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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다카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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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도 다카요시는 조슈번 출신의 무사로,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서 존왕양이 사상을 배우며 도쿠가와 막부 타도 운동에 참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유신삼걸' 중 한 명으로,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는 데 기여하고,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하여 서양 문물을 접했다. 귀국 후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정한론에 반대했으나, 대만 정벌 반대와 오사카 회의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헌법 수립을 추진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으나, 1877년 세이난 전쟁 중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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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다카요시
기본 정보
서양식 복장을 한 기도 다카요시 (메이지 유신 이후)
기도 다카요시
본명와다 고고로 (和田 小五郎)
출생일1833년 8월 11일
출생지하기, 조슈 번, 일본
사망일1877년 5월 26일
사망지교토, 일본
안장 위치교토 료젠 호국 신사
국적일본인
배우자기도 마쓰코 (1868년 결혼 ~ 1877년)
자녀기도 요시코 (딸)
양부가쓰라 다카코
아버지와다 마사카게
어머니세이코
친척와다 스테코 (이복 자매)
와다 야에코 (이복 자매)
구루하라 하루코 (자매)
가쓰라 가쓰자부로 (양자)
(양자)
기도 다카마사 (조카)
기노 고이치 (종손)
거주지교토, 일본
교육메이린칸
쇼카손주쿠
직업정치가
전문 분야정치
알려진 업적유신 삼걸 중 한 명
다른 이름가쓰라 고고로 (桂 小五郎)
니이보리 마쓰스케 (新堀 松輔)
기도 간지 (木戸 貫冶)
기도 준이치로 (木戸 準一郎)
기도 고인 (木戸 孝允)
주요 저서기도 다카요시 일기 1권 (1868-1871)
기도 다카요시 일기 2권 (1874-1877)
작위종1위
훈장훈1등 욱일대수장
관직
제2대 문부경취임일: 1874년 1월 25일
퇴임일: 1874년 5월 13일
제2대 내무경취임일: 1874년 2월 14일
퇴임일: 1874년 4월 27일
일본어 표기
한자木戸 孝允
가나きど たかよし
로마자 표기Kido Takayoshi

2. 생애

기도 다카요시는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무사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존왕양이 사상을 배웠고, 도쿠가와 막부 타도 운동을 주도한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교류하였다.[10]

1852년에는 에도에 유학하여 검술을 배우고, 서양식 포술, 병술, 조선술, 란학 등을 익혔다.[11][12] 1858년 안세이 대옥 이후에는 사쓰마번, 미토번, 에치젠번 등 여러 번의 존왕양이 지사들과 교류하며, 다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등과 함께 번내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11][14]

1864년 이케다야 사건금문의 변으로 인해 데이시키에서 잠복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1865년 번주로부터 "키도"라는 성을 받고,[14] 1866년에는 사쓰마-장주 동맹 체결을 주도했다.[11]

신정부 수립 후에는 태정관참여, 총재국 고문, 참의 등을 역임하며, 1868년 오가조의 맹서 기초·감수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의 기본 방침을 정했다.[14] 판적봉환, 폐번치현 등 봉건제 해체와 중앙 집권 국가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4][12]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하여 여러 나라의 헌법을 연구하고,[14] 1873년 귀국 후에는 헌법과 삼권 분립 국가의 조속한 실시를 주장했다.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수정·반대, 국민 교육과 천황 교육 강화, 사족 수산에도 힘썼다.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함께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에 반대했다.[15]

1874년 대만 출병에 반대하여 참의를 사임했으나, 1875년 오사카 회의에서 입헌제 채용을 협의하며 정부에 복귀했다.[11] 지방관 회의 의장, 내각 고문 등을 역임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세이난 전쟁 중인 1877년 5월 26일 교토에서 병사했다. "사이고야. 적당히 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11]

유족은 화족령에 따라 후작에 서임되었는데, 이는 구 다이묘, 공가 이외에는 오쿠보 도시미치 유족과 함께 단 두 집안뿐이었다.

