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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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드레 지드는 186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 평론가이자 일기 작가이다. 그는 개인주의와 자유를 옹호하며, 기독교적 이원론, 동성애, 식민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작품에 담았다. 1891년 첫 소설을 발표한 후, 동성애를 자각하고 북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성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는 1926년 발표한 소설 『가짜화폐 제조자』를 대표작으로 꼽았으며, 아프리카 식민지 여행을 통해 식민주의의 폐해를 고발했다. 1930년대에는 공산주의에 동조했으나 소련의 현실을 비판하며 반스탈린주의적 입장을 보였고, 194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드의 사상은 한국의 지식인과 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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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앙드레 폴 기욤 지드 |
출생일 | 1869년 11월 22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
사망일 | 1951년 2월 19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안장 장소 | 퀴베르빌 묘지 |
직업 |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 |
로마자 표기 | André Paul Guillaume Gide |
서명 | André Gide signature.svg |
수상 | |
수상 내역 | 노벨 문학상 (1947년) |
작품 활동 | |
주요 작품 | 배덕자 좁은 문 《바티칸의 지하창고》 (때로는 영어 제목으로 《라프카디오의 모험》으로 출판됨) 전원 교향악 위조지폐범 지상의 양식 |
결혼과 가족 | |
자녀 | 카트린 지드 |
교육 | |
교육 기관 | 리세 앙리 4세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헨리 필딩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프리드리히 니체 타고르 오스카 와일드 |
영향을 준 인물 | 자크 리비에르 브라이언 오놀런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미시마 유키오 |
기타 |
2. 생애와 작품
앙드레 지드는 1869년 11월 22일 파리시에서 중산층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2][3][4] 아버지 장 폴 기욤 지드는 파리 대학교 법학 교수였으며, 어머니 쥘리엣 마리아 롱도는 독실한 청교도였다. 지드의 조상인 기도(Guido) 가문은 16세기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고 가톨릭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받은 후 프랑스와 다른 서유럽 및 북유럽 국가들로 이주했다.[2][3][4] 지드는 노르망디에서 고립된 환경에서 성장했다.
1891년, 21세에 첫 소설 『앙드레 발터의 수첩』(프랑스어: Les Cahiers d'André Walter)을 출판했다.[5] 1893년과 1894년에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자각했다.[5]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와 친구가 되었고, 1895년 두 사람은 알제에서 만났다. 와일드는 자신이 지드에게 동성애를 소개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드는 스스로 동성애를 발견했었다.[6][7]
지드는 파리 6구 메디시스 거리(Rue de Médici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 폴 기욤 지드는 남프랑스 위제스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집안 출신으로 파리 대학교 법학부 교수였다. 어머니 쥘리엣은 북프랑스 루앙 출신의 부유한 직물 상인 롱도 씨의 딸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자주 위제스, 루앙, 라 로크의 별장 등을 방문했다. 6세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평생의 취미로 삼았다. 8세 때 알자스 학교에 입학했으나, 자위 습관으로 일시 정학을 당하고, 병약하여 친척 집 등에서 요양했으며, 10세 때 알자스 학교에 복학했다. 11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 이모, 가정교사에게서 양육받았다. 또한 알자스 학교를 퇴학하고 여러 곳의 요양지를 전전한 후 파리로 돌아왔다. 14세 때 알자스 학교에 재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퇴학했다. 17세 때 알자스 학교의 수사학 수업에 들어가 피에르 루이스와 문학적 우정을 맺었다.
1888년 앙리 4세 고등학교의 철학 수업으로 전학하여 레옹 블룸과 만나 『라 르뷔 봉슈』지 편집을 도왔다. 바칼로레아에 합격했지만,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1890년 루이스를 통해 폴 발레리와 만나 어머니 쪽 사촌인 마들렌 에마뉘엘을 주제로 한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를 집필하여 다음 해 자비 출판했다. 곧 스테판 말라르메의 화요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는 말라르메에게 극찬을 받았고, 그 후에도 상징주의의 영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
=== 북아프리카 여행과 성적 정체성 확립 ===
법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난 뒤 어머니의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 교육 속에서 자랐던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교육이 남긴 것은 자기혐오와 죄의식뿐이었다고 자서전 앞머리에서 씁쓸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죄의식을 심화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청년이 되면서 발견하게 된 동성애 성향이었다. 그러나 지드는 이것을 반전의 기회로 만든다. 자신의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을 오히려 긴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온전한 행복을 향유한다면 그것이 죄악일 수 있는가? 지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희열을 향유하며 삶을 충만하게 살도록 허락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부과한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다.
