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트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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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스트롱포는 1850년대 윌리엄 암스트롱이 개발한 영국의 후장식 강선포이다. 이 포는 층층 구조의 포신, 압착 포신, 가압식 폐쇄 장치 등 혁신적인 기술을 적용하여 정확도와 사거리를 향상시켰다. 암스트롱포는 제2차 아편 전쟁, 뉴질랜드 전쟁, 사쓰에이 전쟁 등 여러 분쟁에 사용되었으나, 폐쇄기 문제로 인해 신뢰성을 잃고 영국군에서 퇴출되었다. 이후 미국 남북 전쟁, 일본의 보신 전쟁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기술 개선을 통해 다시 영국 해군에 채용되기도 했다. 암스트롱포는 6파운드 경야포, 9파운드 기병포, 12파운드 야포, 20파운드 야포, 40파운드 공성포, 110파운드 해군포, 100톤 포 등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며, 군사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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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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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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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강선포 |
발명가 | 윌리엄 암스트롱 경 |
생산 기간 | 1855년 - 1860년대 |
제원 | |
구경 | 3 인치 (76 mm) ~ 12 인치 (305 mm) |
무게 | 모델에 따라 다름 |
포탄 무게 | 모델에 따라 다름 |
포탄 종류 | 납 코팅된 연철 탄환 포탄 산탄 |
작동 방식 | 후장식 |
강선 유무 | 있음 |
역사적 정보 | |
사용 국가 | 영국 일본 기타 |
주요 사용 전투 | 크림 전쟁 보신 전쟁 아이노 전쟁 |
일본 정보 | |
다른 이름 | 엘스윅 포 (일본어: エルズウィック砲) |
2. 개발 배경 및 초기 역사
1854년 윌리엄 조지 암스트롱은 영국 육군 장관 5대 뉴캐슬 공작 헨리 펠햄 클린턴에게 3파운드 강선 후장포 개발을 제안받았다. 이후 포강을 넓혀 5파운드 포로 만들었는데, 사정거리와 정확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암스트롱은 3년간의 개발을 통해 더 큰 구경의 포에도 후장식을 채택했다.
1858년 암스트롱의 후장포가 영국군에 채용되었으나, 초기에는 '야전 특수부대용'으로 한정되었다. 생산된 포는 6파운드 (2.5인치 = 64mm) 산포와 경야포, 9파운드 (3인치 = 76mm) 기마포병포, 그리고 12파운드 (3인치 = 76mm) 야포뿐이었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방식이 대형 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상부의 명령으로 20파운드 (3.75인치 = 95mm) 야포와 함재포, 40파운드 (4.75인치 = 121mm) 함재 · 요새포, 그리고 110파운드 (7인치 = 180mm) 화포를 생산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이 세 종류의 포를 모두 채용했으며, 뉴질랜드에서도 40파운드와 110파운드 포를 사용했다.[6]
2. 1. 크림 전쟁과 암스트롱의 결심
1854년 크림 전쟁 중, 영국군이 중포를 사격 위치로 진입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을 접한 윌리엄 암스트롱은 경량에 고성능인 화포 개발을 결심했다.[3] 이 시기는 유럽에서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활강포에서 강선포로 전환이 시도되던 때였으며, 암스트롱의 설계는 그 초기 시도 중 하나였다.[4]암스트롱은 1854년 영국 육군 장관(5대 뉴캐슬 공작 헨리 펠햄 클린턴)에게 시험용 강선 후장포 3파운더포 제작을 제안했다. 이후 포강을 넓혀 5파운드 포로 만들었지만, 사정거리와 정확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이후 3년간 개발을 계속하여 더 큰 구경의 포에도 후장식을 채택했다.
2. 2. 유럽의 화포 기술 발전
1854년 윌리엄 조지 암스트롱은 영국 육군 장관 5대 뉴캐슬 공작 헨리 펠햄 클린턴으로부터 3파운드 강선 후장포의 개발을 제안받았다. 이후 포강을 넓혀 5파운드 포로 만들었지만, 사정거리와 정확도는 모두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 후 암스트롱은 3년 동안 개발을 해서, 더 큰 구경의 포에 후장식을 채용했다.[6]1858년 암스트롱의 후장포가 군에 채용되었지만, 처음에는 '야전 특수부대용'으로 한정되었으며, 6파운드 (2.5인치 = 64mm) 산포와 경야포, 9파운드 (3인치=76mm) 기마포병포, 12파운드 (3인치=76mm) 야포만 생산되었다.[6]
암스트롱은 이 방식이 대형 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상층부는 20파운드 (3.75인치 = 95mm) 야포와 함재포, 40파운드 (4.75인치 = 121mm) 함재 · 요새포, 110파운드 (7인치 = 180mm) 화포의 생산을 명령했다. 영국 해군은 이들 세 종류의 포를 모두 채용하였으며, 뉴질랜드에서도 40파운드, 110파운드 포를 채용했다.[6]
이 시기, 유럽에서는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활강포에서 강선포로의 전환이 시도되었으며, 암스트롱의 설계는 그 초기 시도 중 하나였다. 기존의 포신은 주조 방식이었던 것에 반해(주조포), 암스트롱은 포강에 해당하는 속심을 중심으로 포신을 조금씩 조립해가는 제조법을 채용했다.
1863년, 병기 선정 위원회는 전장식과 후장식 포의 장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1864년,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정부는 암스트롱 후장식 포의 생산을 중단했다. 1865년 8월, 위원회가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보고서는 암스트롱 포가 더 비싸지만, 주철 전장식 포가 파열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반면, 암스트롱 포는 한 번도 파열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더 안전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게다가, 포병은 후장에서 불발탄을 제거할 수 있었다.
