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시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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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시노드는 167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동방 정교회의 회의로, 칼뱅주의의 신학 사상과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 고백에 대한 반박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다. 시노드는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이신칭의 교리를 거부하고,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 성령의 위격, 성경과 교회의 관계 등 정교회의 교리를 재확인했다. 이 회의는 '도시테오스의 신앙 고백'이라는 문서를 통해 정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으며,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를 "지난 천 년 동안 그리스 교회에서 발표된 가장 중요한 신앙 선언"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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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시노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예루살렘 시노드 (1672년) |
다른 이름 | 예루살렘 공의회 (1672년) 베들레헴 시노드 엔 베들레헴 카이 히에로솔리모이스 시노도스 (Ἐν Βηθλεὲµ καὶ Ἱεροσολύµοις Σύνοδος, 그리스어) 이ерусалимский Собор (러시아어) |
종교 | 동방 정교회 |
관할 | 예루살렘 총대주교청 (Πατριαρχείον Ἱεροσολύμων, 그리스어) |
장소 | |
개최 장소 | 예루살렘 베들레헴 (Βηθλεέμ, 그리스어) |
연대기 | |
날짜 | 1672년 |
이전 공의회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다음 공의회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주요 인물 | |
의장 | 도세테오스 2세 |
주제 | |
주요 주제 | 칼뱅주의에 대한 반박 |
관련 문서 | 도세테오스의 고백 |
중요성 | |
중요성 | 동방 정교회에서 칼뱅주의를 공식적으로 단죄함 |
2. 배경: 키릴로스 루카리스 논쟁
17세기 서방 교회에서 벌어진 종교 개혁의 여파는 동방 정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정교회는 성직자 교육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일부 성직자들은 서방 교회의 신학 사상에 노출되었다.[16]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칼뱅주의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신앙 고백서'를 출판하면서 큰 논쟁이 시작되었다.[20][1] 이 '신앙 고백서'는 정교회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루카리스 사후에도 칼뱅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21][2] 키릴로스 루카리스를 둘러싼 이 논쟁은 동방 정교회가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도전에 맞서 자신들의 정통 신앙을 명확히 하고 재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켰으며, 이는 예루살렘 시노드가 열리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16][17]
2. 1. 키릴로스 루카리스와 그의 신앙 고백서
162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소책자가 라틴어판으로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1][2] 이 책은 흔히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 고백서’(Confessiolat)라고 불리며, 칼뱅주의 교리에 부합하는 18개 조항의 신앙 요약을 담고 있었다.[20][1] 같은 해에 이 책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20] 그리스어 판본은 1631년[20] 또는 1633년[1] 《동방의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나왔다.[20][1][2]이 책의 내용으로 인해 키릴로스는 칼뱅주의적 시각을 채택하고, 심지어 칼뱅주의가 사실 동방 교회의 신앙이라고 주장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교회 내부에서 거센 반발을 샀다.[20][3] 그의 정교회 옹호자들은 이 책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했으나,[20][3] 키릴로스 본인은 이 책의 저자임을 구두로만 부인했을 뿐 서면으로는 부인하지 않았다.[21][3]
키릴로스는 1638년 오스만 제국 당국에 의해 구류 중 교살당했다.[21][7] 그의 사후에도 동방 정교회 내부에서는 칼뱅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계속되었으며,[21] 루카리스의 '신앙 고백'은 163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와 1642년 야시 시노드에서 공식적으로 비난받았다.[2] 이러한 반대 움직임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로 1643년에 나온 키예프 수도 대주교 표트르 모길라의 《신앙 해설서》(Expositio fideilat)가 있다.[21]
17세기 종교 개혁 시기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논쟁은 정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키릴로스 루카리스나, 가톨릭교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페트루 모힐라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 배경에는,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정교회 성직자들이 서방 교회의 교육 기관에서 학문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다.[16] 예루살렘 공회를 주도한 도시테오스 2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학으로 교부 신학을 배우며 정교회의 입장을 확립하려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7][16]
2. 2. 칼뱅주의에 대한 반박과 이전의 시노드들
17세기에 들어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신학 논쟁은 동방 정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 정교회 성직자들이 서방 교회의 교육 기관에서 학문을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이러한 영향은 더욱 커졌다[16]. 이 시기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키릴로스 루카리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16].1629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소책자가 라틴어판으로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흔히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 고백서’(Confessio|콘페시오lat)라고 불리는 이 책은 칼뱅주의 교리와 유사한 18개 조항의 신앙 요약을 담고 있었다[20][1]. 같은 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로도 번역되었으며, 그리스어 판본은 《동방의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1631년(또는 1633년[1])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출판되었다[20][2].
