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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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먼드 1세는 939년부터 946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이다. 그는 922년에 태어나 이복 형인 애설스탠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먼드는 즉위 직후 더블린의 올라프 3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944년 노섬브리아를 재정복하는 등 군사적 위협에 대응했다. 또한,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수도원 부흥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946년 암살당했으며, 그의 동생 에드레드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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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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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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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 939년 10월 27일 |
사망 | 946년 5월 26일 |
대관식 | 939년 12월 1일 경 |
전임자 | 애설스탠 |
후임자 | 에드레드 |
배우자 | 앨플기푸 애설플래드 |
자녀 | 에드위그 에드거 |
아버지 | 에드워드 장형왕 |
어머니 | 에드기푸 |
출생일 | 920년/921년 |
사망 장소 | 글로스터셔, 파클처치 |
매장지 | 글래스턴베리 수도원 |
왕조 | 웨식스 가문 |
칭호 | 잉글랜드인의 왕 |
추가 정보 | |
별칭 | 에드먼드 장려왕 에드먼드 정의왕 에드먼드 업적왕 |
2. 생애
에드먼드 1세는 922년 연장자 에드워드와 그의 후비 이드기푸 사이에서 태어났다. 939년 이복형 애설스탠이 44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드먼드가 18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1]
왕위에 오른 직후 에드먼드는 몇 가지 군사적 위협에 직면했다. 더블린 왕 올라프 3세( Olaf III Guthfrithson|올라프 3세영어)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중부 지방을 침략했다. 그러나 942년에 올라프 3세가 사망하자, 에드먼드는 잉글랜드 중부 지방을 재정복했다. 943년에는 요크 왕 올라프의 후견인이 되었고, 944년에는 노섬브리아 재정복에 성공했다. 같은 해, 에드먼드와 동맹을 맺었던 요크 왕 올라프는 왕위를 잃고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떠났다. 올라프는 더블린 왕 올라프 콰란이 되었고, 계속해서 에드먼드와 동맹을 유지했다. 945년, 에드먼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 Kingdom of Strathclyde|스트래스클라이드영어)을 정복했지만, 영유권을 스코틀랜드 왕 말콤 1세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군사적 상호 원조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에드먼드는 국경 안전 정책과 스코틀랜드와의 평화적 관계를 확립했다.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수도원 부흥이 시작되었다.
946년, 에드먼드는 추방된 도적 레오파(Leofa)에게 살해당했다. 퍼클처치( Pucklechurch|퍼클처치영어)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에드먼드는 군중 속에서 레오파를 발견했다. 레오파는 떠나기를 거부했고, 에드먼드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에드먼드와 레오파는 함께 죽었다.[1]
에드먼드의 왕위는 동생 에드레드가 계승했다. 에드레드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에드레드 사후에는 에드먼드의 아들들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2. 1. 가족 관계
에드먼드는 연장자 에드워드와 그의 세 번째 아내 에디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복형인 애설스탠은 939년에 후사 없이 사망했고, 에드먼드가 왕위를 계승했다.[1]에드먼드는 앨프기푸와 결혼하여 에드위와 에드거 두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은 모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앨프기푸는 샤프츠베리 수도원의 후원자였으며, 944년에 사망한 후 성인으로 존경받았다.
에드먼드의 두 번째 부인은 에델플레드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에델플레드의 아버지 앨프가르는 946년에 에식스의 앨더만이 되었다.