후장식 포의 장점에 대해 언급한 추가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절차를 지배했으며, 위원회는 "장점의 균형은 전장식 야포에 유리하다"고 발표했고, 1865년 영국은 후장식 병기에서 전장식 병기로 전환했다.[6]
2. 3. 암스트롱 포의 초기 설계
1854년 윌리엄 조지 암스트롱은 영국 육군 장관 5대 뉴캐슬 공작 헨리 펠햄 클린턴(Henry Pelham-Clinton, 5th Duke of Newcastle)으로부터 3파운드 강선 후장포의 개발을 제안받았다. 이후 포강을 넓혀 5파운드 포로 만들었는데, 사정거리와 정확도 모두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암스트롱은 그 후 3년 동안 개발을 계속하여 더 큰 구경의 포에도 후장식을 채택했다.[1]암스트롱포는 "조립식" 구조를 사용했는데, 중앙의 "A" 튜브는 처음에는 연철로, 1863년부터는 기름으로 강화된 연강으로 만들어졌다. 이 튜브는 포신을 지지하고, 여러 개의 연철 코일이 그 위에 감겨 중앙 튜브를 압축 상태로 유지했으며, 포미 조각과 포환 링이 있었다.[2] 이 포의 강선은 "다중 홈" 시스템으로, 포신에는 길이 방향으로 38개의 홈이 있었고 38구경당 1회 회전하는 꼬임이 있었다.
주철 포탄은 미니에 탄환과 유사한 모양으로 얇은 납 코팅이 되어 있어 포신의 구경보다 약간 컸다. 이 포탄은 포의 강선 홈과 맞물려 회전력을 얻었다. 이러한 방식은 스웨덴의 마틴 폰 바렌도르프와 조반니 카발리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회전은 밀착으로 인한 장약여유를 제거하여, 기존의 활강식 전장식 포보다 더 적은 화약량으로 더 큰 사거리와 정확도를 얻을 수 있게 했다.
각 화약 카트리지 위에는 두 개의 주석판 사이에 우지와 아마인유로 구성된 "윤활제"가 있었고, 밀랍으로 코팅된 펠트 솜과 밀보드가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윤활제는 포탄을 따라 포신 아래로 내려갔으며, 주석판 사이에서 짜여져 솜 뒤로 포탄 코팅에서 남은 납 침전물을 제거하여 다음 발사를 위해 포신을 깨끗하게 했다.[3]
20세기 포에서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혁신적인 특징은 암스트롱이 "그립"이라고 부른 것으로, 압착 포신의 일종이었다. 포구 끝의 6인치 포신은 직경이 약간 더 작아 포탄이 포신을 떠나기 전에 중심을 잡았고, 동시에 납 코팅을 약간 압착하여 직경을 줄이고 탄도 특성을 향상시켰다.
암스트롱 후장 장전포는 수직 슬라이딩 블록(통풍구 조각)을 사용했는데, 앞면에 원추형 구리 링 플러그가 있어 발사 챔버를 밀봉하여 포미를 닫았다. 블록과 플러그를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블록 뒤에 속이 빈 포미 나사(나사 포미)를 사용했으며, 포수는 이를 돌려 발사 전에 포미를 조이고 밀봉했다.
포를 장전하고 발사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 포미 나사를 돌려 풀었다.
- 통풍구 조각을 들어 올렸다.
- 포탄을 속이 빈 포미 나사를 통해 삽입하여 포신에 밀어 넣었다.
- 화약 카트리지를 포미 나사를 통해 챔버에 삽입했다.
- 프라이머 튜브를 통풍구 조각에 삽입했다 (40파운드 및 110파운드의 경우에만 크기 때문에 필요).
- 통풍구 조각을 내렸다.
- 포미 나사를 조였다.
- 끈이 부착된 마찰 튜브를 통풍구 조각 상단의 구멍에 삽입했다.
- 포수는 끈을 당겨 통풍 튜브의 화약 뇌관에 불을 붙였고, 섬광은 통풍구 조각의 통풍구를 통과하여, 프라이머가 있는 경우 보조를 받아 화약실로 들어가 화약 장약에 불을 붙였다.
기존의 포신은 주조로 만들어졌지만, 암스트롱은 포강에 해당하는 속심을 중심으로 포신을 조금씩 조립해가는 제조법을 채용했다. 강철로 만든 속심을 포신의 안쪽 표면으로 하고, 그 바깥쪽에 가단철 띠를 감거나 짧은 원통을 앞뒤로 늘어놓는 방식이었다. 이 공법으로 만들어진 포신은 바깥쪽 띠가 안쪽 층을 꽉 조여, 균질한 주조 포신보다 가벼우면서도 강했다. 또한, 주문에 따라 포의 크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폐쇄기로는 쇄전식과 나사전식의 혼합형인 가압식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쇄전식 폐쇄기 뒤쪽에 나사 조임식 나사전식 폐쇄기를 함께 설치한 것이지만, 나사전식 폐쇄기는 내경이 약실과 거의 같은 굵기의 파이프 모양 나사로 되어 있었다. 이 나사를 풀고 쇄전을 빼낸 후, 나사의 파이프 안을 통과시켜 포탄과 장약을 장전하고 쇄전을 장착, 나사를 조여 쇄전을 밀착시켜 사격 준비를 완료하는 구조였다.
약낭 앞쪽에는 양철판 사이에 수지와 아마인유를 넣은 윤활기가 장착되었다. 판 뒤에는 밀랍으로 코팅한 펠트 묶음과 두꺼운 종이가 있었다. 포탄이 발사되면 윤활기도 뒤따라가는데, 이때 판 틈새에서 윤활유가 짜내어져 펠트 묶음이 포탄에서 떨어져 내강에 들러붙은 납을 닦아내어 다음 탄 발사 전에 내강을 청소하는 방식이었다.
