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제2차 고구려-수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전쟁이다. 수 양제는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하고 수나라의 지배에 불응하자 113만 명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했다. 전쟁은 요하 전투, 요동성 전투, 평양성 전투, 살수대첩 등으로 전개되었으며,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고구려가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쟁의 패배와 국내 반란으로 수나라는 멸망했고, 고구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굳건한 국방력을 보여주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12년 중국 -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수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네 차례 침공한 전쟁으로, 수나라의 팽창 정책과 고구려의 강경한 외교 정책이 충돌하여 발발했으며 양국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수나라 멸망과 당나라 건국,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612년 중국 - 살수 대첩
    살수 대첩은 612년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고구려-수 전쟁 중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별동대를 섬멸하여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킨 결정적인 전투이다.
  • 612년 한국 -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수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네 차례 침공한 전쟁으로, 수나라의 팽창 정책과 고구려의 강경한 외교 정책이 충돌하여 발발했으며 양국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수나라 멸망과 당나라 건국,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612년 한국 - 살수 대첩
    살수 대첩은 612년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고구려-수 전쟁 중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별동대를 섬멸하여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킨 결정적인 전투이다.
제2차 고구려-수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제2차 고구려-수 전쟁
전체고구려-수 전쟁
날짜612년
장소랴오둥반도대동강
결과고구려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수나라
교전국 2고구려
지휘관
수나라수 양제
우중문
우문술
내호아
고구려영양왕
고건무
을지문덕
병력 규모
수나라기록 상 1,133,800여 명
고구려불명
사상자 규모
수나라30만 명 이상
고구려불명

2. 배경

607년 수 양제는 돌궐의 계민 가한의 막부를 방문하였는데, 마침 그곳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보낸 사신이 있었다. 이 때 황문 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에게 봉하였던 땅이며, 나라와 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정벌하려 하였습니다. (중략) 이제는 폐하의 시대이니,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왕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 양제는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우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우리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명년에는 응당 탁군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입조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토벌하리라."

하지만 영양왕은 사신으로부터 이를 보고 받았으나 수 양제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제 수 양제가 장차 침공할 것을 대비하게 된다.

수 양제돌궐의 계민가한에게 충성을 맹세 받은 뒤인 611년, 고구려 정벌을 결정했다. 이에 엄청난 양의 세금을 거둬야 했으며, 전선을 하루종일 건조하느라 열에 서너 명이 배에 구더기가 생기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 또한 온 나라의 말과 식량, 병기등의 물자를 탁군으로 옮겼다. 이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양제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다.

2. 1. 수나라의 동북아 정세 인식

607년 수 양제는 돌궐의 계민 가한의 막부를 방문하였는데, 마침 그곳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보낸 사신이 있었다. 이 때 황문 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에게 봉하였던 땅이며, 나라와 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정벌하려 하였습니다. (중략) 이제는 폐하의 시대이니,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왕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 양제는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우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우리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명년에는 응당 탁군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입조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토벌하리라."

하지만 영양왕은 사신으로부터 이를 보고 받았으나 수 양제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2. 2. 고구려의 대응

607년 수 양제는 돌궐의 계민 가한의 막부를 방문하였고 마침 계민의 막사에는 고구려의 영양왕이 보낸 사신이 있었다. 계민이 사신을 숨길 수 없자, 황문 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건의하였다. 수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우홍을 통해 입조를 요구하며, 불응 시 돌궐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하지만 영양왕은 수 양제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다가올 침공에 대비하였다. 수 양제는 611년, 고구려 정벌을 결정하고 탁군으로 물자를 모으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2. 3. 수나라의 전쟁 준비

수 양제는 611년 2월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수 양제는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도망간 자들을 받아들이며, 변방을 침범하고, 조공 사신을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또한 고구려의 가혹한 법령, 무거운 조세, 호족들의 국정 농단, 잦은 재앙과 흉년, 백성들의 고통을 언급하며 고구려 원정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612년 정월, 수 양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좌우 12군씩 총 24개 군을 편성하여, 육군과 수군이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1,133,800명이었고,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에 달했다. 출병에 앞서 상건수, 임삭궁, 계성에서 제사를 지내고, 군대의 편제와 군율을 정비하였다. 각 군은 40리 간격으로 진군하여 40일 만에 출발이 완료되었고, 깃발은 960리에 뻗쳤으며, 어영은 80리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이었다.

