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수호조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류수호조약은 1854년 7월 11일 류큐 왕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이 동아시아 진출을 시도하면서 류큐 왕국을 일본으로 가는 거점으로 삼으려 했고, 류큐 왕국은 이에 대응하여 조약 체결을 맺었다. 이 조약은 자유 무역 허용, 미국 선박에 대한 물자 제공, 표류민 구조, 미국의 영사 재판권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류큐 왕국의 전통적인 무역 통제 정책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류큐 왕국이 사쓰마 번의 부용국이었고, 조약의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1879년 류큐 처분으로 류큐 왕국이 멸망하면서 조약은 효력을 상실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54년 조약 - 미일 화친 조약
미일 화친 조약은 1854년 에도 막부와 미국이 흑선 내항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하기로 한 조약으로, 이후 불평등 조약과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으나 정치적 격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1854년 조약 - 영일 화친 조약
영일 화친 조약은 1854년 에도 막부와 영국이 체결한 조약으로, 크림 전쟁 중 러시아의 수교 추진에 대응하여 영국이 협상을 진행, 일본이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땔감과 물을 공급하게 되었으나 불평등 조항도 포함되어 영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 - 1854년 미국 - 미일 화친 조약
미일 화친 조약은 1854년 에도 막부와 미국이 흑선 내항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하기로 한 조약으로, 이후 불평등 조약과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으나 정치적 격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1854년 미국 - 1854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
1854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논쟁 속에서 노예제 확산에 대한 찬반 논쟁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며 휘그당과 민주당 중심의 정치 구도가 붕괴되고 공화당을 비롯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 1854년 일본 - 미일 화친 조약
미일 화친 조약은 1854년 에도 막부와 미국이 흑선 내항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하기로 한 조약으로, 이후 불평등 조약과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으나 정치적 격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1854년 일본 - 호요 해협 지진
호요 해협 지진은 1854년 12월 7일에 발생했으며, 이요국, 분고국, 부젠국 등에서 강한 진동이 감지되었고 중국 상하이에서도 감지되었으며, 쓰나미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주택 붕괴 등의 피해가 있었다.
미류수호조약 | |
---|---|
조약 정보 | |
제목 | 아메리카합중국 류큐국 정부와의 정약 |
원제 | Convention between the Lew Chew Islands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통칭 | 류미수호조약 |
기안 | 미상 |
서명일 | 1854년 7월 11일 ( 함풍 4년, 가영 7년 6월 17일) |
서명 장소 | 미상 |
날인 | 미상 |
효력 발생일 | 미상 |
현황 | 미상 |
실효일 | 1879년 (메이지 12년) |
체결국 | 류큐 왕국과 미국 |
당사국 | 미상 |
기탁자 | 미상 |
문헌 정보 | 미상 |
언어 | 미상 |
내용 | 미상 |
관련 정보 | 미상 |
2. 체결까지의 경위
산업 혁명 이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진행되면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 가는 거점으로 여겨졌고, 1853년 5월 26일에는 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나하 항에 내항했다[4]。오키나와에서는 수로 조사와 내륙 탐험을 하는 동시에, 슈리성을 방문하기도 했다[4]。
근세의 류큐 왕국에서는 1704년에 사쓰마 번으로부터 중국 배, 조선 배, 서양 배(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하는 '호에이 원년 어조목'이 포고되었으나, 서양 배의 내항 증가에 따라 가에이 시대와 안세이 시대에 개정되었다[5]。또한, 서양 배의 내항 시 류큐 왕부는 정식 외교 교섭을 피하기 위해 가명과 가관을 사용한 허구 조직으로 대응을 했다[5]。페리의 내항과 슈리성 강행 방문에서도, 마부니아지 조켄이 '쇼 타이모'라는 이름과 '총리관'의 관직명, 무카이 뇨잔(타나바라 친카타 쵸쿠)이 '바 료사이'라는 이름과 '포정관'의 관직명으로 대응했다[5]。