에드먼드의 형제자매로는 친누나 에드버그가 있었는데, 그녀는 윈체스터의 수녀였으며 나중에 성인으로 숭배되었다. 또한, 12세기 역사가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에드먼드에게 아키텐의 왕자 루이와 결혼한 에디푸라는 이름의 친누나가 있었다고 언급했지만, 일부 역사가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름 | 재위 기간 |
---|---|
에드위 | 955년 - 957년 |
에드거 | 957년 - 959년 |
에드먼드 1세는 939년 이복형 애설스탠이 사망하자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즉위 직후 여러 군사적 위협에 직면했다. 더블린 왕 올라프 3세 구스프리드손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중부 지방을 침략했다. 그러나 942년 올라프 3세가 사망하면서 에드먼드는 중부 지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943년에는 요크 왕 올라프의 후견인이 되었고, 944년에는 노섬브리아를 완전히 재정복했다. 같은 해, 에드먼드의 동맹이었던 요크 왕 올라프는 왕위를 잃고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떠났지만, 올라프 콰란이라는 이름으로 더블린 왕이 된 후에도 에드먼드와의 동맹을 유지했다. 945년, 에드먼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를 정복했으나, 스코틀랜드 왕 말콤 1세에게 영유권을 양도하고 군사적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 안전 정책과 스코틀랜드와의 평화적 관계를 확립했다.[1]
3. 즉위 초기의 위협과 극복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장형왕과 그의 세 번째 아내 에드기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선왕 애설스탄의 이복 동생이었다. 939년 10월 27일 애설스탄이 사망하자 에드먼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직후, 에드먼드는 여러 군사적 위협에 직면했다. 더블린 왕 올라프 3세는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중부 지방을 침략했다. 942년 올라프 3세가 사망하자, 에드먼드는 잉글랜드 중부 지방을 되찾았다. 943년 에드먼드는 요크 왕 올라프의 대부가 되었고, 944년 노섬브리아를 성공적으로 재정복했다. 같은 해, 에드먼드의 동맹이었던 요크 왕 올라프는 왕위를 잃고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갔다. 올라프는 더블린 왕이 된 후에도 에드먼드와 계속 동맹을 맺었다. 945년 에드먼드는 스트래스클라이드를 정복했지만, 그 영유권을 스코틀랜드 왕 말콤 1세에게 양도하고 군사적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에드먼드는 국경 안전 정책과 스코틀랜드와의 평화적 관계를 확립했다. 에드먼드 통치 기간에는 잉글랜드 내 수도원 부흥이 시작되기도 했다.
9세기에 웨섹스, 머시아, 노섬브리아, 이스트 앵글리아 등 4개의 앵글로색슨 왕국은 바이킹의 공격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 865년 대 이교도 군대의 침략으로 절정에 달했고, 878년까지 바이킹은 이스트 앵글리아, 노섬브리아, 머시아를 점령하고 웨섹스마저 거의 정복할 뻔했다. 그러나 그해 웨섹스인들은 알프레드 대왕 지휘 하에 반격하여 에딩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 880년대와 890년대 앵글로색슨족은 웨섹스와 서부 머시아를 통치했지만, 잉글랜드 나머지는 바이킹 왕의 지배를 받았다. 알프레드는 요새 네트워크를 건설했고, 그의 사위 머시아의 영주 애설레드와 장남 에드워드의 도움을 받아 890년대 새로운 바이킹 공격을 좌절시키는 데 기여했다. 에드워드는 알프레드가 899년에 사망했을 때 왕이 되었다. 909년, 에드워드는 웨섹스와 머시아 군대를 보내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을 공격했고, 이듬해 데인족은 머시아를 습격하여 보복했다. 그들이 노섬브리아로 돌아가던 중 앵글로색슨 군대에 붙잡혀 테텐홀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한 세대 동안 노섬브리아 바이킹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910년대 에드워드와 그의 누이이자 애설레드의 미망인인 머시아의 레이디 애설플래드는 알프레드의 요새 네트워크를 확장하여 바이킹 통치 하의 동부 머시아와 이스트 앵글리아를 정복했다. 에드워드가 924년에 사망했을 때, 그는 험버 강 남쪽의 모든 잉글랜드를 통제했다.
에드워드는 장남 애설스탄에게 왕위를 계승받았고, 애설스탄은 927년 노섬브리아를 장악하여 잉글랜드 전체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헌장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자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및 스트래스클라이드 왕들이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그는 Rex Totius Britanniae|라틴어|전 브리타니아의 왕la과 같은 더 웅장한 칭호를 채택했다. 934년 그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937년에는 스코틀랜드, 스트래스클라이드, 바이킹 연합군이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애설스탄은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브리타니아에서 그의 지배적인 위치를 굳혔다.
베네딕토 수도원주의는 7세기와 8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번성했지만, 8세기 후반과 9세기에 심각하게 쇠퇴했다. 알프레드가 871년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원과 라틴어 지식은 쇠퇴했지만, 알프레드 시대부터 점차 부활했다. 이는 애설스탄 통치 기간 동안 가속화되었으며, 10세기 후반 잉글랜드 베네딕토 개혁의 두 지도자인 던스턴과 윈체스터의 애설월드는 930년대 애설스탄의 세계적이고 지적인 궁정에서 성숙했다.
