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알바로 데 루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바로 데 루나는 1388년에서 1390년 사이에 태어난 카스티야의 귀족으로,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의 총신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1410년 궁정에 들어가 후안 2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탐욕스러운 귀족들로부터 국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루나는 1427년 귀족들의 연합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지만, 이듬해 복귀하여 1445년 올메도 전투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왕비 이사벨과의 갈등과 왕세자 엔리케와의 불화로 인해 1453년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당시 카스티야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88년 출생 -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태규
    잉글랜드 귀족이자 군인인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태규는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하며 헨리 5세의 측근으로서 가터 기사단에 임명되었고, 주요 전투 참전 및 노르망디 육군 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사망하여 그의 군사적 업적은 잉글랜드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 1388년 출생 - 비신 (명나라)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정화의 함대에 참여했던 비신은 《성차승람》을 저술하여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지리, 풍속, 산물에 대한 정보를 기록했으며, 그의 기록은 당시 명나라의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카스티야 왕국 - 톨레도 왕국
    톨레도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무슬림 왕국으로, 알폰소 6세에게 정복되어 카스티야 왕국에 합병된 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여러 사건을 거쳐 스페인의 영토 재편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 카스티야 왕국 -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1212년 7월 16일 스페인에서 벌어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이 무와히드 왕조를 격파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 쇠퇴를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전투이다.
알바로 데 루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바로 데 루나, 산티아고 기사단 복장
알바로 데 루나, 산티아고 기사단 복장
작위 정보
작위명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백작
임기 시작1423년
임기 종료1445년
작위명 (2)산티아고 기사단 단장
임기 시작 (2)1445년
임기 종료 (2)1453년
전임 (2)비예나 공작 엔리케
후임 (2)후안 데 루나
작위명 (3)카스티야 총 사령관
임기 시작 (3)1423년
임기 종료 (3)1453년
전임 (3)루이 로페스 다발로스
후임 (3)미겔 루카스 데 이란조
개인 정보
출생지카스티야 카네테
사망지카스티야 왕국 바야돌리드
사망일1453년 6월 2일
배우자엘비라 데 포르토카레로 (1420년 결혼)
(1430년 결혼)
자녀후안 드 루나
마리아 드 루나
아버지돈 알바로 마르티네스 데 루나
어머니마리아 페르난데스 데 자라나

2. 어린 시절

1388년에서 1390년 사이 쿠엥카 주의 카녜테에서 태어났다.[6][7] 아버지는 카스티야귀족인 돈 알바로 마르티네스 데 루나였고, 어머니는 그의 정부였던 마리아 페르난데스 데 하라나였다. 그는 이들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6][7] 아버지 돈 알바로는 엔리케 3세의 '코페로 마요르'(귀족에게 음료를 따르는 시종)였다.

7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재혼했고, 그는 삼촌들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훗날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가 되는 페드로 데 루나였다.[8]

1410년, 당시 톨레도 대주교였던 삼촌 페드로 데 루나의 도움으로 궁정에 들어가 시종이 되었다.[1] 그는 점차 당시 소년 왕이었던 후안 2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9] 1412년, 후안 2세의 숙부인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으로 선출되어 카스티야를 떠나자, 섭정은 왕의 어머니인 캐서린이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알바로 데 루나는 국왕의 매우 중요한 측근이자 친구 같은 존재인 '콘티노'(''contino'')로 부상했다.[1]

3. 권력 쟁취

알바로 데 루나는 1388년에서 1390년 사이 카스티야의 귀족 돈 알바로 마르티네스 데 루나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의 '코페로 마요르'(음료 시종)였고, 어머니는 마리아 페르난데스 데 하라나였다.