페리는 총 5차례에 걸쳐 나하에 기항했다[4]。페리는 류큐 점령 계획을 가지고 있어 1854년 1월 25일에 본국 정부에 진언했지만, 프랭클린 피어스의 신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해군 장관 도빈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고 부정했다[6]。도빈의 회신은 당시 우편 사정으로 류큐와의 교섭 후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어 교섭에 미치는 영향은 불분명하지만, 페리에게는 일본에 류큐 개항을 인정받거나, 류큐와 독자적으로 조약(Treaty)을 조인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고 한다[6]。이 중 일본에 류큐 개항을 인정받는 선택지는, 1854년 3월 17일에 페리가 하야시 후쿠사이 등과 회담했을 때, 일본 측에서 류큐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며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기 때문에 좌절되었다[6]。한편, 류큐와 독자적으로 조약(Treaty)을 조인하는 선택지에 대해, 페리의 『원정기』에 따르면 류큐 측은 중국에 대해 assumption(불손한) 행위에 해당되는 표현을 피하고 싶어 했고, 류큐 측의 『류큐 왕국 평정소 문서』에도 반대의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6]。
그 때문에 Treaty의 문구는 피하게 되었고, 1854년 7월 11일에 페리와 류큐 측 대표(쇼 히로이서 등) 사이에 문서가 조인되었다[5][6]。
2. 1.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과 페리 제독의 내항
19세기 중반, 산업 혁명을 거친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로 진출을 꾀했다. 특히 미국은 태평양을 통한 무역로 개척에 관심을 가졌다. 1853년 5월 26일, 매튜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류큐 왕국의 나하 항에 처음 도착했다.[4] 페리는 5월 28일에 총리관인 마부니 촌의 안지(按司)로 있던 상대모(尚大模)와 처음으로 회견했고, 6월 6일에는 슈리성을 방문하여 북전(北殿)에서 총리관 등과 회견했다. 후에 이에 대한 책임을 들어 상대모는 총리관을 사임하고 있다. 페리 제독은 류큐 왕국을 일본으로 가는 거점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6월 9일에는 미시시피호를 남기고 오가사와라 제도로 출항했다.[4]6월 18일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나하로 귀항한 페리는, 함대에 자재 공급을 마친 7월 2일 서플라이호를 나하 항에 남기고 군함 4척을 이끌고 우라가를 향하여 출항했다. 이때 우라가로 향했던 4척과는 별도로 키프라이스호는 상해로 향했다. 7월 25일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에도 막부에 전한 페리는 우라가로부터 귀항하여 자재를 공급하고, 류큐 측에게 성규사(聖現寺)의 1년간 임대 및 그 협정으로, 약 5, 600톤의 석탄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의 건설 및 그 시설의 타당한 금액으로의 대여, 정리(偵吏)의 추적을 금지, 시장을 세워 교역을 자유롭게 하는 것의 4가지 조항을 요구해 이것을 승낙 받고 8월 1일에 홍콩을 향하여 출항했다.
근세 류큐 왕국에서는 1704년에 사쓰마 번으로부터 중국 배, 조선 배, 서양 배(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하는 '호에이 원년 어조목'이 포고되었으나, 서양 배의 내항 증가에 따라 가에이 시대와 안세이 시대에 개정되었다.[5] 또한, 서양 배의 내항 시 류큐 왕부는 정식 외교 교섭을 피하기 위해 가명과 가관을 사용한 허구 조직으로 대응을 했다.[5] 페리의 내항과 슈리성 강행 방문에서도, 마부니아지 조켄이 '쇼 타이모'라는 이름과 '총리관'의 관직명, 무카이 뇨잔(타나바라 친카타 쵸쿠)이 '바 료사이'라는 이름과 '포정관'의 관직명으로 대응했다.[5]
페리는 총 5차례에 걸쳐 나하에 기항했다.[4] 페리는 류큐 점령 계획을 가지고 있어 1854년 1월 25일에 본국 정부에 진언했지만, 프랭클린 피어스의 신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해군 장관 도빈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고 부정했다.[6] 도빈의 회신은 당시 우편 사정으로 류큐와의 교섭 후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어 교섭에 미치는 영향은 불분명하지만, 페리에게는 일본에 류큐 개항을 인정받거나, 류큐와 독자적으로 조약(Treaty)을 조인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고 한다.[6] 이 중 일본에 류큐 개항을 인정받는 선택지는, 1854년 3월 17일에 페리가 하야시 후쿠사이 등과 회담했을 때, 일본 측에서 류큐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며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기 때문에 좌절되었다.[6] 한편, 류큐와 독자적으로 조약(Treaty)을 조인하는 선택지에 대해, 페리의 『원정기』에 따르면 류큐 측은 중국에 대해 assumption(불손한) 행위에 해당되는 표현을 피하고 싶어 했고, 류큐 측의 『류큐 왕국 평정소 문서』에도 반대의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6]
그 때문에 Treaty의 문구는 피하게 되었고, 1854년 7월 11일에 페리와 류큐 측 대표(쇼 히로이서 등) 사이에 문서가 조인되었다.[5][6] 미국 내에서의 조약 체결 절차 경위는 다음과 같다.[7]
- 1854년 7월 11일 - 페리가 간이 서명.
