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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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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목왕후는 조선 선조의 계비로, 1602년 왕비가 되어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낳았다. 선조 사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이 제거되고, 인목왕후는 서궁에 유폐되어 폐모론에 시달렸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 대왕대비로 복귀했으며, 말년에는 가족에게 왕실과의 혼인을 꺼리는 유언을 남겼다.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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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인목왕후
한글인목왕후 김씨
한자仁穆王后 金氏
로마자 표기Inmok Wanghu Gimssi
칭호
시호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
별칭소성왕대비
소성대왕대비
서궁
인목대비
생애
출생일1584년 12월 5일
출생 장소조선 한성부 반송방 사저
사망일1632년 8월 3일
사망 장소조선 한성부 인경궁 흠명전
매장지목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가족 관계
아버지김제남
어머니광산 노씨 광산부부인
배우자선조
자녀1남 1녀 (총 2녀)
장녀정명공주
아들영창대군 이의
왕비 책봉
즉위일1602년 8월 29일
폐위일1608년 3월 16일
전임 왕비의인왕후 박씨
후임 왕비폐비 유씨
왕대비
즉위일1608년 3월 17일
1623년 4월 13일
퇴위일1618년 3월 5일
1624년 10월 15일
전임 왕대비공의왕대비 박씨 (인성왕후)
의성왕대비 심씨 (인순왕후)
후임 왕대비자의왕대비 조씨 (장렬왕후)
대왕대비
즉위일1624년 10월 15일
퇴위일1632년 8월 13일
전임 대왕대비성렬대왕대비 윤씨 (문정왕후)
후임 대왕대비자의대왕대비 조씨 (장렬왕후)

2. 생애

1584년(선조 17년) 김제남의 둘째 딸로 태어나 많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602년(선조 35년), 정실인 의인왕후가 죽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쓴 선조와 18세의 나이로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2] 아버지 김제남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1603년(선조 36년) 정명공주를 낳았고, 1606년(선조 39년)에는 영창대군을 낳았다.[2] 선조에게는 정실 소생의 아들, 즉 적장자였기에 기대가 컸다. 그러나 이는 큰 재앙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후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측실 소생으로 인목왕후보다 11살 위인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1608년(선조 41년), 후계를 지명하지 않은 채 선조가 승하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의 세력은 일소되었고, 왕대비가 된 인목왕후는 경운궁에 유폐되어 아들과도 떨어지게 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영창대군은 유폐지인 강화도에서 살해(혹은 화형)당했고, 아버지 김제남역모죄사약을 받았으며, 인목왕후의 친족들은 각각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리고 인목왕후는 왕대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측실의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유폐된 곳을 따라 "서궁(西宮)"이라 불리며, 이爾瞻과 김개시를 비롯한 광해군 세력에게 모욕을 당하며 6년을 보냈다.

{{인용문-테두리|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려 서소문(西小門) 안에서 죽게 하였다.

:김제남이 사사당한 날에 그의 아내 노씨(盧氏)가 맨발로 대비가 거처하는 궁전의 담장 밖으로 가서

:울부짖으면서 대비의 어렸을적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아무개야, 아무개야. 어찌하여 너의 아비를 죽이는데 구해주지 않는단 말이냐.’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그러자 상(광해군)이 노씨를 집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집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노비 하나만을 데리고서 집을 부수어 끼니를 해먹었는데,

:도성 사람들 중에 더러 어둠을 틈타 쌀과 간장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병진년(1616년) 가을에 김제남을 소급해 형벌을 주고 노씨를 제주에다 8년 동안 안치해 두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67권,
광해 5년(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6월 1일 (무자)|align=center}}

{{인용문-테두리| 

:존호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과 옥보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르며,

(중략)


:서궁의 진배는 후궁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와 혼인은 옹주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상복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3권,
광해 10년(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1월 30일 (경인)|align=center}}

그동안 인목왕후의 궁녀가 그 유폐 생활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계축일기』를 저술했고, 이는 후에 궁중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1623년(광해군 15년) 3월, 궁중 쿠데타(인조반정)가 일어나, 인목왕후는 능양군(후의 인조)을 지지하는 서인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석방되고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대북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爾瞻과 김개시는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대해 살의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증오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인용문-테두리|
'''왕대비의 교서'''

  • ---{{인용문-따옴표|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중략)


:광해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align=center}}

1624년(인조 2년)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7]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유폐는 끝났다. 인목왕후와 딸은 창덕궁에서 생활하도록 허락받았고, 폐위 전의 칭호와 지위도 회복되었다.