2. 1. 어린 시절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1]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요시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존왕양이 사상을 배웠다.[1] 학생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운동을 이끈 조슈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1833년 8월 11일,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시에서 사무라이 의사이자 번의인 와다 마사카게(和田昌景)와 그의 후처 세이코(清子)의 아들로 와다 고고로(和田小五郎)로 태어났다.[1] 1840년, 매형이 이미 와다 가문의 당주였기 때문에, 그는 일곱 살 때 가쓰라 가문(桂家)에 입양되어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로 알려지게 되었다.[1]

가쓰라 가문의 봉록은 원래 150석이었으나, 양부인 가쓰라 타카코(桂孝古)가 임종 직전에 입양이 이루어졌고, 10일 후 사망했기 때문에 90석으로 줄었다. 그리하여 가쓰라 고고로는 가쓰라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841년에는 양모도 사망하였고, 몇 달 후 그는 친가로 돌아갔다. 1848년에는 어머니와 그의 이복 누나 야에코(八重子)를 병으로 잃었다.

가쓰라 고고로는 명륜관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점차 불만을 느끼고 1849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학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그는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천황 충정 사상을 받아들였다. 1851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했다.

1852년, 가쓰라는 에도(江戸)(현재의 도쿄(東京))로 가서 검술을 배우고, 미토번(水戸藩)(현재의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의 급진적인 사무라이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에가와 타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으로부터 포병 기술을 배웠다. 또한, 나가사키(長崎)와 시모다(下田)에서 외국 선박 건조를 관찰한 후, 조슈번의 최초의 서양식 군함 건조를 감독하기 위해 조슈로 돌아왔다.

1840년, 7세에 맞은편에 살던 번사 가쓰라 고코의 양자가 되어, 번의 대주사에 올라 록(90석)을 얻었다. 이듬해, 가쓰라가의 양모도 죽었기 때문에, 생가인 와다가로 돌아가, 친부모와 차녀와 함께 자랐다.

소년 시절에는 병약했지만, 한편으로는 장난기 많은 악동이기도 하였으며, 하기 성 아래의 마쓰모토가와를 오가는 배를 배꾼과 함께 뒤집어엎는 장난에 열중했다. 어느 때, 수면에서 얼굴을 내밀고 배의 난간에 손을 짚었는데, 짜증이 난 배꾼에게 노로 머리를 맞았다. 고로는 예상 범위였던 것인지, 둑에 올라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빙긋 웃었다고 한다. 이때의 이마의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옛 상처로 남아있다.

10대에 들어서는, 번주인 모리 요시아키라의 친시에서 두 번 정도 포상을 받아(즉흥적인 한시와 『맹자』의 해설), 조슈 번의 젊은 영재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848년, 차녀와 친모를 연이어 병으로 잃고, 슬픔에 잠겨 병석에 누워, 주위에 출가한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849년, 명륜관에서 병학 사범이었던 요시다 쇼인에게 산카류 병학을 배우고, “일을 해낼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나중에 쇼인은 “가쓰라는 나의 존중하는 바이다”라고 말하며, 사제 관계이면서 동시에 절친 관계가 되었다(쇼인이 세 살 위).

  • 자주 오해되는 점이지만,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고로가 배운 것은 아니다. 그 무렵(안세이 4년) 고로는 에도 근처에 있었다.


고로 18세의 1851년, 친부 와다 마사카게가 72세로 죽었다. 은 10관(당시 환율로 금 170냥에 해당)과 지속적인 무급 수입이 예상되는 임대주택 등의 부동산을 상속받았다. 와다가(20석)와 나머지 동산(은 63관 이상)·부동산은 의형인 훈죠가 계승했다.

2. 2. 조슈번의 지도자

1862년 기도는 조슈번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나가사키와 시모다에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참관한 후 조슈에 돌아와 조슈번의 첫 번째 전함 건설을 감독하였다. 조슈번에 급진파 세력이 강해지자, 1865년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번에 원정해서 가혹하게 탄압했다. 조슈번에는 보수 정부가 들어서고, 기도는 지도자 직을 박탈당했다.[10]

그러나 막부 군대가 철수하자 급진파들도 자신들의 군대를 조직하였고, 그리하여 2차 도쿠가와 군 원정을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그 뒤 기도는 조슈번 우두머리로서 사쓰마번의 급진파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는 함께 쇼군을 무너뜨리고 일본 천황을 권력에 복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하여, 이른바 '유신 삼걸'로 알려지게 된다.[10]