3. 암스트롱 포의 구조 및 작동 방식
암스트롱포는 기존 대포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와 작동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암스트롱포는 중앙 "A" 튜브(처음에는 연철을 사용하였으나, 1863년부터는 연강을 사용)를 사용하여 "조립식" 구조를 채택했다. 이 튜브는 포신을 잡고 여러 개의 연철 코일이 그 위에 축소되어 중앙 튜브를 압축 상태로 유지했으며, 포미 조각과 포환 링이 있었다.[1][2] 포신에는 길이 방향으로 38개의 홈이 파여 있었으며, 38구경당 1회 회전하는 "다중 홈" 강선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3. 1. 층층이 쌓은 포신 구조
암스트롱포는 기존의 대포처럼 한 번에 주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부품을 조립하여 만들었다. 포신은 'A 튜브'라고 불리는 중심 강부(처음에는 연철로 만들었으나, 1863년부터는 중저탄소강을 사용)에 여러 겹의 연철 코일을 감아 만든 층층 구조였다. 이 코일들의 압력 덕분에 포신의 강도가 높아졌다.[1][2] 포미 밸브와 포이(砲耳, 포를 포가에 연결하는 돌기)도 별도의 부품이었다. 포신 안에는 38구경마다 한 번 회전하는 강선이 파여 있었다.주철 포탄은 미니에 탄환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얇은 납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이 납 코팅은 포탄이 포신 구경보다 약간 더 크게 만들어졌고, 발사 시 강선과 맞물려 포탄에 회전을 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스웨덴의 마틴 폰 바렌도르프와 조반니 카발리가 개발한 것이다. 이 회전과 밀착으로 인한 장약여유 제거는 기존의 활강식 전장포보다 더 적은 화약으로 더 긴 사거리와 정확도를 가능하게 했다.
각 화약 카트리지 위에는 두 개의 주석판 사이에 우지와 아마인유로 만든 "윤활제"가 있었고, 그 뒤에는 밀랍으로 코팅된 펠트 솜과 밀보드가 있었다. 이 윤활제는 포탄이 포신을 따라 내려갈 때 주석판 사이에서 짜여 나와 솜 뒤에 남은 납 찌꺼기를 제거하여 다음 발사를 위해 포신을 깨끗하게 했다.[3]
암스트롱포의 또 다른 혁신적인 특징은 "그립"이라고 부른 압착 포신 구조였다. 포구 끝의 6인치 포신은 직경이 약간 작게 만들어져 포탄이 포신을 떠나기 전에 중심을 잡고, 동시에 납 코팅을 약간 압착하여 직경을 줄이고 탄도 특성을 향상시켰다.
3. 2. 가압식 폐쇄 장치
암스트롱포는 포신을 한 번에 주조하지 않고, 여러 부품을 조립하여 만들었다. 포신은 'A 튜브'라는 내강부에 연철 코일을 끼워 넣어 강도를 높였다. 초기에는 연철을 사용했지만, 1863년부터는 중저탄소강을 사용했다.[1][2] 포미(뒤쪽) 밸브와 포이(귀)도 별도의 부품이었다.
암스트롱포의 가압식 폐쇄 장치는 수직으로 움직이는 통풍구 조각(vent piece)을 사용했는데, 앞면에 원추형 구리 링 플러그가 있어 발사 챔버를 밀봉했다. 이 조각과 플러그를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포미 나사를 사용해 조이고 밀봉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구조적으로 약하고 다루기 어려워, 이후 나사식 폐쇄 장치로 대체되었다.
장전과 발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졌다.
1. 포미 나사를 돌려 풀었다.
2. 통풍구 조각을 들어 올렸다.
3. 포탄을 속이 빈 포미 나사를 통해 삽입하여 포신에 밀어 넣었다.
4. 화약 카트리지를 포미 나사를 통해 챔버에 삽입했다.
5. 프라이머 튜브를 통풍구 조각에 삽입했다 (40파운드 및 110파운드의 경우에만 필요).
6. 통풍구 조각을 내렸다.
7. 포미 나사를 조였다.
8. 끈이 부착된 마찰 튜브를 통풍구 조각 상단의 구멍에 삽입했다.
9. 포수는 끈을 당겨 통풍 튜브의 화약 뇌관에 불을 붙였고, 섬광은 통풍구 조각의 통풍구를 통과하여, 프라이머가 있는 경우 보조를 받아 화약실로 들어가 화약 장약에 불을 붙였다.
3. 3. 포탄 및 장약
암스트롱포의 포탄은 미니에 탄환과 유사한 모양의 주철 포탄으로, 얇은 납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이 납 코팅은 포신의 구경보다 약간 더 크게 만들어졌으며, 포의 강선 홈과 맞물려 포탄에 회전을 부여했다. 이러한 회전 방식은 스웨덴의 마틴 폰 바렌도르프와 조반니 카발리가 개발한 시스템을 따른 것이다.[3] 회전과 밀착은 장약여유를 없애, 기존 활강식 전장포보다 적은 화약으로도 더 긴 사거리와 정확도를 확보했다.각 화약 카트리지 위에는 우지와 아마인유로 구성된 "윤활제"가 두 개의 주석판 사이에 위치했다. 이 윤활제는 밀랍으로 코팅된 펠트 솜과 밀보드가 뒤를 받치고 있었다. 발사 시 윤활제가 포탄을 따라 포신 아래로 내려가면서 주석판 사이에서 짜여져 솜 뒤로 포탄 코팅에 남은 납 찌꺼기를 제거하여, 다음 발사를 위해 포신을 깨끗하게 유지했다.[3]
3. 4. 장전 및 발사 절차
암스트롱포의 장전 및 발사 절차는 다음과 같다.[1][2][3]1. 나선형 꼬리 마개(포미 나사)를 돌려서 푼다.