브루난부르 전투는 잉글랜드를 통일 왕국으로 파멸로부터 구원했고, 에드먼드가 왕위에 순조롭게 오르는 데 기여했지만, 그가 왕이 된 후 그의 통치에 대한 도전을 막지는 못했다. 바이킹의 도전 연대기는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에 따르면, 애설스탄의 죽음은 요크 바이킹들이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패배한 바이킹 세력을 이끈 더블린 왕국의 왕 안라프 구스프리드슨의 왕권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했다. ''ASC D''에 따르면 "여기서 노섬브리아인들은 그들의 약속을 저버리고 아일랜드에서 온 안라프를 그들의 왕으로 선택했다." 안라프는 939년 말까지 요크에 있었고, 이듬해에는 에드워드와 애설플레드가 정복한 요크 왕국의 남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동부 머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노샘프턴으로 진군했지만 격퇴되었고, 이후 고대 머시아 왕실 중심지인 태무스워스를 공격하여 양측 모두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에드먼드 휘하의 군대에 레스터에서 붙잡혔지만, 바이킹을 대신하여 요크의 대주교 울프스탄과 아마도 잉글랜드를 위해 행동한 중재로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레스터에서 조약을 맺어 파이브 보로인 링컨, 레스터, 노팅엄, 스탬퍼드 및 더비를 구스프리드슨에게 양도했다. 이는 10세기 초 에드워드 장로가 바이킹 정복을 되돌리기 시작한 이후 잉글랜드에게 첫 번째 심각한 좌절이었으며, 역사가 프랭크 스턴턴은 이를 "수치스러운 항복"이라고 묘사했다. 구스프리드슨은 잉글랜드 표준보다 낮은 바이킹 무게로 요크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구스프리드슨은 941년에 사망하여 에드먼드가 손실을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 942년에 그는 파이브 보로를 되찾았고, 그의 승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시로 기념되었다.
:여기 잉글랜드의 주, 에드먼드 왕,
:친족의 수호자, 사랑받는 행위의 선동자,
:도르 강으로 경계를 이루는 머시아를 정복했다
:휘트웰 갭과 험버 강
:넓은 대양; 다섯 보로:
:레스터와 링컨,
:그리고 노팅엄 역시 스탬퍼드도
:그리고 더비. 그 이전에는 데인족이
:노르만족 아래에 있었고, 강제로 복종했다
:이교도의 포로 족쇄에서,
:다시 구원될 때까지 오랫동안,
:에드워드의 아들의 영예를 위해,
:전사의 보호자, 에드먼드 왕.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10세기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는 잉글랜드 민족주의와 웨스트 색슨 왕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이 경우 기독교 잉글랜드인과 데인족이 노르웨이(노르드) 이교도에 대한 승리적인 반대 속에서 에드먼드 아래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스턴턴은 이 시가 15년 동안 에델스탄의 통치를 받은 후 동부 머시아의 데인족이 스스로를 잉글랜드 왕의 정당한 신하로 여기게 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무엇보다도 데인족과 노르만족 사이의 적대감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대 작가들이 종종 무시하지만 이 시대 잉글랜드 전체 역사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영어로 된 최초의 정치시이며, 그 저자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그 시가 동시대의 것이 아니고, 동시대인들이 그들의 상황을 그러한 방식으로 보았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며 회의적이다. 같은 해에 에드먼드는 북부 머시아의 대규모 토지를 유력 귀족인 검은색 울프시게에게 양도하여, 바이킹에 저항하는 데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데인로에서 지지자들에게 토지를 양도하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다.
구스프리드슨의 뒤를 이어 요크의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사촌 안라프 시흐트릭슨으로, 943년에 에드먼드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이는 그가 웨스트 색슨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시흐트릭슨은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지만, 그에게는 요크에 경쟁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안라프 구스프리드슨의 형제이자 에드먼드의 후원을 받아 세례를 받은 라그날과 다른 알려지지 않은 시흐트릭슨이라는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동전이 발행되었다. 세 사람의 동전은 모두 동일한 디자인으로 발행되었으며, 이는 공동 권위를 시사할 수 있다. 944년에 에드먼드는 요크의 바이킹 통치자들을 추방하고, 이전에 바이킹을 지지했던 울프스탄 대주교와 940년에 에드먼드가 임명한 머시아의 앨더만, 아마도 에텔문드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장악했다.