3. 전쟁의 전개

수 양제는 611년 2월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천명하고, 612년 정월에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밝히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조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구려가 한나라와 위나라 때 잠시 엎어졌으나, 난리를 틈타 다시 세력을 키워 중국 땅을 잠식하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 고구려가 조칙을 거부하고 조공을 하지 않으며, 도망자를 받아들이고 변방을 어지럽히고 있다.
  •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을 선동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고, 청구(靑丘) 바깥에서 조공하는 나라들의 사신 왕래를 막고 재물을 약탈하고 있다.
  • 고구려의 가혹한 법령과 무거운 조세, 호족들의 국정 농단과 붕당, 뇌물 수수 등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 고구려가 잦은 재앙과 흉년, 끊임없는 전쟁과 부역, 군량 운반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


수 양제는 이러한 명분을 내세워 113만 3,8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숫자는 군량을 나르는 사람을 제외한 수치이며, 실제 동원된 인원은 그 배가 넘었다고 한다. 이들을 200만 명이라고도 칭하였다. 양제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며, 왼쪽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해명(海冥),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등의 길로, 오른쪽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㚟),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의 길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각 군은 서로 연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모두 평양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수 양제는 출병에 앞서 상건수(桑乾水) 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내고, 계성(薊城)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각 군대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이 되게 하였다. 보병은 80대로 나누어 4단으로 하고, 단마다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갑옷, 투구, 깃발 등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하루에 1군씩 40리 간격으로 점진하게 하여 40일 만에 출발이 완료되었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3. 1. 수 양제의 조서와 군대 동원

수 양제는 611년 2월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천명하고, 612년 정월에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밝히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조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구려가 한나라와 위나라 때 잠시 엎어졌으나, 난리를 틈타 다시 세력을 키워 중국 땅을 잠식하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 고구려가 조칙을 거부하고 조공을 하지 않으며, 도망자를 받아들이고 변방을 어지럽히고 있다.
  •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을 선동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고, 청구(靑丘) 바깥에서 조공하는 나라들의 사신 왕래를 막고 재물을 약탈하고 있다.
  • 고구려의 가혹한 법령과 무거운 조세, 호족들의 국정 농단과 붕당, 뇌물 수수 등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 고구려가 잦은 재앙과 흉년, 끊임없는 전쟁과 부역, 군량 운반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


수 양제는 이러한 명분을 내세워 113만 3,8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숫자는 군량을 나르는 사람을 제외한 수치이며, 실제 동원된 인원은 그 배가 넘었다고 한다. 이들을 200만 명이라고도 칭하였다. 양제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며, 왼쪽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해명(海冥),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등의 길로, 오른쪽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㚟),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의 길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각 군은 서로 연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모두 평양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수 양제는 출병에 앞서 상건수(桑乾水) 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내고, 계성(薊城)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냈다. 각 군대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이 되게 하였다. 보병은 80대로 나누어 4단으로 하고, 단마다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갑옷, 투구, 깃발 등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하루에 1군씩 40리 간격으로 점진하게 하여 40일 만에 출발이 완료되었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3. 2. 요하 전투 (612년 3월 ~ 5월)

612년 3월 15일, 수 양제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며 수나라의 대군은 요하에 이르렀고, 동쪽으로 진군하는 수나라 군사와 이를 방어하는 고구려 군사간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에서 수나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간에 2달 동안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구려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수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하 서쪽 언덕에서 3개의 부교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매번 고구려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접전하였다. 고구려군 약 2만여명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기록상 약 3만여명이 사살되었다. 3월 19일, 수나라 군은 총공격을 하여 도하에 나섰으나 고구려군의 대반격에 크게 패하여 맥철장, 전사웅, 맹차 등 용맹한 장수들이 죽었다.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수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고, 이에 수나라 대군이 일제히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격전을 치뤘고, 이에 고구려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마침내 처음 요하에 도착한지 2달만인, 5월 16일, 수나라 대군은 요하를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요하를 건넜으나 다시 고구려군이 몰려와 요하 동안(東岸)에서 고구려 군사와 큰 전투를 치른 후 수제가 요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명하여 요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3. 3. 요동성 전투 (612년 5월 ~ 6월)

요동성은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며 평지성이었다. 고구려 역대 성 가운데 5손가락 안에 드는 대성이었다. 고구려 군사는 자주 나와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수 양제는 요동성 전투에서 수나라 군사들이 대량으로 전사함으로써 종대대형으로 진군이 어렵자 후군로와 보급로가 차단당하지 않기 위하여 어영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고 좌로군 11군 장수에게는 진군로 주변 요지(要地)에 있는 고구려 성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12군은 진군로 주변 요지에 있는 고구려 성 공격에 나섰으나, 수개월 간 요동의 20여 성 중 단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 수군 3개 군이 몰살당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항복하기를 청하였으나, 장수들은 수 양제의 "군사행동은 모두 아뢰고서 행하여라"라는 칙지 때문에 감히 응하지 못하고 먼저 보고했다. 회보가 왔을 때에는 성 안의 방어가 이미 갖추어져 항거하며 싸웠고, 이런 일이 두세 차례 거듭되었으나 수 양제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고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6월, 수 양제는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성지와 형세를 관찰한 뒤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으며, "그대들이 힘을 다하지 아니해도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는 다 벌벌 떨며 낯빛이 변하였다.