1893년에서 1894년까지 지드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파리에서 오스카 와일드와 친구가 되었고 1895년 그 둘은 알제에서 만났다. 와일드는 지드가 동성애자라는 느낌을 받아 그에게 말해주었는데 사실 지드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다. 1892년 프랑스 북부의 낭시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결핵으로 곧 제대했다. 1893년, 절친한 친구 폴 알베르 로랑스와 함께 북아프리카(알제리, 튀니지)를 여행했다. 이후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하여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을 만나고, 매춘부와의 교류 및 동성애를 경험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기독교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문학가로서의 전환점이 되었다.
=== 결혼과 문학 활동 ===
1895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드는 사촌인 마들렌 롱도(Madeleine Rondeaux)[8]와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성적인 관계 없이 유지되었다. 같은 해 『늪』을 발표하여 상징주의와의 실질적인 결별을 선언했다. 1897년에는 『지상의 양식』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20년 후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주목받으며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1902년의 『부도덕한 사람』에서는 삶의 가치와 쾌락에 눈뜨고 기존의 도덕에서 등을 돌리는 한 남자의 비극을 그린다.
1908년 지드는 문학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The New French Review) 창간에 기여했다.[10] 이듬해 재창간하여 과도한 신비주의에 빠진 여주인공의 사랑과 비극을 그린 『좁은 문』을 연재하여 일반 독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1912년 마르셀 프루스트로부터 『스완의 집』의 NRF 출판을 의뢰받았지만 거절했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본 후 프루스트에게 사과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이후는 NRF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1914년의 『바티칸의 지하실』에서는 교황과 프리메이슨을 풍자하는 스토리 설정 아래, 동기 없는 살인("무보상의 행위")을 저지르는 라프카디오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지드는 『부도덕한 사람』, 『좁은 문』, 『시골 교향곡』(1919년) 등의 1인칭 화자에 의한 단선적인 줄거리의 작품을 "레시(이야기)", 『바티칸의 지하실』, 『늪』,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1899), 『바티칸의 지하실』 등의 비판적이고 해학적인 작품을 "소시(소극, 희극)"로 분류하여 "로망(소설)"과 구별하고 있다.
=== 1920년대: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 ===
그의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는 일체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개인적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의 궤적이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엄격하고 경직된 윤리규율, 그 부당함에 침묵하는 소시민 사회의 위선과 순응, 창조성을 억압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대표자’라고 불렀던 지드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진정성의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검토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1926년, 『가짜화폐 제조자』(『가짜화폐 사용자』라고도 번역됨)를 발표한다.[48] 이것은 지드가 유일하게 "로망"으로 인정한 대표작이며, 도스토옙스키와 영국 소설 (필딩, 디킨스, 스티븐슨 등)에서 배운 기법을 혼합한 작품이다.[48] 작품 속에 에두아르라는 소설가가 등장하여, 작품과 같은 이름의 소설("가짜화폐 제조")을 쓴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어, 이른바 "소설의 소설"이 되어 있다.[48] 이러한 메타적 기법("문중문")은 후의 누보 로망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48]
작품에는, 생애의 아내였던 마들렌의 영향이 강하며, 『죄인』, 『좁은 문』 등에 그녀의 그림자를 가진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48] 그러나 마들렌을 사랑하면서도 성관계를 갖지 않고(이른바 "백색 결혼"), 마르크 알레그레와의 동성애 관계로 인해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다고 한다.[48] 1917년경, 가정교사였던 엘리 알레그레 목사의 아들인 16세의 마르크와 관계를 갖게 된다.[48] 이 알레그레와의 관계는, 자전적인 특징이 있는 『일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48] 또한, 그는 엘리자베트 뱅 리셀베르그(테오 판 레이셀베르흐의 딸)와의 사이에 1923년, 딸 카트린을 두었다.[48] 지드는 엘리자베트에게 "나는 단 한 명의 여성만을 진정으로 사랑할 것이고, 젊은 남자에게만 진정한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이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고, 나 자신에게 아이가 없는 것도 견딜 수 없다."라고 편지를 보냈다.[48] 또한, 『코리돈』(1924년)에서는 남색을 옹호하고, 이어지는 자전적인 『한 알의 밀알도 죽지 않고서는』(1926년)에서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커밍 아웃했다.[48]
