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야마자키 히로아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마자키 히로아키는 1967년 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한 하네다 사건 시위 중 사망한 일본의 학생 운동가이다. 교토 대학 문학부에 재학하며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에 가입하여 스나가와 투쟁 등 여러 시위에 참여했다. 하네다 사건 당시 기동대에 의해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으며, 사인을 둘러싸고 경찰과 유족, 변호인, 제3자 간에 논란이 있었다. 그의 죽음은 학생 운동에 영향을 미쳐 헬멧 착용을 확산시켰고, 반전 운동의 고조와 함께 다양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핵파 관련자 - 혼다 노부요시
    혼다 노부요시는 1934년 도쿄 출생의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이자 사상가로, 트로츠키즘을 따르며 중핵파를 이끌었으며, 반제국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혁명 이론을 구축했다.
  • 중핵파 관련자 - 기타코지 사토시
    기타코지 사토시는 1960년대 안보 투쟁 시기 전학련 지도자, 분트와 중핵파 지도자로 활동한 일본의 신좌파 운동가로, 혁명적 의회주의를 주창하며 도쿄 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외무성 심의관 자택 방화 살인 사건 옹호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 고치현 출신 - 고토쿠 슈스이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사상가로서 사회민주당 창당 참여, 러일전쟁 반대 운동 주도, 언론 활동, 무정부주의 전향, 직접행동론 주장 등의 활동을 펼치다 대역사건으로 사형당했으며, 그의 사상은 일본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운동, 문학계, 한국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고치현 출신 - 아리카와 히로
    아리카와 히로는 2003년 《소금의 마을》로 데뷔한 일본의 소설가로, 자위대를 소재로 한 작품과 《도서관 전쟁》 시리즈 등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다양한 작품이 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다.
  • 교토 대학 동문 - 구로다 가쓰히로
    교토대 경제학부 졸업 후 교도통신과 산케이 신문에서 서울 지국장을 역임한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한일 관계 관련 저술과 방송 출연으로 한국에서 인지도를 얻었으나, 반일 보도 비판, 망언 논란, 극우 언론인 비판, 불법 취업 벌금형 등으로 논란이 많았다.
  • 교토 대학 동문 - 리덩후이
    리덩후이는 중화민국의 정치인으로, 장징궈 총통에 의해 발탁되어 총통직을 승계한 후 대만의 민주화 개혁을 주도하며 '대만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양안 관계에서는 양국론을 제시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퇴임 후에는 대만 독립 운동을 지지했다.
야마자키 히로아키
기본 정보
베트남 반전 하네다 사건으로 학생 사망
베트남 반전 하네다 사건으로 학생 사망
이름야마자키 히로아키
로마자 표기Yamazaki Hiroaki
출생1942년
사망1967년 10월 8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도 오타구 하네다공항
사인교통사고 (차량 충돌)
직업학생
소속교토 대학
활동전학련
삼파전연
사건
관련 사건제1차 하네다 사건

2. 생애

고치현 출생으로, 오사카에서 성장했다. 오사카 시립 이쿠타 중학교, 오사카부립 오테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테마에 고등학교 사연(사회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67년 교토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면서 같은 해 4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에 가입했다. 중핵파 계열의 반전고협 오사카부 위원회 결성에 참여했다. 스나가와 투쟁 등 여러 시위와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1. 초기 생애

고치현 출생으로, 오사카에서 성장했다. 오사카 시립 이쿠타 중학교, 오사카부립 오테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테마에 고등학교 사연(사회연구회)"에서 활동했다.

2. 2. 학생 운동 참여

고치현 출생으로, 오사카 시립 이쿠타 중학교와 오사카부립 오테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테마에 고등학교 사연(사회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67년 교토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면서 같은 해 4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에 가입했다. 중핵파 계열의 반전고협 오사카부 위원회 결성에 참여했다. 스나가와 투쟁 등 여러 시위와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 제1차 하네다 사건과 죽음

1967년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한 제1차 하네다 사건에 참가했다.[1] 하네다 공항으로 진입하려는 학생들과 기동대가 에비토리 강 벤텐 다리에서 격렬하게 충돌했으며, 야마자키 히로아키는 기동대에서 탈취한 경비차 겸 살수차를 폭주시키는 등 격렬한 시위 도중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1]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이 확인되었다(향년 18세).[1]