2. 벤트 피스(Vent-Piece, 수직 슬라이딩 블록)를 들어 올린다.
3. 포탄을 선식 꼬리 마개 중앙부의 구멍(속이 빈 포미 나사)을 통해 포신 내에 삽입하여 밀어넣는다.
4. 화약 카트리지(약낭)를 선식 꼬리 마개 중앙부의 구멍을 통해 약실에 밀어넣는다.
5. 뇌관 튜브를 벤트 피스에 장착한다. (40파운드와 110파운드 포의 경우에만)
6. 벤트 피스를 낮춘다.
7. 나선형 꼬리 마개를 매어 달아 닫아준다.
8. 벤트 피스 상단 점화 입(vent)에 드래그라인(끈)이 붙은 마찰 튜브를 삽입한다.
9. 포수가 밧줄을 당기면, 점화 구강 화약이 발화하고 이것이 장약을 폭발시켜 포탄이 발사된다.
각 화약 카트리지 위에는 두 개의 주석판 사이에 우지와 아마인유로 구성된 "윤활제"가 있었으며, 밀랍으로 코팅된 펠트 솜과 마지막으로 밀보드가 뒷받침했다. 윤활제는 포탄을 따라 포신 아래로 내려갔고, 윤활제는 주석판 사이에서 짜여져 솜 뒤로 포탄 코팅에서 남은 납 침전물을 제거하여 다음 발사를 위해 포신을 깨끗하게 했다.
4. 암스트롱 포의 실전 투입과 문제점
1858년 영국군의 제식포로 채용된 암스트롱포는 초기에는 큰 기대를 받았으나, 실전 투입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사쓰에이 전쟁에서 21문의 암스트롱포가 총 365발을 발사했으나, 28문이 발사 불능 상태에 빠졌고, 주력함 유리아라스에 탑재된 1문에서는 폭발 사고까지 발생했다. 이는 장전 시 포통 뒤쪽의 팽창 계수가 큰 화약이 가스 압력을 받으면서, 당시 미숙한 생산 기술로 제작된 철제 꼬리 마개가 쉽게 파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암스트롱포는 빠르게 신뢰성을 잃었고, 영국 내 주문 취소 및 생산 중단으로 이어져 과도기적 무기로 사라져 갔다. 폐기된 암스트롱포는 수출 금지가 해제되어 남북 전쟁 중인 미국에 수출되었으며, 이후 에도 막부 말기 일본에 매각되어 제2차 조슈 정벌과 보신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에도 막부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를 통해 35문을 주문했지만, 글러버가 인도를 거절하여 막부의 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군은 암스트롱포를 사용하여 청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통역관 로버트 스윈호는 "죽은 중국인들이 총 주변에 널려 있었고, 몇몇은 끔찍하게 찢겨져 있었다"라고 기록하며 암스트롱포의 파괴력을 묘사했다.
1863년 뉴질랜드에서 벌어진 영국군과 마오리족 간의 와이카토 분쟁에서도 암스트롱포가 사용되었다. 랑기리리 전투에서 사용된 12파운드포는 현재 테 아와무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868년 우에노 전투에서는 일본 제국 정부를 지원하는 군대가 암스트롱포를 사용했다.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차라시아브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인도군을 상대로 암스트롱포가 사용되었으며, 6문이 노획되기도 했다.
4. 1. 영국군의 채용과 초기 성과
1854년 윌리엄 조지 암스트롱은 영국 육군 장관 5대 뉴캐슬 공작 헨리 펠햄 클린턴에게 3파운드 강선 후장포 개발을 제안받았다. 이후 포강을 넓혀 5파운드 포로 만들었는데, 사정거리와 정확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암스트롱은 3년 동안 개발을 계속하여 더 큰 구경의 포에도 후장식을 적용했다.1858년 암스트롱의 후장포가 영국군에 채용되었지만, 처음에는 '야전 특수부대용'으로 한정되었다. 초기에는 6파운드 (2.5인치 = 64mm) 산포와 경야포, 9파운드 (3인치=76mm) 기마포병포, 그리고 12파운드 (3인치=76mm) 야포만 생산되었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방식이 대형 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상부의 명령으로 20파운드 (3.75인치 = 95mm) 야포와 함재포, 40파운드 (4.75인치 = 121mm) 함재 · 요새포, 110파운드 (7인치 = 180mm) 화포를 생산했다. 영국 해군은 이 세 종류의 포를 모두 채용했으며, 뉴질랜드에서도 40파운드와 110파운드 포를 사용했다.
영국군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암스트롱포를 널리 사용했는데, 통역관 로버트 스윈호는 베이탕의 중국 요새 공격 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죽은 중국인들이 총 주변에 널려 있었고, 몇몇은 끔찍하게 찢겨져 있었다. 성벽은 타타르 포병들에게 거의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고, 암스트롱포가 그들에게 쏟아부은 파괴적인 화력에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는 놀라웠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들은 다리가 총에 묶여 있었던 경우가 한 번 이상 있었다.
암스트롱포, 주로 12파운드포는 1863년 뉴질랜드 와이카토 분쟁에서 영국군과 마오리족 간의 전투에 널리 사용되었다. 랑기리리 전투에서 사용된 보존 상태가 좋은 12파운드포가 테 아와무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포신은 포가(carriage)를 움직이지 않고도 좌우로 6도 회전할 수 있으며, 바퀴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폭 75mm의 강철 밴드가 부착되었다. 바퀴 지름은 1.7m, 궤도 폭은 1.8m, 포구에서의 포신 폭은 140mm이다. 영국군은 이 포의 정확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이니 능선 전투에서 포병이 능선을 공격하는 보병의 머리 위로 포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보병은 마오리 참호 앞쪽의 약간의 땅에 몸을 숨겼다가 포격이 멈추자 참호를 공격했다.