1410년, 삼촌인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5세 데 루나의 소개로 궁정에 시종으로 들어간 그는, 곧 어린 국왕 카스티야의 후안 2세의 측근이 되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의 섭정 시기에는 큰 영향력이 없었으나, 국왕의 어머니 랭커스터의 캐서린이 섭정을 맡게 되면서 국왕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국왕의 옛 친구를 의미하는 "''콘티노''"가 되었다.[1]

카네테에 있는 알바로 데 루나의 동상


당시 카스티야는 국왕의 사촌들인 아라곤의 인판테(엔리케와 후안) 등 탐욕스러운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안 2세는 자신에게 충성하며 귀족 세력을 견제할 인물로 알바로 데 루나를 선택하고 깊이 의지했다.[2] 루나는 뛰어난 기마술, 다루는 솜씨, 시적 재능 등 다방면에 능하여 왕의 존경을 받았고,[1] 이를 바탕으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점차 강력한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루나의 권력 장악은 기존 귀족 세력, 특히 아라곤의 인판테들과의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귀족들은 루나가 국왕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제거하고 국왕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1] 알바로 데 루나의 역할에 대해서는 사리사욕을 채운 총신이라는 비판과,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한 충신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3. 1. 왕의 총애

후안 2세(1405~1454)는 아버지 엔리케 3세(1379~1406)가 일찍 사망하면서 생후 22개월 만에 왕위에 올랐다. 숙부 페르난도 1세와 어머니의 섭정을 거쳐 1419년, 14세의 나이로 직접 통치를 시작했지만, 실제 정치는 총신 알바로 데 루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 짓기, 사냥, 마상 시합 등에만 몰두하며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5][10]

어린 시절부터 사촌 형들을 비롯한 탐욕스러운 귀족들에게 시달렸던[5] 후안 2세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에게 충성할 인물이 필요했다.[10] 알바로 데 루나는 이러한 왕의 필요에 부합하는 인물이었고, 후안 2세는 그를 깊이 신뢰하며 의지했다. 왕은 루나의 충성을 진심 어린 애정으로 받아들였다.[6] 후대의 사람들은 왕의 깊은 총애를 마법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2]

루나는 후안 2세가 존경할 만한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기수였고, 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시에도 능한 궁정 시인이었다.[9][1] 이러한 능력으로 어린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루나는 그 대가로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고 왕국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음모와 위선에 능했다는 비판도 있다.

루나는 1453년 왕의 지지를 잃기 전까지 약 30년간 카스티야 정치의 중심 인물로 군림하며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는 아라곤의 인판테들(엔리케와 후안)과 왕비 마리아 등 귀족 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이들은 루나의 영향력에서 왕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권력 투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후안 2세는 종종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9][1]

알바로 데 루나가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후안 데 마리아나는 그를 단순한 사리사욕을 채우는 총신으로 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카스티야에서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 노력한 충실한 신하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지배가 약탈적인 귀족들의 무법한 연합의 지배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3. 2. 숙적 엔리케와의 대립

후안 2세의 모후 캐서린이 1418년 사망한 후, 후안 2세의 사촌 형들인 인판테 후안(훗날 아라곤 왕 후안 2세)과 엔리케가 공동 섭정이 되면서 형제간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11] 이들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영지와 넓은 인맥을 카스티야에 가지고 있었기에[12], 부친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으로 떠난 후에도 카스티야 왕실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1419년 3월, 후안 2세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으나, 후안과 엔리케로 대표되는 '아라곤파' 귀족들이 여전히 관직 임용권을 행사하는 등 실질적인 권력 이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정 혼란은 계속되었다.[5]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후안 2세의 지원을 받은 알바로 데 루나가 나섰지만, 이에 불만을 품고 권력욕이 강했던 엔리케는 1420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마침 그의 형 후안이 나바라의 블랑쉬와 결혼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린 것이었다.[13] 엔리케는 토르데시야스의 왕궁을 습격하여 국왕 후안 2세를 생포하고, 자신의 형 후안을 따르던 귀족들을 제거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엔리케는 1420년 8월, 후안 2세를 아빌라로 끌고 가 자신의 여동생 마리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14] 소식을 들은 엔리케의 형 후안이 군대를 이끌고 올메도에 도착하자, 엔리케는 왕을 데리고 탈라베라로 이동했다. 같은 해 11월 29일, 알바로 데 루나는 후안 2세의 탈출을 도왔고, 자신도 왕과 함께 몬탈반 성으로 피신했다. 엔리케가 성을 포위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함락에 실패하고 철수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엔리케에 대한 귀족들의 지지가 약해져 쿠데타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15] 엔리케는 1423년 반역죄로 체포되어 산티아고 기사단장 직위를 제외한 모든 직위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모라성에 감금되었다.

