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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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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순항 포위전은 1904년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러시아 제국의 여순항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러시아 제국이 랴오둥 반도를 조차하여 여순항을 군사 기지로 건설하고 태평양 함대의 근거지로 삼자,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고아 고지, 174고지, 203고지 등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참호전과 갱도전을 통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203고지 점령 이후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에 대한 포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결국 러시아군은 1905년 1월 항복했다. 이 전투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러일 전쟁의 전세를 일본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어 지휘부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며, 고다마 겐타로의 역할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여순항 포위전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으로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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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일본 포위선 근처에서 폭발하는 러시아 500파운드 포탄, 포트 아서 근처
일본 포위선 근처에서 폭발하는 러시아 500파운드 포탄, 포트 아서 근처
분쟁러일 전쟁
기간1904년 8월 1일 – 1905년 1월 2일
장소뤼순커우 구(포트 아서, 현대 중국)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일본노기 마레스케
고다마 겐타로
이지치 코스케
나카무라 사토루
도고 헤이하치로
러시아아나톨리 스테셀
로만 콘드라첸코
알렉산드르 포크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로베르트 비렌
병력 규모
일본201,000명
150,000명 (병력)
51,000명 (예비군)
474문 (포)
러시아101,000명
50,000명 (병력)
44,000명 (자원병)
12,000명 (해군)
7,000명 (신병)
506문 (포)
사상자 및 손실
일본91,549명
57,780명 (육군 사상자)
33,769명 (병)
전함 2척, 순양함 4척 포함, 군함 16척 손실
러시아55,675명
31,306명 (육군 사상자)
24,369명 (포로)
전체 함대 손실
지리 정보

2. 배경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러시아군이 주둔하던 남만주 일대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중 한 곳은 여순항으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유일한 극동 부동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10]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 본토와 한반도만주 사이의 보급로 안전 확보가 필요했으며, 한반도 주변 해역의 제해권 장악을 위해 뤼순 함대의 완전 무력화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또한 뤼순 요새에 갇힌 러시아 육군 세력(2개 사단)은 만주 남부에서 예상되는 결전에 나서는 일본군 (만주군)의 배후(및 보급에 중요한 다롄)에 대한 위협이었으므로, 봉쇄 또는 무력화가 필요했다.

1898년 랴오둥반도조차한 러시아는 뤼순커우를 태평양 함대(후의 제1태평양 함대) 주력 함대 (뤼순 함대)의 근거지로 삼고, 항만을 둘러싼 산들에 본격적인 영구 요새를 건설했다. (뤼순 요새)[11]

3. 전투 과정

일본 제3군의 진격
파란 선: 7월 30일, 빨간 선: 8월 15일, 노란 선: 8월 20일, 녹색 선: 1월 2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주변 해역의 제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뤼순커우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러시아 뤼순 함대를 무력화해야 했다. 또한 뤼순 요새에 갇힌 러시아 육군 세력은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었기에 봉쇄 또는 무력화가 필요했다.[10]

일본 해군은 뤼순 함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항구 봉쇄 작전을 실행했지만,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04년 5월, 러시아가 발틱 함대의 극동 파견을 결정하면서 상황은 더욱 긴박해졌다. 발틱 함대가 뤼순 함대와 합류하면 일본 해군은 수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되어 전쟁 지속이 어려워질 수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뤼순 함대가 증원되기 전에 격멸해야 했고, 해군은 육군의 뤼순 참전을 요청하게 되었다. 제3군은 5월 29일에 편성되어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3군의 주요 임무는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고, 병력을 보전하여 다른 일본군 부대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뤼순 요새는 원래 청나라의 군항이었으나, 러시아가 조차하면서 요새화되었다. 요새는 여러 개의 보루참호, 포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콘크리트로 강화되었다. 러시아군은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관동군을 신설하고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투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초기 공세 (1904년 8월): 일본군은 고아 고지를 점령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는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함대에 격침되었다.
  • 포위 및 참호전 (1904년 9월 ~ 11월): 일본군은 28cm 곡사포를 동원하여 요새를 포격하고, 참호와 터널을 파는 갱도전에 집중했다.
  • 203 고지 전투 (1904년 11월 ~ 12월): 뤼순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203고지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고지를 점령했고, 이를 통해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켰다.[1][2]
  • 러시아군의 항복 (1905년 1월): 203 고지 함락과 함대 괴멸로 러시아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은 항복을 결심하고, 1905년 1월 2일 항복 협상이 마무리되었다.[1]