1868년 7월 4일, 암스트롱포는 우에노 전투에서 일본 제국 정부를 지원하는 군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차라시아브 전투에서 영국군과 인도군을 상대로 암스트롱포가 사용되었으며, 하워드 헨스만은 베이커 준장 지휘하의 영국-인도 연합 원정군에 의해 6문이 노획되었다고 기록했다.
4. 2. 사쓰에이 전쟁에서의 문제점
사쓰에이 전쟁에 참가한 21문의 암스트롱포 중 28문에서 발사 불능이 발생했고, 주력함 유리아라스에 탑재된 1문에서는 폭발 사고까지 일어났다. 총 365발이 발사되었다.[1][2]이는 장전 시 가동되는 포통 뒤쪽의 거대한 팽창 계수를 가진 화약이 가스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숙한 생산 기술로 인해 철제(강철이 아닌 단조) 꼬리 마개가 쉽게 파열되었다.[1][2] 이로 인해 암스트롱포는 빠르게 신뢰성을 잃었고, 영국에서 주문이 취소되고 생산이 중단되어 과도기적인 무기로 사라져 갔다.
1863년 사쓰에이 전쟁에서 암스트롱포의 빠른 발사 속도와 착발신관을 장착한 유탄의 파괴력이 높게 평가되었지만, 가압식 폐쇄기는 강도 면에서 문제가 있어[1] 자주 화문철이 파손되었으며, 특히 선회포로 사용되었던 110파운드포에서는 포가 강도 부족도 드러났다.[2]
4. 3. 제2차 아편 전쟁에서의 활약
영국군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암스트롱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통역관 로버트 스윈호는 베이탕의 중국 요새 공격 이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죽은 중국인들이 총 주변에 널려 있었고, 몇몇은 끔찍하게 찢겨져 있었다. 성벽은 타타르 포병들에게 거의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고, 암스트롱포가 그들에게 쏟아부은 파괴적인 화력에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는 놀라웠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들은 다리가 총에 묶여 있었던 경우가 한 번 이상 있었다.
이는 암스트롱포의 파괴력이 청나라 군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국군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암스트롱포는 1863년 뉴질랜드에서 벌어진 영국군과 마오리족 간의 와이카토 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특히 랑기리리 전투에서 사용된 12파운드포는 현재 테 아와무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포는 포신을 좌우로 6도 회전시킬 수 있으며, 나무 바퀴에 폭 75mm의 강철 밴드가 부착되어 있다. 바퀴 지름은 1.7m, 궤도 폭은 1.8m이며, 포구에서의 포신 폭은 140mm이다. 영국군은 이 포의 정확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이니 능선 전투에서 포병이 공격하는 보병의 머리 위로 포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1868년 우에노 전투에서는 일본 제국 정부를 지원하는 군대가 암스트롱포를 사용했다.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차라시아브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인도군을 상대로 암스트롱포가 사용되었으며, 6문이 노획되기도 했다.
1863년 사쓰에이 전쟁에서는 함포 모델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암스트롱포의 빠른 발사 속도와 착발신관을 장착한 유탄의 파괴력은 높게 평가되었지만, 가압식 폐쇄기에 강도 문제가 있어 자주 파손되었다. 특히 선회포로 사용되었던 110파운드포는 포가 강도 부족 문제도 드러났다.[1]
이러한 구조적 문제 외에도 대구경포에서는 조작이 어려웠고, 장갑 관통력과 조준 정확도도 전장식보다 떨어졌다.[2] 당시 장갑함의 등장으로 대함 병기의 관통력이 중요해지면서 포의 대구경화·대중량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2] 결국 영국 해군은 암스트롱포를 함선에서 제거하고 전장식 라이플포를 채택하게 되었다.[3]
4. 4. 뉴질랜드 전쟁에서의 사용
1863년 뉴질랜드에서 영국군과 마오리족 간의 와이카토 분쟁에서 암스트롱포, 주로 12파운드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랑기리리 전투에서 사용된 12파운드포가 테 아와무투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포신은 포가(carriage)를 움직이지 않고도 좌우로 6도 회전할 수 있다. 바퀴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폭 75mm의 강철 밴드가 있다. 바퀴 지름은 1.7m이고, 궤도 폭은 1.8m이다. 포구에서의 포신 폭은 140mm이다. 육군은 이 총의 정확성에 대한 자신감이 커서 하이니 능선 전투에서 포병은 능선을 공격하는 진격하는 보병의 머리 위로 발사했다. 보병은 마오리 참호 앞쪽의 약간의 땅에 몸을 숨겼다가 포격이 멈추자 참호를 공격했다.4. 5. 미국 남북 전쟁으로의 수출
사쓰에이 전쟁에서 드러난 문제점으로 인해 영국에서 신뢰성을 잃고 주문이 취소된 암스트롱포는 수출 금지가 해제되면서 남북 전쟁 중인 미국으로 수출되었다.[2] 조지프 휘트워스가 설계한 후장포와 함께 암스트롱포는 남북 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2]4. 6. 일본으로의 유입과 보신 전쟁
1858년 영국군의 제식포로 채택되었으나, 사쓰에이 전쟁에서 잦은 고장과 폭발 사고로 인해 신뢰성을 잃고 생산이 중단된 암스트롱포는 이후 수출 금지가 해제되어 남북 전쟁 중인 미국에 수출되었고,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에도 막부 말기의 일본에 매각되었다.에도 막부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를 통해 35문의 암스트롱포를 주문했지만, 글러버가 인도를 거절하여 막부의 손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트롱포는 제2차 조슈 정벌과 보신 전쟁에서 양측 모두에 의해 사용되었다.
1868년 7월 4일 우에노 전투에서는 일본 제국 정부를 지원하는 군대가 암스트롱포를 사용했다.
