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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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회의는 1874년 일본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과 정부 간의 타협을 위해 열린 회의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 대립으로 정부를 떠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자유민권 운동을 전개하고, 오쿠보 도시미치 중심의 정부가 위기에 직면하자, 이노우에 가오루의 중재로 오쿠보,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가 오사카에서 회동했다. 회의에서 오쿠보, 기도는 이타가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입헌 정체 수립과 의회 개설을 약속했지만, 내부 갈등으로 6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비록 단명했지만, 이 회의는 일본의 입헌 정치 방향성을 제시했고, 강화도 조약 체결 등 일본의 대한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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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회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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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정보 | |
회의명 | 오사카 회의 |
로마자 표기 | Ōsaka Kaigi |
개최지 | 오사카 |
개최 시기 | 1875년 초 |
주요 참가자 | |
정부 측 |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
재야 측 |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
회의 배경 | |
배경 | 정한론 정쟁 이후 정부 내 갈등 심화 자유민권운동의 대두 |
회의 결과 | |
합의 내용 | 입헌정치 체제 도입 합의 원로원 설치 대심원 설치 지방관 회의 개최 |
결과 | 입헌정치 체제 수립의 초석 마련 메이지 정부의 권력 집중 완화 |
추가 정보 | |
참고 문헌 | 梅田正己 『大阪会議』 伊藤隆編『日本近代史辞典』 歴史学研究会編『日本史史料(5)』 |
2. 배경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 6년(1873년) 정변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정부를 떠나면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정부가 재편되었다. 그러나 타이완 출병 문제로 기도 다카요시마저 사직하면서 오쿠보 중심의 사쓰마번 파벌 색채가 강해졌다.[1]
정한론을 둘러싼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정부 수뇌부가 분열되어, 정한론을 지지하던 산기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하야하여 정부를 떠났다. 남은 정부 요인들은 급속하고 무질서하게 진행된 기존의 제도 개혁을 정리하고자 오쿠보를 중심으로 내무성을 설치했다. 오쿠보를 중심으로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등이 정부를 재편했지만, 직후 타이완 출병 문제를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조슈번 출신의 기도마저 직을 떠났다. 이로써 정부는 사쓰마번 출신인 오쿠보를 사실상의 정점으로 하는 정권으로 변모하였다.
이 무렵, 정부 시책에 대한 불만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가에서는 에토의 주도로 사가의 난이 일어났고, 가고시마현에서는 사이고를 따라 귀향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사학교 세력이 현정을 장악했으며, 고치에서는 이타가키가 애국공당을 결성하여 자유민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아카사카의 구이가이 자카(喰違坂)에서 태정대신 직무대리였던 이와쿠라가 불만을 품은 사족 다케치 구마키치 등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쿠이가이의 변)이 발생했다. 또한, 좌대신에 취임한 시마즈 히사미쓰가 정부에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건백서를 제출하면서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정치 개혁의 재정적 기반이 되어 줄 지조 개정도 지지부진하여 오쿠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쿠보는 기도를 다시 정부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과거 독직 사건으로 관계를 떠나 오사카에서 실업계에 종사하고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혼란한 정국을 우려하여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료인 이토와 함께 중재 역할을 자임했다. 기도와의 연계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오쿠보도 이에 응하여 이토에게 기도와의 회담 주선을 의뢰하고 직접 오사카로 향했다. 1874년(메이지 7년) 12월, 이노우에는 야마구치현에 있던 기도를 오사카로 불렀고, 도쿄에 있던 이타가키도 초청했다.
이 과정에는 이노우에와 마찬가지로 관계를 떠나 실업계에 있던 고다이 도모아쓰의 역할도 중요했는데, 그는 자신의 저택을 회의 장소로 제공하고 오쿠보가 약 한 달간 머물며 회의를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 세 사람의 입장은 각기 달랐지만, 이토와 고다이 등의 중재 노력으로 오사카에서의 회동이 성사될 수 있었다.
3. 교섭 과정
이 무렵 사가의 난과 같은 사족 반란, 가고시마현의 사학교에 의한 현정 장악, 이타가키의 애국공당 결성과 자유민권운동 시작 등 국내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이와쿠라 도모미 피습 사건(쿠이가이의 변)과 시마즈 히사미쓰의 보수적 건의서 제출 등으로 정국 혼란은 깊어졌고, 개혁의 재정 기반인 지조개정마저 지지부진하자 오쿠보는 위기감을 느끼고 기도 다카요시를 정부에 복귀시킬 필요성을 절감했다.[1]
당시 관계를 떠나 오사카에서 실업가로 활동하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혼란한 정국 타개를 위해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 세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동료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중재에 나섰다.[1] 오쿠보와 기도는 각자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이 제안에 호응했다.[1]
1874년 12월, 이토와 이노우에의 주선으로 오쿠보와 기도가 오사카로 향했고, 도쿄에 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도 초청되어 오사카 기타하마에서 세 사람의 회동이 성사되었다.[1] 실업가 고다이 도모아쓰 역시 회의 장소를 제공하는 등 준비 과정에 기여했다.[1]
이토와 고다이 등의 중재로 회의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당초 기도의 정부 복귀 문제 외에 입헌정치 도입과 의회 설립 문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1] 이후 1875년 1월 22일 기도와 이타가키 사이에 민선의원 개설 합의가 이루어졌고, 일주일 뒤에는 기도와 오쿠보 사이에서 기도의 정부 복귀가 최종 결정되었다.[1]
3. 1.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의 입장 차이
오사카 회의에 임하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4. 오사카 체제의 성립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정부에서 하야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자유민권운동을 이끌고 있었고, 타이완 침략 문제로 사직했던 기도 다카요시는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중심의 정부는 사가의 난 등 국내의 불안정한 상황을 타개하고, 특히 지지부진한 지조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기도와 이타가키를 다시 정부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중재에 나섰다. 이노우에는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 세력의 연계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오쿠보는 조슈번의 실력자인 기도와의 연계를 원했고, 기도 역시 오쿠보가 청나라와의 타이완 침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것에 만족하며 정부 복귀를 고려하고 있었다. 1874년 12월, 이토와 이노우에의 요청으로 오쿠보와 기도가 오사카로 향했고, 도쿄에 있던 이타가키도 오사카로 내려와 정부 복귀 및 개혁 방안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회의 장소는 고다이 도모아쓰가 자신의 저택을 제공하였다.