루카리스는 이 책에서 칼뱅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며, 심지어 칼뱅주의가 본래 동방 교회의 신앙이라는 주장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20][2]. 이는 정교회 내부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 책이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루카리스 본인은 구두로만 부인했을 뿐 서면으로 명확히 부인하지는 않았다[21][3].
결국 키릴로스 루카리스는 오스만 제국 당국에 의해 구류 중 1638년 교살당했으며[21][7], 그의 '신앙 고백서'는 그가 사망한 해인 163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와 1642년 야시 시노드에서 공식적으로 비난받았다[2].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루살렘 시노드가 열리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예루살렘 시노드를 주도하게 되는 도시테오스 2세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독학으로 교부 신학을 연구하며 정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재확립하고자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7][16].
3. 예루살렘 시노드의 개최
(내용 없음)
3. 1. 명칭, 시기 및 장소
예루살렘 시노드는 1672년 예루살렘의 도시테오스 총대주교가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 봉헌을 계기로 소집하여 해당 교회에서 열렸기 때문에 베들레헴 시노드라고도 불린다.[4][7][5]시노드는 1672년 3월에 소집되었으며,[5] 같은 해에 열렸다.[4]
3. 2. 소집 목적과 주요 의제
162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키릴 루카리스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라틴어 소책자가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흔히 '키릴 루카리스의 신앙 고백'으로 불리며, 칼뱅주의 교리에 가까운 18개 조항의 신앙 요약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번역본이 나왔고, 그리스어판은 1631년 또는 163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 신앙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2] 이 책 때문에 루카리스는 칼뱅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마치 동방 교회의 본래 신앙인 것처럼 주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를 옹호하는 정교회 측에서는 이 책이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키릴 본인이 직접 서면으로 부인한 적은 없다.[3] 키릴 루카리스는 1638년에 사망했다.[7]루카리스의 '신앙 고백'은 이미 163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와 1642년 야시 시노드에서 비판받은 바 있었다.[2] 예루살렘 시노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의 교리를 명확히 거부하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신학적 논쟁에 대응하여 동방 정교회의 교리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소집되었다. 즉, 서방의 종교 개혁 과정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들에 대해 동방 정교회의 교리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4]
시노드는 루카리스의 '신앙 고백'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1] 주요 결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성경과 성전: 개신교의 ''성경만''(Sola Scriptura) 원칙에 반대하여, 성전(거룩한 전통) 역시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의 원천임을 확정했다.[4]
- 칭의: 칭의(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사랑과 은총, 그리고 선행의 역할을 강조하며,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Sola Fide) 주장을 거부했다.[4][5]
- 성사: 성사는 일곱 가지임을 확정하고, 이것들이 단순한 상징이나 형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4]
- 성찬례: 그리스도가 성찬례 안에 실제로 임재한다는 교리를 확정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의 트랜스섭스턴시에이션(화체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용어인 μετουσίωσις|메투시오시스el를 사용했다.[4] [7][5]
- 성경 정경: 구약의 제2경전(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더 짧은 히브리어 정경 목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4]
- 예정론: 무조건적 예정 교리를 거부했다.[5]
- 성령론: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출하며,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정교회의 전통적 입장을 재확인했다.[6]
4. 시노드의 결정과 의의
167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이 시노드는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의 교리적 도전에 맞서 동방 정교회의 전통 신앙을 수호하고 명확히 하고자 소집되었다.[4] 시노드는 키릴로스 루카리스 총대주교의 이름으로 알려진 신앙 고백서가 칼뱅주의적이라는 논란에 대응하여, 해당 고백서의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정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20][1] 시노드는 이 고백서가 위조되었거나,[7] 루카리스 개인의 견해일 뿐 정교회의 공식 가르침이 아니라고 선언했다.[7][3]
주요 결정 사항으로는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예정과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명백히 거부하고, 구원에 있어 믿음과 선행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점을 들 수 있다.[5][12] 또한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과 성전의 권위, 일곱 성사의 유효성 등 정교회의 핵심 교리를 재확인했다.[4][7][5][12]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현한다는 전통적인 입장과 구약 성경의 제2경전 포함 역시 재천명되었다.[23][6][4]
