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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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양왕은 590년부터 6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린 왕이다. 그는 수나라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격퇴하며 고구려의 국력을 지켰으며, 특히 612년 수나라의 대규모 침략인 살수대첩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떨쳤다. 영양왕은 재위 기간 동안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는 한편, 역사서 편찬 등 문화 발전을 장려했다. 618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이복동생 영류왕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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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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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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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태왕 |
재위 기간 | 590년 10월 - 618년 9월 |
즉위 | 590년 10월 |
이전 | 평원왕 |
이후 | 영류왕 |
휘 | 고대원/고원 |
이명 | 평양왕, 대흥왕 |
출생 | 미상 (559년 전후) |
출생지 | 평양성 |
사망 | 618년 9월 |
사망지 | 평양성 |
능묘 | 강서대묘 (추정) |
시호 | 영양태왕 또는 평양태왕 |
종교 | 불교 |
왕조 | 고구려 |
왕실 | 고씨 |
정치 | |
통치 | 590년 10월 - 618년 9월 |
연호 | 건흥 |
가족 관계 | |
부왕 | 평원왕 |
형제 | 영류왕, 대양왕, 평강공주 |
왕위 계승 | |
고구려 태자 | 565년 1월 - 590년 10월 |
이전 태자 | 양성 |
이후 태자 | 환권 |
2. 생애
평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해는 정확하지 않다. 565년 음력 1월(평원왕 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590년 음력 10월 평원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양왕은 비할 데 없는 카리스마를 지녔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고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3] 즉위 초 수나라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받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된 대중국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북쪽의 거란 및 말갈 부족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영양왕의 치세는 수나라의 중국 대륙 통일 이후 고조된 동아시아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598년부터 614년까지 이어진 수나라와의 고구려-수 전쟁에서 여러 차례의 대규모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598년 영양왕이 말갈 병력을 이끌고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하자, 수 문제는 30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악천후와 고구려의 효과적인 방어로 실패했다(제1차 고구려-수 전쟁).[4] 이후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며 잠시 평화를 회복했다.
607년, 영양왕이 동돌궐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수 양제는 이를 문제 삼아 612년 113만이 넘는 대군으로 다시 침공했다(제2차 고구려-수 전쟁). 이때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수나라 별동대를 크게 격파하는 살수 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5] 수 양제는 613년(제3차)과 614년(제4차)에도 침공을 감행했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과 수나라 내부의 혼란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계속된 전쟁은 수나라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켜 618년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전쟁 중에도 남쪽의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과거 고구려 영토였던 서울 지역 회복을 목표로 백제의 석두성을 공격해 포로 3천 명을 잡고, 신라의 우곡산성(강원도 안변군)을 빼앗고 포로 8천 명을 확보하는 등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신라가 수나라 및 이후 당나라와 연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4][1]
문화적으로는 600년 대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기존의 역사서 《유기》 100권을 정리해 5권의 《신집》을 편찬하게 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605년 영양왕(기록상 '대흥왕')이 일본에 불상 제작용 황금 300냥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활발했던 문화 교류를 엿볼 수 있다.
618년 음력 9월, 재위 29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영양왕(嬰陽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매장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켜냈으며, 이후 연개소문의 정변과 나당 연합군에 의한 멸망 등의 혼란 속에서 고구려의 마지막으로 온전하게 왕위를 지킨 군주로 평가받는다.