3. 4. 평양성 전투와 내호아의 패퇴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은 패수로부터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내호아는 부총관 주법상의 신중론을 무시하고 정병 4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건무로 추정되는 고구려 장수는 빈 절에 복병을 숨겨두고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내호아를 유인했다. 성 안으로 들어온 수나라 군대가 약탈을 위해 흩어지자 복병이 공격하여 크게 패퇴시켰고, 내호아는 겨우 목숨만 건져 살아남았다.

이때 고구려 지휘 장수는 영양왕의 동생인 고건무로 추정되며, 평양성의 수비군은 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다수가 을지문덕을 따라갔고, 고건무를 따랐던 군사는 500명 남짓으로 보이나, 4만 명의 수나라 군대를 격파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2만~4만 명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수군도 상륙하여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군사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했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단속하고 있어 물러났다. 내호아는 해포에 주둔하며 감히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3. 5. 살수대첩 (612년 7월)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굶주림에 지쳐있음을 간파하고,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 싸울 때마다 패하는 척하며 후퇴했다. 이로 인해 우문술 등은 하루 동안 일곱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이러한 연이은 승리에 자만심을 갖게 된 우문술은 결국 을지문덕의 유인책에 넘어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격하게 된다.

을지문덕우중문에게 "그대의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라는 내용의 시, 이른바 '여수장우중문시'를 보내 심리전을 펼쳤다. 또한, 우문술에게는 영양왕이 항복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려 퇴각을 유도하였다.

당초 우문술은 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각하려 하였으나, 우중문은 정예병으로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놓친 것에 불안함을 느낀 우문술은, 결국 군사들이 피로하고 평양성이 함락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거짓 항복을 명분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수나라 군대가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에 이르러 절반쯤 강을 건넜을 때, 을지문덕은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 후군을 맹공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 공격으로 수나라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하루 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450리를 달아났다. 9군 30만 5천 명 중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2천 7백 명뿐이었으며, 막대한 물자도 거의 탕진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대승리로 기록되는 살수대첩의 결과였다.

4. 전쟁의 결과

평양을 직공하는 육군 별동대와 해군 상륙군이 모두 패퇴하고, 수 본국에는 반란이 일어나자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하였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얻은 것 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고구려 원정 실패는 수나라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수의 고구려 원정군을 회유하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고구려는 청야전술로 인해 요동벌부터 평양 깊숙이까지 모든 논밭이 불타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인명 피해도 컸다. 요동벌에서만 1만 명의 군사가 죽었고, 요동성 공방전 중에도 최소 2~3만 명의 고구려군이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나라 군사들이 요동의 각 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기에 각 성의 피해 상황까지 합치면 피해 규모는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4. 1. 고구려의 피해

고구려는 청야전술로 인해 요동벌부터 평양 깊숙이까지 모든 논밭이 불타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인명 피해도 컸다. 요동벌에서만 1만 명의 군사가 죽었고, 요동성 공방전 중에도 최소 2~3만 명의 고구려군이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나라 군사들이 요동의 각 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기에 각 성의 피해 상황까지 합치면 피해 규모는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4. 2. 수나라의 멸망에 끼친 영향

평양을 직공하는 육군 별동대와 해군 상륙군이 모두 패퇴하고, 수 본국에는 반란이 일어나자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하였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얻은 것 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고구려 원정 실패는 수나라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수의 고구려 원정군을 회유하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고구려 또한 청야전술로 인해 요동벌부터 평양 깊숙이까지 모든 논밭이 불타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요동벌에서만 1만의 군사가 죽었고, 요동성 공방전 중에도 2~3만의 고구려군이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나라 군사들이 요동의 각 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기에 각 성의 피해 상황까지 합친다면 인명 피해는 수만 명을 헤아릴 것이다.

5. 전력 추정 논란

이기훈 박사, 데이빗 앤드류 그라프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는 기록상의 병력을 60만 정도로 추정[1][2][3]하였고, 한국역사고전소장 임용한 박사는 실제 병력 30만에 나머지 보급병을 포함하여 113만으로 추정[4]하였으며, 학계 정설은 113만이고 60만 추정은 소수라고 한다.[5]

그러나 피인용 횟수를 검색하면 100만을 주장하는 논문 대다수가 학계에서 아무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수나라가 갑자기 청나라와 같은 후기 왕조에 맞먹을 정도로 경작 면적과 같은 통계[6]가 급상승했고, 고수전쟁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도 적지 않은 병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6. 한국사 속의 위상

6. 1. 굳건한 국방력의 상징

6. 2. 민족의 자긍심 고취

6. 3. 외세 침략 극복의 역사적 교훈

참조

[1] 서적 전쟁으로 보는 한국 역사
[2] 문서 전쟁으로 보는 한국 역사 https://commons.wiki[...]
[3]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ROUTLEDGE
[4] Youtube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 고구려-수나라 전쟁 편(43부) https://www.youtube.[...]
[5] 간행물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
[6] 서적 청나라 경작 면적 https://books.google[...] 上海人民出版社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