- 1855년 3월 3일 - 미국 상원(미국 제33대 의회/33rd United States Congress영어)이 비준에 대한 조언과 동의.
- 1855년 3월 9일 - 프랭클린 피어스미국 대통령이 비준을 재가하고, 조약 체결권 행사를 선언.
2. 2. 류큐 왕국의 입장과 대응
류큐 왕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양속(兩屬)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5][6] 산업 혁명 이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류큐 왕국은 서양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 했으나, 1853년 5월 26일 매튜 페리 제독이 나하 항에 내항하는 등[4] 외부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1704년 사쓰마 번으로부터 중국, 조선, 서양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선박을 대상으로 하는 '호에이 원년 어조목'이 포고되었으나, 서양 선박의 내항 증가에 따라 가에이 시대와 안세이 시대에 개정되었다.[5] 류큐 왕부는 정식 외교 교섭을 피하기 위해 가명과 가관(假官)을 사용한 허구 조직으로 대응했다.[5] 페리의 내항과 슈리성 강행 방문에서도, 마부니아지 조켄은 '쇼 타이모'라는 이름과 '총리관'의 관직명으로, 무카이 뇨잔(타나바라 친카타 쵸쿠)은 '바 료사이'라는 이름과 '포정관'의 관직명으로 대응했다.[5]
페리는 류큐와 독자적인 조약(Treaty) 체결을 원했지만, 류큐 측은 중국에 대한 불손한 행위로 비춰질 것을 우려하여 Treaty라는 문구 사용을 피하고자 했다.[6] 결국 1854년 7월 11일 페리와 류큐 측 대표(쇼 히로이서 등) 사이에 문서가 조인되었다.[5][6]
2. 3. 조약 체결 과정
1853년 5월 26일, 매튜 C. 페리는 서스케하나호를 포함한 3척의 배를 이끌고 나하 항에 처음 도착했다.[4] 페리는 5월 28일 총리관인 마부니 촌(摩文仁村)의 안지(按司) 상대모(尚大模)와 처음 만났고, 6월 6일에는 슈리성을 방문하여 북전(北殿)에서 총리관 등과 회견했다. 이 일로 상대모는 총리관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5]6월 8일, 페리는 국왕 등에게 물품을 선물하고, 6월 9일 미시시피호를 남겨둔 채 오가사와라 제도로 떠났다. 6월 18일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나하로 돌아온 페리는 함대에 물자를 공급하고, 7월 2일 서플라이호를 나하 항에 남겨둔 채 군함 4척을 이끌고 우라가로 향했다. 이때 우라가로 향한 4척과는 별도로 키프라이스호는 상해로 갔다.
7월 25일, 페리는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에도 막부에 전달하고 우라가에서 돌아와 물자를 공급받았다. 류큐 측에 성규사(聖現寺)의 1년간 임대, 약 5,600톤의 석탄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 건설 및 적절한 가격으로의 대여, 정리(偵吏) 추적 금지, 시장을 세워 교역 자유화 등 4가지 조항을 요구하여 승낙받고, 8월 1일 홍콩으로 출항했다.