1849년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 되고,[11][13] 1852년에는 에도에 유학하여 사이토 야쿠로의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고,[11] 또한 서양식 포술, 병술, 조선술, 란학 등을 배웠다.[12]

1858년 안세이 대옥 이후, 사쓰마번, 미토번, 에치젠번 등 여러 번의 존왕양이 지사들과 폭넓게 교류하게 되고,[14] 다카스기 신사쿠와 쿠사카 겐즈이 등과 함께 번 내의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된다.[11] 1862년 이후에는 번정의 요직에 취임한다.[13] 1864년 이케다야 사건 및 그 직후의 금문의 변에 의해, 다지마 데이시키에서 8개월간의 잠복 생활을 강요당한다.[11] 다카스기 신사쿠 등이 번정을 장악하면 귀환하고, 1865년에 번주로부터 "키도"의 성을 받는다.[14] 1866년에는 번을 대표하여 사쓰마-장주 동맹을 체결한다.[11]

2. 3.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으로, 교토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수도를 옮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71년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를 여행했다.[2] 귀국 후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에 반대했다.

1874년 타이완 원정에 반대하다 실각했다.[3] 1875년 오사카 회의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서양식 헌법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3. 정치 활동

장주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7세에 번사 게이가의 양자가 되었다.[11][12] 1849년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 되었고,[11][13] 1852년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검술을 배우는 한편, 서양식 포술, 병술, 조선술, 란학 등을 익혔다.[11][12]

1858년 안세이 대옥 이후,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현) 등 여러 번의 존왕양이(왕을 받들고 외세를 배척함) 지사들과 교류하며,[14]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과 함께 번내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11] 1862년 이후 번정의 요직에 취임했다.[13] 1864년 이케다야 사건금문의 변 이후 8개월간 잠복 생활을 했다.[11] 1865년 번주로부터 "키도"라는 성을 받았다.[14] 1866년 사쓰마-조슈 동맹 체결에 기도는 번을 대표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1][14]

신정부 성립 후, 참의 등 정부 관료를 역임했다.[14] 1868년 오가조의 맹서 기초·감수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의 기본 방침을 정하고, 판적봉환, 폐번치현 등 중앙 집권 국가 확립을 위한 기초 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4][12]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여 여러 나라의 헌법을 연구했다.[14] 1873년 귀국 후 헌법과 삼권 분립 국가의 조속한 실시를 주장하고,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수정 및 국민 교육과 천황 교육 강화에 힘썼다. 또한, 정한론에 반대하여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임하는 계기가 되었다.[15]

헌법 제정을 건의했지만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는 오쿠보 주도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4] 1874년 대만 출병에 반대하여 참의를 사임했다.[14] 1875년 오사카 회의에서 입헌제 채용을 협의하여 정부에 복귀했지만, 오쿠보에 대한 비판은 여전했다.[11] 지방관 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세이난 전쟁1877년 사망했다.[11]

3. 1. 막부 타도 운동

1864년 이케다야 사건 당시, 기도는 회합 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하여 쓰시마 번 저택으로 향했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는 설과, 이케다야에서 지붕을 타고 도망쳤다는 설이 있다.[10] 이 사건으로 과격파 존왕양이 지사들은 슈부 마사노스케, 다카스기 신사쿠 등 신중파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금문의 변에서 기도는 돗토리 번을 설득하여 조슈 번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고메이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결국 이쿠마쓰와 쓰시마 번 무사 오시마 도모노스케의 도움을 받아 잠복 생활에 들어갔다.[10] 이후 아이즈 번 등에 의한 조슈 번 잔당 사냥이 심해지자, 다지마의 데이시키에 잠복한다.

1866년 사쓰마-조슈 동맹 체결에 기도는 번을 대표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1][14]

제2차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은 패배하였다.

