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카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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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나카 기요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로, 포수로서 선수 생활을 했다.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지명되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주니치 드래건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지바 롯데 마린스를 거치며 1996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고양 원더스, 도쿄 국제 대학, 노스아시아 대학 등에서 코치 및 감독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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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기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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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명 | 야마나카 기요시 |
로마자 표기 | Kiyoshi Yamanaka |
한자 표기 | 山中 潔 |
가나 표기 | やまなか きよし |
선수 정보 | |
소속 구단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역할 | 팜 포수 인스트럭터 |
등번호 | 75 |
출신지 | 오사카부 사카이시 |
생년월일 | 1961년 10월 29일 (62세) |
신장 | 178 |
체중 | 83 |
투구 | 우 |
타석 | 좌 |
수비 위치 | 포수 |
프로 입단 년도 | 1979년 |
드래프트 순위 | 4순위 |
첫 출장 | 1981년 8월 8일 |
마지막 경기 | 1996년 7월 31일 |
선수 경력 | |
선수 경력 | PL학원고등학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0 - 1988)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89 - 1990) 주니치 드래건스 (1990 - 1991) 닛폰햄 파이터스 (1992 - 1994) 지바 롯데 마린스 (1995 - 1996)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감독 및 코치 경력 | 지바 롯데 마린스 (1997 - 2002) 닛폰햄 파이터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3 - 2009) 지바 롯데 마린스 (2010 - 2013) 고양 원더스 (2014) 도쿄 국제대학 노스 아시아 대학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20 - ) |
2. 선수 경력
PL가쿠엔 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때인 1978년 여름 고시엔에서 백업 포수였지만 우승을 경험했다[2]。3학년 때인 1979년에는 봄의 선발에서, 킨다이의 나카니시 야스토모와 배터리를 이루며 주전 포수로 출전했지만, 준결승에서 에이스 이시이 다케시를 보유한 미시마 고등학교에 연장 10회 사요나라 패했다[3]。같은 해 여름 고시엔 부 예선에서도 결승에 진출했지만, 나미쇼의 우시지마 가즈히코, 가가와 노부유키 배터리에 막혀 패배, 고시엔 출전을 놓쳤다。고등학교 동기로는 고바야카와 다케히코, 아베 게이지, 야마자키 고가 있었다.
같은 해 드래프트 4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지명되어 1980년에 입단했다.
1981년부터 1군 출전을 했다.
1984년에는 64경기에 출전했다.
1985년에는 개막부터 다쓰카와 미쓰오를 대신하여 기용되어 52경기에 선발 마스크를 쓰고,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
1986년부터 고바 다케시를 대신하여 아난 준로 감독이 취임하여 다시 벤치를 데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984년에 2경기, 1986년에도 1경기에서 교체 출전했다.
1988년 오프에 야마다 쓰토무와의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1989년에 팀 포수 중 두 번째로 많은 45경기에 출전했다.
1990년 개막 직전에 사이토 마나부와의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주전 포수 나카무라 다케시 다음가는 2번 포수의 자리를 확보하고, 슛한 타격으로 나카무라의 자리를 위협했다[4]。
1991년 오프에 이가라시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로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하여, 닛폰햄에서도 주전 포수인 다무라 후지오 다음가는 2번 포수의 자리를 확보했다.
1994년 오프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같은 해에 지바 롯데 마린스의 테스트를 받고 합격하여, 롯데에서는 바비 밸런타인 감독이 상대 투수가 우투수일 때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95년은 팀 포수 중 두 번째로 많은 61경기에 출전하여, 롯데의 2위 약진에 기여했다.