이러한 결정들은 도시테오스 신앙 고백문으로 집약되었으며, 이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주요 교리들을 반박하고 정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선언이 되었다.[4] 예루살렘 시노드는 동방 정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를 "지난 천 년간 그리스 교회에서 작성된 가장 중요한 신앙 선언문"으로 평가했고,[24] 개신교 학자 필립 샤프는 서방 교회의 트리엔트 공의회에 비견될 만한 중요성을 지닌다고 언급했다.[25] 시노드는 서방의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기된 신학적 쟁점들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정의하고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4]
4. 1. 주요 결정 사항
시노드는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의 교리를 거부하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논쟁 속에서 동방 정교회의 교리적 입장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4] 특히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조건적 예정과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논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키릴 루카리스의 이름으로 알려진 신앙 고백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20][1] 시노드는 키릴로스의 신앙 고백서가 위조되었거나,[7] 설령 그가 작성했더라도 이는 동방 정교회의 신앙이 아닌 개인의 이단적 견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7][3]시노드에서 결정하고 재확인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성전과 성경: 개신교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칙을 반대하며, 성경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인 성전의 권위를 확정했다.[4][12]
- 구원과 행위: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힘입은 선행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며, 무조건적 예정과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거부했다.[5][12] 또한 주교직의 사도 전승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 성사: 성사는 총 일곱 개임을 확정하고,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나 표현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4][12]
- 성찬례: 성찬례에서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한다는 실재 임재 교리를 확정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성변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용어 'μετουσίωσις|메투시오시스grc'를 사용했다.[4] [7][5] 또한 성찬례는 성사이자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한 진정한 희생제사임을 강조하고, 상징설이나 공재설을 부정했다.[12]
- 성령: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發)한다는 정교회의 전통 교리를 재확인하며,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발한다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필리오케 교리를 반대했다.[23][6]
- 성경 정경: 구약 성경의 제2경전이 정경임을 확정하고, 히브리어 성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개신교의 입장을 거부했다.[4][12]
- 기타: 사후 영혼의 상태에 대한 정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도 분명히 하였다.[20]
이러한 결정들은 도시테오스 신앙 고백문이라는 이름의 시노드 교령에 담겼으며, 정교회 신앙이 칼뱅주의 교리와 양립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일부 해설자들은 성찬례와 개인적 종말론에 대한 시노드의 결의가 실질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한다.[22]
4. 2. '도시테오스의 신앙 고백'
예루살렘 시노드의 결과물은 흔히 '도시테오스의 신앙 고백'(Ὁμολογία Δοσιθέου|호몰로기아 도시테우grc)으로 불린다. 이는 시노드의 의사록 제6장에 포함된 내용으로, 18개의 법령(''horoi'')과 4개의 질문(''eroteseis'') 및 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7] 시노드의 공식 의사록은 1672년 3월 20일에 작성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신다. 정통 신앙의 방패, 또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도시테오스 아래 예루살렘 시노드가 칼뱅주의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작성한 변증서, 그들은 동방 교회가 하나님과 신성한 것에 관해 자신들처럼 이단적인 생각을 한다고 거짓으로 말한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7]이 신앙 고백은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이름으로 발표된 ''신앙 고백서''의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며,[20][1]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조건적 선택과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등의 교리를 명확하게 거부했다.[5][20] 또한, 개신교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칙에 맞서 교회의 가르침과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4][12]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선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4][12]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회와 성전: 개신교의 '오직 성경' 원칙을 부정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전의 역할을 강조했다.[4][12]
- 칭의: 칭의에 있어 사랑과 은총, 그리고 선행의 역할을 강조하며, 예정설을 부정했다.[4][12]
- 성사: 성사는 7가지임을 확정하고, 이것들이 단순한 상징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4][12]
- 성찬례: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한다는 교리를 확정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의 트랜스섭스턴시에이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용어인 'metousiosis|메투시오시스grc'(μετουσίωσις)를 사용했다.[4][7][5] 또한 성찬례는 성사이자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한 희생제사임을 명확히 했다.