항복 직후 노기 마레스케(중앙 왼쪽)과 아나톨리 스테셀(중앙 오른쪽)과 그들의 휘하 장교들

3. 1. 초기 공세 (1904년 8월)

1904년 8월 7일, 일본군은 120mm 포로 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 함대는 해안 포격에 참여하며 북동쪽에 있는 약 604m 높이의 고아 고지(타쿠산, 큰 고아 언덕)와 샤오쿠산(작은 고아 언덕)을 공격했다.

고아 고지는 급경사였고 러시아군이 설치한 장애물 때문에 진격이 어려웠다. 8월 7일 아침부터 밤까지 포병 공격을 했지만, 강의 범람과 집중호우로 많은 병사들이 익사하고 러시아군의 기관총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8월 8일 노기 마레스케가 다시 포병 공격을 하여 러시아 방호순양함 노비크에 큰 피해를 입혔고, 20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8월 9일 일본군은 고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23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로 인해 여순항에 갇힌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위험해졌다.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8월 10일 황해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격침당하고 전사했다.

8월 11일 러시아군은 병력 후퇴를 위해 임시 휴전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8월 14일 떠나기로 결정했다. 8월 13일 노기 장군은 늑대 고지에서 러시아 정찰 기구 격추에 실패하고 러시아 포병의 조정 부족을 알게 되어, 174 고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일본군은 항복을 요구했으나 러시아군은 거부하고 8월 19일 새벽 공격을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남산 전투를 이끌었던 트레차코프 대령의 동시베리아 연대가 맡았다.

트레차코프 대령은 후퇴를 거부하며 참호에서 첫 번째 방어선을 지켰으나, 8월 20일 원군이 오지 않아 병력의 절반이 전사, 부상, 탈영하여 혼란에 빠졌고, 일본군의 대공세로 고지는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1,800명, 러시아군은 1,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8월 24일 노기 장군은 174 고지 동부와 서부의 웬타이 계곡으로 병력을 파견했으나 8월 25일 대패했다. 그 시기 오야마 이와오 장군은 랴오양 전투에서 알렉세이 쿠로파트킨이 이끄는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3. 2. 포위 및 참호전 (1904년 9월 ~ 11월)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여순항 요새에 대한 직접 공격보다는 요새 아래 콘크리트 벽을 폭파하고 참호와 터널을 만드는 갱도전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병력과 대포를 보강하고, 거대한 약 27.94cm 28cm 곡사포를 곳곳에 설치했다.[12] 1904년 6월 15일 러시아 순양함에 의해 침몰한 ''히타치마루''에 실려 있던 포대를 대체하기 위해 약 27.94cm 28cm 곡사포 포대가 도착했다. 이 곡사포는 227kg 포탄을 9km 이상 날려 보낼 수 있었으며, 러시아 요새 공격에 필요한 화력을 제공했다.[12] 러시아 군인들은 이 거대한 포탄을 "울부짖는 기차"라고 불렀으며, 여순항에서 35,000발 이상 발사되었다.[12]

여순항 포위전 당시 일본 28cm 곡사포


여순항 지도


9월 중순까지 일본군은 8km 이상의 참호를 파고 수도 시설 레드우트에서 70m 이내로 접근하여, 1904년 9월 19일에 이 레드우트를 공격하여 점령했다.[12] 그 후 템플 레드우트를 점령하고, 나마코야마와 203 고지를 공격했으나, 러시아군의 기관총과 대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12] 203 고지 전투는 며칠 더 계속되었으며, 일본군은 매일 발판을 확보했지만 매번 러시아 반격에 밀려났다. 노기 장군은 3,5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시도를 포기했다.[12]