에드먼드가 사망했을 때, 그의 후계자 에드레드는 954년까지 최종적으로 패배하지 않은 노섬브리아에서 추가적인 반란에 직면했다. 밀러의 견해에 따르면, 에드먼드의 통치는 "에델스탄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했지만, 여전히 진정한 통일 잉글랜드의 일부가 아니었고, 에드레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도 그렇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한다. 노섬브리아인들의 반복적인 반란은 그들이 분리주의적 야망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연속적인 남부 왕들의 압력 하에서만 포기했다. 애설스탄과 달리 에드먼드와 에드레드는 거의 항상 브리튼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노섬브리아를 통제하지 못하는 시기에도 '잉글랜드의 왕'으로 자신을 묘사하기도 했다. 헌장에서 에드먼드는 때때로 940년과 942년에 "앵글로-색슨족의 왕"이라는 더 낮은 칭호로 자신을 부르기도 했으며, 945년에 노섬브리아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은 후에야 브리튼 전체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폐에 Rex Totius Britanniae|라틴어|전 브리타니아의 왕la이라고 자신을 묘사한 적이 없다.
4. 통치와 업적
에드먼드는 애설스탄의 유럽 대륙 정책을 계승하여, 특히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동프랑크의 왕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와의 동맹을 유지했다.[1] 940년대 초, 일부 노르만족 영주들이 덴마크 왕자 하랄 블루투스에게 루이 4세를 상대로 도움을 요청했고, 945년 하랄은 루이를 사로잡아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겼다. 에드먼드와 오토는 이에 항의하며 루이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고, 결국 위그는 라옹을 넘겨주는 대가로 루이를 풀어주었다.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수도원 부흥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베네딕토회 개혁은 에드거 치세에 절정에 달했지만, 에드먼드의 통치는 그 초기 단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플뢰리 수도원과 같은 대륙 개혁 중심지와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다와 앨프해아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 글래스턴베리는 던스턴과 에설월드가 베네딕토회 텍스트를 연구하며 수도원 개혁을 전파하는 첫 중심지가 되었다.
에드먼드 1세는 법 개혁에도 힘써 세 가지 법전을 남겼다. 이 법전들은 각각 I 에드먼드, II 에드먼드, III 에드먼드로 불린다.[1] I 에드먼드는 교회 문제, II 에드먼드와 III 에드먼드는 공공 질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II 에드먼드는 혈투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III 에드먼드는 절도, 특히 가축 절도를 방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4. 1. 노섬브리아 재정복과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브루난부르 전투는 잉글랜드를 통일 왕국으로 파멸로부터 구원했고, 에드먼드가 왕위에 순조롭게 오르는 데 기여했지만, 그가 왕이 된 후 그의 통치에 대한 도전을 막지는 못했다.[1] 에델스탄의 죽음은 요크 바이킹들이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패배한 바이킹 세력을 이끈 더블린 왕국의 왕 안라프 구스프리드슨의 왕권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했다. ''ASC D''에 따르면 "여기서 노섬브리아인들은 그들의 약속을 저버리고 아일랜드에서 온 안라프를 그들의 왕으로 선택했다."
안라프는 939년 말까지 요크에 있었고, 이듬해에는 에드워드와 에델플레드가 정복한 요크 왕국의 남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동부 머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노샘프턴으로 진군했지만 격퇴되었고, 이후 고대 머시아 왕실 중심지인 태무스워스를 공격하여 양측 모두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에드먼드 휘하의 군대에 레스터에서 붙잡혔지만, 바이킹을 대신하여 요크의 대주교 울프스탄과 아마도 잉글랜드를 위해 행동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레스터에서 조약을 맺어 파이브 보로인 링컨, 레스터, 노팅엄, 스탬퍼드 및 더비를 구스프리드슨에게 양도했다. 이는 10세기 초 에드워드 장로가 바이킹 정복을 되돌리기 시작한 이후 잉글랜드에게 첫 번째 심각한 좌절이었으며, 역사가 프랭크 스턴턴은 이를 "수치스러운 항복"이라고 묘사했다. 구스프리드슨은 잉글랜드 표준보다 낮은 바이킹 무게로 요크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구스프리드슨은 941년에 사망하여 에드먼드가 손실을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 942년에 그는 파이브 보로를 되찾았고, 그의 승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시로 기념되었다. 이 시는 잉글랜드 민족주의와 웨스트 색슨 왕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기독교 잉글랜드인과 데인족이 노르웨이(노르드) 이교도에 대한 승리적인 반대 속에서 에드먼드 아래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스턴턴은 이 시가 15년 동안 에델스탄의 통치를 받은 후 동부 머시아의 데인족이 스스로를 잉글랜드 왕의 정당한 신하로 여기게 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무엇보다도 데인족과 노르만족 사이의 적대감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대 작가들이 종종 무시하지만 이 시대 잉글랜드 전체 역사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영어로 된 최초의 정치시이며, 그 저자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그 시가 동시대의 것이 아니고, 동시대인들이 그들의 상황을 그러한 방식으로 보았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며 회의적이다.