2. 1. 수나라와의 전쟁
영양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 대륙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어 있었다. 수 문제는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후, 북쪽의 돌궐과 고구려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수나라는 사신 파견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와 지형을 염탐하는 등 긴장을 고조시켰고, 영양왕 역시 수나라의 동태를 살피며 대비했다.598년, 수 문제가 고구려 침공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양왕은 말갈 병력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방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에 격분한 수 문제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제1차 고구려-수 전쟁). 그러나 고구려는 강이식 장군의 지휘 아래 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때마침 닥친 장마와 역병 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수나라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4] 이후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양국 간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수 양제가 즉위한 후, 고구려에 대한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수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연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자[5], 이를 빌미로 삼아 여러 차례 조공을 요구했으나 영양왕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612년, 수 양제는 직접 113만 3800명[9]이라는 기록적인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제2차 고구려-수 전쟁). 수 양제가 이끄는 본군은 요동성 공격에 실패했고, 별동대는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현 청천강)에서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살수대첩이다.[5]
수 양제는 613년(제3차)과 614년(제4차)에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과 수나라 내부의 반란(양현감의 난) 등으로 인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4차 침공 때는 이미 수나라 군대의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고, 영양왕이 화친을 제의하자 수 양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양왕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이어진 네 차례의 고구려-수 전쟁에서 수나라의 대규모 침공을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는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무리한 원정을 강행한 수나라가 급격히 쇠퇴하여 결국 618년 멸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삼국사기》는 영양왕을 비할 데 없는 카리스마와 너그러움을 지녔으며,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고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평가했다.[3] 그는 수나라의 팽창주의적 야욕에 맞서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2. 1. 1. 제1차 고구려-수 전쟁 (598년)
영양왕 즉위 당시 중국 대륙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된 상태였다. 남조 진(陳)을 멸망시킨 수 문제는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와 지형을 염탐하였다.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수 문제가 고구려 공격을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수나라가 요동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영양왕이 사용한 '태왕' 칭호에 불만을 품은 것도 침공의 배경이 되었다. 이에 598년 영양왕은 말갈 병력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방의 임유관(臨渝關, 현 산해관)을 선제 공격하였다. 이는 수나라의 패권적 야욕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임유관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에 격분한 수 문제는 같은 해 음력 6월, 한왕(漢王) 양량 (수)과 왕세적(王世積)을 대원수로 삼고, 주라후(周羅睺)에게 수군과 보급을 맡겨 총 30만 명의 수륙 양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 보급선의 경로를 미리 파악하여 격파함으로써 군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때마침 장마와 폭풍이 닥쳐 수나라 육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해군 함대 역시 큰 손실을 보았다. 전염병까지 겹치면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이끄는 군대의 효과적인 방어와 전략에 말려들어 결국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4][2]
수 문제는 패전 소식에 격노하여 출정했던 장수들을 처벌하고 재차 침공을 계획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는 중단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의 뜻을 표하며 화친을 청했고, 수 문제는 이를 받아들여 양국 간에는 잠시 평화가 회복되었다.
한편, 당시 백제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길안내를 자처하며 고구려 공격을 부추겼으나, 수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2. 1. 2. 제2차 고구려-수 전쟁 (612년)
607년, 수 양제는 고구려가 동돌궐의 야미 카간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동돌궐은 명목상 수나라의 봉신국이었으나, 실제로는 고구려의 동방 패권을 지지하고 있었다.[5] 수 양제는 고구려가 요동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고 독자적인 태왕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4] 이전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동돌궐과의 접촉을 계기로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다. 이미 수 양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침입을 예상한 고구려는 608년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고 우명산성을 함락시키는 등, 한강 이북의 영토 회복을 시도하며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611년 수 양제는 군사를 탁군(啄郡)에 집결시킨 뒤, 612년 마침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때 동원된 수나라 군대는 총 113만 38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9][5] 수 양제가 직접 이끄는 좌군은 요수를 건너 고구려의 중요 거점인 요동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편,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해군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직접 향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미 수군의 진격로를 예측하고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가했고, 수나라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에 수 양제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만 5천 명의 정예 별동대를 편성하여 곧바로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수군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후퇴하는 척하며 수나라 군대를 살수(현 청천강)까지 유인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는 시점을 노려 총공격을 감행하여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살수대첩이라 한다.[5] 살수에서의 참패로 수나라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완전히 퇴각하였다.
