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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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정당은 1898년 일본에서 자유당과 진보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정당이다. 정당 내각 수립, 지방 자치 발달 등을 목표로 했으며,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배출했다. 그러나 내부 갈등과 분열로 인해 자유당 계열이 헌정당을 해산하고, 오쿠마 시게노부 세력이 헌정본당을 창당하면서 분열되었다. 이후 헌정당은 입헌정우회로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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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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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창립자 및 지도자 | 오쿠마 시게노부 |
창립일 | 1898년 6월 22일 |
해산일 | 1900년 9월 13일 |
합병 대상 | 자유당 진보당 |
후신 | 헌정본당 (좌파 계열, 1898년) 입헌정우회 (우파 계열) |
본부 | 도쿄 |
이념 | 일본 내셔널리즘 자유 민족주의 자유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 좌파 ~ 중도 우파 (1898년) 중도 우파 (1898년–1900년) |
상징색 | 빨간색 하얀색 |
국가 | 일본 |
2. 창당과 헌정당 내각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이었지만, 헌정당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순탄치 않았다. 내각 구성 당시부터 외무대신 자리를 두고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이타가키는 호시 도루를 외무대신으로 추천했지만, 오쿠마는 호시가 헌정당 합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직접 외무대신을 겸임했다. 이로 인해 호시를 지지하던 구 자유당 계열 의원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 문제는 1898년 8월 총선에서 헌정당이 압도적인 승리(전체 의석의 약 80%)를 거두면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곧이어 오자키 유키오 문부대신이 '공화 연설 사건'을 일으키면서 헌정당 내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오자키는 재벌 중심의 금권정치를 비판하면서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천황제 국가인 일본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헌정당 내 구 자유당 계열은 오자키를 맹비난했고, 결국 오쿠마는 오자키를 파면했다. 그러나 오쿠마는 후임 문부대신으로 또다시 구 진보당 계열인 이누카이 쓰요시를 임명하면서 구 자유당 계열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1]
2. 1. 창당 배경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지조증징법안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한 진보당이 내각에서 이탈하여 자유당과 제휴를 모색했다. 이에 분노한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제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의회 해산 당일 마쓰카타는 돌연 사임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로 취임했지만, 내각과 의회 간의 관계 악화로 다시 의회를 해산해야 했다.[1]제5회 총선이 실시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의회가 해산되자 자유당과 진보당은 격렬히 반발했고, 1898년 6월 22일 두 당은 합당하여 헌정당을 창당했다. 헌정당은 정당 내각 수립, 지방 자치 발달, 통상 무역 확대, 산업 및 철도 확충, 국력에 걸맞는 군비 증강, 재정 기반 확립, 교육 발달, 황실 및 헌법 옹호, 문관 임용령 폐지 등을 내걸었다.[1] 당분간 총재는 두지 않았고, 구 자유당의 마쓰다 마사히사, 하야시 유조, 구 진보당의 오자키 유키오, 오히가시 요시데쓰 등 4명이 총무위원으로 취임하여 당무를 담당했다.[1]
자유당과 진보당은 이념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두 당수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이토는 합당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두 당이 합당하여 거대 정당인 헌정당이 출범하자 이토는 당황하여 원로들에게 대책을 요구했다. 이토는 번벌 정부를 지지하는 신당 창당이나 헌정당에 정권 양보를 제안했지만, 원로들은 모두 거부했다. 이에 이토는 내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후임자를 찾지 못한 원로들은 결국 헌정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방안을 택했다.[1]
2. 2. 헌정당 결성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지조증징법안을 준비하던 중, 내각에 참여하고 있던 진보당은 이에 반발하여 내각에서 이탈하고 자유당과 제휴를 꾀했다. 이에 분노한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중의원을 해산하여 제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의회를 해산한 당일 마쓰카타는 돌연 사임을 발표했고, 후임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로 취임했지만 내각과 의회의 사이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부득불 다시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른다.제5회 총선이 실시된 지 겨우 3개월 만에 다시 의회를 해산한 것에 대해 자유당과 진보당은 격렬히 반발했고, 1898년 6월 22일 두 당을 합쳐 헌정당을 발족시켰다. 헌정당은 정당 내각의 수립, 지방 자치의 발달, 통상 무역의 확대, 산업 및 철도의 확충, 국력에 알맞는 군비 증강, 재정 기반의 확립, 교육의 발달, 황실 및 헌법의 옹호, 문관 임용령 폐지 등을 내걸었다.[1] 총재는 따로 두지 않은 채, 구 자유당의 마쓰다 마사히사와 하야시 유조, 구 진보당의 오자키 유키오와 오히가시 요시데쓰 등 4명이 총무위원으로 취임해 당무를 담당했다.
