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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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율준은 요나라 도종의 장남으로, 1059년에 태어나 1077년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한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아 1065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야율을신의 모함으로 인해 폐위되어 유폐되었다가 결국 살해당했다. 사후 소회태자로 추존되었으며, 1101년에는 천조제에 의해 대효순성황제로 추존되고 묘호는 순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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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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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래 이름 | 遼順宗 |
휘 | 한풍명은 야율준(耶律濬), 거란명은 야율야로알(耶律耶魯斡) |
별호 | 야율준(耶律浚) |
묘호 | 순종(順宗) |
시호 | 인성대효문황제(大孝順聖皇帝) |
국적 | 요(遼) |
출생일 | 청녕(淸寧) 4년 윤 12월 3일 (1059년 1월 19일) |
사망일 | 대강(大康) 3년 11월 27일 (1077년 12월 15일) |
아버지 |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 |
어머니 | 선의황후(宣懿皇后) 소관음(蕭觀音) |
배우자 | 정순황후(貞順皇后) 소씨(蕭氏) |
왕족 정보 | |
작위 | 요나라의 황제(추존) |
작위 2 | 요나라의 황태자 |
재위 2 | 1065년 2월 8일 ~ 1077년 6월 30일 |
즉위식 2 | 함옹(咸雍) 원년 1월 1일 (1065년 2월 8일) |
작위 3 | 양왕(梁王) |
재위 3 | 1063년 2월 9일 ~ 1065년 2월 8일 |
즉위식 3 | 청녕(淸寧) 9년 1월 9일 (1063년 2월 9일) |
2. 생애
1059년 1월 19일에 요 도종과 선의 소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도종의 기대를 받았으며, 1063년 양왕(梁王)에 봉해지고 1065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075년에는 북남추밀원사를 겸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1077년, 어머니 선의 소황후가 죽고 권력을 잡은 간신 야율을신의 모함으로 인해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 11월, 상경으로 유배된 곳에서 야율을신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사후 도종에 의해 소회태자(昭懷太子)로 복권되었고, 훗날 천조제에 의해 순종(順宗)으로 추존되었다.
2. 1. 출생과 황태자 책봉
1059년 1월 19일 (청녕 4년 윤 12월 3일), 도종과 선의 소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여 아버지 도종을 기쁘게 하였다.1063년 (청녕 9년)에는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1064년 (청녕 10년)에는 도종의 사냥에 참여하여 뛰어난 활 솜씨를 보였다. 1065년 (함옹 원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2. 2. 야율을신의 모함과 죽음
1075년, 어머니 선의 소황후가 자살로 몰리고 간신 야율을신이 북원추밀사가 되면서 권력을 장악하자, 황태자 야율준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 야율준의 호위병이었던 소홀고가 야율을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점검 소십삼은 야율준이 즉위하면 자신들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라며 야율을신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1077년 5월, 야율을신은 우호위태보 야율사랄을 시켜 도궁사 야율살랄, 지원 소서살, 호위 소홀고 등이 황제 도종을 폐위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발하게 했다. 그러나 도종은 증거가 없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야율을신은 같은 해 6월, 다시 牌印郎君 소알도올 등을 통해 소서살 등이 황태자 야율준을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는 음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번에는 도종이 이 말을 믿고 야율준을 별실에 가두고 야율연가에게 심문을 맡겼다. 야율준은 "나는 이미 황태자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대가 나를 위해 변호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야율을신의 측근이었던 야율연가는 그의 말을 왜곡하여 보고했다.
격분한 도종은 결국 야율준을 황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궁궐에서 쫓겨나며 야율준은 "내가 무슨 죄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탄식했지만, 소십삼은 수레에 올라 그를 꾸짖으며 위사에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야율준은 상경으로 보내져 원담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야율을신은 소달로고와 소살팔을 보내 야율준을 살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상경 유수 소달득은 도종에게 야율준이 병으로 사망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 도종은 유해를 용문산에 묻도록 했다. 이후 도종이 야율준의 비 소씨를 찾으려 하자, 야율을신은 이마저도 미리 사람을 보내 살해했다.
훗날 도종은 야율준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도종은 야율준에게 소회태자(昭懷太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황제의 예우로 옥봉산에 다시 장사 지냈다. 1101년 10월, 천조제가 즉위한 후 야율준은 대효순성황제(大孝順聖皇帝)로 추존되었고, 묘호는 순종(順宗)이 되었다. 그의 비 소씨 역시 정순황후(貞順皇后)로 추존되었다.
2. 3. 사후 복권과 추존
도종은 후에 야율준의 죽음이 억울했음을 알고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고, 소회태자(昭懷太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천자의 예로 옥봉산에 이장했다. 건통 원년 (1101년) 10월, 천조제에 의해 대효순성황제로 추존되었고, 묘호는 순종(順宗)이 되었다. 야율준의 비 소씨는 정순황후로 추존되었다.3. 가족 관계
아버지는 요나라 제8대 황제 도종 야율홍기이며, 어머니는 선의황후 소관음이다.[1] 황태자비는 소씨로 사후 정순황후(貞順皇后)로 추존되었다.[1] 자녀로는 아들 천조제 야율연희와[2] 딸 진진국 장공주(秦晉國 長公主) 야율연수가 있다.
3. 1. 부모
- '''부''' : 도종(道宗) 인성제(仁聖帝) 야율홍기(耶律洪基중국어)
- '''모''' : 선의황후(宣懿皇后) 소관음(蕭觀音중국어)
3. 2. 황후
야율준의 황태자비는 소씨(蕭氏)이다.[1] 사후 정순황후(貞順皇后)로 추존되었다.[1]3. 3. 자녀
참조
[1]
문서
천조제의 의해 황후로 추존됨
[2]
문서
양왕(梁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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