쿠데타가 진압된 후, 후안 2세는 자신의 탈출을 돕고 쿠데타를 무산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루나를 카스티야의 총사령관(Constable of Castile)으로 임명했다.[16] 이로써 루나는 정권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엔리케의 형이자 아라곤의 국왕 알폰소 5세가 동생의 석방을 위해 외교적 압박을 가했고, 결국 후안 2세는 1425년 10월 엔리케를 석방했다.[17] 석방된 엔리케는 즉시 반 국왕파 귀족 연합을 이끌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루나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시 권력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귀족 연합의 압박으로 1427년 9월 루나는 잠시 실각했지만,[18] 엔리케가 주도하던 귀족 연합이 분열 양상을 보이자, 귀족들의 요청으로 5개월 만인 1428년 2월 정계에 복귀했다. 이로써 엔리케와의 권력 투쟁은 재개되었다. 엔리케와 귀족 연합이 카스티야와 레온에 대한 후안 2세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루나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자, 1428년 6월 후안 2세는 엔리케에게 궁정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1429년, 엔리케는 자신의 형이자 아라곤 왕인 알폰소 5세와 공모하여 카스티야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부추겼다.[19] 아라곤과 나바라 연합군이 자드라케(Jadraque)까지 침공했으나, 후안 2세의 왕비이자 알폰소 5세의 누이인 마리아의 중재 노력 덕분에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듬해 양국 간에 마자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엔리케는 카스티야에서 추방되어 망명길에 올랐다.[20]

이후에도 엔리케는 루나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으나, 1445년 아라곤의 인판테들과 연합한 귀족 세력은 올메도 1차 전투에서 루나가 이끄는 국왕군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엔리케는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1] 이로써 알바로 데 루나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제거되었다.

3. 3. 실각과 복귀

엔리케는 1425년 10월 석방된 후, 반 국왕파 귀족 연합을 이끌며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알바로 데 루나를 궁정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시 권력 투쟁에 나섰다.[17] 귀족 연합의 압박이 거세지자 1427년 9월, 루나는 결국 실각했고[18] 엔리케는 정치 일선에 복귀하여 이전의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엔리케가 주도하는 귀족 연합은 곧 분열 양상을 보였고, 귀족들의 요청으로 루나는 실각한 지 5개월 만인 1428년 2월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로써 엔리케와의 권력 투쟁은 재개되었다. 엔리케와 귀족 연합은 카스티야와 레온에 대한 후안 2세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루나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이에 1428년 6월, 후안 2세는 엔리케에게 궁정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1429년, 엔리케는 자신의 형이자 아라곤의 왕인 알폰소 5세(재위 1416~1458)와 공모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했다.[19] 아라곤과 나바라 연합군이 자드라케(Jadraque)까지 쳐들어왔으나, 후안 2세의 왕비이자 알폰소 5세의 누이인 마리아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 덕분에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1430년, 양국 간에 마자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엔리케는 이 일로 인해 망명길에 올랐다.[20]

어린 국왕 후안 2세는 루나를 매우 신뢰하고 의지했다. 당시 카스티야는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귀족들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웠는데, 특히 국왕의 사촌이자 '아라곤의 인판테'로 불리던 엔리케와 후안 형제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루나에게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또한 루나는 뛰어난 기마술, 창술 실력, 시적 재능 등 국왕이 존경할 만한 능력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1] 하지만 루나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음모와 위선에도 능숙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귀족들은 루나가 국왕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하며, 국왕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1] 알바로 데 루나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역사가 후안 데 마리아나는 그를 단순한 사리사욕을 채우는 총신으로 보았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가 혼란스러운 귀족들의 발호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한 충신이었다고 평가한다.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측면도 있지만, 그의 통치가 귀족들의 무법적인 연합보다는 더 나은 대안이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1431년, 루나는 귀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레콩키스타를 진척시키기 위해 그라나다 토후국 원정을 시도했다. 라 이구에루엘라 전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반항적인 귀족들의 비협조와 국왕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일관된 정책 추진은 어려웠고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1]