산업 혁명 이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진행되면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 가는 거점으로 여겨졌다.[4] 류큐 왕국은 1704년 사쓰마 번으로부터 중국 배, 조선 배, 서양 배(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하는 '호에이 원년 어조목'을 포고했으나, 서양 배의 내항 증가에 따라 가에이 시대와 안세이 시대에 개정되었다.[5] 류큐 왕부는 정식 외교 교섭을 피하기 위해 가명과 가관을 사용한 허구 조직으로 대응했다.[5] 페리의 슈리성 강행 방문에도 마부니아지 조켄이 '쇼 타이모', 무카이 뇨잔(타나바라 친카타 쵸쿠)이 '바 료사이'라는 가명과 관직명으로 대응했다.[5]
페리는 류큐 점령 계획을 가지고 1854년 1월 25일 본국 정부에 건의했지만, 프랭클린 피어스의 신정부는 동의하지 않았고, 해군 장관 도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부정했다.[6] 페리는 일본에 류큐 개항을 인정받거나, 류큐와 독자적으로 조약(Treaty)을 맺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6] 일본에 류큐 개항을 인정받는 것은 하야시 후쿠사이 등이 류큐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회피하여 좌절되었다.[6] 류큐와 독자적 조약(Treaty) 체결은 류큐 측이 중국에 대한 불손한 행위로 여겨지는 표현을 피하려 했고, 류큐 측 문서에도 반대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6]
1854년 1월 21일, 페리는 군함 3척을 이끌고 다시 나하에 와서 슈리성을 방문하여 물자 등을 공급받고, 2월 7일 에도로 향했다. 7월 1일, 일본과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다시 나하에 왔다. 7월 7일, 류큐와의 조약 체결을 위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고, 다음날 조약안 수정을 거쳐 류큐 측의 회답 기한을 7월 10일로 정했다. 7월 10일, 다시 협의하여 조약 수정안을 승인하고 류큐 측은 조약을 승낙한다고 답했다.
결국 Treaty라는 문구는 피하고, 7월 11일 류큐-미국 간 우호 조약이 체결되었다.[5][6] 류큐 측 전권 대표는 상굉훈(尚宏勲, = 요나시로 왕자 조키(与那城王子朝紀) = 나카자토 아지 조키(仲里按司朝紀))과 마량재(馬良才, = 타나바루 우에카타 조쿠(棚原親方朝矩))였고, 미국 측 전권 대표는 매튜 C. 페리였다. 조약문은 한자(류큐국의 외교 문서는 한자)와 영어 두 가지로 작성되어 교환되었고, 7월 13일에는 한 통을 더 작성했다.
3. 조약의 주요 내용
류큐 왕국과 미국 간의 우호 조약은 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 무역 허용 (제1조)류큐 왕국은 미국과의 자유 무역을 허용해야 했다. 이는 류큐 왕국의 전통적인 무역 통제 정책에 대한 중대한 변화였다.
미국 선박에 대한 물자 제공 (제2조, 제7조)미류수호조약에 따라 류큐 왕국은 미국 선박에 땔감, 물, 식량 등의 물자를 제공해야 했다. 이는 미국 함대의 태평양 활동을 지원하는 중요한 조항이었다.
표류민 구조 (제3조)류큐 왕국은 미국 선박의 표류민을 구조하고 보호해야 했다.
미국의 영사 재판권 인정 (제4조)미류수호조약 제4조에서는 류큐 왕국 내에서 미국인이 범죄를 저지른 경우 미국 영사에게 재판권을 부여하였다. 이는 류큐 왕국의 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불평등 조항이었다.
미국인 묘지 설치 및 보호 (제5조)미류수호조약 제5조에 따라 류큐 왕국은 미국인 묘지 설치를 허용하고 보호해야 했다.