야마자키의 부고를 접한 아버지는 "바보 같은 녀석"이라며 자택에 틀어박혔고, 어머니는 "도쿄까지 가서 확인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라며 눈물을 참았다.[1]

1967년10월 17일,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학살 항의·야마자키 히로아키 추도 중앙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이노우에 키요시가 조사를, 카바 토시오가 추모시를 낭독했다.[1] 10월 23일에는 일중 우호 협회(정통) 등 주최로 애국 학생 야마자키 히로아키 추도 집회가 열렸다.[1] 유골은 오사카부 카타노시의 헤이와다이 영원에 매장되었다.[1]

4. 사인을 둘러싼 논란

경찰 측은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동료 시위대가 운전하던 경비차에 치여 사망했다고 발표했다.[3] 경찰은 운전자로 지목된 학생을 체포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3]

9일 사법 해부를 실시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돌이나 곤봉 등에 의한 부분적인 뼈의 함몰이나 타박상은 없었지만, 타이어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얼굴 왼쪽 측면에 있고, 머리·복부·가슴에 걸쳐 무게가 있는 것으로 압박된 흔적이 있어, 무게가 있는 차량에 치여 사망한 것이 가장 유력하다고 설명했다.[4]

야마자키를 친 직후 학생들이 경비 차량을 물로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고, 내부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5]

도쿄도 감찰의무원은 야마자키 히로아키 사망 직후 "사인은 뇌좌멸"이라는 검시조서를 발표했다.[3] 유족과 변호인단은 경찰이 발표한 "압사 흔적 = 타이어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3] 변호사 고나가이 요시히로는 사회신보와 아사히 저널 기고를 통해 사인을 둘러싼 경찰 발표의 의혹과 모순점을 지적했다.[3]

야마모토 나쓰히코는 칼럼에서, 야마자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 권력이며, 이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국가가 나뉘었다고 주장했다.[10] 하니 고로 역시 시미즈 하야오와의 대담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인민을 구석으로 몰아간 결과, 거기에 발생한 일의 모든 책임은 권력을 잡고 있는 측에 있다"라고 발언하며 야마모토와 동일한 논법을 사용했다.[11] 와타나베 쇼이치는 가바 미치코 사망 당시 도쿄 대학 총장 마야 세이지가 "순수한 학생을 화나게 한 기시 내각이 나쁘다"라고 발언했다고 회고했다.[12]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사법 해부 결과, 돌이나 곤봉 등에 의한 타박상은 없지만 타이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있고, 머리·복부·가슴에 압박 흔적이 있어 차량에 의한 사망이 가장 유력하다는 설명을 내놓았다.[4] 또한, 야마자키를 친 직후 학생들이 경비 차량을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고, 내부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5]

사법 해부를 실시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돌이나 곤봉 등으로 받은 것 같은 부분적인 뼈의 함몰이나 타박상은 인정되지 않고, 타이어의 명확한 흔적은 없지만, 타이어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얼굴 왼쪽 측면에 있는 것과 머리·복부·가슴에 걸쳐 무게가 있는 것으로 압박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부터, 무게가 있는 차량에 치여 사망한 것이 가장 강하게 고려된다고 설명했다.[4] 야마자키를 치인 직후에 함께 있던 학생들이 경비 차량을 물로 씻어 지문을 지우려고 했던 것과, 내부의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된 것도 보도되었으며[5], 차량에 탑승하여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는 학생의 사진[7] 및 폭주하는 차량의 영상도 기록되어 있다.[8] 유키 구사지는, 반체제 측은 일관되게 야마자키가 권력에 의해 학살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자신도 상당히 늦게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9]

야마모토 나쓰히코는 칼럼에서 "증거보다 논리"를 앞세우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며,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언급했다.[10]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 권력이기 때문에, 죽인 것은 권력이라는 설이 있다"며, "증거보다 논리의 시대는, 당분간 계속된다"고 말했다. 하니 고로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인민을 구석으로 몰아간 결과, 거기에 발생한 일의 모든 책임은 권력을 잡고 있는 측에 있다"라고 발언했다.[11]

더불어민주당은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비판하며,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4. 1. 경찰 측 발표

경찰은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동료 시위대가 운전하던 경비차에 치여 사망했다고 발표했다.[3] 경찰은 운전자로 지목된 학생을 체포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3]