=== 아프리카 여행과 반식민주의 ===
앙드레 지드는 1926년 7월부터 1927년 5월까지 연인 마르크 알레그레와 함께 프랑스 적도 아프리카 식민지를 여행했다.[10] 이들은 중앙콩고(현 콩고 공화국), 우방기샤리(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를 거쳐 카메룬으로 이동했다.[10] 지드는 이 여정을 기록하여 『콩고 여행』(''Voyage au Congo'', 1927년)과 『차드에서 돌아와서』(''Retour du Tchad'', 1928년)를 출판했다.[10]
이 책들에서 지드는 프랑스 기업들의 행태와 "대규모 양허" 제도를 비판하며 개혁을 촉구했다.[10]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일부를 프랑스 기업에 양도하여 천연자원 개발을 허용했는데, 지드는 원주민 노동자들이 강제로 숲에서 고무를 채취해야 했으며, 이러한 착취를 노예 제도에 비유했다.[10] 이 책은 프랑스 내 반식민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식민주의의 영향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기여했다.[18] 그의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는 일체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개인적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드는 인간을 억압하는 윤리규율, 소시민 사회의 위선, 창조성을 억압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그리고 식민주의 등 당대 여러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 1930년대: 공산주의 동조와 반스탈린주의 ===
1930년대 앙드레 지드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며 소련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27] 그는 소련의 정치적 탄압을 인지하면서도, 빅토르 세르주의 석방을 주장하는 등 인도주의적 행보를 보였다.[19][24]
1936년, 막심 고리키의 장례식 참석 및 소련 작가 연맹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한 지드는, 그곳의 문화 검열과 개인 숭배에 환멸을 느꼈다.[24] 귀국 후, 그는 『소련으로부터의 귀환』(Retour de L'U.R.S.S., 1936)을 통해 소련의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했다.[20] 그는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친구들과 결별했으며, 친소련 독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그는 책에서 문화의 쇠퇴, 개성 말살, 반대 의견 억압 등을 지적했다.[24]
지드는 스탈린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자제했지만, "각 가정에... 스탈린의 같은 초상화, 그리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묘사를 통해 개인 숭배 현상을 비판했다.[21]
일리야 에렌부르크 등은 지드에게 출판 연기를 요청했지만, 지드는 이를 거부하고 책을 출간했다.[22] 이후 그는 소련 언론과 "소련의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22][24]
1937년, 지드는 『소련에 대한 재고』를 출판하여 비판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레프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읽고, 빅토르 세르주를 만나면서 소련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24] 『소련에 대한 재고』에서 지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스탈린의 독재로 변질되었고, 특권 관료가 잉여 노동으로 이익을 얻는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되었다고 비판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드는 전통과 규율을 강조하며 공산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거부했다.[27] 1946년작 『테세』에서 그는 과거와의 연결을 강조하며 개인주의를 옹호했다.[27]
1949년, 그는 실패한 신에 기고하여 자신의 반공주의적 신념을 재확인했다.[27] 1930년대에 들어서는 소비에트(Совиет)에 대한 공감을 표하기 시작하며 공산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1936년, 소비에트 연방 작가 동맹(Союз писателей СССР)의 초청을 받아 중병에 걸린 막심 고리키(Максим Горький)를 문병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지드는 약 두 달간의 체류 후 『소비에트 여행기(Retour de l'U.R.S.S.)』(가제)에서 소련의 실태를 밝히고 요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여 좌파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지드는 이듬해 『소비에트 여행기 수정』(1937년)에서 전작에 대한 비판에 반박했다. 『소비에트 여행기』는 1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소련 비판 서적 중 최대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후 반나치(наци), 반파시즘(фашизм)을 관철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반전·반파시즘 세계 청년 회의 명예 의장을 역임했다.