6월 30일, 메이지 천황은 오쿠마를 내각총리대신, 이타가키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내각의 발족을 승인했다. 이로써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당초 자유당과 진보당은 세부적인 정책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난관에 봉착한다.
2. 3. 제1차 오쿠마 내각 수립
제3차 이토 내각이 자유당과 진보당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소수 여당으로 발족하여 양당과 대립하다가 1898년(메이지 31년) 6월 10일 중의원을 해산하면서 헌정당 창당과 제1차 오쿠마 내각 수립의 배경이 시작되었다.자유당과 진보당은 야당으로서 번벌 내각과 대치하던 중, 제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1898년 6월 22일에 헌정당을 결성하였다. 헌정당은 정당 내각의 수립, 지방 자치의 발달, 통상 무역의 확대, 산업 및 철도의 확충, 국력에 걸맞는 군비 증강, 재정 기반의 확립, 교육의 발달, 황실 및 헌법의 옹호, 문관 임용령 폐지 등을 내걸었다. 당분간 총재는 설치하지 않고, 구 자유당의 마쓰다 마사히사, 하야시 유조와 구 진보당의 오자키 유키오, 오히가시 요시데쓰 4명이 총무 위원으로 취임하여 당무를 수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번벌 정부가 주도적으로 정당을 조직하여 의회 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번벌 수뇌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토는 내각 총사퇴를 선택했지만, 원로들은 헌정당과 대치할 인물을 찾지 못했다. 결국 헌정당에 내각을 조직하게 하기로 결정하고, 1898년 6월 27일,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대명강하(내각 조직 명령)가 내려졌다.
1898년 6월 30일, 메이지 천황은 오쿠마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이타가키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내각의 발족을 승인했다. 이로써 헌정당은 결당 5일 만에 사상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구마이타 내각)을 조직하게 되었다.
제1차 오쿠마 내각의 주요 각료는 다음과 같다.
2. 4. 내각의 난관과 갈등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자유당과 진보당은 세부 정책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난관에 봉착했다. 외무대신 인선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호시 도루를 외무대신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는 호시가 헌정당 합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외무대신을 겸임하며 이타가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시 본인과 구 자유당 계열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2개월 뒤 실시된 제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헌정당이 전체 의석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1]1898년 8월 22일, 오자키 유키오 문부대신이 제국교육회 차담회에서 이른바 '공화 연설 사건'을 일으켰다.[1] 이는 미쓰이 등 재벌 중심의 부패한 금권정치를 비판한 것이었지만, 대통령을 언급하는 발언이 천황제 국가인 일본의 국체에 위반된다는 비난을 받았다. 헌정당 내에서도 구 진보당 계열이었던 오자키의 발언을 구 자유당 계열에서 비판하는 등 내부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오쿠마는 오자키를 파면했다. 그런데 후임으로 역시 구 진보당 계열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를 임명하면서 구 자유당 계열의 반발을 샀다.
3. 분열과 해산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지조증징법안을 추진하자, 내각에 참여했던 진보당은 이에 반발하여 내각에서 이탈하고 자유당과 제휴를 시도했다. 이에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중의원을 해산하여 제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러졌지만, 마쓰카타는 해산 당일 사임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내각과 의회 간의 관계 악화로 다시 의회가 해산되었다.
제5회 총선 후 불과 3개월 만에 의회가 해산되자 자유당과 진보당은 강하게 반발했고, 1898년 6월 22일 두 당은 합당하여 '''헌정당'''을 결성했다. 헌정당은 정당 내각 수립, 지방 자치 발달, 통상 무역 확대, 산업 및 철도 확충, 국력에 걸맞는 군비 증강, 재정 기반 확립, 교육 발달, 황실 및 헌법 옹호, 문관 임용령 폐지 등을 내걸었다. 총재는 두지 않고, 구 자유당의 마쓰다 마사히사, 하야시 유조, 구 진보당의 오자키 유키오, 오히가시 요시데쓰 등 4명이 총무위원으로 취임하여 당무를 담당했다.
자유당과 진보당은 이념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두 당수 간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이토는 합당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당이 합당하여 거대 정당인 헌정당이 출범하자 이토는 당황하여 원로들에게 대책을 요구했다. 이토는 번벌 정부를 지지하는 신당 창당이나 헌정당에 정권 양보를 제안했지만, 원로들은 모두 거부했다. 이에 이토는 내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후임자를 찾지 못한 원로들은 결국 헌정당에 정권을 넘기는 방안을 택했다.
