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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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는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건립된 석비로, 도선국사와 수미선사를 함께 기리고 있다. 석비는 탑구,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귀갑문 대신 평행사선문이 새겨진 귀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신, 운용문이 조각된 양 측면 등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비문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건립 기간이 18년에서 21년에 걸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비는 규모가 크고 건립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후기 조각사 및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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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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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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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靈巖 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
로마자 표기 | Yeongam Dogapsa DoseonguksaㆍSumiseonsabi |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1395 |
지정일 | 2004년 1월 26일 |
소재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로 306, 도갑사 (도갑리)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도갑사 |
문화재 정보 (과거) | |
이름 (과거) | 도갑사도선수미비 (道岬寺道詵守眉碑) |
지정 구분 (과거)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과거) | 38 |
지정일 (과거) | 1974년 5월 22일 |
해제일 (과거) | 2004년 1월 26일 |
2. 형태
석비는 탑구, 귀부, 비신, 이수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구는 여러 개의 판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앞면은 사각형, 뒷면은 'ㅅ'자 모양으로 전체적으로는 육각형이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등에는 귀갑문 대신 평행사선무늬가 새겨져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고, 앞면과 뒷면에 각각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수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에는 연꽃 무늬가, 윗면에는 구름 속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2. 1. 탑구
탑구는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앞면은 방형이고 뒷면은 'ㅅ'자형으로 전체적으로 6각형 형태를 보인다.2. 2. 귀부
탑구(塔區)는 여러 매의 판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앞면은 방형이지만 뒷면은 귀부의 형상과 같이 'ㅅ'자형으로 만들어져 전체적으로는 6각형의 형태를 보인다.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는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되었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사선문(斜線紋)이 정연하게 음각되었다. 앞발은 5개의 발가락, 뒷발은 3개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꼬리는 살짝 돌려 왼쪽 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윗면에는 비좌(碑座)로부터 중단에 이르기까지 넓게 방형의 얕은 받침이 표현되었다. 각 면 중앙의 내곡된 윗면에는 화문(花紋)이 조식되어 있다.
2. 3. 비신
비신은 귀부 및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윗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고 쓰여 있으며, 비제(碑題)는 가로쓰기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고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도선국사의 비석이 훼손되어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비문은 앞면에 2개, 뒷면에 1개, 총 3개로 구성되어 다른 석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비문의 찬자는 각각 이경석(李景奭), 이수인(李壽仁), 정두경(鄭斗卿)이지만, 연대는 모두 '숭정병자사월일시. 계사사월일립'(崇禎丙子四月日始. 癸巳四月日立)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636년(조선 인조 14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 측면에는 운용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있는 쌍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2. 4. 이수
이수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아래에는 28판의 앙연(仰蓮)이 조각되었으며, 윗면에는 구름무늬 위에 두 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 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3. 특징
이 석비는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의 양식이 독특하며, 건립 기간, 비문 구성 등에서 다른 석비와 차별성을 보인다. 특히 도선국사와 수미대선사 두 명을 함께 기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석비 건립 과정과 관련된 상세한 기록은 기술사 및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
3. 1. 규모 및 양식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건립된 이 석비는 규모가 매우 크며, 귀부에는 귀갑문 대신 평행사선문이, 비신 양 측면에는 운용문이 새겨져 있어 조선 후기 조각사의 수준 높은 작풍을 보여준다. 또한, 대부분의 석비가 한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도선과 수미선사 두 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독특하며, 석비 건립에 18년이 걸렸다는 점은 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3. 2. 건립 기간 및 비문
이 석비는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건립되었으며, 건립 기간이 18년으로 석비 건립 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비문은 3개로 구성되어 있고, 찬자와 건립 기간이 각각 달라 석비 건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1]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비문은 각각 독립되어 있으며, 찬자와 글쓴이, 건립 기간이 모두 다르다. 두 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과 석재 채취 및 이동 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세 번째 비문에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석비 건립 과정에서 3개의 비문에 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
3. 3. 두 명의 주인공
이 석비는 대부분의 석비가 한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도선국사와 수미대선사 두 명을 함께 기리고 있어 독특하다.[1]3. 4. 역사적, 예술적 가치
이 석비는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건립된 것으로, 규모 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닌다. 각 부분의 양식에서 귀부는 귀갑문 대신 평행사선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신은 조성 재료가 대리석이며, 양 측면에 조각된 운용문은 힘찬 기상과 율동감을 지니고 있어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또한, 석비 건립 기간이 18년이라는 점은 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석비가 한 명을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이 석비는 도선과 수미선사 두 명을 기리고 있어 독특하다. 건립 연대는 동일하지만 비문은 각각 독립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찬자와 글씨를 쓴 사람, 각을 새긴 사람이 모두 다르다. 이는 21년간의 건립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고, 석재 채취부터 이동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 비문에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석비 건립 과정에서 세 개의 비문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석비는 거대한 규모와 건립 기간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후기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두 명이라는 점과 글씨 역시 서예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따라서 이 석비는 대한민국의 보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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