1445년, 루나의 주요 정적이었던 아라곤의 인판테들과 연합한 귀족 세력은 올메도 1차 전투에서 루나가 이끄는 국왕군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엔리케는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1] 이 승리로 루나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그는 기사들의 선거를 통해 산티아고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되었다.[1]

3. 4. 올메도 전투

1437년 카스티야 귀족들이 국왕 후안 2세와 재상 루나에 대항하여 무력 봉기를 일으키면서 카스티야는 내전에 돌입했다. 1438년, 루나의 숙적이자 1435년 어머니 레오노르의 사망으로 앨버커키 백작위를 상속받았던 엔리케도 귀국하여 귀족들 편에 서서 내전에 합류하였다.

1445년 5월 19일, 올메도에서 벌어진 제1차 올메도 전투에는 아라곤이 반 국왕파 카스티야 귀족들과 연합했으며 엔리케도 참전하였다. 루나 재상이 이끈 국왕군은 아라곤-귀족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정적 엔리케가 부상을 입고 사망하면서 루나는 일생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21]

엔리케가 사라지자 카스티야 왕국은 사실상 루나가 장악하게 되었다. 엔리케의 죽음으로 카스티야의 최대 조직인 산티아고 기사단의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루나가 기사들의 선거를 통해 그랜드 마스터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의 권력은 국왕의 힘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9][3][1] 루나는 이미 1423년부터 카스티야의 치안 판사이자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스 백작이었다.[1]

4. 몰락

돈 알바로 데 루나의 비극적인 최후. 호세 마리아 로드리게스 데 로사다 (1826–1896)의 그림


후안 2세의 첫 왕비 마리아가 의문스러운 상황 속에서 사망했을 때 알바로 데 루나가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그의 권력은 여전히 확고해 보였다.[1] 그러나 후안 2세의 두 번째 왕비인 포르투갈의 이사벨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그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사벨 왕비는 자신의 결혼 자체가 루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에 대한 루나의 막대한 영향력에 불만을 품었다.[1]

결정적으로 국왕의 회계 담당관 알폰소 페레스 데 비베로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루나가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자[1] 이사벨 왕비는 남편 후안 2세에게 루나로부터 벗어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결국 1453년, 국왕은 아내의 요구에 굴복하여 루나를 체포하도록 명했다. 루나는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453년 6월 2일 바야돌리드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1]

4. 1. 왕세자 엔리케와의 갈등

1425년 후안 2세의 첫 번째 왕비 마리아에게서 엔리케 왕세자(훗날 엔리케 4세)가 태어났다. 당시 카스티야는 국왕의 총신 루나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아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루나는 어린 엔리케 왕세자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세고비아에 별도의 궁정을 마련해주고, 왕자의 동료 선발과 교육을 직접 감독했다.[22] 아버지 후안 2세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능했으며, 루나를 지나치게 신임하여 모든 국정을 맡겨 사실상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23]

1445년, 엔리케의 어머니 마리아 왕비가 독살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임종 직전 루나를 주모자로 지목했으나, 사후에 어떠한 조사나 후속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엔리케 왕세자는 성장하면서 루나의 권력 남용이 부당함을 인지했지만, 이미 국정을 장악한 루나와 그의 측근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루나와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지만, 성격이 나약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엔리케는[23]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23]

어린 후안 2세 국왕은 루나를 매우 아꼈는데,[2] 이는 루나가 뛰어난 기수이자 다루는 솜씨가 능하며 궁정 시인이기도 하여 국왕이 존경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일 수 있다.[1] 그러나 루나는 탐욕스러운 귀족들, 특히 국왕의 사촌이자 아라곤의 인판테인 헨리와 후안 형제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2]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음모와 위선에도 능했다. 이들 귀족 세력은 국왕을 루나의 부당한 영향력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1]

