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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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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염단은 신나라의 인물로, 왕망 시대에 활동한 장군이다. 그는 태자의 사우로 임명되었으며, 남방 이민족 반란과 적미군 토벌에 참여했다. 남방 이민족 토벌에서는 역병으로 실패하고 장안으로 소환되었으며, 적미군과의 전투에서 부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광을 따라 출전했다가 패배하여 전사했다. 염단의 죽음을 애도하여 '과'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 행적

염단은 신나라의 장군으로, 염씨 가문은 대대로 한나라의 무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지황 3년(22년) 4월, 경시장군(更始將軍)·평균후(平均侯)가 된 염단은 태사(太師) 왕광과 함께 10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적미군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왕광과 염단은 진군 중에 부하들에게 방종을 일삼게 했고, 그 결과 "적미군을 만나더라도 태사(왕광)는 만나지 마라. 태사는 괜찮지만 경시(염단)에게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1]

정도(定陶)에 이르렀을 때, 왕망으로부터 창고의 양식과 나라의 재정이 바닥났으니 힘써 싸우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에 불안을 느낀 염단은 부하 풍연과 상의했는데, 풍연은 신나라를 버리고 독립하여 정세를 관망하자고 제안했지만 염단은 따르지 않았다. 같은 해 겨울, 무염(無鹽)에서 봉기한 삭로회(索盧恢)를 진압하여 (公)으로 승진하였다.[1]

이후 적미군의 동헌 별동대가 양군에서 활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왕광은 즉시 토벌하려 했다. 염단은 병사들의 휴식을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왕광은 듣지 않았고 염단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결국 성창(成昌)에서 동헌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고, 염단은 도망치는 왕광에게 자신의 인수와 부절을 넘겨주고 자신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 왕광은 염단의 죽음을 애도하여 과라는 시호를 내렸다.[1]

2. 1. 초기 관직 생활

시건국 3년(10년), 중랑장(中郞將) 염단은 어모(禦侮)에 임명되어 당림, 이충(李充), 조양(趙襄)과 함께 태자의 사우(四友)가 되었다.[1]

천봉 2년(15년), 남성장군(南城將軍)에서 영시장군(寧始將軍)으로 전임되었다.[1]

이듬해, 왕망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남방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평만장군(平蠻將軍) 풍무(馮茂)가 토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옥사하였고, 뒤이어 염단은 용부(庸部牧) 사웅(史熊)과 함께 천수, 농서의 기병 및 광한, 파군, 촉군, 건위의 관리 및 백성 10만 명을 동원하여 다시 토벌에 나섰다. 토벌군은 처음에 승기를 잡았으나, 역병이 돌아 결국 실패하고 염단은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같은 해에 대사마 장우흉노 정벌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장우가 정벌에 반대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다.[1]

2. 2. 남방 이민족 토벌

천봉 3년(16년), 왕망이 남방 민족인 구정의 수령을 왕에서 후로 격하하자, 구정을 비롯한 남방 민족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1] 왕망은 평만장군 풍무를 보내 토벌하게 했으나 실패하고 풍무는 투옥되어 사망했다. 이에 염단과 용부 사웅이 천수군·농서군의 기병, 광한군·파군·촉군·건위군의 관리·백성 10만 명을 동원하여 남방 민족 토벌에 나섰다.[1] 처음에는 승리했으나, 곧 염단의 군대도 역병 등으로 고통받았고, 결국 토벌에 실패하여 천봉 6년(19년)에 염단은 장안으로 소환되었다.[1]

2. 3. 적미군과의 전투와 최후

지황 3년(22년) 4월, 경시장군(更始將軍)·평균후(平均侯) 염단은 태사(太師) 왕광과 함께 10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적미군 토벌에 나섰다. 군세가 정도(定陶)에 이르렀을 때, 왕망으로부터 창고의 양식과 나라의 재정이 바닥났으니 힘써 싸우라는 서간을 받았다.[1] 염단의 부하 풍연은 신나라를 저버리고 할거하여 정세를 관망하자고 하였으나 염단은 듣지 않았다.[1] 같은 해 겨울, 무염(無鹽)에서 봉기한 삭로회(索盧恢)를 진압하여 (公)으로 승진하였다.[1]

적미군의 동헌 별동대가 양군에서 활동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고, 왕광은 바로 이를 토벌하려 하였다. 염단은 병사들을 쉬게 하자며 말렸으나 왕광은 듣지 않았고, 염단 또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곧 성창(成昌)에서 동헌과 싸웠으나 패하였고, 염단은 달아나는 왕광에게 인수와 부절을 넘기고 자신은 남아서 싸우다 죽었다.[1] 왕광은 염단의 죽음을 애도하여 과라는 시호를 내렸다.[1]

3. 출전


  • 반고한서
  • * 권95 서남이전
  • * 권99하 왕망전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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