1904년 10월 29일,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맞아 203 고지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6일간의 백병전 끝에 실패하고 124명의 장교와 3,611명의 병사를 잃었다.[12]

겨울이 시작되면서 일본군은 18문의 암스트롱 약 27.94cm 곡사포를 추가로 지원받았고, 450문의 다른 대포에 추가했다. 일본군 화력 통제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으며, 포병 부대는 수 마일에 달하는 전화선을 통해 야전 사령부와 연결되었다.[12]

제1차 총공격이 실패한 후, 도쿄만 요새 및 게이요 요새에 배치되어 있던 구식 대함 공격용 28cm 곡사포(당시에는 28cm포라고 불림)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28cm 곡사포는 10월 1일, 구 시가지와 항만부에 포격을 시작했다. 10월 20일에 점령한 남산포산을 관측소로 하여 만 내의 함선에도 명중탄을 안겨 피해를 입혔다.[33] 최종적으로 18문이 투입되었다[34]

10월 18일, 제3군은 이룡산(二龍山) 보루와 송수산(松樹山) 보루의 동시 공략 계획을 수립했다. 10월 30일, 공성 포병의 사전 포격 후, 제2연대는 송수산 보루로의 돌격을 시작했지만, 외호 돌파에 시간이 걸리는 사이에 큰 손해를 입어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42] 그 때문에 외호 외곽에서부터 갱도 작업을 시작했지만, 공격 준비 완료까지 기일이 소요될 상황이 되었다.[42]

제9사단은 우익대의 보병 제19연대가 이룡산 보루의 사제 참호(散兵壕)를 점령하고 갱도 굴진을 시작했다.[40] 이룡산 보루에서는 송수산과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의 갱도전이 전개되었다.

11월 중순에 반룡산·일호 양 보루로부터 양측의 이룡산과 동계관산 보루의 직하까지 참호를 파는 데 성공하고, 더 나아가 중턱에서 터널을 파서 흉벽과 외곽 측면 방어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3. 3. 203 고지 전투 (1904년 11월 ~ 12월)

1904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벌어진 203고지 전투는 여순항 포위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203고지는 뤼순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본군과 러시아군 모두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1]

1904년 12월 14일의 203 고지


2004년 203 고지 정상에서 본 뤼순항


9월 중순, 일본군은 8km의 참호를 파고 203고지로 병력을 이동시켰으나, 러시아군의 포격과 기관총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0월 29일,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맞아 재공격을 감행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냈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겨울이 되자 일본군은 280mm 곡사포를 추가로 배치하고, 러시아 발트 함대가 이동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203고지 공격을 서둘렀다. 아나톨리 스테셀 총장과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은 203고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방어를 강화했다.

11월 26일, 일본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러시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4,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11월 28일, 대규모 포병 지원과 함께 재차 공격을 감행했으나, 러시아군의 수류탄과 기관총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2월 5일, 일본군은 지속적인 포격 지원과 함께 여러 차례의 공격 끝에 203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두 아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2]

203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뤼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12월 5일, 폴타바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했고, 12월 7일에는 레트비잔이 포탄을 맞아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12월 9일에는 포베다, 퍼레스비트, 순양함 팔라다, 바얀 등이 파괴되었다.

팔라다가 포격을 받자 유류 창고가 불타고 있다.


포베다와 팔라다


이후 1905년 1월, 뤼순항에서 탈출한 세바스토폴의 함장 니콜라이 폰 에센이 항복하면서, 뤼순항에 있던 대부분의 러시아 함선이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3. 4. 러시아군의 항복 (1905년 1월)

203고지 함락과 제1태평양 함대의 괴멸은 뤼순항의 러시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몇 주 동안 다른 고지에서 저항이 이어졌지만, 여순 요새 사령관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은 사실상 전투 의지를 잃었다. 12월 6일에는 203고지 부근 포대에서 수비대가 철수하면서 주변 요새들이 고립되었다.