보신 전쟁은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으로, 낡은 막부 세력을 타파하고 근대적인 신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이었다. 암스트롱포는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격동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신 전쟁은 낡은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민중들의 열망이 반영된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암스트롱 포의 개량과 재기
1863년, 병기 선정 위원회는 전장식 포와 후장식 포의 장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위원회는 1865년 8월 최종 보고서에서 "다중 홈 강선 방식은 납으로 코팅된 발사체와 복잡한 후장식 장치를 갖추고 있어 전쟁의 일반적인 목적에 있어서 전장식 시스템보다 훨씬 열등하며, 초기 비용과 탄약 모두에서 더 비싸다"고 발표했다. 또한 전장식 포가 구조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장전과 사용이 쉽고 빠르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암스트롱 포는 주철 전장식 포와 달리 파열된 적이 없어 더 안전하고, 불발탄 제거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6]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비용 문제로 인해 영국은 1865년 후장식 병기에서 전장식 병기로 전환했다.[6] 1859년과 1869년에 실시된 시험에서 강선포가 50야드 거리에서도 4인치 두께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는데, 이는 해상 강국인 영국의 안보에 중요한 문제였다.
암스트롱은 후장식 포의 제한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정부는 이미 전장식 포로 복귀를 결정했다. 이후 암스트롱은 1866년 발사체 외부에 스터드를 부착하여 포신 홈과 정렬되는 새로운 강선 시스템을 제안했고, 이는 강선 전장식 포(RML)로 채택되었다.
1880년대에 암스트롱은 다시 후장포 제조로 돌아와 단속 나사 포미와 드 방게 방식을 사용했다. 1920년대까지 영국 해군, 영국 육군 등에 현대적인 "BL" 포를 공급했지만, 일반적으로 "암스트롱 포"라고 불리는 것은 이전 세대의 "RBL" 포이다.
5. 1. 폐쇄 장치 개선
암스트롱포는 포미(breech)를 닫기 위해 수직으로 움직이는 블록(통풍구 조각)을 사용했다. 이 블록 앞면에는 원추형 구리 링 플러그가 있어 발사 챔버를 밀봉했다.[1] 블록과 플러그를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포미 나사(screw breech)를 사용했는데, 포수는 이 나사를 돌려 발사 전에 포미를 조이고 밀봉했다.하지만 이러한 가압식 폐쇄 장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리 나사식 폐쇄 장치가 도입되었다. 이 방식은 프랑스의 보리외가 발명했지만, 암스트롱이 실용화하여 더욱 발전시켰다.[2]
1879년, 영국 해군은 다시 후장포를 장비하기 시작했다.[3] 이는 폐쇄 장치 설계 개선으로 후장포의 실용성이 향상되었고, 관통력 향상 요구와 장약(발사약)의 발전으로 포신이 길어져 전장포의 장전 작업이 비효율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3] 이후 암스트롱 사는 프로이센의 크루프 사와 함께 전 세계에 후장식 강선포를 수출했다.[4]
5. 2. 전장식 강선포로의 전환과 암스트롱의 노력
1863년, 병기 선정 위원회는 전장식 포와 후장식 포의 장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1864년, 위원회가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영국 정부는 암스트롱 후장식 포의 생산을 중단했다.[6] 위원회는 1865년 8월 최종 보고서에서 "다중 홈 강선 방식은 납으로 코팅된 발사체와 복잡한 후장식 장치를 갖추고 있어 전쟁의 일반적인 목적에 있어서 전장식 시스템보다 훨씬 열등하며, 초기 비용과 탄약 모두에서 더 비싸다"고 발표했다. 또한 전장식 포가 구조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장전과 사용이 쉽고 빠르다고 평가했다.[6]보고서는 암스트롱 포가 더 비싸지만 주철 전장식 포가 파열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반면, 암스트롱 포는 한 번도 파열된 적이 없어 더 안전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포병은 후장식 포에서 불발탄을 제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언급했다.[6]
이러한 후장식 포의 장점에 대한 추가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비용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하여 위원회는 "장점의 균형은 전장식 야포에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1865년 영국은 후장식 병기에서 전장식 병기로 전환했다.[6]
1859년 암스트롱 40파운더와 1869년 암스트롱 강선 100파운더로 실시된 시험에서 강선포가 50야드 거리에서도 4인치 두께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는 해상 강국으로서 영국의 안보가 잠재적 적대 세력이 개발하고 있는 새로운 장갑 보호 군함을 격파할 수 있는 해군 병기의 능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암스트롱은 후장식 포의 제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40파운더 및 64파운더 포에 대한 대체 수평 슬라이딩 웨지 버전을 개발했지만, 정부는 이미 전장식 포로 복귀를 결정했다.
전장식 포에 강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암스트롱은 1866년 발사체의 외부에 스터드를 부착하여 대포의 포신에 있는 홈과 정렬되는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 방식은 영국 정부에 의해 채택되어 첫 번째 세대의 강선 전장식 포(RML로 명명)가 되었고, 암스트롱의 견고한 조립 단강 철 구조 방식과 함께 사용되었다.
암스트롱은 야전에 투입된 자신의 포의 폐쇄기 개량을 추진하여, 나사식에 기반한 분리 나사식을 착안했다. 이 방식은 프랑스의 보리외가 발명했지만, 암스트롱이 실용화를 추진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1879년에는 영국 해군도 다시 후장포를 장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폐쇄기 설계 개량으로 후장포의 실용성이 향상되었고, 관통력 향상 요구와 장약(발사약)의 발전으로 장포신화가 진행되어 전장포로의 장전 작업 등이 비실용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암스트롱 사는 프로이센의 크루프 사와 함께 전 세계에 후장식 라이플포를 수출하게 되었다.