=== 만년 ===
1938년 아내 마들렌이 사망하자 앙드레 지드는 깊은 고독에 빠져 『이제 그녀는 너 안에 있다』를 썼다. 1939년에는 권위 있는 『플레이아드 문고』(Bibliothèque de la Pléiade)에 작품이 실린 최초의 생존 작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을 피해 튀니스로 이주하여 1942년 1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프랑스, 영국, 미국 연합군이 투니스를 탈환할 때까지 투니스에 거주했고, 그 후 알제로 이동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물렀다.[30] 1945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1945년 괴테상을 수상하였다. 1947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인간의 문제와 상황을 진실에 대한 두려움 없는 사랑과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력으로 제시한 포괄적이고 예술적으로 중요한 저술"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31] 그는 말년의 많은 시간을 자신의 저널 출판에 바쳤다.[32]
앙드레 지드는 1951년 2월 19일 파리 자택에서 폐울혈로 사망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52년 그의 작품을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렸다.[33]
2. 1. 초기 생애
앙드레 지드는 1869년 11월 22일 파리시에서 중산층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2][3][4] 아버지 장 폴 기욤 지드는 파리 대학교 법학 교수였으며, 어머니 쥘리엣 마리아 롱도는 독실한 청교도였다. 지드의 조상인 기도(Guido) 가문은 16세기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고 가톨릭 이탈리아에서 박해를 받은 후 프랑스와 다른 서유럽 및 북유럽 국가들로 이주했다.[2][3][4] 지드는 노르망디에서 고립된 환경에서 성장했다.1891년, 21세에 첫 소설 『앙드레 발터의 수첩』(프랑스어: Les Cahiers d'André Walter)을 출판했다.[5] 1893년과 1894년에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자각했다.[5]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와 친구가 되었고, 1895년 두 사람은 알제에서 만났다. 와일드는 자신이 지드에게 동성애를 소개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드는 스스로 동성애를 발견했었다.[6][7]
지드는 파리 6구 메디시스 거리(Rue de Médici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 폴 기욤 지드는 남프랑스 위제스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집안 출신으로 파리 대학교 법학부 교수였다. 어머니 쥘리엣은 북프랑스 루앙 출신의 부유한 직물 상인 롱도 씨의 딸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자주 위제스, 루앙, 라 로크의 별장 등을 방문했다. 6세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평생의 취미로 삼았다. 8세 때 알자스 학교에 입학했으나, 자위 습관으로 일시 정학을 당하고, 병약하여 친척 집 등에서 요양했으며, 10세 때 알자스 학교에 복학했다. 11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 이모, 가정교사에게서 양육받았다. 또한 알자스 학교를 퇴학하고 여러 곳의 요양지를 전전한 후 파리로 돌아왔다. 14세 때 알자스 학교에 재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퇴학했다. 17세 때 알자스 학교의 수사학 수업에 들어가 피에르 루이스와 문학적 우정을 맺었다.
1888년 앙리 4세 고등학교의 철학 수업으로 전학하여 레옹 블룸과 만나 『라 르뷔 봉슈』지 편집을 도왔다. 바칼로레아에 합격했지만,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1890년 루이스를 통해 폴 발레리와 만나 어머니 쪽 사촌인 마들렌 에마뉘엘을 주제로 한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를 집필하여 다음 해 자비 출판했다. 곧 스테판 말라르메의 화요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는 말라르메에게 극찬을 받았고, 그 후에도 상징주의의 영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
2. 2. 북아프리카 여행과 성적 정체성 확립
법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난 뒤 어머니의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 교육 속에서 자랐던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교육이 남긴 것은 자기혐오와 죄의식뿐이었다고 자서전 앞머리에서 씁쓸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죄의식을 심화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청년이 되면서 발견하게 된 동성애 성향이었다. 그러나 지드는 이것을 반전의 기회로 만든다. 자신의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을 오히려 긴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온전한 행복을 향유한다면 그것이 죄악일 수 있는가? 지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희열을 향유하며 삶을 충만하게 살도록 허락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부과한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다.1893년에서 1894년까지 지드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파리에서 오스카 와일드와 친구가 되었고 1895년 그 둘은 알제에서 만났다. 와일드는 지드가 동성애자라는 느낌을 받아 그에게 말해주었는데 사실 지드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다. 1892년 프랑스 북부의 낭시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결핵으로 곧 제대했다. 1893년, 절친한 친구 폴 알베르 로랑스와 함께 북아프리카(알제리, 튀니지)를 여행했다. 이후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하여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을 만나고, 매춘부와의 교류 및 동성애를 경험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기독교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문학가로서의 전환점이 되었다.