12월 7일, 스테셀 중장은 작전 회의를 소집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했다. 203고지 함락으로 주요 포대와 보루들이 일본군의 정확한 포격에 노출되어 부상병이 속출했다. 일본 제3군은 공병대가 땅굴을 파고 폭약을 설치하여 보루를 파괴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12월 15일 콘트라첸코 소장의 전사로 여순 요새 방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12월 28일, 이룡산 포대가 함락되면서 스테셀 중장은 절망에 빠졌고, 12월 31일에는 송수산 보루와 포대들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마침내 1905년 1월 1일, 스테셀 중장은 항복을 결심했다. 그는 더 이상의 저항은 막대한 희생만 낼 뿐이라고 판단하고, 영어로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당시 국제 공용어는 프랑스어였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어가 더 익숙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항복 문서를 든 견습사관은 일본군과 조우했고, 이지치 고스케 소장과 참모장 레이스 대령을 대표로 하여 항복 교섭이 시작되었다. 1905년 1월 2일 16시 35분, 수사영에서 항복 협상이 마무리되었다.[1]

4. 결과 및 영향

여순항 함락은 러일 전쟁의 전세를 일본에게 유리하게 기울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봉천 전투,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하며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190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일 전쟁은 종결되었다.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랴오둥 반도 조차권, 남만주 철도 부설권 등 만주에서의 이권을 획득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8]

노기 마레스케가 이끈 일본 제3군은 여순항 포위전에서 러시아군보다 5배가 넘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특히 장교의 손실이 커서 전투 종료 시까지 온전히 살아남은 이들이 겨우 10명에 불과했다.[8]

전쟁이 끝난 후, 노기 마레스케는 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보고하며 많은 희생에 대해 사죄하고 자결을 요청했으나, 천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기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 직후 할복 자살했다.[9]

여순 요새의 함락으로 여순 함대는 무력화되었다.

일본군은 공성전 경험이 부족하여 초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 갱도전 교범도 부족했고, 기관총 운용도 미숙했다. 그러나 여순에서의 경험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요새 공략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05년 1월, 블라디미르 레닌은 여순 함락을 "러시아 전제의 역사적인 파국"으로 규정했다.[80] 여순 함락은 러시아 내 피의 일요일 사건과 러시아 제1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5. 논란 및 비판

제1차 총공격에서 일본군은 전사 5,017명, 부상 10,843명이라는 큰 피해를 보았고, 러시아군은 전사 1,500명, 부상 4,500명의 피해를 보았다.[22] 일본군은 거의 한 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을 잃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태평양 함대의 해군 장병들로 육전대를 편성하고, 함선의 중소구경 포 일부를 육상으로 올려 육군 부대를 증원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5. 1. 일본군 지휘부에 대한 비판

노기 마레스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지휘부는 여순항 포위전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특히 초기 공격에서 보병 돌격 전술에만 의존하여 많은 병력을 잃은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1] 일각에서는 203고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요새 정면에 대한 공격에만 집중한 것이 비효율적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3]

당시 종군 기자였던 스탠리 워시번은 203고지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제7사단을 집중 투입하는 방향으로 제3군의 군의를 정리한 것은 노기였다고 평가했다.[83] 그러나 최근에는 새로운 자료와 제3군 관계자의 증언 등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 제1차 총공격 이후 공격법을 강습에서 참호를 파고 들어가 아군의 손해를 줄이는 정공법으로 전환했다.[12]
  • 여순 공략의 주목적이 "함대 격멸"이었다는 것은 오류이며, 당시 제3군의 중포에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13]
  • 203고지는 이미 난산 전투 이후 방어 강화 공사가 시작되었고, 제1차 총공격 시점에서 일본군의 포격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했다.[1]


그 외에도, 육군이 모범으로 삼았던 프랑스와 독일 육군도 요새 공략의 기본은 기습이나 강습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22] 명령 체계 및 보급 문제 등이 지적되고 있다.