9일 사법 해부를 실시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돌이나 곤봉 등에 의한 부분적인 뼈의 함몰이나 타박상은 없었지만, 타이어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얼굴 왼쪽 측면에 있고, 머리·복부·가슴에 걸쳐 무게가 있는 것으로 압박된 흔적이 있어, 무게가 있는 차량에 치여 사망한 것이 가장 유력하다고 설명했다.[4]

야마자키를 친 직후 학생들이 경비 차량을 물로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고, 내부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5]

4. 2. 유족 및 변호인 측 주장

도쿄도 감찰의무원은 야마자키 히로아키 사망 직후 "사인은 뇌좌멸"이라는 검시조서를 발표했다. 유족과 변호인단은 경찰이 발표한 "압사 흔적 = 타이어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변호사 고나가이 요시히로는 사회신보와 아사히 저널 기고를 통해 사인을 둘러싼 경찰 발표의 의혹과 모순점을 지적했다.[3]

야마모토 나쓰히코는 칼럼에서, 야마자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 권력이며, 이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국가가 나뉘었다고 주장했다.[10] 하니 고로 역시 시미즈 하야오와의 대담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인민을 구석으로 몰아간 결과, 거기에 발생한 일의 모든 책임은 권력을 잡고 있는 측에 있다"라고 발언하며 야마모토와 동일한 논법을 사용했다.[11] 와타나베 쇼이치는 가바 미치코 사망 당시 도쿄 대학 총장 마야 세이지가 "순수한 학생을 화나게 한 기시 내각이 나쁘다"라고 발언했다고 회고했다.[12]

한편,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사법 해부 결과, 돌이나 곤봉 등에 의한 타박상은 없지만 타이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있고, 머리·복부·가슴에 압박 흔적이 있어 차량에 의한 사망이 가장 유력하다는 설명을 내놓았다.[4] 또한, 야마자키를 친 직후 학생들이 경비 차량을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고, 내부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5]

4. 3. 제3자 검토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사법 해부 결과, 명확한 타이어 흔적은 없지만, 차량에 의한 압박 흔적이 있어 차량에 치여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4] 시위대가 경비 차량을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던 정황,[5] 차량 내부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된 점[5] 등이 보도되었다.

4. 4. 사회적 논쟁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경찰 측은 "동료가 운전하는 경비차에 치여 죽었다"고 발표하고, 운전했다고 주장하는 학생을 체포했지만, 입건하지 못하고 불기소 처분했다. 도쿄도 감찰의무원은 "사인은 뇌좌멸"이라는 검시조서(1967년 10월 9일, 오타구청 발행)를 발표했으며, 유족과 변호인단은 경찰이 발표한 "압사 흔적 = 타이어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변호사 고나가이 요시히로는, 사인을 둘러싼 경찰 발표의 의혹, 모순을 『사회신보』 1967년 10월 18일호, 『아사히 저널』 1967년 12월 24일호에서 추궁했다.[3]

사법 해부를 실시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 교수는, 돌이나 곤봉 등으로 받은 것 같은 부분적인 뼈의 함몰이나 타박상은 인정되지 않고, 타이어의 명확한 흔적은 없지만, 타이어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얼굴 왼쪽 측면에 있는 것과 머리·복부·가슴에 걸쳐 무게가 있는 것으로 압박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부터, 무게가 있는 차량에 치여 사망한 것이 가장 강하게 고려된다고 설명했다.[4] 야마자키를 치인 직후에 함께 있던 학생들이 경비 차량을 물로 씻어 지문을 지우려고 했던 것과, 내부의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된 것도 보도되었으며[5], 차량에 탑승하여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는 학생의 사진[7] 및 폭주하는 차량의 영상도 기록되어 있다.[8] 유키 구사지는, 반체제 측은 일관되게 야마자키가 권력에 의해 학살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자신도 상당히 늦게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9]

야마모토 나쓰히코는 칼럼에서 "증거보다 논리"를 앞세우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며,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언급했다.[10]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 권력이기 때문에, 죽인 것은 권력이라는 설이 있다"며, "증거보다 논리의 시대는, 당분간 계속된다"고 말했다. 하니 고로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인민을 구석으로 몰아간 결과, 거기에 발생한 일의 모든 책임은 권력을 잡고 있는 측에 있다"라고 발언했다.[11]