당초 오쿠보는 이타가키를 포함시키는 데 소극적이었으나, 자신의 권력을 견제하고 정부 내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던 기도의 강력한 주장으로 성사되었다. 오쿠보 역시 이타가키를 정부에 참여시켜 자유민권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의했다. 회의 과정에서 기도는 의회제 도입의 사전 단계로 지방관 회의 설치를 주장했고, 오쿠보 역시 독일식 입헌정치를 일본에 적합하다고 여겨 의회제 도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1875년 1월 22일, 기도와 이타가키는 민선 의원 개설에 합의했고, 일주일 뒤 기도와 오쿠보는 기도의 정부 복귀를 결정했다. 오쿠보가 입헌정치 수립, 삼권분립, 양원제 의회 도입 등 이타가키의 정부 개혁 요구를 수용하자, 이타가키도 협력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2월 11일, 기도가 오쿠보와 이타가키를 기타하마의 요정 '가가이(加賀伊)'로 초대하여 최종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이 자리에서는 정치 이야기 없이 세 사람이 술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회의 타결을 기뻐한 기도는 요정의 이름을 '가가이로(花外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직접 간판 글씨를 썼다.
세 사람의 합의안은 즉시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에게 제출되었고, 3월 기도와 이타가키는 참의로 복귀했다. 4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점차 입헌 정체 수립의 조서'를 발표하여 원로원, 대심원, 지방관 회의 설치를 명하고 단계적인 입헌정치 수립을 선언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성립된 정치 체제를 오사카 체제라고 부른다.
한편, 이타가키의 정부 복귀는 애국사 창립 운동을 좌절시켰고, 이로 인해 그는 자유민권운동 세력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5. 오사카 체제의 붕괴
어렵게 성립된 오사카 체제였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쿠보, 기도, 이타가키 세 사람 모두 의회 개설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개설 시기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특히 오쿠보와 기도는 의회 개설을 서두르는 것에 반대했는데, 이는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며 지지를 얻고 있던 이타가키 세력이 의회를 장악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쿠보와 기도는 열강의 압력에 맞서고 근대적인 법률 정비와 국력 증진을 위해서는 천황 중심의 삿초 번벌 정권에 권력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의회 역시 삿초 번벌 정권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
지방관 회의의 권한 문제도 갈등의 요인이었다. 기도는 지방관 회의를 통해 친정부 세력을 지방에 심으려 했고, 처음에는 기도가 의장을 맡고 전국에 부현회(府県会)를 설치하는 데까지는 합의했다. 하지만 부현회를 어떻게 구성할지를 두고 의견이 부딪혔다. 오쿠보와 기도는 기존 지방 관료들을 의원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지만, 이타가키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해야 한다고 맞섰다.
원로원 역시 문제의 중심에 섰다. 오쿠보와 기도가 의회 개설을 미루려 하자, 원로원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법률안 심의권, 청원 심사 및 수리권, 정부 감시 및 통제 기능을 부여하고, 나아가 법률안 제정권과 예산 심의권까지 주장하며 원로원을 사실상의 의회로 만들려 시도했다. 이는 삿초 번벌 중심의 권력 구도를 흔들 수 있었기에 오쿠보와 기도는 반대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내각법제국을 만들어 원로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면서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후 윤요호 사건(강화도 사건) 처리 방식을 둘러싸고 기도와 이타가키의 의견 대립이 극에 달했고, 결국 이타가키는 다시 참의직을 사임했다. 이로써 오사카 체제는 성립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이타가키가 사직하면서 기도의 정부 내 발언권도 약해졌고, 때마침 지병까지 악화되어 정치 활동이 어려워졌다. 여기에 한때 이타가키와 손잡으려 했던 좌대신 시마즈 히사미쓰마저 참의와 각 성(省)의 장관(卿) 겸직 금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면서, 정부는 다시 오쿠보와 이와쿠라 도모미가 주도하는 체제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오사카 회의 이전의 오쿠보 중심 체제가 더욱 강화된 형태로 부활한 셈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오사카 회의는 장래 입헌 정치와 의회 정치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6. 오사카 회의에 대한 평가
오사카 회의는 비록 단기간에 그 합의가 무너졌지만, 일본의 입헌 정치와 의회 정치의 기초적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회의 과정에서 삼권 분립, 양원제 의회 설립 등 근대 국가 체제의 기본 원칙들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사카 회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삿-초 번벌 세력이 여전히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과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 세력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이후 일본 정치의 주요 과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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