1996년 오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야마나카 기요시는 PL 가쿠엔 고등학교 시절인 1978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60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기 포수이면서도 우승을 경험했다.[20] 이듬해 1979년 춘계 선발 대회(제51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나카니시 야스토모(훗날 긴키 대학에 진학)와 배터리를 구성하여 주전 포수로서 출전,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이시이 다케시가 소속된 미노시마 고등학교한테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21] 같은 해 여름에 개최된 고시엔 오사카부 예선에서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나미쇼 고등학교의 우시지마 가즈히코(투수), 가가와 노부유키(포수) 배터리에 막혀 팀은 탈락,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20] 고교 동기로는 고바야카와 다케히코, 아베 게이지, 야마자키 쓰요시 등이 있었다.1979년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2]
2.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80년 ~ 1988년)
1979년 일본 프로 야구 신인 선수 지명 회의에서 드래프트 4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지명되어 1980년에 입단했다.[2] 1981년부터 1군에서의 출전 기회를 얻었다.[2] 1984년에는 64경기에 출전했다.[2] 1985년에는 개막 이후부터 다쓰카와 미쓰오를 대신해서 기용되는 등 52경기에 선발 마스크를 착용했고,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2] 1986년부터는 고바 다케시를 대신하여 아난 준로 감독이 취임하면서 다시 벤치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2] 일본 시리즈에서는 1984년에 2경기, 1986년에 1경기에 교체 출장했다.[2] 1988년 오프에는 야마다 쓰토무와의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이적했다.[2]2. 3.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1989년)
1988년 오프에 야마다 쓰토무와의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이적했고[4] 1989년에 팀내 포수로는 두 번째로 많은 45경기에 출전했다.[4]2. 4.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90년 ~ 1991년)
1990년 시즌 개막 직전에 사이토 마나부와의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건스에 이적했다.[4] 주니치에서는 주전 포수 나카무라 다케시에 뒤를 이은 두 번째 포수 자리를 획득했다. 슛을 이용한 타격으로 나카무라의 자리를 위협했다.[4] 1991년 오프에 이가라시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로 닛폰햄 파이터스에 이적했다.2. 5.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92년 ~ 1994년)
1991년 오프에 이가라시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로 닛폰햄 파이터스에 이적했다.[4] 닛폰햄에서도 주전 포수인 다무라 후지오에 이어 두 번째 포수 자리를 확보했다. 하지만 1994년 오프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19]2. 6.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1995년 ~ 1996년)
1994년 오프에 전력 외 통보를 받고 지바 롯데 마린스의 테스트를 받아 합격했다.[4] 바비 밸런타인 감독은 상대 투수가 우완 투수일 때 야마나카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1995년에 팀내 포수 중 두 번째로 많은 61경기에 출전하여 지바 롯데의 정규 시즌 2위 달성에 기여했다.[4] 1996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3. 지도자 경력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를 맡았다.[22] 지바 롯데 코치 시절엔 나중에 주전 포수가 될 사토자키 도모야를 지도했는데 사토자키는 “그 분이 없었다면 난 그만뒀을 것이다”[22], “야마나카 코치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16년이나 현역으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23]라고 말했다. 또한 하시모토 다스쿠도 “야마나카 코치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거기까지 야구를 계속할 수 없었고 아주 오래 전에 그만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24] 야마나카가 평소부터 말하고 있던 것은 “코치는 단지 선수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25]
3. 1.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 (1997년 ~ 2002년, 2010년 ~ 2013년)
야마나카 기요시는 현역 은퇴 이듬해인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를 맡았다.[22] 지바 롯데 코치 시절 사토자키 도모야를 지도했는데, 사토자키는 "그 분이 없었다면 난 그만뒀을 것이다",[22] "야마나카 코치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16년이나 현역으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3] 또한 하시모토 다스쿠도 "야마나카 코치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거기까지 야구를 계속할 수 없었고 아주 오래 전에 그만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24] 야마나카는 평소 "코치는 단지 선수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25]2010년에는 다시 지바 롯데에 1군 배터리 코치로 복귀하여[12]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2011년에는 1군 불펜 코치, 2012년에는 1군 배터리 코치, 2013년에는 2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13] 2013년 10월 22일, 구단은 다음 해 계약을 맺지 않기로 발표했다.[13]
