6일의 위기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한편, 같은 해 오를레앙 가문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1937년에는 모라스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오를레앙 가문으로부터 절연 선언을 받았다.
반공·반독을 기치로 활동을 계속하며,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이탈리아와의 제휴를 주장하고, 파시즘에도 접근했다.
1936년 인민전선 내각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았다.[27] 1939년 교황비오 12세는 파문을 해제했다.[25]
4. 3. 비시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 (1940-1945)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필리프 페탱 원수를 지도자로 하는 프랑스국이 수립되자, 악시옹 프랑세즈는 활동을 재개했다.[44] 비시 정권을 '신의 놀라운 일'로 환영하며, 독일과의 협력(콜라보라시옹)을 수행하는 비시 정권에 대한 협력을 표명하여 지지 기반이 되었고,[44] 반동적인 프랑스 국민혁명/Révolution nationale영어 실시에 몰두했다.“오직 프랑스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페탱 원수가 명령하지 않는 한 어떠한 저항, 전투 재개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지만, 과거 전개했던 반독 주장을 뒤집은 것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고, 고참 당원들 사이에서는 탈당자가 속출했다. 일부 구성원들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거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샤를 모라스는 비시 정권을 지지했지만, 독일과의 협력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레옹 도데는 1942년 사망했고, 샤를 모라스는 나치 독일 항복과 비시 정권 해체 후 나치 독일에 협력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4. 4. 전후 (1945-현재)
1944년 해산되었던 악시옹 프랑세즈는 1947년 모리스 푸조에 의해 재건되었다.[44] 그는 신문 ''아스펙 드 라 프랑스/Aspects de la France프랑스어''(AF)와 반혁명 운동인 "라 레스타라시옹 나시오날/la Restauration Nationale프랑스어"("국가 복원")을 창설했다.[28] 1952년 샤를 모라스 사후, ''아스펙 드 라 프랑스/Aspects de la France프랑스어''와 피에르 부탕의 ''라 나시옹 프랑세즈/La Nation Française프랑스어''가 1967년 ''라 나시옹 프랑세즈/La Nation Française프랑스어''가 폐간될 때까지 모라스의 유산을 계승했다.1971년, 베르트랑 르누뱅, 조르주-폴 바그너 등이 "누벨 악시옹 프랑세즈/Nouvelle Action Française프랑스어"라는 분파 운동을 결성했다. 이는 이후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누벨 악시옹 로얄리스트''(NAR)가 되었다. 이들은 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했으며,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을 지지했다.
1980년대 초, 조르주-폴 바그너와 필립 콜롬바니 등 여러 AF 인물들은 장 마리 르펜의 국민전선(FN)에 합류했다. 1990년대에는 모리스 푸조의 아들인 피에르 푸조가 운동을 이끌었다.[28]

2018년 기준 악시옹 프랑세즈는 3,000명의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세습적인, 반의회적인, 분권화된 군주제를 지지하며, 유럽 연합에 강력히 반대한다.[29] 이들은 자신들을 정당이 아닌 싱크탱크로 여기며, ''르 비앵 코뮌(Le bien commun)''이라는 잡지를 발행한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지역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파리의 "플로르 서클(Cercle de Flore)"과 같은 문학 서클을 운영한다.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에는 잔 다르크를 기리는 행렬을 조직하고,[30] 여름에는 "막심-레알 델 사르트 캠프"라는 대학을 개최한다.[31] 라 마니푸르 투 기간 및 이후, "르 프랭프랭 프랑세"라는 하위 운동을 통해 젊은 회원을 모집했다.[32]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활동하며,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33]
5. 주요 활동가
샤를 모라스는 왕당파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악시옹 프랑세즈의 지도자였다. 그는 군주제 복귀를 위한 완전한 민족주의 원칙을 창안하고, 이 원칙이 프랑스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라고 생각했다.[49] 그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반드레퓌스편에 서서 '반 드레퓌스 프랑스 행동'을 창립하였으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예수회의 노선을 따랐다.[49]
레옹 도데는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샤를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 운동에 참여했다.[49] 그는 〈악시옹 프랑세즈〉 신문을 보수적·민족주의적·왕당파적 입장의 일간지로 개편하는 데 기여했다.
조르주 소렐은 생디칼리슴 이론가로, 드레퓌스 사건 초기에는 친드레퓌스파였으나, 이후 샤를 모라스와 교류하며 악시옹 프랑세즈에 영향을 주었다.[50] 무솔리니는 소렐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50]
악시옹 프랑세즈는 지역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파리의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서클과 같은 문학 서클을 통해 프랑스 보수주의자 및 우익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토론을 벌였다.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에는 잔 다르크(Joan of Arc)를 기리는 행렬을 조직하고,[30] 여름 대학인 "막심-레알 델 사르트 캠프"를 개최하여 활동가들을 모은다.[31] 또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33]
6. 평가
6. 1. 파시즘과의 관계
독일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는 악시옹 프랑세즈를 유럽 역사에서 최초의 파시즘 정당으로 간주하며 파시즘 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34]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놀테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35] 리처드 설로는 "놀테가 악시옹 프랑세즈를 파시즘 전통과 연결짓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36] 르네 레몽과 스탠리 G. 페인은 악시옹 프랑세즈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20][37]제브 슈테른헬(Zeev Sternhell)은 저서 『좌도 우도 아닌』(Neither Right nor Left)[38]과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탄생』(The Birth of Fascist Ideology)[39]에서 악시옹 프랑세즈가 국가 신디칼리즘에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파시즘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슈테른헬에 따르면, 국가 신디칼리즘은 악시옹 프랑세즈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와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의 혁명적 신디칼리즘의 결합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탈리아로 확산되어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 이념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국가 신디칼리즘이 1930년대의 비순응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비순응주의자들은 사실상 프랑스식 파시즘이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르네 레몽(René Rémond)은 프랑스 우익 세력을 분류하면서, 오를레앙파를 지지했던 악시옹 프랑세즈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를 완전히 거부하는 특징을 가진 왕당파(legitimist)에 더 가깝다고 보았다. 레몽에 따르면, 오를레앙파 지지자들은 자유 시장 경제(economic liberalism)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7. 한국과의 관계
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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