1445년 올메도 1차 전투에서 루나는 아라곤의 인판테들과 연합한 귀족 세력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루나의 주요 정적이자 마리아 왕비의 오빠였던 빌레나 공작 헨리가 부상으로 사망했다. 이 승리 후 루나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되는 등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1] 이러한 루나의 절대적인 권력 강화는 엔리케 왕세자와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2. 계비 이사벨과의 대립

국왕 후안 2세는 새로운 왕비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프랑스 출신의 왕녀나 공녀를 원했다. 그러나 재상 루나가 포르투갈과의 동맹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두번째 왕비로는 포르투갈 주앙 1세의 손녀로 19세의 어린 이사벨을 선택하였고 144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사벨(1428~1496)이 입궐하자 루나는 새로운 왕비 역시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였다. 심지어 부부생활에까지 간섭[24]하였다. 이사벨이 왕녀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카스티야의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루나의 노력 덕분이었지만, 도를 넘는 루나의 간섭은 왕비를 불쾌하게 만들었다.[25] 아울러 총신 루나를 위시한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득세하여 국정이 혼란스럽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는 상황을 왕비로서 두고 보기 어려웠다. 이사벨은 귀족의 힘을 누르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주앙 1세의 손녀답게 담대하게 권력 투쟁에 나섰다.

4. 3. 동맹과 정변

이사벨(1428~1496) 왕비는 후안 2세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의 막강한 영향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결혼 자체가 루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지만, 왕비는 루나를 제거하여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1] 이를 위해 이사벨 왕비는 먼저 후안 2세의 전처 소생인 엔리케(1425~1474) 왕세자와 정치적인 동맹을 맺었다.[23] 루나 제거와 왕권 강화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쉽게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왕실 회계사[25] 알폰소 페레스 데 비베로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루나가 사주한 일이라는 혐의를 받았다.[25][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사벨 왕비는 남편인 후안 2세에게 루나를 제거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1] 결국 후안 2세는 왕비의 요구에 동의하여 루나의 체포를 명했고,[25] 1453년 4월 4일 루나는 부르고스에서 체포되었다.[27] 이를 계기로 왕비 이사벨과 왕세자 엔리케는 정변[26]을 일으켰다.[27]

루나는 후안 2세의 전 왕비였던 아라곤의 마리아(1403~1445)를 독살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었다.[25] 체포된 루나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았다. 1453년 6월 2일, 한때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루나는 바야돌리드 광장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9][28][1]

4. 4. 정변 이후

정변은 성공했지만, 후안 2세(1405~1454)는 어려서부터 깊이 의지하고[25] 총애하던 신하 알바로 데 루나의 죽음을 슬퍼하며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1454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세자 엔리케가 엔리케 4세로 즉위했다. 엔리케 4세는 즉위 후, 과거 정변 당시 정치적 동맹이었던 계비 이사벨과 그녀의 두 자녀(이사벨과 알폰소)를 왕궁에서 추방하여 아레발로(Arévalo)라는 소도시로 유배 보냈다.[29] 이는 1453년 정변 당시 계모 이사벨이 보여준 능력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 이복 남동생 알폰소에게 물려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30] 계비 이사벨(1428~1496)은 이러한 배신의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게 되었고,[31] 증상이 점차 악화되어 남은 생애 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녀의 딸 이사벨은 훗날 1474년 이복 오빠 엔리케 4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즉위했으며, 레콩키스타를 완성하는 등 16세기 스페인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가 되었다.

5. 결혼과 자녀

알바로 데 루나는 정식 부인 후아나 피멘텔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으며, 정부 마르가리타 마누엘에게서 사생아 한 명을 두었다.