2. 3. 결혼과 문학 활동
1895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드는 사촌인 마들렌 롱도(Madeleine Rondeaux)[8]와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성적인 관계 없이 유지되었다. 같은 해 『늪』을 발표하여 상징주의와의 실질적인 결별을 선언했다. 1897년에는 『지상의 양식』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20년 후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주목받으며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1902년의 『부도덕한 사람』에서는 삶의 가치와 쾌락에 눈뜨고 기존의 도덕에서 등을 돌리는 한 남자의 비극을 그린다.1908년 지드는 문학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The New French Review) 창간에 기여했다.[10] 이듬해 재창간하여 과도한 신비주의에 빠진 여주인공의 사랑과 비극을 그린 『좁은 문』을 연재하여 일반 독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1912년 마르셀 프루스트로부터 『스완의 집』의 NRF 출판을 의뢰받았지만 거절했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본 후 프루스트에게 사과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이후는 NRF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1914년의 『바티칸의 지하실』에서는 교황과 프리메이슨을 풍자하는 스토리 설정 아래, 동기 없는 살인("무보상의 행위")을 저지르는 라프카디오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지드는 『부도덕한 사람』, 『좁은 문』, 『시골 교향곡』(1919년) 등의 1인칭 화자에 의한 단선적인 줄거리의 작품을 "레시(이야기)", 『바티칸의 지하실』, 『늪』,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1899), 『바티칸의 지하실』 등의 비판적이고 해학적인 작품을 "소시(소극, 희극)"로 분류하여 "로망(소설)"과 구별하고 있다.
2. 4. 1920년대: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
그의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는 일체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개인적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의 궤적이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엄격하고 경직된 윤리규율, 그 부당함에 침묵하는 소시민 사회의 위선과 순응, 창조성을 억압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대표자’라고 불렀던 지드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진정성의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검토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1926년, 『가짜화폐 제조자』(『가짜화폐 사용자』라고도 번역됨)를 발표한다.[48] 이것은 지드가 유일하게 "로망"으로 인정한 대표작이며, 도스토옙스키와 영국 소설 (필딩, 디킨스, 스티븐슨 등)에서 배운 기법을 혼합한 작품이다.[48] 작품 속에 에두아르라는 소설가가 등장하여, 작품과 같은 이름의 소설("가짜화폐 제조")을 쓴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어, 이른바 "소설의 소설"이 되어 있다.[48] 이러한 메타적 기법("문중문")은 후의 누보 로망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48]
작품에는, 생애의 아내였던 마들렌의 영향이 강하며, 『죄인』, 『좁은 문』 등에 그녀의 그림자를 가진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48] 그러나 마들렌을 사랑하면서도 성관계를 갖지 않고(이른바 "백색 결혼"), 마르크 알레그레와의 동성애 관계로 인해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다고 한다.[48] 1917년경, 가정교사였던 엘리 알레그레 목사의 아들인 16세의 마르크와 관계를 갖게 된다.[48] 이 알레그레와의 관계는, 자전적인 특징이 있는 『일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48] 또한, 그는 엘리자베트 뱅 리셀베르그(테오 판 레이셀베르흐의 딸)와의 사이에 1923년, 딸 카트린을 두었다.[48] 지드는 엘리자베트에게 "나는 단 한 명의 여성만을 진정으로 사랑할 것이고, 젊은 남자에게만 진정한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이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고, 나 자신에게 아이가 없는 것도 견딜 수 없다."라고 편지를 보냈다.[48] 또한, 『코리돈』(1924년)에서는 남색을 옹호하고, 이어지는 자전적인 『한 알의 밀알도 죽지 않고서는』(1926년)에서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커밍 아웃했다.[48]
2. 5. 아프리카 여행과 반식민주의