인조 즉위 당시 21세였던 정명공주는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였기에 자신보다 어린 홍주원1623년에 결혼하여 7남 1녀를 두었다. 혜경궁 홍씨의 증조부가 된 정명공주의 손자 이야기는 정명공주 관련 내용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1632년(인조 10년) 6월 28일 승하하였다. 선조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목릉(穆陵)에 묻혀 있다.[1] 시호는 '''인목'''(仁穆)이며,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로 칭해졌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의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사망 전 인목왕후는 왕실 생활에 대한 유언을 가족들에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왕실의 며느리로서 겪었던 고통을 언급하며, 친정 식구들이 왕실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이 유언은 그녀의 8대질녀인 김수덕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김수덕 또한 불행한 정략결혼을 겪었다.[1]

2. 1. 가계와 왕비 책봉

인목왕후는 1584년(선조 17년) 11월 14일 연안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둘째 딸로 한성 한송방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김제남은 김오와 안동 권씨의 아들이며,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외조모인 노씨와 사촌지간이다. 김씨 가문은 양쪽 모두 왕실과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외할머니를 통해 정의옹주(貞懿翁主)의 외6대 증손녀이자 소헌왕후와 세종대왕의 외7대 증손녀였다. 어머니를 통해서는 6대 조부인 임영대군을 통해 세종소헌왕후의 외7대 손녀이기도 했다.

1602년(선조 35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선조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8세의 인목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였다.[2] 1603년(선조 36년) 정명공주를, 1606년(선조 39년) 영창대군을 낳았다.[2]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였기에 기대가 컸으나, 이는 큰 재앙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2. 2. 왕비 시절과 광해군과의 갈등

1602년 선조의 첫 번째 계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인목왕후는 19세의 나이로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목왕후보다 32세 연상이었으며, 인목왕후의 부모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이는 정순왕후와 영조의 51세 차이 다음으로 큰 나이 차이를 보이는 결혼이었다. 왕비가 된 후, 인목왕후의 아버지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Yeonheung Buwongun'')이라는 왕실 칭호를, 어머니는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Gwangsan Bubuin'')이라는 왕실 칭호를 받았다.

인목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을 당시, 선조는 이미 의인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했기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상태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김씨 숙의의 둘째 아들이었다. 광해군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사실상 조선의 통치자 역할을 했다.

1603년, 인목왕후는 정명공주를 낳았다. 1604년에는 또 다른 공주를 낳았으나, 그 아이는 같은 해 요절했다. 1606년에는 아들인 이의(李㼅)를 낳았는데, 그는 후에 영창대군으로 추봉되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과 그의 외척들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여 크게 동요했다. 법에 따라 왕비의 아들은 후궁의 아들보다 계승 순위가 높고 더 나은 주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와 그의 몇몇 신하들은 적장자를 세자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광해군이 이를 알아챘고, 선조는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인해 이러한 변화를 실행할 수 없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의 계승을 공고히 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대북은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들을 대규모 옥사를 일으켜 제거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년),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죄명으로 사사되었으며, 영창대군 또한 폐서인 되어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아버지 김제남을 비롯해 오빠 김내와 남동생 김규, 김선 및 형부 심정세 등이 형문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어머니 노씨는 자택에 감금되었는데 이후 인목왕후가 사실상 폐위되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인용문-테두리|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려 서소문(西小門) 안에서 죽게 하였다.

:김제남이 사사당한 날에 그의 아내 노씨(盧氏)가 맨발로 대비가 거처하는 궁전의 담장 밖으로 가서

:울부짖으면서 대비의 어렸을적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아무개야, 아무개야. 어찌하여 너의 아비를 죽이는데 구해주지 않는단 말이냐.’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그러자 상(광해군)이 노씨를 집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집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노비 하나만을 데리고서 집을 부수어 끼니를 해먹었는데,

:도성 사람들 중에 더러 어둠을 틈타 쌀과 간장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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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67권,
광해 5년(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6월 1일 (무자)|align=center}}

광해군 재위 동안, 광해군은 소성왕후와 영창대군을 끊임없이 탄압하였다. 소성왕후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내놓으라는 끈질긴 요구를 거부하였다. 결국 그녀는 영창대군을 광해군에게 넘겨 왕자로서 궁궐에서 양육되고 교육받게 하였다. 1614년, 그의 아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독살당하였다.

소성왕후는 폐위되어 경운궁정명공주와 함께 유폐되었다. 그녀의 시녀들은 배신, 탈출, 죽음으로 해마다 줄어들었다. 인목왕후의 궁녀가 그 유폐 생활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계축일기』를 저술했고, 이는 후에 궁중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광해군 15년(1623년) 3월, 궁중 쿠데타(인조반정)가 일어나, 인목왕후는 능양군(후의 인조)을 지지하는 서인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석방되고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대북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爾瞻과 김개시는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대해 살의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증오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2. 3. 서궁 유폐와 폐모론

인목왕후는 정명공주경운궁 석어당에 유폐되었으며, 외부와의 소통은 단절되었다.[5]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인목왕후는 대비 소성왕후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재위 동안, 광해군은 소성왕후와 영창대군을 끊임없이 탄압하였다. 소성왕후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내놓으라는 끈질긴 요구를 거부하였으나, 결국 1613년 영창대군을 광해군에게 넘겨 왕자로서 궁궐에서 양육되고 교육받게 하였다. 하지만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1614년 독살당하였다.[5]