'''정식 자녀 (어머니: 후아나 피멘텔)'''

이름정보배우자
Juan de Luna y Pimentel|후안 데 루나 이 피멘텔es2대 산티스테반 백작Leonor de Zúñiga y Lara|레오노르 데 수니가 이 라라es (베하르 공작의 딸)
María de Luna y Pimentel|마리아 데 루나 이 피멘텔es오빠 사후 상속, 3대 산티스테반 백작 부인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 이 루나, 인판타도 공작



'''사생아 (어머니: 마르가리타 마누엘)'''

이름정보
Pedro de Luna y Manuel|페드로 데 루나 이 마누엘es푸엔티두에나의 영주. 사생아였으나 적자로 인정됨.


6. 평가

알바로 데 루나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그가 개인적인 영달을 추구했다는 비판과 함께, 혼란한 카스티야 정국에서 어린 국왕 후안 2세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충신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역사가 후안 데 마리아나 등은 그를 단순히 사리사욕을 채운 총신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 등에서는 그가 당시 종친과 대귀족들로 인해 혼란했던 카스티야의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면도 있었지만 그의 권력 행사는 귀족들의 불법적인 행위보다는 나았다는 시각도 있다. 당대 카스티야 연대기 작가들 역시 루나가 스페인 역사상 군주가 아닌 인물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을 인정한다.[3]

어린 후안 2세는 루나를 매우 총애했으며, 이는 당시 귀족들의 압박 속에서 국왕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국왕의 사촌이자 아라곤의 인판테로 알려진 페르디난드의 아들들은 국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2] 루나는 뛰어난 기수이자 술에 능했으며, 궁정 시인이기도 하여 국왕의 존경을 받았다.[1]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를 음모와 위선의 대가로 보기도 한다.

알바로 데 루나는 국왕의 보호 아래 카스티야 역사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 시기는 귀족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이 특징이었으며, 특히 아라곤의 인판테인 엔리케와 후안, 그리고 후안 2세의 아내 마리아의 형제들이 결성한 변동적인 연합 세력은 국왕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 이들은 루나의 부당한 영향력으로부터 국왕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1]

1427년, 루나는 귀족 연합에 의해 잠시 추방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복귀했다. 1431년에는 레콩키스타의 일환으로 그라나다 토후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도하여 불안정한 귀족 세력을 규합하려 했다. 라 이구에루엘라 전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반항적인 귀족들과 나태한 성격의 국왕 때문에 일관된 정책 추진은 어려웠고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1445년, 루나는 그의 주요 정적이었던 아라곤의 인판테와 연합한 귀족 세력을 올메도 1차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여왕의 형제이자 빌레나 공작이었던 엔리케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이 승리 이후 루나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들로부터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되었다.[1]

참조

[1] EB1911
[2] 간행물 Encyclopæ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3]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4] 사전 민중서림 엣센스 스페인어사전 네이버 사전
[5] 서적 스페인사 까치글방
[6] 간행물 Encyclopæ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7] 논문 Mujer y santidad en el siglo XV: Álvaro de Luna y El Libro de las virtuosas e claras mugeres
[8] 문서
[9] EB1911 Luna, Álvaro de
[10] 서적 스페인사 까치글방
[11] 웹사이트 Medieval Lands
[12]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13] 문서
[14]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Urgoiti editores
[15] 문서
[16]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Urgoiti editores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Urgoiti editores
[21] 문서
[22] 백과 엔리케 4세 다음백과
[23] 서적 여왕의 시대 미래의 창 2011-05-25
[24] 웹사이트 Isabel of Portugal (1428–1496)
[25] EB1911 Luna, Álvaro de
[26] 서적 여왕의 시대 미래의 창 2011-05-25
[27] 지식백과 이사벨 1세 [Isabel I] - 통일 스페인의 어머니 네이버 지식백과
[28] 웹사이트 Isabel of Portugal (1428–1496) https://www.encyclop[...] 2019-09-23
[29] 웹사이트 Isabel of Portugal (1428–1496)
[30] 서적 여왕의 시대 미래의 창 2011-05-25
[31] 웹사이트 Isabel of Portugal (1428–1496) https://www.encyclop[...] 2019-09-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