1898년 6월 30일, 메이지 천황은 오쿠마 시게노부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1차 오쿠마 내각 발족을 승인했다. 그러나 자유당과 진보당은 세부 정책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난관에 봉착했다. 외무대신 인선에서 이타가키는 호시 도루를 추천했지만, 오쿠마는 호시가 헌정당 합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외무대신 직을 겸임하며 이타가키의 주장을 물리쳤다. 호시 본인과 구 자유당 계열은 반발했지만, 2개월 뒤 총선에서 헌정당이 전체 의석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며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898년 8월 22일, 문부대신 오자키 유키오가 제국교육회 차담회에서 이른바 '공화 연설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미쓰이 등 재벌 중심의 금권정치를 비판한 것이었지만, 대통령 관련 발언이 천황제 국가인 일본의 국체에 위반된다는 비난을 받았다. 헌정당 내에서도 구 진보당 계열이었던 오자키의 발언을 구 자유당 계열에서 비판하는 등 내부분열의 징조를 보이자 오쿠마는 오자키를 파면했다. 그런데 후임으로 역시 구 진보당 계열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를 임명하면서 구 자유당 계열의 반발을 샀다.
이후 헌정당은 구 자유당 계열 의원들이 1898년 10월 29일 호시 도루를 중심으로 영수회의를 열어 일방적으로 헌정당 해산을 선언하면서 분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당 계열의 헌정당 해산, 진보당 계열의 대응과 헌정본당 창당, 자유파 헌정당과 입헌정우회 섹션을 참고하라.
한편, 자유민권운동에 열심이었던 『만조보』(萬朝報) 기자 고토쿠 슈스이는 이를 한탄하며 '자유당을 애도하는 글'을 『만조보』에 실었다.
3. 1. 자유당 계열의 헌정당 해산
1898년 10월 29일, 호시 도루를 중심으로 한 구 자유당 계열 의원들은 영수회의를 열어 일방적으로 헌정당 해산을 선언했다.[1] 이들은 헌정당의 당명, 강령, 규칙은 그대로 유지한 채 총무위원만 호시 도루, 가타오카 겐키치, 에바라 소로쿠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헌정당 존속을 꾀했다. 당시 정당 관리는 내무성 담당이었고, 내무대신이 구 자유당 계열의 이타가키 다이스케였기 때문에 헌정당 해산 및 신 헌정당 (자유파 헌정당) 결성 신고가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다.3. 2. 진보당 계열의 대응과 헌정본당 창당
오쿠마 시게노부는 호시 도루가 주도한 영수회의가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정식 당대회 개최를 시도했다. 그러나 내무성은 이를 위법한 정치집회로 간주하고 허가하지 않았다.[1] 분노한 오쿠마는 헌정당을 탈당하고 1898년 11월 2일 같은 이름의 헌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하지만 내무성은 호시가 이끄는 헌정당의 정치 활동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오쿠마의 헌정당 명칭 사용을 금지했다. 이에 오쿠마는 다음 날인 11월 3일 당명을 '''헌정본당'''으로 바꾸어 정식 창당했으며, 그 달 8일 제1차 오쿠마 내각도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다.[1]3. 3. 자유파 헌정당과 입헌정우회
자유파 헌정당일본어은 제2차 야마가타 내각 출범 이후, 호시 도루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유착하여 지조증징을 이루어냈으나, 헌정당원들의 각 성청 차관 및 국장 임명 요구에 야마가타가 문관임용령 개정으로 대응하자, 야당으로 전환하여 야마가타 내각을 공격한 정당이다.[1]호시 도루는 오쿠마 내각 이후 정계에서 은퇴한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대신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연대하고자 했다. 이토 역시 내각 지원을 위한 신당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호시는 헌정당을 기반으로 이토의 신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1900년 9월 13일 헌정당 해산이 의결되었고, 이틀 후 입헌정우회가 창당되자 헌정당 의원 대부분이 합류했다.[1]
4. 헌정당의 유산과 영향
1898년 8월 총선에서 헌정당은 300석 중 260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이어 내부 분열이 발생했다. 구 자유당 계열 의원들은 오쿠마 시게노부가 내각 의석을 공정하게 배분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품었다. 또한 문부대신 오자키 유키오의 '공화연설사건'을 문제 삼아 공화주의를 조장한다며 비판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보수 세력과 연대했다.[1] 오자키가 사임한 후에도 구 자유당 파벌은 오쿠마 내각을 계속 공격했고, 결국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구 자유당 파벌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총재로 추대하고 '''신헌정당'''을 결성했으며, 구 진보당 계열은 헌정본당을 결성하여 맞섰다. 신헌정당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신정부와 동맹을 맺고 토지세 개혁과 선거권 확대를 추진했다. 1900년, 신헌정당은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에 합류했다.