류큐국의 수로 안내 (제6조)류큐국은 미국 선박에 안전한 항해를 위한 수로 안내를 제공해야 했다. 이 조항은 류큐 왕국이 미국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3. 1. 자유 무역 허용 (제1조)
류큐 왕국은 미국과의 자유 무역을 허용해야 했다. 이는 류큐 왕국의 전통적인 무역 통제 정책에 대한 중대한 변화였다.3. 2. 미국 선박에 대한 물자 제공 (제2조, 제7조)
미류수호조약에 따라 류큐 왕국은 미국 선박에 땔감, 물, 식량 등의 물자를 제공해야 했다. 이는 미국 함대의 태평양 활동을 지원하는 중요한 조항이었다.3. 3. 표류민 구조 (제3조)
류큐 왕국은 미국 선박의 표류민을 구조하고 보호해야 했다.3. 4. 미국의 영사 재판권 인정 (제4조)
미류수호조약 제4조에서는 류큐 왕국 내에서 미국인이 범죄를 저지른 경우 미국 영사에게 재판권을 부여하였다. 이는 류큐 왕국의 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불평등 조항이었다.3. 5. 미국인 묘지 설치 및 보호 (제5조)
미류수호조약 제5조에 따라 류큐 왕국은 미국인 묘지 설치를 허용하고 보호해야 했다.3. 6. 류큐국의 수로 안내 (제6조)
류큐국은 미국 선박에 안전한 항해를 위한 수로 안내를 제공해야 했다. 이 조항은 류큐 왕국이 미국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4. 조약 체결 이후의 상황
1854년 10월 29일(함풍 4년·가영 7년 9월 8일)에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에 조약 제1조의 조항 변경을 명령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조약 내용을 수정하지 못했다.
사쓰마 번이 제시한 수정 문안은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는 수정된 부분)
- 원문: 1. 이후 미국 국민이 류큐에 오면 예의를 갖춰 후하게 대하고 화목하게 교류해야 한다. 그 나라 사람이 물건을 사려고 할 경우, 관리든 백성이든 소유한 물건으로 판매할 수 있다. 관리는 백성을 막는 규정을 설정해서는 안 된다.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것은 양측이 공평하게 교환해야 한다.
- 수정 문안: 1. 이후 미국 국민이 류큐에 오면 예의를 갖춰 후하게 대하고 화목하게 교류해야 한다. 그 나라 사람이 물건을 '''사려고 하면, 상점의 물품이나 관리들이 사는 물건을 품목에 기록하여 품목을 판매하는 자가 그 물건을 관리에게 전달하여 가격과 돈을 관리에게 제시한 후에 물품 거래는 사령관 관리가 미리 알 수 있게 해야 하며,''' 금지'''하는 것은 사사로운 논의뿐이며,'''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것은''' 양측 모두 공평하게 교환해야 한다.'''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의 부용국인 한편 청에 조공하는, 청일 양측에 속한 류큐국이 국제법 상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또 그와 같은 류큐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해석은 곤란하다.[11][12]
2006년 스즈키 무네오 중의원 의원이 이 조약의 유효성에 대해 일본 정부에 견해를 질의했으나, "일본국으로서 체결한 국제 약속이 아니며, 그 법적 성격에 대해 정부로서 확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라는 답변을 받았다.[10][9]
이 조약의 유효성은 확정적이지 않지만, 1879년 류큐 처분으로 류큐 왕국이 멸망함으로써, 이 조약은 실효되었다고 여겨진다.
1879년 (메이지 12년), 일본 제국이 류큐 처분을 단행하여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9][10] 이로 인해 류큐 왕국은 멸망했고, 류큐-미국 간 우호 조약은 효력을 상실했다고 여겨진다.[9][10]
청에 조공하는 동시에 사쓰마 번의 부용국이었던 류큐국이 국제법 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또 류큐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의 유효성에 대한 해석은 곤란하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헤이세이 18년), 스즈키 무네오 중의원 의원이 이 조약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질의했으나, "일본국으로서 체결한 국제 약속이 아니며, 그 법적 성격에 대해 정부로서 확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라는 답변을 받았다.[9][10][11][12]
4. 1. 사쓰마 번의 개입과 조약 수정 시도
1854년 10월 29일(함풍 4년·가영 7년 9월 8일)에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에 조약 제1조의 조항 변경을 명령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조약 내용을 수정하지 못했다.사쓰마 번이 제시한 수정 문안은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는 수정된 부분)
- 원문: 1. 이후 미국 국민이 류큐에 오면 예의를 갖춰 후하게 대하고 화목하게 교류해야 한다. 그 나라 사람이 물건을 사려고 할 경우, 관리든 백성이든 소유한 물건으로 판매할 수 있다. 관리는 백성을 막는 규정을 설정해서는 안 된다.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것은 양측이 공평하게 교환해야 한다.