- 성경 정경: 구약 성경의 제2경전이 정경임을 확정하고, 개신교에서 따르는 더 짧은 히브리어 성경 정경을 거부했다.[4][12]
- 성령: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나온다는 동방 정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재확인하며,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필리오케 교리를 반대했다.[6][23]
- 기타: 주교직의 사도 전승 필요성을 강조했다.
도시테오스 신앙 고백은 동방 정교회 신앙이 칼뱅주의 교리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선언한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는다.[24][25] 시노드의 결의 중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 임재(특히 '메투시오시스' 용어 사용)와 사후 영혼 상태에 대한 내용은 일부 해설자들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 및 개인적 종말론과 실질적으로 동일시되기도 한다.[22]
4. 3. 시노드의 의사록과 서명
시노드의 의사록에는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도시테오스와 그의 전임자인 넥타리오스 총대주교, 6명의 관구 대주교와 주교, 성묘의 대수도원장 요사팟을 비롯한 다수의 대수도원장, 사제, 수도사, 신학자들이 서명했다. 러시아 정교회 대표로는 수도사 티모시가 참여했으며, 총 68명이 서명했다.[7]의사록은 1672년 3월 20일 자로 작성되었으며, 공식 제목은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신다. 정통 신앙의 방패, 또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도시테오스 아래 예루살렘 시노드가 칼뱅주의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작성한 변증서, 그들은 동방 교회가 하나님과 신성한 것에 관해 자신들처럼 이단적인 생각을 한다고 거짓으로 말한다"이다.[7]
의사록의 첫 부분은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다"는 성경 구절 인용으로 시작하여, 시노드 소집 배경을 설명한다. 특히 키릴로스 루카리스 총대주교에게 귀속된 견해들을 동방 정교회가 결코 지지한 적이 없음을 강력히 부정한다. 이를 위해 과거 루터교와 콘스탄티노플의 예레미아 2세 사이의 논의, 그리고 콘스탄티노플과 야시에서 열렸던 이전 시노드들의 결정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루카리스가 논란이 된 '고백서'를 실제 작성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해당 '고백서'의 내용과 루카리스의 다른 설교 및 저술 내용을 비교 분석한다.[7]
제2장에서는 루카리스가 누구에게도 '고백서'를 보여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의 저작 여부에 대한 의심의 근거를 찾으려 시도한다.[7]
제3장에서는 설령 루카리스가 '고백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이는 동방 정교회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이단적 견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7]
제4장에서는 동방 정교회의 입장을 변호하며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인용하고, 루카리스의 '고백서'에 나타난 이단적 주장들에 대한 파문 목록을 담고 있다.[7]
제5장에서는 루카리스의 여러 행동과 발언을 인용하며 다시 한번 그를 변호하려 시도하고, 1639년 콘스탄티노플 시노드와 1641년 야시 시노드의 법령 전문을 수록한다.[7]
제6장은 시노드의 법령을 "도시테오스의 고백"이라는 형태로 제시한다. 여기에는 18개의 법령과 4개의 질의응답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령과 질의응답들은 루카리스의 '고백서'가 부정했던 내용들, 즉 교회와 성경의 관계, 예정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이해, 성도 숭배, 성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 임재, 성찬 전례의 의미와 희생 제사로서의 성격 등을 매우 상세하고 확고하게 재확인한다. 짧은 에필로그로 의사록을 마무리하며, 날짜와 서명, 봉인이 이어진다.[7]
4. 4. 시노드의 영향과 평가