같은 해에 에드먼드는 북부 머시아의 대규모 토지를 유력 귀족인 검은색 울프시게에게 양도하여, 바이킹에 저항하는 데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데인로에서 지지자들에게 토지를 양도하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다.
구스프리드슨의 뒤를 이어 요크의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사촌 안라프 시흐트릭슨으로, 943년에 에드먼드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이는 그가 웨스트 색슨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시흐트릭슨은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지만, 그에게는 요크에 경쟁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안라프 구스프리드슨의 형제이자 에드먼드의 후원을 받아 세례를 받은 라그날과 다른 알려지지 않은 시흐트릭슨이라는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동전이 발행되었다. 세 사람의 동전은 모두 동일한 디자인으로 발행되었으며, 이는 공동 권위를 시사할 수 있다. 944년에 에드먼드는 요크의 바이킹 통치자들을 추방하고, 이전에 바이킹을 지지했던 울프스탄 대주교와 940년에 에드먼드가 임명한 머시아의 앨더만, 아마도 에텔문드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장악했다.
에드먼드가 사망했을 때, 그의 후계자 에드레드는 954년까지 최종적으로 패배하지 않은 노섬브리아에서 추가적인 반란에 직면했다. 밀러의 견해에 따르면, 에드먼드의 통치는 "에델스탄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했지만, 여전히 진정한 통일 잉글랜드의 일부가 아니었고, 에드레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도 그렇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한다. 노섬브리아인들의 반복적인 반란은 그들이 분리주의적 야망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연속적인 남부 왕들의 압력 하에서만 포기했다. 에델스탄과 달리 에드먼드와 에드레드는 거의 항상 브리튼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노섬브리아를 통제하지 못하는 시기에도 '잉글랜드의 왕'으로 자신을 묘사하기도 했다. 헌장에서 에드먼드는 때때로 940년과 942년에 "앵글로-색슨족의 왕"이라는 더 낮은 칭호로 자신을 부르기도 했으며, 945년에 노섬브리아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은 후에야 브리튼 전체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폐에 Rex Totius Britanniaela라고 자신을 묘사한 적이 없다.
940년대 초, 일부 노르만족 영주들은 덴마크의 왕자 하랄 블루투스에게 서프랑크의 루이 4세를 상대로 도움을 요청했고, 945년 하랄은 루이를 사로잡아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그를 포로로 감금했다. 에드먼드와 동프랑크의 왕이자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오토 1세는 모두 항의하며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는 위그에게 라옹 마을을 넘겨주는 대가로만 이루어졌다.