4. 사상과 정책

기도 다카요시는 장주번(長州藩)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게서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배웠다.[11][13] 에도(江戸) 유학 시절 사이토 야쿠로(斎藤弥九郎)에게 검술을 배우는 한편, 서양식 포술, 병술, 조선술, 란학(蘭学) 등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익혔다.[11][12]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 이후 여러 번의 존왕양이 지사들과 교류하며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14][11]

신정부 수립 후 오가조의 맹서(五箇条の御誓文)의 기초·감수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기본 방침을 정했으며, 판적봉환(版籍奉還), 폐번치현(廃藩置県) 등 봉건 제도 해체와 근대 사회 및 중앙 집권 국가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4][12]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에 참가하여 여러 나라의 헌법을 연구하고, 귀국 후 삼권 분립(三権分立)에 기초한 헌법과 입헌군주제의 조속한 실시를 주장했다.[14][15]

자본주의(資本主義)의 폐해를 경계하고 국민 교육과 천황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족(士族) 수산을 추진했다.[15] 내정 우선주의 입장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정한론(征韓論)에 반대했다.[15]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헌법 제정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부국강병(富国強兵) 정책에 매진하는 오쿠보 주도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계몽 관료로서 활동했다.[14] 대만 출병(台湾出兵)에 반대하여 참의를 사임하기도 했다.[14] 오사카 회의(大阪会議)에서 입헌제 채용을 협의하여 정부에 복귀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중 사망했다.[11]

4. 1. 개혁 사상

요시다 쇼인에게서 존왕양이 사상을 배웠다.[11][13] 사이토 야쿠로에게 검술을 배우는 한편, 서양식 포술, 병술, 조선술, 란학 등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익혔다.[11][12]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하여 여러 나라의 헌법을 연구했으며,[14] 귀국 후에는 삼권 분립에 기초한 헌법과 입헌군주제의 조속한 실시를 주장했다.[15]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계하고 국민 교육과 천황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15]

1868년 오가조의 맹서 기초·감수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의 기본 방침을 정했으며,[14] 판적봉환, 폐번치현 등 봉건제 해체와 근대 사회 및 중앙 집권 국가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4][12]

5. 유산

기도 다카요시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삼걸'(維新の三傑일본어)로 불리며, 이는 '복고의 삼걸'이라는 의미이다.[10] 메이지 유신을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일본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입헌 정치와 의회 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에는 기도 다카요시를 기리는 기도 신사(Kido Shrine)가 있다. 1886년경 기도 공원(Kido Park)에 세워진 이 신사에서 기도는 학문과 무예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4] [5]

기도 신사(Kido Shrine), 야마구치, 야마구치현(Yamaguchi Prefecture), 일본


기도의 일기는 고향 조슈번(長州藩)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를 위한 더 큰 이익 사이에서 겪었던 심한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옛 친구들을 배신했다는 소문에 맞서 싸워야 했던 일을 자주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국가라는 개념이 비교적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영지에 대한 특권을 확보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6. 비판 및 논란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여러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했지만, 그중 일부는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6. 1. 정한론 주장

메이지 신정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정치적 식견을 인정받아, 1868년 1월 총재국 고문 전임이 되어 서정 전반의 실질적인 최종 결정 책임자가 되었다. 태정관 제도 개혁 후, 외국 사무 걸, 참여, 참의, 문부경 등을 겸임했다.

1868년부터, 오조의 칙서[43], 매스컴 발전 추진, 봉건적 풍습 폐지, 판적봉환, 폐번치현, 인재 우선주의, 사민평등, 헌법 제정과 삼권분립 확립, 이원제 확립,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수정 및 반대, 교육 충실, 법치주의 확립 등을 제언하고 메이지 정부에 실행시켰다.

군인의 각료 등용 금지, 민주적 지방 경찰, 민주적 재판 제도 등 매우 현대적이고 개명적인 건의를 당시에 하였다. 국가의 기본 방침인 국시(國是)를 명확히 하는 것은 새 정부 출범 당시부터 중요한 과제였다. 유리 기미마사와 후쿠오카 다카치카가 조문을 작성하여 검토와 수정을 거듭하며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반복적으로 제출하였다. 총재국 고문에 임관한 기도 다카요시는 게이오 4년 3월에 건언서를 제출하여 내용 구체화의 긴급성을 역설하였다. 유리 기미마사가 1단계로, 후쿠오카 다카치카가 2단계로 작성한 초안을 기도가 최종적으로 수정한 것이 같은 해 3월 14일에 공포된 오가조의 고쇼몬(五箇条の御誓文)이다.