- 수정 문안: 1. 이후 미국 국민이 류큐에 오면 예의를 갖춰 후하게 대하고 화목하게 교류해야 한다. 그 나라 사람이 물건을 '''사려고 하면, 상점의 물품이나 관리들이 사는 물건을 품목에 기록하여 품목을 판매하는 자가 그 물건을 관리에게 전달하여 가격과 돈을 관리에게 제시한 후에 물품 거래는 사령관 관리가 미리 알 수 있게 해야 하며,''' 금지'''하는 것은 사사로운 논의뿐이며,'''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것은''' 양측 모두 공평하게 교환해야 한다.'''
4. 2. 조약의 유효성에 대한 논란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의 부용국인 한편 청에 조공하는, 청일 양측에 속한 류큐국이 국제법 상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또 그와 같은 류큐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해석은 곤란하다.[11][12]2006년 스즈키 무네오 중의원 의원이 이 조약의 유효성에 대해 일본 정부에 견해를 질의했으나, "일본국으로서 체결한 국제 약속이 아니며, 그 법적 성격에 대해 정부로서 확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라는 답변을 받았다.[10][9]
이 조약의 유효성은 확정적이지 않지만, 1879년 류큐 처분으로 류큐 왕국이 멸망함으로써, 이 조약은 실효되었다고 여겨진다.
4. 3. 류큐 병합과 조약의 효력 상실
1879년 (메이지 12년), 일본 제국이 류큐 처분을 단행하여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9][10] 이로 인해 류큐 왕국은 멸망했고, 류큐-미국 간 우호 조약은 효력을 상실했다고 여겨진다.[9][10]청에 조공하는 동시에 사쓰마 번의 부용국이었던 류큐국이 국제법 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또 류큐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의 유효성에 대한 해석은 곤란하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헤이세이 18년), 스즈키 무네오 중의원 의원이 이 조약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질의했으나, "일본국으로서 체결한 국제 약속이 아니며, 그 법적 성격에 대해 정부로서 확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라는 답변을 받았다.[9][10][11][12]
5. 조약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5. 1. 불평등 조약으로서의 성격
5. 2. 류큐 왕국의 외교적 지위 약화
5. 3. 오키나와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참조
[1]
웹사이트
旧条約彙纂. 第3巻(朝鮮・琉球)
https://dl.ndl.go.jp[...]
2021-04-20
[2]
웹사이트
琉米・琉仏・琉蘭条約の原本、里帰り 27日から展示
https://ryukyushimpo[...]
2015-02-04
[3]
논문
尚泰請封問題と琉仏約条 : 一八五五年・一八五六年におけるフランス人逗留問題から
http://doi.org/10.15[...]
法政大学沖縄文化研究所
2016-03-31
[4]
웹사이트
文献で見る沖縄の歴史と風土
https://www.lib.u-ry[...]
琉球大学附属図書館
2023-11-20
[5]
논문
近世琉球の欧米船迎接体制とその特徴―「三条約」締結後の虚構組織を事例に―
https://okiu1972.rep[...]
2023-02
[6]
논문
米琉コンパクトをめぐるペリー提督の琉球認識
https://meio-u.repo.[...]
2022-03-31
[7]
웹사이트
United States Treaties and International Agreements: 1776-1949 Volume9 pp.692-693
https://www.loc.gov/[...]
미국의회도서관
2020-05-06
[8]
웹사이트
琉米修好条約 原本「6通」存在 米側「間違いない」
https://ryukyushimpo[...]
琉球新報
2023-11-20
[9]
웹사이트
内閣衆質一六五第一九三号
https://www.shugiin.[...]
衆議院
2024-01-02
[10]
웹사이트
一八五四年の琉米修好条約に関する質問主意書
https://www.shugiin.[...]
[11]
웹사이트
1854년의 미류수호조약에 관한 질문 주의서(主意書)
http://www.shugiin.g[...]
2011-03-24
[12]
웹사이트
内閣衆質一六五第一九三号
http://www.shugiin.g[...]
2011-03-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