3. 2.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코치 시절 (2003년 ~ 2009년, 2020년 ~ 2024년)
야마나카 기요시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2군 배터리 코치를 역임했고, 2002년에는 1군 불펜 코치를 맡았다.[5] 지바 롯데 코치 시절에는 사토자키 도모야를 지도했는데, 사토자키는 야마나카 코치가 없었다면 선수 생활을 그만뒀을 것이라고 회고했다.[22][23] 하시모토 다스쿠 또한 야마나카 코치 덕분에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24] 야마나카는 코치의 역할에 대해 "선수를 지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수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25]2003년, 야마나카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1군 불펜 담당 코치로 부임했다.[5] 2004년과 2006년에는 1군 배터리 코치를, 2005년과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2군 배터리 코치를 역임했다. 2006년에는 닛폰햄의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쓰루오카 신야를 주전 포수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11]
2020년, 야마나카는 다시 닛폰햄으로 돌아와 2군 육성 코치를 맡았고,[16] 2021년부터는 2군 배터리 코치를 담당했다. 2022년 7월 23일 롯데전에서는 1군 배터리 코치 야마다 가쓰히코가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아 대신 1군에 합류하기도 했다.[17] 2024년부터는 포수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다.[19]
3. 3. 기타 지도자 경력
야마나카 기요시는 현역 은퇴 이듬해인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지바 롯데 코치를 맡았다.[22][23][24] 지바 롯데 코치 시절 사토자키 도모야를 지도했는데, 사토자키는 야마나카 코치가 없었다면 선수 생활을 그만뒀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2][23] 하시모토 다스쿠 역시 야마나카 코치를 만나지 못했다면 야구를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24] 야마나카는 평소 "코치는 단지 선수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25]이후 닛폰햄에서 1군 불펜 담당 코치(2003년[5]), 1군 배터리 코치(2004년, 2006년), 2군 배터리 코치(2005년, 2007년 - 2009년)를 역임했다. 2006년에는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쓰루오카 신야를 주전 포수로 성장시켰다.[10][11] 2010년에는 롯데로 복귀하여[12] 1군 배터리 코치로서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1군 불펜 코치(2011년), 1군 배터리 코치(2012년), 2군 배터리 코치(2013년)를 맡았고, 2013년 10월 22일 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다.[13]
2014년에는 고양 원더스의 배터리 코치를 맡았고,[14] 2015년에는 도쿄 국제 대학 조감독으로 취임했다.[14] 2016년부터는 감독으로 승격하여 2018년까지 재임했다. 2019년에는 노스아시아 대학 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소통했다.[15] 2020년부터는 닛폰햄에 복귀하여 2군 육성 코치, 2021년부터는 2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16] 2022년 7월 23일 롯데전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은 1군 배터리 코치 야마다 가쓰히코를 대신하여 1군에 합류하기도 했다.[17] 2024년부터는 포수 인스트럭터를 맡는다.[19]
4. 상세 정보
4. 1. 선수 경력
야마나카 기요시는 1980년부터 1988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이후 1989년부터 1990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뛰었고,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를 마지막으로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4. 2. 지도자 경력
4. 3. 개인 기록
야마나카 기요시는 1981년 8월 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고라쿠엔 구장)에서 9회초 하기와라 야스히로의 대타로 첫 출장했다. 1983년 4월 12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8회말 이토 히로미츠로부터 첫 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4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는 8번 타자 겸 포수로 첫 선발 출장했다.1984년 5월 1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나가사키 시영 오하시 구장)에서 5회초 토리하라 코지로부터 밀어내기 볼넷으로 첫 타점을 올렸다. 1985년 4월 1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9회말 리치 게일로부터 2점 홈런을 치며 첫 홈런을 기록했다.
4. 4. 연도별 타격 성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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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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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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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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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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