  • ''널리 회의를 열어, 모든 일을 공론으로 결정해야 한다.''
  •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행해야 한다.''
  • ''관직자와 무사, 그리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뜻을 이루어, 백성의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옛날의 악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근거해야 한다.''
  •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크게 황실의 기반을 떨치도록 한다.''
  • '''칙어''' ''우리나라는 전례 없는 변혁을 행하려 하고, 朕(짐)은 몸소 백성보다 앞서 천지신명에게 맹세하여 크게 이 국시를 정하고, 만민 보전의 길을 세우고자 한다. 백성들 또한 이 취지에 따라 협력하여 노력하라.''


기도 다카요시는 후쿠오카 다카치카의 초기 초안에서 제1조의 「열후 회의를 열고」를 「널리 회의를 열고」로 수정하였다. 제4조 「옛날의 악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근거해야 한다」를 새롭게 삽입하였다. 「천지의 공도」는 보편적인 자연의 이치에 근거한 인간의 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크게 황실의 기반을 떨치도록 한다」를 마지막 제5조에 두어, 「일본인은 세계인이 되어 크게 국민적 기반을 정비해야 한다」라는 메이지유신의 최중요 과제를 국민 모두에게 인식시키는 데 유의하였다. 오가조에 이어 칙어를 새롭게 삽입하였다.

오가조의 고쇼몬 공포 다음 날에는 억조안부국위선양의 어전한이 고시되었고, 기도 다카요시는 그 기초 작업도 수행하였다.

7. 죽음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중반,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혀 온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이는 정신 질환과 육체적 탈진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수년간의 과도한 음주와 더불어 결핵이나 각기병으로 추정되는 질병도 원인이었다.[10] 의식이 흐릿한 가운데, 기도는 오쿠보의 손을 잡고 "사이고(西郷)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했다.[11]

기토 다카요시의 묘, 령산고국신사, 교토시 사쿄구


메이지 10년(1877년) 2월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기토 다카요시는 곧바로 사이고군 토벌에 임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그러나, 평소부터 중증이었던 기토의 병(대장암의 간전이[49])이 악화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문병도 받았지만, 5월 26일, 교토 별저에서 몽롱한 상태 속에 오쿠보의 손을 꽉 잡고, "사이고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메이지 정부와 사이고 양쪽을 염려하는 말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50] 향년 45세(만 43세).

묘소는 교토 령산고국신사에 있다.

8. 대중문화

와츠키 노부히로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과 OVA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담- 추억편》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극중에서는 잔혹한 조슈번의 급진적인 지도자로 묘사되지만, 그의 휘하에서 발도제(人斬り抜刀斎)로 활동했던 젊은 히무라 켄신에게는 어느 정도 자애로운 멘토 역할을 한다. 그러나 켄신과 유키시로 토모에의 관계 이후 켄신에게 더러운 일을 시킨 것을 후회하며, 결국 토모에는 막부의 밀정과 켄신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OVA에서는 세키 토모카즈가, 2021년 실사 영화 《바람의 검심 최종장 The Beginning》에서는 타카하시 이세이가 연기했다.

2004년 드라마 《신센구미!》에서는 이시구로 켄이 주인공 곤도 이사미의 오랜 친구이자 조슈번 지도자로서 등장했다.[1] 2009년 드라마 《료마전》에서는 타니하라 쇼스케가 조슈번 지도자로서 등장했다.[2]

소라치 히데아키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은혼》의 가츠라 코타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3] 비디오 게임 《용과 같이 유신!》에도 등장하며, 아키야마 슌이 연기하고 야마데라 코이치가 목소리를 연기했다.[4] 2024년 액션 RPG 《Rise of the Rōnin》에서도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한다.[5]