앙드레 지드는 1926년 7월부터 1927년 5월까지 연인 마르크 알레그레와 함께 프랑스 적도 아프리카 식민지를 여행했다.[10] 이들은 중앙콩고(현 콩고 공화국), 우방기샤리(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를 거쳐 카메룬으로 이동했다.[10] 지드는 이 여정을 기록하여 『콩고 여행』(''Voyage au Congo'', 1927년)과 『차드에서 돌아와서』(''Retour du Tchad'', 1928년)를 출판했다.[10]이 책들에서 지드는 프랑스 기업들의 행태와 "대규모 양허" 제도를 비판하며 개혁을 촉구했다.[10]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일부를 프랑스 기업에 양도하여 천연자원 개발을 허용했는데, 지드는 원주민 노동자들이 강제로 숲에서 고무를 채취해야 했으며, 이러한 착취를 노예 제도에 비유했다.[10] 이 책은 프랑스 내 반식민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식민주의의 영향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기여했다.[18] 그의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는 일체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개인적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드는 인간을 억압하는 윤리규율, 소시민 사회의 위선, 창조성을 억압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그리고 식민주의 등 당대 여러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2. 6. 1930년대: 공산주의 동조와 반스탈린주의
1930년대 앙드레 지드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며 소련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27] 그는 소련의 정치적 탄압을 인지하면서도, 빅토르 세르주의 석방을 주장하는 등 인도주의적 행보를 보였다.[19][24]1936년, 막심 고리키의 장례식 참석 및 소련 작가 연맹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한 지드는, 그곳의 문화 검열과 개인 숭배에 환멸을 느꼈다.[24] 귀국 후, 그는 『소련으로부터의 귀환』(Retour de L'U.R.S.S., 1936)을 통해 소련의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했다.[20] 그는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친구들과 결별했으며, 친소련 독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그는 책에서 문화의 쇠퇴, 개성 말살, 반대 의견 억압 등을 지적했다.[24]
지드는 스탈린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자제했지만, "각 가정에... 스탈린의 같은 초상화, 그리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묘사를 통해 개인 숭배 현상을 비판했다.[21]
일리야 에렌부르크 등은 지드에게 출판 연기를 요청했지만, 지드는 이를 거부하고 책을 출간했다.[22] 이후 그는 소련 언론과 "소련의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22][24]
1937년, 지드는 『소련에 대한 재고』를 출판하여 비판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레프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읽고, 빅토르 세르주를 만나면서 소련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24] 『소련에 대한 재고』에서 지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스탈린의 독재로 변질되었고, 특권 관료가 잉여 노동으로 이익을 얻는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되었다고 비판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드는 전통과 규율을 강조하며 공산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거부했다.[27] 1946년작 『테세』에서 그는 과거와의 연결을 강조하며 개인주의를 옹호했다.[27]
1949년, 그는 실패한 신에 기고하여 자신의 반공주의적 신념을 재확인했다.[27] 1930년대에 들어서는 소비에트(Совиет)에 대한 공감을 표하기 시작하며 공산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1936년, 소비에트 연방 작가 동맹(Союз писателей СССР)의 초청을 받아 중병에 걸린 막심 고리키(Максим Горький)를 문병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지드는 약 두 달간의 체류 후 『소비에트 여행기(Retour de l'U.R.S.S.)』(가제)에서 소련의 실태를 밝히고 요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여 좌파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지드는 이듬해 『소비에트 여행기 수정』(1937년)에서 전작에 대한 비판에 반박했다. 『소비에트 여행기』는 1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소련 비판 서적 중 최대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후 반나치(наци), 반파시즘(фашизм)을 관철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반전·반파시즘 세계 청년 회의 명예 의장을 역임했다.
