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화친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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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일 화친 조약은 1854년 영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의 쇄국 정책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 중 러시아의 일본 접근에 대응하여 영국은 제임스 스털링 제독을 파견,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나가사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영국 선박에 물과 식량을 제공했다. 하지만 통상 조항의 부재와 치외법권 문제의 모호성으로 영국 내에서는 불완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1858년 엘긴 경에 의해 영일 통상 조약이 체결되어 불평등 조약 체제가 강화되었고, 일본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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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화친 조약 | |
---|---|
조약 개요 | |
조약명 | 영일 화친 조약 |
원어 명칭 | 日英和親条約 (일본어) Anglo-Japanese Friendship Treaty (영어) |
서명일 | 1854년 10월 14일 (가에이 7년 8월 23일) |
서명 장소 | 나가사키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나가사키, 하코다테 (후의 하코다테) 개항 |
관련 조약 | 미일 화친 조약 러일 화친 조약 일란 화친 조약 |
2. 조약 체결 이전의 상황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은 중국에서 큰 이익을 얻었지만, 일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미국이 매튜 C.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영국의 적국이 된 러시아의 푸탸틴 해군 중장이 러일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동인도·중국함대 사령관 제임스 스털링 해군 제독을 일본에 급파했다.
스털링은 프랑스와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캄차카반도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후, 일본으로 향했다. 1854년 9월 7일 스털링이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 푸탸틴은 이미 떠난 뒤였다. 스털링은 막부에 유럽이 크림 전쟁 중이며, 러시아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일본에 국외 중립을 요구했다.
당시 나가사키 봉행은 미즈노 다다노리였는데, 그는 매튜 페리와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은 인물이었다. 미즈노는 이 기회에 영국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아편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과 친선 조약을 맺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스털링은 영국 정부로부터 정식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지만,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응했다. 막부는 오메쓰케 나가이 나오유키를 파견하여 교섭을 지원하도록 했으며, 1854년 10월 14일 영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큰 이점으로 여겨 조약을 추인했다. 그러나 홍콩 총독 존 보울링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통상 조약 체결을 자신이 직접 주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에 의해 영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2. 1. 일본의 쇄국 정책과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인 1600년 윌리엄 애덤스가 일본에 도착하면서 영국과 일본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1613년에는 영국 선장 존 새리스가 나가사키 히라도에 무역 기지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2] 그러나 1623년 영국은 일본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1639년 도쿠가와 막부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국가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발표하여, 네덜란드와 청나라와의 외국 무역만을 나가사키에서 유지하도록 했다.[3]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고립 정책은 여러 번 도전을 받았다. 1844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는 일본에 스스로 고립 정책을 끝내라는 편지를 보냈다.[4] 1852년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는 매튜 페리 제독을 파견하여 무력 외교를 통해 일본 항구를 개방하도록 강요했다.[5] 페리의 위협에 일본은 결국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여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구를 미국에 개방했다.[7]
2. 2. 크림 전쟁과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 변화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은 중국에서 큰 이익을 얻었지만, 일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미국이 매튜 C.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영국의 적국이 된 러시아의 푸탸틴 해군 중장이 러일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동인도·중국함대 사령관 제임스 스털링 해군 제독을 일본에 급파했다.[8]
스털링은 프랑스와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캄차카반도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후, 일본으로 향했다. 1854년 9월 7일 스털링이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 푸탸틴은 이미 떠난 뒤였다. 스털링은 막부에 유럽이 크림 전쟁 중이며, 러시아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일본에 국외 중립을 요구했다.[9]
당시 나가사키 봉행은 미즈노 다다노리였는데, 그는 매튜 페리와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은 인물이었다. 미즈노는 이 기회에 영국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아편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과 친선 조약을 맺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스털링은 영국 정부로부터 정식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지만,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응했다. 막부는 오메쓰케 나가이 나오유키를 파견하여 교섭을 지원하도록 했으며, 1854년 10월 14일 영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큰 이점으로 여겨 조약을 추인했다. 그러나 홍콩 총독 존 보울링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통상 조약 체결을 자신이 직접 주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에 의해 영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3. 영일 화친 조약의 체결 과정 (1854년)
1854년, 크림 전쟁에 참전 중이던 영국은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스털링을 일본 나가사키에 파견했다. 스털링은 러시아 함대를 추격하던 중 나가사키에 입항하여, 막부에 러시아의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경고하고 일본의 국외 중립을 요구했다.[8]
당시 나가사키 봉행 미즈노 다다노리는 페리 제독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은 인물로, 이 기회에 영국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과의 친선 조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스털링은 외교 권한이 없었음에도 막부의 제안에 응했고, 오메쓰케 나가이 나오유키가 교섭을 도왔다.