5. 2. 고다마 겐타로의 역할 논란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뤼순 공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여러 논란이 존재한다.

고다마 겐타로가 뤼순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일본군이 203고지를 공략하자, 기밀 일로전사는 이를 고다마의 공적으로 소개했다.[84] 그러나 벳큐 단로, 조난 마사요시, 하라 고 등은 저서를 통해 이러한 주장에 오류가 많다고 반박했다.[84]

고다마는 대본영과 해군의 재촉으로 실시된 제2차 총공격에 반대하고, 준비를 완전히 갖춘 후 동북 방면 공략을 지시했다. 그는 해군이 요청한 203고지 공략은 탄약 절약 차원에서 반대했다.

제3군이 제3차 총공격 도중 작전을 변경하여 203고지 공략을 결의했을 때, 만주군 총사령부는 반대했다. 총사령부에서 파견된 참모부 차장 후쿠시마 야스마사 소장은 제3군의 시라이 참모에게 설득당했다.

제3군 참모 대부분은 고다마와 당일 만나지 않고 전화 연락으로 대신했으며, 고다마가 전투 시찰 시 제3군 참모를 질책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고다마는 예비 병력으로 배치되어 있던 12cm 유탄포 15문과 9cm 곡사포 12문을 다카사키 산으로 옮겨 203고지를 지원하는 주변의 러시아 포대를 제압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공성 포병 사령부와 제3군 사령부도 파악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최근에는 제3군 사령부 측 사료를 통해 고다마가 뤼순에서 실제로 제3군의 작전에 지시를 내렸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한편, 203고지 공략에서 고다마의 관여가 적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하타 이쿠히코는 『203고지 공략 「노기·고다마 대결 장면」의 검증』[85]에서 이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가오카 가이시 회고록에는 여순 공략전에 대한 감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9월 중순까지 203고지에 참호만 있었을 뿐, 어떠한 설비도 없었다고 언급하며, 9월 22일 제1사단의 공격에서 조금만 더 분발했으면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6. 한국의 관점

2004년 러시아 우표 "포트 아서 영웅 방어 100주년" 기념 우표. 군사 훈장인 포트 아서 십자장을 묘사하고 있다.


여순항 포위전은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이다. 일본 제국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국화를 강요하고,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현대 한국의 진보 진영은 여순항 포위전을 비롯한 러일 전쟁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군 지휘부의 무능함과 무모함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인명 피해에 대해 비판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한다.[8]

또한, 일본이 여순항 포위전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결국 강제 병합에 이른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3] 서적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4] 서적 The Tide at Sunrise
[5] 서적 Warfare and Armed Conflicts, a statistical reference, Volume II 1900–91 McFarland
[6] 서적 Оборона Порт-Артура
[7] 서적 Port Arthur, the siege and capitulation, Volume 1
[8] 서적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Columbia University Press
[9] 웹사이트 Aftermath http://www.battlefie[...]
[10] 서적 近代日本戦争史 第一編 同台経済懇話会
[11] 서적 血風二百三高地 潮書房光人社
[12] 서적 血風二百三高地 潮書房光人社
[13] 서적 血風二百三高地 潮書房光人社
[14] 서적 血風二百三高地 潮書房光人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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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서적 血風二百三高地 潮書房光人社
[77] 웹사이트 『日本美術年鑑』昭和48年版(81頁) https://www.tobunken[...] 東京文化財研究所 2014-01-01
[78] 서적 日本工兵物語 原書房
[79] 서적 第一次世界大戦史 中公新書
[80] 서적 明石工作:謀略の日露戦争 丸善 1995-01-01
[81] 서적 日露戦争と新聞:「世界の中の日本」をどう論じたか 講談社 2009-01-01
[82] 서적 1999-01-01
[83] 서적 乃木大将と日本人 講談社学術文庫 1980-01-01
[84] 서적 2005-01-01
[84] 서적 2011-01-01
[85] 간행물 文藝春秋「坂の上の雲」日本人の勇気総集編(平成23年12月臨時増刊号) 文藝春秋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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