이 시노드는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조건적 선택과 이신칭의를 둘러싼 논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고백서 내용을 상세히 반박했다.[20] 또한, 성찬례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과 사후 영혼의 상태에 대한 정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명확히 했다. 일부 해설자들은 시노드의 결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성변화와 개인적 종말론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같다고 보기도 한다.[22]시노드는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서만 나온다고 선언하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입장에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23]
'도시테오스 신앙 고백문'이라고도 불리는 시노드 교령들은 정교회 신앙이 칼뱅주의 교리와 양립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또한 주교직의 사도 전승 필요성, 구원을 위해 믿음과 선행이 모두 필요하다는 점, 성사의 개수는 일곱 개라는 점, 성찬례는 성사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를 위한 희생제사라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강조했다.
시노드는 키릴로스의 신앙 고백서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과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인물이 이단적인 고백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예루살렘 시노드를 "지난 천 년 동안 그리스 교회에서 발표된 가장 중요한 신앙 선언"이라고 평가했으며,[24][9] 개신교 학자 필립 샤프 역시 "이 시노드는 현대 동방 교회 역사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에 비견될 만큼 매우 중요하다"고 논평했다.[25]
1910년 ''가톨릭 백과사전''은 시노드의 결정 사항을 "전 동방 정교회에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총대주교들, 러시아 교회 등으로부터 즉시 승인받았으며, 동방 정교회의 상징적인 책에 항상 전체 내용이 인쇄되어 있고, 모든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엄격한 의미의 공식 신조 또는 선언을 형성한다."라고 기술한다.[7]
그러나 개신교 작가들은 시노드의 강한 반(反)개신교적 태도가 예수회, 당시 프랑스 대사였던 올리비에 드 넼텔, 그리고 동방 정교회를 약화시키려던 다른 가톨릭 신자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7] 18세기 비선서파 성공회 주교들과의 서신 교환에서 동방 총대주교들은 성변화에 대한 시노드의 가르침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8]
동방 정교회 대주교 칼리스토스 웨어는 이 시노드를 에큐메니컬 공의회 시대 이후 열린 여러 지역 공의회 중 하나로 보며, 그 신앙 선언이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여졌지만 [...] 부분적으로는 무시되거나 수정되었다"고 언급하여 그 수용 범위가 제한적이었음을 시사한다.[10]
개신교 학자 필립 샤프는 시노드를 트리엔트 공의회와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시노드는 동방 교회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며, 트리엔트 공의회에 비유할 수 있다. 두 공의회 모두 그들이 대표하는 교회의 교리적 지위를 확정했고, 두 공의회 모두 개신교의 복음주의 교리를 정죄했다. 두 공의회 모두 똑같이 위계적이고 관용이 없었으며, '사도들'과 '장로들'이 사랑의 정신으로, 저주 없이 자유롭게 논의하고 조정했던 예루살렘에서 열린 최초의 시노드와 이상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 회의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기독교인 간의 큰 논쟁이 있었다."[5]
정교회 내에서는 이 시노드가 종교 개혁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한 중요한 공의회이자 "동방 정교회의 중요하고 상징적인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시노드는 정교회에서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인정하는 일곱 공의회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지는 못한다.[19] 정교회는 교리 체계보다는 성사 안에서의 영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예루살렘 시노드는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가치 있는 공의회이지만, 현대에는 그 결의문보다 다른 문헌들이 더 권장되기도 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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