1854년 10월 14일, 나가사키 봉행 미즈노 다다노리와 메쓰케 나가이 나오유키는 스털링과 함께 영일 화친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에서의 보급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조약을 추인했다.[9]
3. 1. 스털링의 방일과 일본 측의 오해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은 중국에서 큰 이익을 얻었고, 일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매튜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일본에 파견되어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의 적국인 러시아의 푸탸틴 해군 중장이 러일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이에 영국은 동인도·중국함대사령관 제임스 스털링 해군 제독을 일본에 급파했다. 스털링은 프랑스와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캄차카반도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뒤,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향했다. 1854년 9월 7일, 스털링이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는 푸탸틴이 이미 떠난 뒤였다. 스털링은 막부에 유럽이 크림 전쟁 중이며, 러시아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일본에 국외 중립을 요구했다.[8]
당시 나가사키 봉행은 미즈노 다다노리였는데, 그는 페리 제독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은 인물이었다. 미즈노는 이 기회를 통해 영국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아편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과 친선 조약을 맺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영국과의 합의가 불가피하며, 영국이 쿠릴 열도에 대한 러시아의 계획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9]
스털링은 영국 정부로부터 외교 교섭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응했다. 막부는 메쓰케 나가이 나오유키를 파견하여 교섭을 지원하도록 했다.
3. 2. 조약 협상과 주요 내용
아편 전쟁으로 영국은 중국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일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미국이 매튜 C. 페리 해군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수교 조약을 체결하려는 노력에는 소극적이었다.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적국이 된 러시아의 푸챠틴 해군 중장이 수교 조약 교섭을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하였고, 영국은 동인도·중국함대사령관 제임스 스털링 해군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스털링은 프랑스와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캄차카반도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뒤 명령을 받고 일본을 향했다. 1854년 9월 7일 스털링이 나가사키에 입항했을 때에는 푸챠틴은 떠난 뒤였기에 스털링은 막부에 대해 현재 유럽이 크림 전쟁에 휘말려있으며, 러시아는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있음을 경고한 뒤, 일본에게 국외중립을 요구했다.
당시 나가사키 봉행은 페리 제독과의 외교교섭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은 미즈노 다다노리였는데, 미즈노는 이 기회에 영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하고자 원했다. 일본은 아편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위기감이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친선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최우선 수단이라고 여긴 것이다. 스털링은 영국 정부로부터 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에 응했다. 막부는 오메쓰케 나가이 나오유키를 파견하여 교섭을 돕도록 하였으며, 1854년 10월 14일 영일 화친 조약이 조인되었다.[8]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태에서 일본에서 보급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큰 이득이라고 여겨 사후에 이를 추인하였다. 하지만 영국이 동아시아에 파견한 최고위 외교관이었던 존 보울링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영일 화친 조약은 7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9]
조항 | 요약 |
---|---|
I | 영국 선박의 식량 및 수리를 위해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한다. |
II |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개항 날짜를 설정하고, 영국은 현지 규정을 준수하기로 합의한다. |
III | 기타 항구는 영국 선박이 조난 시에만 사용한다. |
IV | 현지 법률을 준수하기로 합의한다. |
V | 향후 개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하며, 네덜란드 및 중국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
VI | 조약은 12개월 이내에 비준되어야 한다. |
VII | 조약이 비준되면, 향후 영국 방문에 의해 변경되지 않는다. |
제6조는 조약의 조건이 대영 제국 여왕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에 의해 12개월 이내에 비준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천황이 외국인과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털링은 쇼군의 대표자들과 조약을 체결했고, 그 내용은 고메이 천황에 의해 승인되었다.[10]
이 조약에서는 나가사키와 하코다테를 영국에 개방 (조약항의 설정)하고, 땔감과 식수의 공급을 인정했다. 또한, 범죄를 저지른 선원의 인도 및,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 등의 규칙도 정해졌다. 단, 통상 규정(영사 파견의 규정)은 없고, 게다가 조약항에 내항한 영국 선은 일본법을 따르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4. 조약의 내용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크림 전쟁 중 러시아가 일본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제임스 스털링을 파견하여 1854년 10월 14일 영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였다.
