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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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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라후는 남북조 시대와 수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군인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했고, 진나라에서 개원장군으로 임명되어 북제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했을 때 항복하여 수 문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고구려-수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했으며, 사후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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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후
지도
기본 정보
이름주라후 (周羅睺)
출생542년
사망605년
시대수나라
주요 활동장군, 행정관
생애
초기 생애주라후는 낙양 사람으로, 원래는 북주 장군인 주열의 종이었다.
수나라 봉사주열이 수나라에 합류한 후, 주라후도 뒤따랐다. 그는 군사적 공헌으로 인정받아 여러 계급을 거쳐 올라갔다.
진나라 정복주라후는 진나라 정복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반란 진압601년에 주라후는 남녕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여량 전투그는 여량에서 이현의 반군을 격파했다.
죽음주라후는 605년에 사망했다.
가족
아버지주열

2. 생애

주뤄허우는 양나라의 장군이었던 아버지 저우파하오(周法暠) 슬하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주강시의 순양(潯陽)이다.[1] 십 대 시절부터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고,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며 개와 매를 데리고 사냥을 다니거나 주변의 무모한 자들과 군사 훈련을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형제는 그의 행동을 경고했지만, 주뤄허우는 고치지 않았다.[2]

주뤄허우는 진나라와 수나라에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 '''남조 진(陳)에서의 생애'''는 === 남조 진(陳)에서의 생애 === 에서 자세히 다룬다.
  • '''수(隋)에서의 생애'''는 === 수(隋)에서의 생애 === 에서 자세히 다룬다.


진숙보 즉위 후(582년), 형주의 군사를 지휘했다.[3] 그러나 오세흥(吳世興)이라는 하급 관리가 주뤄허우의 영향력을 경계하는 비밀 상소를 올렸다. 이에 진숙보는 경악했지만, 소마하와 노광달(魯廣達)은 주뤄허우를 옹호했다. 주뤄허우는 반역하라는 조언을 뿌리치고 건강으로 가 황제의 신임을 다시 얻고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에 임명되었다. 연회에서 진숙보는 주뤄허우가 훌륭한 시인임을 알고 기뻐했으며, 곧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하고 상주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2]

588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침공했을 때, 삼협과 중 양쯔강을 양준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양광 휘하의 다른 수나라 군대가 589년에 건강을 점령하고 진숙보를 사로잡자,[2] 진숙보의 친필 편지를 받고 "사흘 동안 깊이 울었다"고 하며 군대를 해산하고 항복했다.[4]

수 문제는 주뤄허우를 높이 평가하여 처음 만났을 때 부귀를 약속했다. 수나라 장군 하약필(賀若弼)이 그의 능력을 비꼬자, 주뤄허우는 즉시 정면 대결을 한다면 결과를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그해 가을, 명예직인 ''의동삼사''(儀同三司, "삼사(三司)와 동등한 위상") 칭호를 받았다. 또 다른 때, 수나라 장군 한금호(韓擒虎)는 주뤄허우의 전 부하인 양상(羊翔)이 더 일찍 수나라에 투항하여 더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언급했지만, 주뤄허우는 신하가 항복을 지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2]

2. 1. 남조 진(陳)에서의 생애

남조 양에서 주법고(周法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세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응구(鷹狗)를 좋아했다.[10]

진의 선제 때 전공을 세워 개원장군(開遠將軍)·구용현령(句容縣令)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대도독(大都督) 오명철(吳明徹)의 아래에서 북제(北齊)군과 강양에서 싸웠는데, 왼쪽 눈에 유시(流矢)를 맞았다.

북제군이 오명철을 숙예(宿預)에서 포위하자, 주라후는 말을 달려 돌진했고 태복경(太僕卿) 소마하(蕭摩訶)가 그를 보좌해, 진군은 북제군에 대승했다.

577년(태건 9년) 오명철이 북벌군을 서주(徐州)로 진군시켜 북주(北周)의 양사언(梁士彦)과 팽성(彭城)에서 싸웠는데, 이때 주라후는 적진 앞에서 낙마한 소마하를 구원해 그를 데리고 엄중한 포위를 돌파했다.

이듬해 오명철이 패하자 전군을 이끌고 귀환했으며, 같은 해 광원장군(光遠將軍)·종리태수(鍾離太守)를 거쳐 또 그 이듬해 사지절(使持節)·도독곽주제군사(都督霍州諸軍事)로 임명되었다.

산적 12동(洞)을 평정해 우군장군(右軍將軍)으로 임명되고 시안현백(始安縣伯)에 봉해졌으며, 이후 총관검교양주내외제군사(總管檢校揚州內外諸軍事), 진릉태수(晉陵太守), 태복경(太僕卿), 웅신장군(雄信將軍)을 거쳐 사지절·도독예장십군제군사(都督豫章十郡諸軍事)·예장내사(豫章內史)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사법(司法)의 절차를 관리에게 맡기지 않아 백성들이 그를 따르며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지덕 연간[11]에 지절(持節)·도독남천제군사(都督南川諸軍事)로 임명되었는데, 강주사마(江州司馬) 오세흥(吳世興)이 주라후가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이유로 후주에게 그를 참소했고 소마하·노광달(魯廣達) 등이 주라후를 변호했다.

이 일을 알고 반란을 권하는 자가 있었으나, 주라후는 이를 거부하고 건강으로 귀환했으며,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로 임명되고 후주에게 신임받게 되었다.