4. 2. 웨일스와의 관계
에드먼드는 애설스탄에게서 웨일스 왕들에 대한 종주권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북웨일스의 기네드 왕 이드왈 포엘은 에드먼드의 초기 약점을 이용하여 충성을 보이지 않았다. 캄브리아 연대기la에 따르면, 그는 942년에 잉글랜드인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는 그가 안라프 구스프리손을 지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942년과 950년 사이 그의 왕국은 남웨일스의 데헤우바르스 왕 하웰 다에게 정복되었다. 토마스 찰스-에드워즈는 하웰 다를 "그 시대의 모든 왕들 중 '영국 황제'의 가장 확고한 동맹"으로 묘사한다.[1] 잉글랜드 헌장에 대한 웨일스 왕들의 증언은 애설스탄 치세에 비해 드물지만, 역사가 데이비드 덤빌은 에드먼드가 웨일스 왕들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944년 데번의 토지를 처분하는 헌장에서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왕이자 이 영국 지방의 통치자"로 불렸는데, 이는 이전의 영국 왕국인 덤노니아가 여전히 잉글랜드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4. 3. 대륙과의 관계
에드먼드는 애설스탄에게서 강력한 유럽 대륙과의 관계를 물려받았다. 에드먼드의 누이들은 외국 왕이나 공작과 결혼하여 이러한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1] 에드먼드는 형의 유럽 대륙 정책을 이어받아 동맹을 유지했는데, 특히 조카인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동프랑크의 왕이자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오토 1세와 동맹을 맺었다. 루이는 오토의 조카이자 매형이었으며, 오토와 에드먼드는 매형과 처남 사이였다.[1] 에드먼드와 유럽 대륙의 통치자들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광범위한 외교적 접촉이 거의 확실하게 있었지만, 오토가 에드먼드의 궁정에 사절단을 보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940년대 초, 일부 노르만족 영주들은 덴마크의 왕자 하랄 블루투스에게 루이를 상대로 도움을 요청했고, 945년 하랄은 루이를 사로잡아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그를 포로로 감금했다. 에드먼드와 오토는 모두 항의하며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는 위그에게 라옹 마을을 넘겨주는 대가로만 이루어졌다.
에드먼드의 이름은 스위스 페퍼스 수도원의 친교 기록에 기재되어 있는데, 아마도 팔리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머물렀던 오다 대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이는 에텔스탄의 통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영국과 유럽 대륙 성직자 간의 광범위한 접촉에 대한 드물게 남아있는 증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4. 4. 국내 정책과 수도원 부흥
10세기에 통용되던 유일한 동전은 페니였다.[1] 에드먼드 통치 시기의 주요 동전 디자인은 H(수평)형으로, 앞면에는 십자가 또는 기타 장식이 있고 그 주위에는 왕의 이름을 포함한 원형 비문이 있으며, 뒷면에는 주전원(moneyer)의 이름이 가로로 적혀 있었다. 에드워드 장로의 통치 이후 에텔스탄 시대에 동전의 무게가 약간 감소했고, 약 940년 이후에는 악화가 심해져 973년경 에드거의 주화 개혁까지 이어졌다.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 동안 주화의 지역적 다양성이 증가했으며, 이는 에드거 통치 초기에 디자인이 비교적 통일될 때까지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10세기의 주요 종교 운동인 잉글랜드 베네딕토회 개혁은 에드거 치세에 절정에 달했지만, 에드먼드의 통치는 초기 단계에서 중요했는데, 이는 모두 수도승이었던 오다와 앨프해아가 이끌었다. 오다는 특히 플뢰리 수도원과 같은 대륙 개혁 센터와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던스턴은 개혁의 핵심 인물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될 예정이었고, 왕은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후 마음을 바꿔 그에게 글래스턴베리에 왕실 영지, 즉 수도원을 하사했다. 그는 또 다른 미래의 개혁 지도자인 에설월드와 합류하여 다음 10년 동안 글래스턴베리에서 베네딕토회 텍스트를 연구하며 수도원 개혁을 전파하는 첫 번째 중심지가 되었다.
에드먼드는 945년 스코틀랜드로 가는 길에 체스터-리-스트 교회에서 성 커스버트의 성지 순례를 했다. 그는 성지에서 기도했고 자신과 그의 군대를 성인에게 칭찬했다. 그의 부하들은 성지에 60파운드를 기증했고, 에드먼드는 성인의 몸에 금 팔찌 두 개를 걸고 값비싼 pallia graecala(그리스 천) 두 개로 감쌌다. 그는 또한 "성 커스버트의 모든 영토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평화와 법을 부여했다".
종교 부흥의 또 다른 징후는 종교 생활을 선택한 귀족 여성들의 수였다. 몇몇 여성들은 에드먼드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윌턴 수도원의 후원자인 수녀 엘프기스와 에드먼드의 첫 번째 아내의 어머니인 윈플레드도 포함되었다. 애설스턴은 종교 여성에게 두 개의 영지를 하사했고, 에드먼드는 일곱 개의 그러한 하사를 했으며, 에드레드는 네 개의 하사를 했다. 이후 한 번의 추가 기부를 제외하고 그 관행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에드먼드의 아들 에드거의 치세에 에설월드와 그의 측근들은 베네딕토회 수도주의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 생활의 형태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에드먼드와 같은 이전 왕들의 견해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를 지원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종교 발전에 대한 특정 이념에 헌신하지 않았다. 브로뉴의 제라르가 944년 베네딕토회 규칙을 부과하여 생 베르탱 수도원을 개혁했을 때, 변화를 거부한 수도승들이 잉글랜드로 도망쳤고, 에드먼드는 그들에게 바스에 있는 왕실 소유의 교회를 주었다.
