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혁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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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혁은 1906년에 태어나 2004년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화학공학자이자 교육자, 그리고 제13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일본 규슈 제국대학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 및 교장,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교육에 헌신했고, 대한화학회 회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며 학술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산업 기반 시설 확충에 힘썼으며, 수질 연구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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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혁 (1906년)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안동혁 |
출생 | 1906년 1월 23일 |
사망 | 1987년 12월 29일 (81세) |
직업 | 정치인 |
배우자 | 김순애 |
자녀 | 4남 3녀 |
학력 | 니혼 대학 법과 졸업 |
경력 | |
소속 정당 | 한국민주당 민주당 (1955년) 민중당 (1963년) 신민당 |
주요 경력 | 제2대 국회의원 제5대 국회의원 제6대 국회의원 제7대 국회의원 민주당 중앙위원 민중당 중앙상임위원 신민당 정무위원 신민당 원내부총무 |
기타 | |
종교 | 천주교 |
2. 학력
연도 | 학교 | 전공 |
---|---|---|
1923년 4월 ~ 1926년 3월 | 경성고등공업학교 | 응용화학 |
1926년 4월 ~ 1929년 3월 | 규슈 제국대학 | 응용화학 |
1948년 9월 ~ 1949년 6월 | 프린스턴 대학교 | 응용화학 |
안동혁은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중앙시험소에서 화학공학 강의와 연구를 하며 유지공업 분야에서 6개의 특허를 획득하고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4] 1953년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쟁 복구와 삼척, 마산, 당인리 발전소 건설, 문경시멘트, 인천 판유리 공장, 충주 요소 비료 공장 건설 착수 등 산업 기반 시설 확립에 기여했다.[4] 1954년부터 서울대학교 등 주요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58년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2004년 작고할 때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한 대한민국의 수질 및 수원, 특히 북한 수원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관련 연구 실적을 쌓았다.[4]
3. 약력
연도 내용 경성고등공업학교 화학과 교수 1929년 4월 ~ 1946년 9월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 및 교장 1933년 과학협회와 공동으로 잡지 《과학조선》 간행 (1944년 1월 폐간) 1934년 7월 5일 이만규, 윤치호, 김창제 등과 함께 과학지식보급회 설립에 참여 중앙공업연구소 소장 1946년 7월 조선화학회(대한화학회의 전신) 설립 참여 1946년 9월 ~ 2004년 조선요업협회(현 대한요업총협회) 초대 회장 대한화학회 회장 1947년 잡지 《과학시대》 창간 (1950년 3월 폐간) 1953년 10월 ~ 1954년 6월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 1958년 4월 ~ 1976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교수 1971년 3월 6일 한국부식학회 창립 발기인 1971년 3월 ~ 한국부식학회 고문 1976년 3월 ~ 2004년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966년 9월 ~ 2004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1971년 1월 ~ 2004년 재단법인 한국화학회관 이사장 (초대) 1972년 1월 ~ 2004년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
4. 생애 및 업적
4. 1. 초기 생애 및 교육
安東赫|안동혁일본어은 1906년 3월 14일 한성부(서울특별시 성동구 상왕십리동)에서 태어났다. 1926년 4월부터 1929년 3월까지 규슈 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하였다.[4] 졸업 후, 모교의 요청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33년에는 교편을 잡으면서 중앙시험소 화학공업부 기수 업무도 겸임했다.[4]
4. 2. 과학 대중화 활동
안동혁은 과학 대중화에도 힘썼다. 1933년 과학협회와 공동으로 잡지 《과학조선》을 간행하였고(1944년 1월 폐간),[4] 1934년 7월 5일에는 이만규, 윤치호, 김창제 등과 함께 과학지식보급회 설립에 참여했다.[4] 1947년에는 잡지 《과학시대》를 창간하여 1950년 3월까지 발행했다.[4]
4. 3. 학술 활동 및 연구 업적
안동혁은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중앙시험소에서 화학공학 강의와 연구를 하며, 유지공업 분야에서 6개의 특허를 획득하고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4] 대한화학회, 대한요업총협회, 한국식품과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 학술원 초대 회원 및 부회장, 한국과학회 이사회 1, 2대 이사장 등 여러 학회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화학공학 학술 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 한국화학회관 설립·운영에 기여했고, 국제과학연맹 이사회 한국대표, 미국화학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북한 수원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전역의 수질, 수원 및 공업용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학생들을 위한 기초 과학 학문 전파를 위해 ‘자연과학개론(공저)’, ‘과학과 경제발전(감수)’(이상 한양대학교출판부, 1971년)을 저술했다. 그 외 연구결과는 ‘과학기술의 건설’(제일출판사, 1946년), ‘과학신화’ (조선공업도서출판사, 1947년), ‘화학공업개론(편저)’(문운당, 1947년) 등의 저서로 남겼다.
4. 3. 1. 수질 연구
1941년 '조선의 水質'(일본어, 조선화학회지), 1944년 9월 '북한의 수질 및 수원' 논문을 조선화학협회지에 게재했고, 한국 전쟁 직전 남북한 전역 공업용수를 조사·연구하며 1948년 '공업용수 조사 원산지역'(중앙공업연구소 보고), 1949년 '북조선의 공업용수'(중앙공업연구소) 등 관련 논문을 13회 중앙공업연구보고에 발표했다.[2]
4. 4. 상공부 장관 재임 시절
1953년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전쟁 중 국가가 당면한 건재 복구 물자 생산, 기간 산업 건설 착수에 힘썼으며, 삼척, 마산, 당인리 발전소 건설, 문경시멘트, 인천 판유리 공장, 충주 요소 비료 공장 건설 착수 등 기반 시설을 확립 및 건설했다.[4]
4. 5. 교육 활동
1929년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한 안동혁은 모교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로 부임했다.[4] 1933년 교편을 잡으며 중앙시험소 화학공업부 기수 업무도 겸임했다.[4]
경성공전과 중앙시험소를 오가며 화학공학 강의와 연구에 매진했으며, 전문인 유지공업 분야에서 6가지 특허를 냈고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4]
1954년 서울대학교를 비롯해 수도권 주요 대학의 강사로 활동을 시작, 1958년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2004년 작고할 때까지 일평생을 교육자로 지내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4]
5. 저서 및 연구결과
안동혁은 1941년 《조선의 수질》(일본어, 조선화학회지)을 발표하고, 1944년 9월에는 《북한의 수질 및 수원》에 대한 논문을 조선화학협회지에 게재했다. 한국 전쟁 직전에는 남북한 전역에 걸쳐 공업용수를 조사·연구했으며, 1948년 《공업용수 조사 원산지역》(중앙공업연구소 보고), 1949년 《북조선의 공업용수》(중앙공업연구소) 등 관련 논문을 13회에 걸쳐 중앙공업연구보고에 발표했다.[2]
또한, 학생들을 위한 기초 과학 학문 전파를 위해 1971년 《자연과학개론》(공저, 한양대출판부)과 《과학과 경제발전》(감수, 한양대출판부)을 저술했다. 그 외 연구 결과는 1946년 《과학기술의 건설》(제일출판사), 1947년 《과학신화》 (조선공업도서출판사), 《화학공업개론》(편저, 문운당) 등의 저서로 출간했다.[2]
6.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15)순흥 안씨(順興安氏)-468,827명
http://www.seoulecon[...]
2014-07-21
[2]
논문
「帝国」の大学に学んだ朝鮮人学生
https://catalog.lib.[...]
[3]
웹사이트
안동혁 前 상공부장관 별세
https://www.hankyung[...]
2004-10-14
[4]
웹인용
안동혁
https://terms.naver.[...]
20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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