이후 도독상주제군사(都督湘州諸軍事)로 나갔다가 다시 소환되어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588년(정명 2년) 의 진왕(晉王) 양광(楊廣)이 진을 공격하자 주라후는 도독파협연강제군사(都督巴峽緣江諸軍事)가 되어 수의 진왕(秦王) 양준의 군을 저지하고 장강(長江)을 건너지 못하게 해 1개월 이상을 대치했으나, 이듬해 건강이 함락되고 후주가 항복해 포로가 되자 양광은 후주에게 편지를 쓰게 해서 주라후를 항복시켰다.

2. 2. 수(隋)에서의 생애

589년 겨울, 주라후는 빈주 자사가 되었다.[2] 얼마 후 경주 자사로 옮겼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2] 상 중 기간이 끝난 후, 다시 빈주 자사로 기용되어 유능하다는 좋은 평판을 얻었다.[2]

598년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자 문제는 30만 명의 원정군을 소집하고 양량 태자를 지휘관으로, 주라후를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5] 주라후는 동래군에서 황해를 건너 평양을 공격하려 했으나, 거센 폭풍으로 인해 많은 배가 흩어지고 침몰했다.[6] 남은 배들은 5만 명의 고구려 함대에 의해 격퇴되었고,[5] 수나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해야 했다.[7]

599년, 주라후는 양소의 휘하에서 타르두 및 서돌궐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양소의 허락을 받아 20명의 기병을 이끌고 혼란에 빠진 돌궐 군대를 공격하여 몇 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파했다. 그 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2]

601년 태자 (東宮)의 우우후율(右虞候率)로 임명되었으며, 1500호의 토지세를 받는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2]

604년 양광이 황위에 오른 후, 605년 초 주라후는 승진하여[8] 다시 양소의 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량을 격파했다. 주라후는 죽은 그의 전 주군인 진숙보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황제는 이를 허락하고 칭찬했다. 당시 양량의 반군 잔당은 여전히 진주, 강주, 려주 (모두 현재의 산시성)를 점령하고 있었고, 주라후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진압했다. 전투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사후 칭호를 받았고, 아들 주중안(周仲安)은 관리가 되었다.[2]

3. 가족 관계


  • 아버지 - 주법고(周法暠): 양(梁) 남강내사(南康內史), 임증현후(臨蒸縣侯)
  • 아들 - 주중안(周仲安):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 아들 - 주중은(周仲隱, 581년 ~ 649년): 사지절(使持節), 당주제군사(唐州諸軍事), 당주자사(唐州刺史)

4. 평가

주라후는 젊어서 기마와 사격을 잘했고, 매와 개를 좋아했으며, 협객 기질과 방탕한 짓을 일삼았다. 남조 진의 선제 때 군공으로 개원장군, 구용현령에 임명되었다. 북제 군과 강양에서 싸웠고, 흐르는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 태건 9년(577년), 군대를 서주로 진격시켜 북주양사언과 팽성에서 싸웠고, 적진 앞에서 낙마한 소마하를 구원하여 함께 포위망을 돌파했다. 태건 10년(578년), 오명철이 패배하자, 전군을 이끌고 귀환했다.

정명 2년(588년), 수의 진왕 양광이 남조 진을 공격하자, 도독 파협 연강 제군사가 되어, 수의 진왕 양준의 군대를 막아 장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1개월 넘게 대치했다. 정명 3년(589년), 건강이 함락되고 후주가 수군에게 사로잡히자, 양광은 후주에게 직접 친서를 쓰게 하여 투항을 권했다. 여러 장수와 3일 동안 논의하고 군대를 해산한 후 항복했다. 문제가 위로하자, "신은 진씨의 후한 대우를 받았고, 망국에 순절하지 못했습니다. 부귀영록은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울면서 대답했다.

개황 18년(598년), 문제의 고구려 원정에서 수군총관이 되었다.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했지만, 폭풍을 만나 배의 대부분이 표류, 침몰하여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귀환했다. 개황 19년(599년), 돌궐의 달두가한이 수의 북변을 침입하자, 양소 휘하에서 돌궐을 토벌했다. 경용 20기를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여 남서쪽에서 들어가 서쪽으로 빠져나왔고, 수군 본대는 그 혼란 속에서 거리를 좁혀 근접전에 돌입하여 승리했다. 이 공으로 대장군으로 진급했다.

인수 4년(604년), 양제가 즉위하자, 우무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한왕 양량이 난을 일으키자, 양소를 보좌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고, 상대장군으로 진급했다.

대업 원년(605년), 양량의 잔당이 진주·강주 등에 근거지를 두고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행강진려 삼주 제군사가 되어 군사를 진격시켜 잔당을 포위했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으며, 향년 64세였다. 주국, 우익위대장군의 지위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壯)이라고 했다.

5. 기타

참조

[1] 서적 Xiong
[2] 서적 Sui Shu 636
[3] 서적 Bei Shi
[4] 학위논문 Crisis and Hermeneutics: Wang Fuzhi's Interpretation of Confucian Classics in a Time of Radical Change from Ming to Qing Dynasty https://tspace.libra[...] University of Toronto 2022-02-27
[5] 서적 Rise of the Tang Dynasty: The Reunification of China and the Military Response to the Steppe Nomads (AD 581-626) https://books.google[...] Pen & Sword Books 2022-02-27
[6] 간행물 Korea Confronts the Outside: Triumphs and Tragedies http://anthony.sogan[...] 2022-02-27
[7] 서적 Xiong
[8] 학위논문 The Korean Wars and East Asia in the Seventh Century https://openresearch[...]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2022-02-27
[9] 문서 『금석록』에 그의 묘지가 605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문서 매가 사냥한 꿩이나 철새 등을 물어오는 사냥개
[11] 문서 583년~586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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