영일 화친 조약은 7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
---|---|
제1조 | 영국 선박의 식량 및 수리를 위해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한다. |
제2조 |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개항 날짜를 설정하고, 영국은 현지 규정을 준수하기로 합의한다. |
제3조 | 기타 항구는 영국 선박이 조난 시에만 사용한다. |
제4조 | 현지 법률을 준수하기로 합의한다. |
제5조 | 향후 개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하며, 네덜란드 및 중국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
제6조 | 조약은 12개월 이내에 비준되어야 한다. |
제7조 | 조약이 비준되면, 향후 영국 방문에 의해 변경되지 않는다. |
제6조에 따르면, 조약은 대영 제국 여왕과 "일본 천황"에 의해 12개월 이내에 비준되어야 했다.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였으며, 천황이 외국인과 교류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털링은 쇼군의 대표자들과 조약을 체결했고, 고메이 천황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하였다.[10]
4. 1. 조약의 불평등성
아편 전쟁으로 영국이 중국에서 큰 이익을 얻자 일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크림 전쟁 와중에 러시아가 수교 조약을 맺으려 하자 영국은 제임스 스털링을 보내 1854년 영일 화친 조약을 체결했다.영국은 일본의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땔감과 물을 공급받게 되었다. 또한 범죄를 일으킨 영국 선원의 인도나 편무적 최혜국 대우 등의 규칙도 인정받아,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10]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요약 |
---|---|
제1조 | 영국 선박의 식량 및 수리를 위해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한다. |
제2조 |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개항 날짜를 설정하고, 영국은 현지 규정을 준수하기로 합의한다. |
제3조 | 기타 항구는 영국 선박이 조난 시에만 사용한다. |
제4조 | 현지 법률을 준수하기로 합의한다. |
제5조 | 향후 개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하며, 네덜란드 및 중국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
제6조 | 조약은 12개월 이내에 비준되어야 한다. |
제7조 | 조약이 비준되면, 향후 영국 방문에 의해 변경되지 않는다. |
5. 조약의 결과와 영향
아편 전쟁으로 영국은 중국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일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크림 전쟁 발발로 인해 일본과의 교섭은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크림 전쟁 중 러시아 함대가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동인도·중국 함대 사령관 제임스 스털링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향했다. 스털링은 막부에 국외 중립을 요구했고, 막부는 나가사키 봉행 미즈노 타다노리를 통해 영국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1854년 10월 14일, 스털링과 미즈노 타다노리, 나가이 나오유키는 '''영일 화친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일본에서의 보급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큰 이점을 얻었고, 본국도 이를 추인했다.
영일 화친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이어 나가사키를 영국에 개항했으며, 영국 선박에 땔감과 물을 공급하게 되었다. 또한 범죄를 저지른 선원의 인도,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 등의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후, 러시아나 네덜란드와도 유사한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고, 1858년에는 엘긴 백작제임스 브루스가 일본을 방문하여 영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5개 항구 개항, 무역, 영국인 거주 등을 추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5. 1. 일본에 미친 영향
영일 화친 조약은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미일 화친 조약을 통해 이미 미국에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했지만, 이 조약을 통해 나가사키와 하코다테를 영국에도 개항하고(조약항 설정), 땔감과 식수 공급을 허용했다. 또한 범죄를 저지른 선원의 인도 및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 등의 규칙도 정해졌다.[2]당시 영국은 크림 전쟁 수행 중이었고, 일본 북방에서 러시아 해군과의 교전을 위해 일본에서의 보급이 절실했다. 영국 본국도 이러한 이점을 인정하여 조약을 추인하였다. 그러나 통상 규정(영사 파견 규정)이 없고, 조약항에 내항한 영국 선박이 일본 법을 따르도록 의무화된 점 등은 홍콩 총독 존 보울링의 이의 제기를 받았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유사한 화친 조약을 체결했으며, 1858년에는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가 일본을 방문하여 5개 항구 추가 개항, 무역 허용, 영국인 거주를 인정하는 영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5. 2. 영국에 미친 영향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태에서 일본에서 보급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큰 이득으로 여겨 조약을 추인하였다. 하지만, 영국이 동아시아에 파견한 최고위 외교관이었던 존 보울링(John Bowring)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통상조약 체결을 자신의 손으로 하길 원했지만, 결국 엘긴 백작에 의해 영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만다.[11]영일 화친 조약을 통해 영국은 시모다와 하코다테에서 땔감과 물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범죄를 일으킨 선원의 인도나 편무적 최혜국 대우 등의 규칙도 인정되어 불평등 조약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가 일본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을 경계한 영국은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영국 해군 중장 제임스 스털링은 일본 해역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고, 분쟁에서 일본의 국가 중립을 재확인하고자 했다.[8]
그러나 영국 측에서는 스털링이 즉각적인 비판을 받았다. 조약이 일본과의 공식적인 통상 관계에 대한 조항을 마련하지 않았고,[11]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 문제가 모호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약의 마지막 조항은 추가 협상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듯했다.