9.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Challenging Past And Present: The Metamorphosis of Nineteenth-Century Japanese Ar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s://gallica.bnf.[...] 1906-01-01
[3] 서적 Kokushi daijiten Vol. 4
[4] 웹사이트 Kido Shrine {{!}} Yamaguchi City - a strategic base of the Meiji Restoration. {{!}} Traveling website of Yamaguchi City - a city of celebrating the 150 year anniversary of the Meiji Restoration. http://ishin150-yama[...] 2018-04-20
[5] 웹사이트 Kido Park / maple {{!}} YAMAGUCHI JAPAN TRAVEL GUIDE http://www.visit-jy.[...] 2018-04-20
[6]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01-01
[7] 웹사이트 木戸孝允旧宅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1-08-20
[8] 웹사이트 木戸孝允とは https://kotobank.jp/[...] 2021-09-23
[9]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0] 웹사이트 旺文社日本史事典 三訂版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1]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3] 웹사이트 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4]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5] 웹사이트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6] 서적 君に成功を贈る
[17] 웹사이트 坂本龍馬、桂小五郎に敗れる 「幻の剣術大会」新史料か https://www.nikkei.c[...] 2020-03-05
[18] 서적 木戸孝允文書
[19] 문서 恵美須ヶ鼻造船所跡
[20] 서적 幕末政局と木戸孝允
[21] 웹사이트 木戸孝允 http://ktymtskz.my.c[...]
[22] 웹사이트 島根県令境二郎(斎藤栄蔵)について https://www.pref.shi[...]
[23] 웹사이트 ⦅中津川宿5⦆桂小五郎の隠れ家 https://www.city.nak[...]
[24] 웹사이트 五代友厚 生麦事件(2) http://godaidon.com/[...]
[25] 웹사이트 桂小五郎に私淑した松平容保「禁門の変」最大の謎を読む https://ironna.jp/ar[...]
[26] 서적 木戸孝允関係文書
[27] 간행물 持続する志 六―会津藩公用方秋月悌次郎 金城学院大学論集 人文科学編
[28] 웹사이트 長州藩が下関戦争で使った軍艦 https://ameblo.jp/sh[...]
[29] 서적 勝海舟日記
[30] 웹사이트 海舟ブログ 第116話 理想-挙国一致の海軍建設 その13 https://ameblo.jp/li[...]
[31] 웹사이트 桂小五郎もびっくり!? 歴史“捏造”旅館にご用心(前編) https://www.cyzo.com[...] 2007-10-18
[32] 웹사이트 桂小五郎もびっくり!? 歴史“捏造”旅館にご用心(後編) https://www.cyzo.com[...] 2007-10-19
[33] 웹사이트 昌念寺 https://www.hyoutabi[...]
[34] 웹사이트 まちの文化財(165) 桂小五郎と西念寺 https://www.city.yab[...]
[35] 서적 高杉晋作の手紙 新人物往来社 1992-03-01
[36] 서적 維新史蹟但馬出石に隠れたる木戸松菊公遺芳集 出石郡教育会 1932-06-10
[37] 서적 国家構想の展開と木戸孝允. 一往復書翰からみた木戸孝允と井上馨一
[38] 서적 慶応二年前半の政局と薩摩藩―「小松・木戸覚書」以降の動向を中心に
[39] 웹사이트 歴史的な会談が行われた場所! 宮島・大願寺 https://www.jal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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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서적 オーストリア外交官の明治維新―世界周遊記<日本篇> 新人物往来社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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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서적 木戸孝允公伝 下
[93] 서적 処世の大道
[94] 웹사이트 デジタル版「実験論語処世談」を読む(目次) https://eiichi.shibu[...] 2020-03-23
[95] 간행물 木戸松菊公逸話 : 史実参照 https://dl.ndl.go.jp[...]
[96] 서적 東西織物界
[97] 서적 東西織物界
[98] 서적 青木周蔵自伝
[99] 서적 青木周蔵自伝
[100] 서적 大倉物語
[101] 간행물 木戸松菊先生 https://dl.ndl.go.jp[...]
[102] 서적 新島襄 人生読本
[103] 간행물 維新元勲十傑論 https://dl.ndl.go.jp[...] 1887-03
[104] 서적 逸話文庫 : 通俗教育. 志士の巻
[105] 서적 木戸松菊先生 民友社 1928-12-15
[106] 서적 近世日本国民史
[107] 서적 木戸孝允 千倉書房 1941-12-06
[108] 웹사이트 『木戸孝允文書』を推薦する 国立歴史民俗博物館長 宮地正人 http://www.e-furuhon[...]
[109] 서적 明治維新の論理と構想--木戸孝允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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