5. 3. 후장포로의 복귀와 암스트롱 포의 부활
1880년대에 암스트롱은 후장포 제조로 돌아와 자체적인 "암스트롱 컵"이 있는 단속 나사 포미를 사용했으며, 이후 1858년 설계에서 수동 작업 대신 총의 발사력을 사용하여 가스 밀봉("폐쇄")을 수행하는 드 방게 방식을 사용했다. 1920년대까지 영국 해군, 영국 육군, 세계 수출 시장에 현대적인 "BL" 포를 공급하는 주요 업체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암스트롱 포"라고 불리는 것은 그 이전 세대의 "RBL" 포이다.암스트롱은 야전에 투입된 폐쇄기의 개량을 추진하여, 나사식에 기반한 분리 나사식을 채용하였다. 이 방식 자체는 프랑스의 보리외가 발명했지만, 암스트롱이 실용화를 추진함으로써 더욱 발전했다.[1]
1879년 영국 해군은 다시 후장포를 장비하기 시작했다.[2] 이는 앞서 언급한 폐쇄기 설계 개량으로 후장포의 실용성이 향상된 것과 더불어, 관통력 향상 요구 및 장약(발사약)의 발전에 따른 장포신화로 인해 전장포 장전 작업 등이 비실용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2] 이후, 암스트롱 사는 프로이센의 크루프 사와 함께 전 세계에 후장식 라이플포를 수출하게 되었다.[3]
6. 암스트롱 포의 종류
암스트롱포는 다양한 구경과 용도로 제작되었다. 1858년에 채택된 암스트롱 시스템은 처음에는 "야전 특별 임무"용으로 사용되었고, 초기에는 6파운더(약 6.35cm|64 mm) 산악포 또는 경야포, 기병 포병용 9파운더(약 7.62cm|76 mm), 12파운더(약 7.62cm|76 mm) 야전포와 같은 소형 포병 무기만 생산했다.
종류 | 구경 |
---|---|
6파운드 경야포 | 약 6.35cm (64 mm) |
9파운드 기병포 | 약 7.62cm (76 mm) |
12파운드 야포 | 약 7.62cm (76 mm) |
20파운드 야포 | 약 9.53cm (95 mm) |
40파운드 공성포 | 약 12.06cm (121 mm) |
110파운드 해군포 | 약 17.78cm (180 mm) |
100톤 포 | 약 45.11cm (450 mm) |
이후 암스트롱은 자신의 시스템이 더 무거운 포에도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20파운더(3.75인치/95mm) 야전포 및 해군포, 40파운더(4.75인치/121mm) 공성포, 110파운더(7인치/180mm) 중포를 개발했다. 영국 해군은 이 모든 포를 사용했으며, 20파운더포를 제외한 모든 포가 뉴질랜드에서 실전에 투입되었다.[2]
6. 1. 6파운드 경야포
종류 | 구경 |
---|---|
6파운드 경야포 | 약 6.35cm (64 mm) |
1854년, 암스트롱은 육군 장관에게 시험용 강선 후장포 3파운더포를 제작할 것을 제안했다. 나중에 구경이 5파운더포로 증가되면서 이 설계는 사거리와 정확도 측면에서 성공적인 성능을 보였다. 그 후 3년 동안 그는 제작 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더 무거운 구경의 포에 적용했다.
암스트롱의 시스템은 1858년에 채택되었으며, 처음에는 "야전 특별 임무"용으로 사용되었고, 처음에는 더 작은 포병 무기, 6파운더포 (약 6.35cm/64mm) 산악 또는 경야전포, 기병 포병용 9파운더포 (약 7.62cm/76mm) 및 12파운더 (약 7.62cm/76mm) 야전포만 생산했다.
6. 2. 9파운드 기병포
Armstrong gun영어의 일종으로, 3인치 (76mm) 구경의 기병포이다. 1858년에 채택된 암스트롱 시스템은 처음에는 "야전 특별 임무"용으로 사용되었고, 그중 하나가 기병 포병용 9파운더포였다.종류 | 구경 |
---|---|
6파운드 경야포 | 2.5 인치 (64mm) |
9파운드 기병포 | 3 인치 (76mm) |
12파운드 야포 | 3 인치 (76mm) |
20파운드 야포 | 3.75 인치 (95mm) |
40파운드 공성포 | 3.75 인치 (95mm) |
110파운드 해군포 | 7 인치 (180mm) |
100톤포 | 17.76인치 (450mm) |
6. 3. 12파운드 야포
12파운드 야포는 3인치(76mm) 구경의 야포이다. 암스트롱의 시스템은 1858년에 채택되었으며, 처음에는 "야전 특별 임무"용으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더 작은 포병 무기인 6파운더포(2.5인치/64mm) 산악 또는 경야전포, 기병 포병용 9파운더포(3인치/76mm) 및 12파운더(3인치/76mm) 야전포만 생산했다.6. 4. 20파운드 야포
20파운드 야포는 3.75인치 (95mm) 구경의 야포이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시스템이 더 무거운 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고위 당국의 요청으로 20파운드(3.75인치/95mm) 야전 및 해군포를 개발했다. 영국 해군은 이 포를 사용했으며, 뉴질랜드에서 실전에 투입되었다.종류 | 구경 |
---|---|
6파운드 경야포 | 2.5 인치 (64 mm) |
9파운드 기병포 | 3 인치 (76 mm) |
12파운드 야포 | 3 인치 (76 mm) |
20파운드 야포 | 3.75 인치 (95 mm) |
40파운드 공성포 | 4.75 인치 (121 mm) |
110파운드 해군포 | 7 인치 (180 mm) |
100톤포 | 17.76인치 (450mm) |
6. 5. 40파운드 공성포
암스트롱의 시스템은 1858년에 채택되었으며, 고위 당국은 암스트롱에게 20파운더(3.75인치/95mm) 야전 및 해군포, 40파운더(4.75인치/121mm) 공성포 및 110파운더(7인치/180mm) 중포를 개발하도록 했다.[2] 영국 해군은 이 모든 포를 사용했으며, 20파운더포를 제외한 모든 포가 뉴질랜드에서 실전에 투입되었다.[2]6. 6. 110파운드 해군포
영국 해군은 20파운더(3.75인치/95mm) 야전 및 해군포, 40파운더 공성포와 함께 110파운더(7인치/180mm) 중포를 사용하였으며, 20파운더포를 제외한 모든 포가 뉴질랜드에서 실전에 투입되었다.[1]종류 | 구경 |
---|---|
110파운드 해군포 | 7인치 (180 mm) |
6. 7. 100톤 포
17.76인치(450mm) 구경의 대형 포이다.종류 | 구경 |
---|---|
6파운드 경야포 | 64mm |
9파운드 기병포 | 76mm |
12파운드 야포 | 76mm |
20파운드 야포 | 95mm |
40파운드 공성포 | 95mm |
110파운드 해군포 | 180mm |
100톤 포 | 450mm |
7. 암스트롱 포의 영향과 유산