2. 7. 만년
1938년 아내 마들렌이 사망하자 앙드레 지드는 깊은 고독에 빠져 『이제 그녀는 너 안에 있다』를 썼다. 1939년에는 권위 있는 『플레이아드 문고』(Bibliothèque de la Pléiade)에 작품이 실린 최초의 생존 작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을 피해 튀니스로 이주하여 1942년 1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프랑스, 영국, 미국 연합군이 투니스를 탈환할 때까지 투니스에 거주했고, 그 후 알제로 이동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물렀다.[30] 1945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1945년 괴테상을 수상하였다. 1947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인간의 문제와 상황을 진실에 대한 두려움 없는 사랑과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력으로 제시한 포괄적이고 예술적으로 중요한 저술"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31] 그는 말년의 많은 시간을 자신의 저널 출판에 바쳤다.[32]
앙드레 지드는 1951년 2월 19일 파리 자택에서 폐울혈로 사망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52년 그의 작품을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렸다.[33]
3. 작품 목록
앙드레 지드는 소설, 수필, 희곡, 평론, 일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37] 그의 작품은 초기 상징주의에서부터 자전적 소설, 사회 비판적인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와 형식을 다루고 있다.[38]
- 『앙드레 발터의 수기』 (''Les Cahiers d'André Walter''), 1891년
- 『나르시스론』 (''Le Traité du Narcisse''), 1891년
- 『앙드레 발터의 시』 (''Les Poésies d'André Walter''), 1892년
- 『우리엔의 여행』 (''Le Voyage d'Urien''), 1893년
- 『사랑의 시도』 (''La Tentative amoureuse''), 1893년
- 『늪』 (''Paludes''), 1895년
- ''Réflexions sur quelques points de littérature et de morale'', 1897년
- 『지상의 양식』 (''Les Nourritures terrestres''), 1897년
- ''Feuilles de route 1895-1896'', 1897년
- ''El Hadj''
-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 (''Le Prométhée mal enchaîné''), 1899년
- 『필록테테스』 (''Philoctète''), 1899년
- 『앙젤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à Angèle''), 1900년
- ''De l'Influence en littérature'', 1900년
- 『칸다울레 왕』 (''Le Roi Candaule''), 1901년
- ''Les Limites de l'Art'', 1901년
- 부도덕한 사람(배덕자) (''L'immoraliste''), 1902년
- ''De l'Importance du Public'', 1903년
- 『프레텍스트』 (''Prétextes''), 1903년
- 『사울』 (''Saül''), 1903년
- ''Amyntas'', 1906년
- 『탕자의 귀환』 (''Le retour de l'enfant prodigue''), 1907년
- 도스토옙스키를 말하다 (''Dostoïevsky d'après sa correspondance''), 1908년
- 좁은 문 (''La porte étroite''), 1909년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910년
- 『신 프레텍스트』 (''Nouveaux prétextes''), 1911년
- ''Charles-Louis-Philippe'', 1911년
- ''C. R. D. N.'', 1911년
- 『이자벨』 (''Isabelle''), 1911년
- ''Bethsabé'', 1912년
- ''Souvenirs de la Cour d'Assises'', 1914년
- 교황청의 지하실 (''Les caves du Vatican''), 1914년
- ''La marche Turque'', 1914년
- 전원교향악 (''La symphonie pastorale''), 1919년
- 코리동 (''Corydon''), 1920년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1920)
- ''Numquid et tu . . .?'', 1922년
- 도스토옙스키 (''Dostoïevsky''), 1923년
- ''Incidences'', 1924년
- ''Caractères'', 1925년
- 위폐범들 (''Les faux-monnayeurs''), 1925년
- 『한 알의 밀알도 죽지 않고서는』(''Si le grain ne meurt''), 1926년
- ''Le journal des faux-monnayeurs'', 1926년
- ''Dindiki'', 1927년
- 『콩고 여행』 (''Voyage au Congo''), 1927년
- ''Le retour de Tchad'', 1928년
- 여인들의 학교 (''L'école des femmes''), 1929년
- ''Essai sur Montaigne'', 1929년
- ''Un esprit non prévenu'', 1929년
- 『로베르』 (''Robert''), 1930년
- ''La séquestrée de Poitiers'', 1930년
- 『르뒤로 사건』 (''L'affaire Redureau''), 1930년
- 『오이디푸스』 (''Œdipe''), 1931년
- ''Perséphone'', 1934년
- 『우리들의 양식』 (''Les nouvelles nourritures''), 1935년
- ''Geneviève'', 1936년
- 소련 방문기 (''Retour de l'U. R. S. S.''), 1936년
- ''Retouches â mon retour de l'U. R. S. S.'', 1937년
- ''Notes sur Chopin'', 1938년
- 『일기 1889–1939』 (''Journal 1889–1939''), 1939년
- ''Découvrons Henri Michaux'', 1941년
- 테세우스 (''Thésée''), 1946년
- ''Le retour'', 1946년
- 폴 발레리 (''Paul Valéry''), 1947년
- ''Le procès'', 1947년
- ''L'arbitraire'', 1947년
- ''Eloges'', 1948년
- ''Littérature engagée'', 1950년
지드의 방대한 서신들은 그의 문학적, 개인적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39], 그의 『일기』는 18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13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40]