헌정당은 자유당과 진보당이 합당하여 탄생한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을 수립했지만, 이념 및 권력 갈등으로 인해 약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1] 제국의회 창설기의 양대 정당이 제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합당하여 당시 전무후무한 거대 정당이 되었으나, 번벌 측의 중추인 원로회의는 헌정당과의 대립으로 정권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타가키 다이스케, 오쿠마 시게노부 두 명을 총리로 추대했다. 그러나 자유당과 진보당은 원래 지반, 정치 사상 등 이해관계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합당 이후 당 운영과 정권 운영을 둘러싸고 혼란이 발생했다. 공화 연설 사건으로 시작된 대신(大臣) 포스트 배분 문제가 갈등의 주요 원인이었다.
4. 1. 헌정당 분열 이후의 정당 구도
1898년 8월 총선에서 헌정당은 300석 중 260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이어 내부 분열이 발생했다. 구 자유당 계열 의원들은 오쿠마 시게노부가 내각 의석을 공정하게 배분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품었다. 또한 문부대신 오자키 유키오의 '공화연설사건'을 문제 삼아 공화주의를 조장한다며 비판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보수 세력과 연대했다.[1] 오자키가 사임한 후에도 구 자유당 파벌은 오쿠마 내각을 계속 공격했고, 결국 내각은 붕괴되었다.1898년 11월, 구 자유당 파벌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총재로 추대하고 '''신헌정당'''을 결성했다. 한편, 구 진보당 계열은 헌정본당을 결성하여 맞섰다. 신헌정당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신정부와 동맹을 맺고 토지세 개혁과 선거권 확대를 추진했다. 이후 1900년, 신헌정당은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에 합류했다.
헌정본당은 이합집산을 거쳐 입헌동지회, 헌정회를 거쳐 입헌민정당으로 발전하며, 입헌정우회와 함께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 전기에 걸쳐 양대 정당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4. 2. 역사적 의의
헌정당은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을 수립했지만, 이념 및 권력 갈등으로 인해 단명했다.[1] 헌정당은 자유당과 진보당이 합당하여 탄생했는데, 제국의회 창설기의 양대 정당이 제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합당하여 당시 전무후무한 거대 정당이 되었다. 번벌 측의 중추인 원로회의는 헌정당과의 대립으로 정권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헌정당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오쿠마 시게노부 두 명을 총리로 추대했다. 이로써 '''사상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 ('''구마이타 내각''')이 발족했다.그러나 자유당과 진보당은 원래 지반, 정치 사상 등 이해관계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합당 이후 당 운영과 정권 운영을 둘러싸고 혼란이 발생했다. 공화 연설 사건으로 시작된 대신(大臣) 포스트 배분 문제가 갈등의 원인이 되어, 구 자유당이 구 진보당을 앞지르는 형태로 헌정당을 해산하고, 동시에 내각에서도 각료를 철수시켜 당과 내각 모두 약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1]
헌정당 해산과 함께 구 자유당만으로 동명의 별도 정당 '헌정당'을 새롭게 결성, 당명을 독점하는 형태로 자유당을 부활시켰다. 이 헌정당 ('''자유파 헌정당''')은 구 자유당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신당 구상에 당 전체가 참가하는 형태로 입헌정우회로 개편되어,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 전기에 걸쳐 양대 정당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편, 구 진보당은 대항하여 '헌정본당'을 결성, 정우회의 후진을 따르는 형태가 되었지만, 이합집산을 거쳐 입헌동지회 · 헌정회 시대에는 여당이 되었고, 그 후에는 양대 정당의 한 축인 입헌민정당을 조직한다.
이처럼 헌정당의 분열과 재편 과정은 이념 갈등, 권력 투쟁, 정당 간 연합과 분열 등 일본 정당 정치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특징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조
[1]
서적
Japanese Political History Since the Meiji Renovation
[2]
서적
日本全史(ジャパン・クロニック)
講談社
1991
[3]
서적
日本全史(ジャパン・クロニック)
講談社
1991
[4]
웹사이트
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https://kotobank.jp/[...]
2018-10-01
[5]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201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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