엘긴 경은 1858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통상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으며, 1858년 영일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인 거류지 설립,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이 허용되었으며, 외국 상품에 대한 최소한의 수입 관세가 부과되었다. 일본은 이 시기 아시아와 서방의 관계를 특징짓는 "불평등 조약 체제"에 불만을 품었다.[12]
5. 3. 존 볼링과 엘긴 백작의 역할
당시 홍콩 총독이었던 존 보울링은 영일 화친 조약이 통상 관계에 대한 조항을 마련하지 않았고,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 문제가 모호하게 표현되었기에 불완전하다고 여겼다.[11] 그는 통상 조약 체결을 자신이 직접 추진하길 원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결국 1858년,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가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통상 협상을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 엘긴 백작은 요트 인도를 구실로 삼아 협상을 시작했고, 영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본격적인 통상 관계를 수립했다. 이 조약으로 외국인 거류지 설립,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이 허용되었으며, 외국 상품에 대한 최소한의 수입 관세가 부과되었다.[12]
5. 4.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
영일 화친 조약은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서구 열강의 압력에 직면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받게 되었다.아편 전쟁 결과, 영국은 중국 대륙에 거대한 이권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았다. 미국(미국)이 동인도 함대를 파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해 보도록 하자"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 후 크림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과의 교섭은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858년에는 엘긴 백작제임스 브루스가 방일하여 5개 항구 개항 및 무역과 영국인의 거주를 인정하는 영일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이 시기 아시아와 서방의 관계를 특징짓는 "불평등 조약 체제"에 불만을 품었다.[12] 영일 화친 조약 이후 러시아와도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었다(시모다 조약, 1855년 2월 7일).
6. 조약에 대한 평가 및 역사적 의의
영일 화친 조약은 일본이 개항과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일 화친 조약과 마찬가지로,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영국에 개항하고 땔감과 물자를 공급하게 되었다. 또한 범죄를 일으킨 선원의 인도나 편무적 최혜국 대우 등의 규칙도 인정되어 불평등 조약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홍콩 총독 존 보울링은 이 조약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 상태에서 일본에서 보급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큰 이득으로 여겨 조약을 추인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참조
[1]
서적
The Anglo-Japanese Convention of 1854
[2]
논문
The Japonian Charters
https://www.jstor.or[...]
1990
[3]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4]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5]
서적
Japan
[6]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7]
웹사이트
Narrative of the expedition of an American Squadron to the China Seas and Japan, 1856
http://ebook.lib.hku[...]
2017-05-19
[8]
서적
The Language Problem in the Anglo-Japanese Negotiations of 1854
[9]
서적
Escape from Impasse
International House of Japan
2006
[10]
서적
A History of Japan, 1582–1941: Internal and External Worlds
2003
[11]
서적
Great Britain and the Opening of Japan, 1834–1858
Japan Library paperback
1995
[12]
서적
The Japanese and Europe: Images and Perceptions
https://books.google[...]
2000
[13]
문서
日露和親条約交渉のためエフィム・プチャーチンが4隻の艦隊を率いて入港中であった。
[14]
문서
他に、エンカウンター(スクリューコルベット)、スティックス、バラクータ(共に外輪スループ)。
[15]
문서
幕府はペリーに次回の交渉時には長崎に行くように伝えていた。
[16]
문서
スターリングは同年3月に日米和親条約が締結されたことを米海軍より入手していたが、外交交渉は任務に含まれてい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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