에델스탄 치세에 라틴어 학습이 부활했는데, 이는 대륙의 모델과 7세기 최고의 학자이자 셔본 주교인 알드헬름의 해석학적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이 부흥은 에드먼드 치세에도 이어졌고, 웨일스 서적 생산이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Historia Brittonumla(브리튼인의 역사)의 "바티칸" 교정본은 에드먼드 치세, 아마도 944년에 잉글랜드에서 제작되었다.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국내의 수도원 부흥이 시작되었다.
4. 5. 법률 정비
에드먼드 1세는 애설스탠의 전통을 이어받아 법 개혁을 추진하여 세 가지 법전을 남겼다. 이 법전들은 I 에드먼드, II 에드먼드, III 에드먼드라고 불린다.[1] 발행 순서는 명확하지만, 발행 날짜는 명확하지 않다. I 에드먼드는 교회 문제, 다른 법전은 공공 질서에 관한 것이다.
I 에드먼드는 에드먼드가 소집하고 대주교 오다와 울프스탄이 참석한 런던 의회에서 반포되었다. 이 법전은 이전에 오다가 반포한 "헌장"과 매우 유사하다. 독신 생활을 하지 않은 성직자는 재산을 잃고 성스러운 땅에 매장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교회 재산 반환에 관한 조항도 있었다. 살인자가 참회하지 않으면 국왕 근처에 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국왕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가 증가했음을 반영했다. 에드먼드는 마법과 우상 숭배에 관한 법을 반포한 몇 안 되는 앵글로색슨족 국왕 중 한 명이었으며, 이 법전은 거짓 증언과 마법 약물 사용을 비난했다. 위증과 마법 약물 사용의 연관성은 전통적이었는데, 아마도 둘 다 종교적 맹세를 어기는 것을 포함했기 때문일 것이다.
II 에드먼드에서는 국왕과 그의 고문들이 "우리 가운데 있는 다양한 불법 폭력 행위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한다"고 언급하며 "평화와 화합"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요 초점은 혈투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데 있다. 당국(witan|위탄ang)은 살인 이후의 앙갚음을 중단해야 한다. 살인자는 대신 피해자의 친척에게 wergeld|웨어길드ang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웨어길드가 지불되지 않으면, 살인자는 복수를 견뎌야 하지만, 교회와 왕실 영지에서 그에 대한 공격은 금지된다. 살인자의 친족이 그를 버리고 웨어길드에 기여하고 그를 보호하는 것을 거부하면, 그들은 복수에서 면제되는 것이 국왕의 뜻이다. 피해자의 친족 중 그들에게 복수하는 사람은 국왕과 그의 친구들의 적대감을 겪게 되며 모든 재산을 잃게 된다. 역사가 도로시 화이트록은 앙갚음을 통제하기 위한 법률의 필요성이 부분적으로 보상금을 받아 분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복수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남자답다고 믿었던 덴마크 정착민들의 유입 때문이라고 보았다. 몇몇 스칸디나비아 차용어가 이 법전에서 처음 기록되었는데, 예를 들어, 집을 공격하는 범죄인 hamsocn|함소츤ang이 있으며, 처벌은 가해자의 모든 재산 몰수이며, 국왕은 그가 생명을 잃을지도 결정한다. 스칸디나비아 차용어는 에드먼드의 다른 법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이것은 그의 덴마크 신민들을 특별히 겨냥했을 수 있다. 폭력 수준에 대한 에드먼드의 우려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절도 억제에 성공한 그의 백성을 칭찬했다. 이 법전은 법을 준수하는 데 더 큰 지역적 주도성을 장려하는 동시에 에드먼드의 왕실 존엄성과 권위를 강조한다.