2. 1. 3. 제3차 고구려-수 전쟁 (613년)
613년 정월, 수 양제는 다시 탁군에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침공했다. 수 양제는 우문술과 함께 요동성으로 직접 진격했고, 왕인공에게는 북쪽의 신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요동성과 신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나라 본국에서는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소식을 들은 수 양제는 크게 당황하여 그날 밤으로 군대를 급히 철수시켜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제3차 침략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수 양제는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뒤 또다시 고구려 침략을 준비했다.2. 1. 4. 제4차 고구려-수 전쟁 (614년)
614년, 수 양제는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는 고구려-수 전쟁의 네 번째 침공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패배와 무리한 원정으로 수나라 군대는 이미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안했다. 당시 수나라 내부는 613년 양현감의 난 이후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고, 전쟁 지속에 대한 부담이 컸다. 결국 수 양제는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 마지못해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에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다시 계획했지만, 수나라 내부의 반대와 혼란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계속된 대외 원정은 수나라의 국력을 심각하게 소모시켰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수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618년 수 양제는 강도에서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수나라는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로써 영양왕은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모두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2. 2. 신라, 백제와의 관계
영양왕은 즉위 후 수나라의 위협에 대비하여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백제에 대한 공격은 곧 신라에 대한 공격을 예고하는 것이었기에, 이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고구려의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 대륙의 침입에 앞서 후방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2] 이에 백제와 신라는 즉시 전시 체제에 돌입하며 삼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방어에 나서면서 고구려군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방향을 바꿔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대규모 전쟁(고구려-수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석두성에서 포로 3천 명을, 신라로부터는 우곡산성(현재 강원도 안변군)을 빼앗고 포로 8천 명을 확보하는 등 군사적 압박을 지속했다. 이는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서울 지역을 되찾으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계속된 남진 정책은 신라로 하여금 수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훗날 신라가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삼국 통일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4][1]
2. 3. 문화 발전
600년 대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기존 역사서인 《유기》 100권을 정리하여, 5권의 새로운 역사서 《신집》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고구려 역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려는 중요한 시도였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신집》은 전해지지 않는다.또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605년 (스이코 천황 13년)에 당시 고구려 국왕(기록에는 '대흥왕'으로 표기됨)이 일본에 불상 제작을 위한 황금 300냥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발전된 불교 문화와 활발했던 대외 교류의 일면을 보여준다.
2. 4. 죽음
618년 음력 9월, 수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시키던 중 재위 29년 만에 승하하였다. 영양왕으로 시호되었으며, 매장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구려는 영양왕 승하 이후 영류왕과 보장왕 두 명의 왕이 더 있었으나,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정변 때 살해되었고 보장왕은 나라가 멸망하면서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왕으로서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왕위를 보존한 것은 영양왕이 마지막이 된다.
3. 가계
4.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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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
서력 | 590년 | 591년 | 592년 | 593년 | 594년 | 595년 | 596년 | 597년 | 598년 | 599년 | 600년 | 601년 | 602년 | 603년 | 604년 |
단기 | 2923년 | 2924년 | 2925년 | 2926년 | 2927년 | 2928년 | 2929년 | 2930년 | 2931년 | 2932년 | 2933년 | 2934년 | 2935년 | 2936년 | 2937년 |
간지 | 경술 | 신해 |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정사 | 무오 | 기미 | 경신 | 신유 | 임술 | 계해 | 갑자 |
영양왕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20년 | 21년 | 22년 | 23년 | 24년 | 25년 | 26년 | 27년 | 28년 | 29년 | |
서력 | 605년 | 606년 | 607년 | 608년 | 609년 | 610년 | 611년 | 612년 | 613년 | 614년 | 615년 | 616년 | 617년 | 618년 | |
단기 | 2938년 | 2939년 | 2940년 | 2941년 | 2942년 | 2943년 | 2944년 | 2945년 | 2946년 | 2947년 | 2948년 | 2949년 | 2950년 | 2951년 | |
간지 | 을축 | 병인 | 정묘 | 무진 | 기사 | 경오 | 신미 | 임신 | 계유 | 갑술 | 을해 | 병자 | 정축 | 무인 |
5. 대중 문화
참조
[1]
웹사이트
영양왕
https://www.doopedia[...]
Doopedia
2016-10-05
[2]
웹사이트
King Yeongyang (2)
http://world.kbs.co.[...]
KBS World
2016-10-05
[3]
서적
Samguk sagi, Annals of Goguryeo
[4]
웹사이트
King Yeongyang (1)
http://world.kbs.co.[...]
KBS World
2016-10-05
[5]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Land of the Morning Calm" to States in Conflict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6]
문서
삼국사기
[7]
문서
일본서기
[8]
웹사이트
565년 1월에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것을 보면 영양왕이 최소 559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terms.naver.[...]
[9]
문서
여기에서 대군이 실제로 113만 대군인지는 많은 논란이 있다.
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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