암스트롱포는 19세기 중후반에 개발되어 군사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858년 윌리엄 암스트롱이 개발한 암스트롱포는 강선 후장포 방식으로, 기존의 활강식 전장식 포보다 더 적은 화약량으로 더 큰 사거리와 정확도를 달성할 수 있었다.[1][2] 포신에 여러 개의 홈을 내어 포탄이 회전하도록 하는 방식은 마틴 폰 바렌도르프와 조반니 카발리가 개발한 시스템을 활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1863년 영국의 병기 선정 위원회는 암스트롱포의 복잡한 구조와 높은 비용을 문제 삼아 전장식 포로 회귀할 것을 결정했다.[6] 1859년과 1869년의 시험에서 강선포가 근거리에서 장갑을 관통하지 못한다는 점도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암스트롱은 전장식 포에 강선을 적용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1866년 영국 정부에 채택되었다.
암스트롱포는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군이 사용하여 중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4] 1863년 뉴질랜드 와이카토 분쟁에서도 영국군이 사용하였다.[5] 1868년 우에노 전투에서는 일본 제국 정부를 지원하는 군대가 사용했으며,[6]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영국군과 인도군을 상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7. 1. 군사 기술 발전에 미친 영향
1854년 윌리엄 암스트롱은 강선 후장포 개발을 제안받아 포를 개발하였다. 3년간의 개발을 거쳐 1858년 암스트롱의 후장포가 영국군에 채용되었다. 처음에는 야전 특수부대용으로 한정되었고, 소형 포 위주로 생산되었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방식이 대형 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대형 포도 생산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이들 포를 채용하였으며, 뉴질랜드에서도 사용되었다.[1][2]암스트롱포는 "조립식" 구조를 사용하여 중앙 튜브를 압축 상태로 유지하고, 포신에 여러 개의 홈을 내어 포탄이 회전하도록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마틴 폰 바렌도르프와 조반니 카발리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이 회전은 밀착으로 인한 장약여유 제거와 함께, 기존의 활강식 전장식 포보다 더 적은 화약량으로 더 큰 사거리와 정확도를 달성할 수 있게 했다.
암스트롱 후장 장전포는 수직 슬라이딩 블록을 사용하여 포미를 닫았고, 포미 나사를 돌려 발사 전에 포미를 조이고 밀봉했다.
1863년, 병기 선정 위원회는 전장식과 후장식 포의 장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조사 결과, 위원회는 다중 홈 강선 방식은 납으로 코팅된 발사체와 복잡한 후장식 장치를 갖추고 있어 전쟁의 일반적인 목적에 있어서 전장식 시스템보다 훨씬 열등하며, 초기 비용과 탄약 모두에서 더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장점의 균형은 전장식 야포에 유리하다"고 발표했고, 1865년 영국은 후장식 병기에서 전장식 병기로 전환했다.[6]
1859년과 1869년의 시험에서 강선포는 근거리에서도 장갑을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는 해상 강국으로서 영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했다. 암스트롱은 후장식 포의 제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부는 이미 전장식 포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전장식 포에 강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암스트롱은 1866년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했고, 이는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7. 2. 세계 각지 분쟁에서의 역할
암스트롱포는 19세기 후반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군은 암스트롱포를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통역관 로버트 스윈호는 영국군이 베이탕의 중국 요새를 공격한 후, 암스트롱포가 중국군에게 "끔찍하게 찢겨진"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했다.[4]
1863년 뉴질랜드 와이카토 분쟁에서도 암스트롱포, 주로 12파운더포가 영국군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랑기리리 전투에서 사용된 12파운더포가 테 아와무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포는 포신을 좌우로 6도 회전시킬 수 있으며, 바퀴 지름은 1.7m, 포구에서의 포신 폭은 140mm이다. 영국군은 이 포의 정확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이니 능선 전투에서 보병의 머리 위로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5]
1868년 7월 4일에는 우에노 전투에서 일본 제국 정부를 지원하는 군대가 암스트롱포를 사용했다.[6]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차라시아브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인도군을 상대로 암스트롱포가 사용되었으며, 6문이 노획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Treatise on Ordnance and Armour
1865
[2]
웹사이트
Armstrong Rifled Breech Loading (RBL) 6-Pounder
http://riv.co.nz/rnz[...]
[3]
서적
Treatise on Ammunition
1877
[4]
서적
Narrative of the North China Campaign of 1860
Smith, Elder & Co
1861
[5]
서적
Afghan War of 1979-80
W.H. Allen & Co.
1882
[6]
웹사이트
The Gun - Rifled Ordnance: Whitworth
https://web.archive.[...]
200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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