앵글로색슨족 국왕과 그들의 지도자들 간의 관계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국왕은 충성과 복종의 서약을 대가로 영주이자 보호자였으며, 이는 카롤링거 왕조 법을 바탕으로 한 용어로 III 에드먼드에서 처음 명시되었으며, 데번 주 콜리턴에서 발행되었다. 이는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거룩한 것이 거룩한 분 앞에서 맹세할 것이며, 어떤 분쟁이나 불화 없이,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그가 좋아하는 것을 옹호하고, 그가 싫어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국왕 에드먼드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신성한 보복의 위협은 법을 어기고 불충한 행위를 처벌할 강제력이 제한적인 사회에서 중요했다. 군사 역사가 리처드 아벨스는 "모두"(omnes|옴네스la) 맹세해야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샤이어 법원에서 왕실 관리들이 시행하는 맹세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 즉 중간 및 대규모 토지 소유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에드먼드의 맹세는 그들 모두를 그에게 개인적으로 묶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합했다고 주장한다. 영주에 대한 강조는 영주가 추종자들을 책임지고 그들을 보증할 의무를 규정하는 조항에서도 더 잘 나타난다.
III 에드먼드는 또한 절도, 특히 가축 절도를 방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지역 사회는 도둑을 잡는 데 협력해야 하며,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훔친 가축을 추적하는 것을 지원해야 하며, 거래는 고위 리브, 사제, 재무 또는 포트리브에 의해 증명되어야 했다. 법률 역사가 패트릭 워몰드가 끔찍하다고 묘사한 조항에 따르면, "우리는 노예에 관해, 그들 중 여러 명이 절도를 저지르면, 그들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죽이거나 교수형에 처하고, 다른 각자는 세 번 채찍질을 당하고 두피를 제거하고 죄의 증표로 새끼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법전은 hundred을 지방 정부의 행정 단위로 언급한 최초의 사례이며, 도둑 체포를 돕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국왕에게 120 실링, hundred에 30 실링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윌리엄스는 "두 번째 법전과 콜리턴 법전에서 중세 사회의 네 기둥, 즉 국왕, 영주, 가족, 이웃의 기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언급한다. 워몰드는 이 법전을 "앵글로색슨족 법률 텍스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묘사하지만, 그는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특히 살인을 왕실 인격에 대한 모욕으로 취급하는 확대된 수사적 어조가 그렇다. 역사가 알라릭 트루스데일은 "지방 행정 기관에 대한 명시적인 자금 지원과 법 집행에 있어서 지방 관리의 권한 강화"를 에드먼드의 법률의 독창적인 기여로 본다. 에드먼드는 그의 손자 애설레드 2세의 법률에 과거의 현명한 법률 제정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되어 있다.
5. 암살과 계승
946년 5월 26일, 에드먼드는 글로스터셔의 퍼클처치에서 일어난 싸움에서 사망했다.[1] 노르만 정복 이후의 연대기 작가인 우스터의 존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영국의 왕인 영광스러운 에드먼드가 영어로 퍼클처치라고 불리는 왕실 마을에 있었는데, 그가 죽을까 봐 가장 사악한 도둑인 레오파로부터 그의 집사를 구하려다가, 5년 7개월의 통치를 마치고 화요일인 5월 26일, 영국의 스승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축일에 같은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글래스턴베리로 옮겨져 성 던스턴 수도원에 묻혔다.
역사가 클레어 다운함과 케빈 할로란은 우스터의 존의 설명을 일축하고 왕이 정치적 암살의 희생자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30년 후 그의 아들 에드거처럼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 묻혔다. 이 위치는 수도원의 영적 명성과 왕실의 수도원 개혁 운동 지지를 반영했을 수 있지만, 그의 죽음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던스턴이 시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에드먼드의 아들들은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그의 동생 에드레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레드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955년에 에드먼드의 장남 에드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946년, 에드먼드는 추방된 도적 레오파(Leofa)에게 Pucklechurch영어에서 미사를 하고 있을 때 살해당했다. 에드먼드는 군중 속에서 레오파를 발견했다. 레오파는 떠나기를 거부했고, 에드먼드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에드먼드와 레오파는 함께 죽었다.
에드먼드의 왕위는 동생 에드레드가 계승했다. 에드레드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에드레드 다음에는 에드먼드의 아들들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 에드위 (재위: 955년 - 957년)
- 에드거 (재위: 957년 - 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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