4. 사상과 영향
일본에서는 와키즈 진지로(和気津次郎)의 소개를 시작으로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 야마우치 요시오(山内義雄) 등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소설가 이시카와 준(石川淳)의 비평문도 있으며, 이시카와는 지드의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또한 지드의 저술은 당시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의 순수소설론은 지드의 『위조지폐범(贋金つくり)』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4. 1. 개인주의와 자유
앙드레 지드는 정신과 육체, 이성과 본능, 선과 악 등으로 세계를 이분하는 기독교 이원론적 세계관에 내재된, 정신과 이성을 우위에 두는 가치관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이러한 가치관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도덕 의무가 육체와 본능을 가진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부당하며,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도덕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드는 개인이 자신의 진정성을 방해하는 것, 즉 그의 온전함과 통합성에 반대되는 것과의 논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42] 그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물려받은 제약과 관습에 열정적으로 반항하며, 모순되는 가면 아래에 있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자 했다.[43]4. 2. 동성애 옹호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인정하고, 이를 옹호하는 데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어린 시절 엄격한 청교도 교육으로 인해 죄의식을 느꼈지만, 청년기에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발견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44]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모든 희열을 향유하는 것이 죄악이 아니며, 인간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라고 주장했다.1893년부터 1894년까지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동성애를 받아들였으며, 오스카 와일드와의 만남을 통해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46] 특히 와일드는 지드가 동성애자임을 짐작하고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지드는 이미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드는 자신을 "페데라스트(pederasts)"로 분류하며, 성인 남성에게 끌리는 "소도미스트(sodomites)"와 구분했다.[44] 그는 소년애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44]
1923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고, 1924년에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코리돈』을 출판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후에 그는 이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여겼다.
4. 3.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
앙드레 지드는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참상을 목격하고, 식민주의의 부당함을 고발했다. 피지배 민족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며,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대했다. 그의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는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개인적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대표자’라고 불렀던 지드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는 거의 없었다.4. 4. 반전체주의
앙드레 지드는 인간을 억압하는 엄격하고 경직된 윤리규율, 소시민 사회의 위선과 순응, 창조성을 억압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대표자'라고 불렀던 그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는 진정성의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검토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지드는 자신의 신념을 설득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지치지 않고 노력했으며, 1947년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박사 학위와 노벨 문학상 수상은 그의 용기와 노력에 대한 평가였다. 그의 주장은 사르트르와 카뮈 같은 다음 세대의 가치관이 되었다.4. 5. 한국에 미친 영향
앙드레 지드의 작품과 사상은 한국의 지식인과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0-70년대 민주화 운동과 사회 개혁 운동에 참여한 지식인들에게 지드의 자유주의, 반권위주의, 반제국주의 사상은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개인의 자유와 욕망, 사회적 억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작품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지드는 인간을 억압하는 엄격하고 경직된 윤리규율, 그 부당함에 침묵하는 소시민 사회의 위선과 순응, 창조성을 억압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대표자’라고 불렀던 그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진정성의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검토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사르트르와 카뮈 같은 다음 세대의 가치관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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