인목대비의 폐위를 둘러싸고 폐모론이 정쟁으로 급부상하였는데, 수많은 찬성과 반대 여론이 대립한 가운데 광해군은 폄손 절목을 내려 인목왕후의 대비(大妃) 호칭을 제거하고 '''서궁'''(西宮)으로 칭하여 후궁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5]

{{인용문-테두리| 

:존호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과 옥보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르며,

(중략)


:서궁의 진배는 후궁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와 혼인은 옹주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상복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3권,
광해 10년(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1월 30일 (경인)|align=center}}

아버지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약을 받았으며, 인목왕후의 친족들은 각각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5] 인목왕후는 대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측실의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유폐된 곳을 따라 "서궁(西宮)"이라 불리며, 이爾瞻과 김개시를 비롯한 광해군 세력에게 모욕을 당하며 6년을 보냈다. 그동안 인목왕후의 궁녀가 그 유폐 생활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계축일기』를 저술했고, 이는 후에 궁중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2. 4. 인조반정과 복권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의 왕위 계승과 광해군의 폐위 교서를 내렸으며, 인조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역할을 하였다.[6]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대해 살의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증오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인용문-테두리|
'''왕대비의 교서'''

  • ---{{인용문-따옴표|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중략)


:광해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align=center}}

1624년(인조 2년)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7]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인조 즉위후, 그녀의 딸 정명공주는 혼기가 늦어졌는데, 이는 광해군 시대에 궁 밖에서 생활했던 딸에 대한 대왕대비의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명공주홍주원과 결혼하여 7남 1녀를 두었고, 그녀의 손자 중 한 명은 혜경궁 홍씨의 증조부가 되었다.

1632년(인조 10년) 6월 28일 승하하였다. 선조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목릉(穆陵)에 묻혀 있다. 시호는 '''인목'''(仁穆)이며,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로 칭해졌다.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의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사망 전 인목왕후는 왕실 생활에 대한 유언을 가족들에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왕실의 며느리로서 겪었던 고통을 언급하며, 친정 식구들이 왕실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이 유언은 그녀의 8대질녀인 김수덕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김수덕 또한 불행한 정략결혼을 겪었다.[1]

2. 5. 말년과 죽음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의 왕위 계승과 광해군의 폐위 교서를 내렸으며, 인조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역할을 하였다.[6]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대해 살의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증오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인용문-테두리|
'''왕대비의 교서'''

  • ---{{인용문-따옴표|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중략)


:광해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align=center}}

1624년(인조 2년)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7]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유폐는 끝났다. 인목왕후와 딸은 창덕궁에서 생활하도록 허락받았고, 폐위 전의 칭호와 지위도 회복되었다.

인조 즉위 당시 21세였던 정명공주는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였기에 자신보다 어린 홍주원1623년에 결혼하여 7남 1녀를 두었다. 혜경궁 홍씨의 증조부가 된 정명공주의 손자 이야기는 정명공주 관련 내용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1632년(인조 10년) 6월 28일 승하하였다. 선조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목릉(穆陵)에 묻혀 있다.[1] 시호는 '''인목'''(仁穆)이며,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로 칭해졌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의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사망 전 인목왕후는 왕실 생활에 대한 유언을 가족들에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왕실의 며느리로서 겪었던 고통을 언급하며, 친정 식구들이 왕실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이 유언은 그녀의 8대질녀인 김수덕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김수덕 또한 불행한 정략결혼을 겪었다.[1]

3. 평가

4. 가족 관계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이며, 1584년(음력 11월 14일) 한성부 반송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이며, 어머니는 광산부부인 노씨이다.

인목왕후는 선조와 혼인하여 정명공주영창대군을 낳았다. 정명공주는 영안위 홍주원과 혼인하였으며,[8] 영창대군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증살되었다.

인목왕후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아버지김제남1562년 - 1613년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됨
어머니노씨1557년 - 1637년
배우자선조1552년 - 1608년조선 제14대 국왕
장녀정명공주1603년 - 1685년영안위 홍주원과 혼인[8], 헌경왕후의 5대 조모[8]
차녀공주[9]1604년 - 1604년요절
장남영창대군1606년 - 1614년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증살



정명공주홍주원과의 사이에서 7남 1녀를 두었으며, 그 후손으로는 조선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측실 원빈 홍씨 등이 있다.

5. 인목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5. 1. 드라마

5. 2. 영화

5. 3. 소설


  • 《광해군과 인목대비》 오영, 범우, 2008, ISBN 978-89-91167-81-0
  • 아라야마 토루/荒山徹일본어의 소설 『류생 음양검』

6. 관련 문화재

참조

[1] 웹사이트 李堈夫人金氏 http://db.history.go[...] 2020-07-08
[2] 서적 선조실록 1602-07-13
[3] 문서
[4] 문서
[5] 서적 광해군일기 1618-01-30
[6] 서적 인조실록 1623-03-14
[7] 서적 인조실록 1624-09-07
[8] 문서
[9] 서적 선조실록 1604-11-17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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