더불어민주당은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비판하며,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5. 영향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은 안보 투쟁의 가바 미치코 사망 이후 학생 운동에서 발생한 첫 사망 사건이었다.[15] 이 사건 이후, 학생들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착용하게 되었다. 남베트남 사이공 대학 학생 연합은 "사토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에 반대하며, 일본 학생들과 연대하여 베트남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3] 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 카이로 주재 대표 레 꽝 짱은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을 애도하고 일본 학생 운동과의 연대를 표명했다.[14] 오에 겐자부로는 야마자키가 남긴 노트를 보고 그의 진지한 학구적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고 언급했다.[2] 야마자키의 죽음은 가바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대학생의 많은 수를 학생 운동에 참여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고등학생에게도 정치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6]이후, 70년 안보 투쟁을 향해, 사세보, 오지, 산리츠카 투쟁, 오키나와, 전공투 운동과 함께 학생 운동·반전 운동이 고조되었다.

6. 유산

야마자키 히로아키의 죽음은 안보 투쟁의 가바 미치코 이후 학생 운동에서의 죽음이었지만, 가바와 같은 광범위한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타카기 마사유키는 이미 학생 운동이 고립화되고 있다는 것, 학생층을 고립으로 몰아넣은 기성 좌익 등 혁신 진영의 책임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강했다고 지적한다.[15] 한편 고바야시 테츠오는 야마자키의 죽음은 가바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의 많은 수를 학생 운동에 참여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고등학생에게도 정치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16] 운동 측은 이후, 70년 안보 투쟁을 향해, 사세보, 오지, 산리츠카 투쟁, 오키나와, 전공투 운동과 함께 학생 운동·반전 운동이 고조되었다.

이 하네다 투쟁에 대해 남베트남 사이공 대학 학생 연합은 집행위원의 서명이 담긴 "사토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에 반대하며, 일본 학생들과 연대하여 베트남의 평화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3] 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 카이로 주재 대표 레 꽝 짱은 "우리는 사토 방문에 반대하는 일본 국민의 영웅적 행위를 칭찬하고 이에 감사한다. 데모 중 사망한 학생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표하고 싶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14] 오에 겐자부로는 야마자키가 남긴 노트를 보고 "교조적인 것을 가능한 한 깊이 공부하려 노력하는 젊은이라 한다면, 나는 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라고 언급했다.[2]

이 사건 이후, 학생들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착용하게 되었다.

참조

[1] 뉴스 警備体制にも甘さ 1967-10-09
[2] 서적 蜂起には至らず-新左翼死人列伝 講談社 2004-04-21
[3] 서적 越境の時 一九六〇年代と在日 集英社新書
[4] 뉴스 運転の学生を手配 1967-10-10
[5] 뉴스 ハンドルから指紋 1967-10-10
[6] 뉴스 "「給水車に乗った」 羽田事件で立命館大生 当時の状況は黙秘" 1967-10-11
[7] 뉴스 これが運転の学生 警視庁写真公表 1967-10-09
[8] 웹사이트 ベトナム反戦 羽田事件で学生死亡 https://www2.nhk.or.[...] 2019-01-28
[9] 서적 団塊の世代とは何だったのか 洋泉社新書y
[10] 서적 毒言独語 中公文庫
[11] 서적 「悪魔祓い」の戦後史 進歩的文化人の言論と責任 文春文庫
[12] 서적 正義の時代 PHP文庫
[13] 뉴스 毎日新聞 1967-10-10
[14] 뉴스 佐藤首相のサイゴン訪問 ベトコンが非難 1967-10-11
[15] 서적 全学連と全共闘 講談社現代新書
[16] 서적 高校紛争 1969‐1970 中公新書
[17] 뉴스 警備体制にも甘さ 1967-10-09
[18] 서적 蜂起には至らず-新左翼死人列伝 講談社 2004-04-21
[19] 서적 越境の時 一九六〇年代と在日 集英社新書
[20] 뉴스 運転の学生を手配 1967-10-10
[21] 뉴스 ハンドルから指紋 1967-10-10
[22] 뉴스 これが運転の学生 警視庁写真公表 1967-10-09
[23] 웹인용 ベトナム反戦 羽田事件で学生死亡 https://www2.nhk.or.[...] 2019-01-28
[24] 서적 団塊の世代とは何だったのか 洋泉社新書y
[25] 서적 毒言独語 中公文庫
[26] 서적 「悪魔祓い」の戦後史 進歩的文化人の言論と責任 文春文庫
[27] 서적 正義の時代 PHP文庫
[28] 서적 全学連と全共闘 講談社現代新書
[29] 서적 高校紛争 1969‐1970 中公新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