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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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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사망으로 시작된 유럽 열강 간의 분쟁이다. 카를 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영토 계승을 보장하려 했지만, 프로이센, 바이에른,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이에 반발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주요 참전국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으로, 중부 유럽, 이탈리아, 북아메리카, 인도 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 결과,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획득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영토를 유지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1756년 외교 혁명과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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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일부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 및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경쟁
기간1740년 12월 16일 – 1748년 10월 18일 (7년 10개월 2일)
장소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남인도
명분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 후 1713년 국사조칙 거부
결과엑스라샤펠 조약
영토 변경슐레지엔에 대한 프로이센의 지배 확인
파르마 공국, 피아첸차 공국 및 과스탈라 공국이 스페인 부르봉 가문에 양도됨
다른 모든 영토는 전쟁 이전 소유주에게 반환됨
교전 세력
교전국 1
(1740–42, 1744–45)
스페인
(1741–45)
(1741–42)
사르데냐 (1741–42)
(1745–48)
스웨덴 (1741–43)
[[파일:Ducado de Modena (antes de 1830).svg|25px]] 모데나 공국
교전국 2

하노버
(1744–48)
(1743–45)
사르데냐 (1742–48)
(1741–43, 1748)
지휘관
지휘관 1루이 15세
모리스, 작센 백작
프랑수아-마리, 1대 브로이 공작
울리히 로벤달
프리드리히 2세
레오폴트 1세
레오폴트 2세
펠리페 5세
인판테 펠리페
가제 백작
카를 7세
막시밀리안 요제프
프레드리크 1세
칼 레벤하우프트
로렌초 데 마리
[[파일:Ducado de Modena (antes de 1830).svg|25px]] 프란체스코 3세 데스테
지휘관 2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1세
루트비히 케벤휠러
로트링겐의 카를
오토 폰 트라운
조지 2세 (동군 연합)
로버트 월폴
스펜서 컴프턴
헨리 펠럼
조지 웨이드
컴벌랜드 공작
토머스 매튜스
안토니 판 데르 하임
빌럼 4세
발데크 공자
이삭 크론스트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루토프스키 백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옐리자베타 1세
표트르 라시
바실리 레프닌
병력 규모
교전국 11740: 200,000명
1742: 120,000명
70,000명
40,000명
35,000명
교전국 21747: 204,000명
120,000명
127,000명
55,000명
1742: 30,000명
사상자
교전국 1프랑스: 158,400명 사망 및 부상
프로이센: 23,100명 사망 및 부상
스페인: 3,000명 사망 및 부상
교전국 2합스부르크 군주국: 148,000명 사망 및 부상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26,400명 사망 및 부상
네덜란드 공화국: 14,630명 사망 및 부상
사보이-사르데냐: 7,840명 사망 및 부상
총 사상자750,000명 사망 또는 부상
관련 전투
왼쪽부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코바동가 호 포획 (1743년 4월 20일), 퐁트누아 (1745년 5월 11일), 호헨프리트베르크 (1745년 6월 4일), 베르겐오프좀 공성전 (1747년 7월 14일 – 9월 18일)

2. 배경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상속 문제가 발생했다. 1703년 상속 상호 조약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남자 상속자가 없을 경우, 황제 요제프 1세의 딸들인 마리아 요제파와 마리아 아말리아에게 영토가 돌아가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살리카 법은 여성의 상속을 금지했기에, 이 합의는 여러 합스부르크 영토와 국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카를 6세는 1713년 1713년 실천 칙령을 발표하여 여성 상속 원칙을 확인했지만, 1703년 합의를 수정하여 자신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을 우선시했다. 그는 조카딸들을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와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시집보내면서 상속권을 포기하게 했다. 카를 6세는 작센과 바이에른 간의 경쟁이 딸의 왕위를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두 경쟁국에게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권리를 준 셈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그녀의 계승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칭호와 권력도 계승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300년 이상 합스부르크가가 차지한 황제직은 선출직이었고, 여성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바이에른, 프로이센, 작센의 성장과 권력 변화, 그리고 오스만 제국 영토 확장에 따른 합스부르크가의 권력 증가는 유럽 세력 균형을 재편하는 원심력이었다.

바이에른과 작센은 국회의 결정에 불복했고, 1738년 프랑스는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1735년-173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으로 약화되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새로운 역할에 대비하지 못했다. 많은 유럽 정치가들은 오스트리아의 생존을 의심했고, 카를 6세는 1740년 10월 사망했다.

이후 주요 분쟁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고, 스페인영국과 젠킨스의 귀 전쟁을 벌였다. 영국은 프로이센과 대립했다. 오스트리아-러시아-튀르크 전쟁 결과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프로이센은 약해진 오스트리아를 노리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지원한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였고, 작센 선제후령과 사르데냐 왕국도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프로이센,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오스트리아에 적대적이었다.

2. 1. 합스부르크가의 계승 문제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어 후계자 문제로 오랫동안 고심했다. 그는 1713년에 딸의 상속을 인정하는 국사조서를 발표하고, 이후 태어난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가 영토(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제국)를 물려주기 위해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에 이 조서를 인정받고자 여러 양보를 했다.[4]

2. 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계승 문제

합스부르크가는 15세기 이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이어왔지만, 여성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남편인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1세를 황제로 즉위시키려 했다.[67] 그러나 프랑스루이 15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로 보고, 뒤에서 계략을 꾸며 공격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주변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 5세의 영토를 스페인, 이탈리아, 신대륙은 장남 펠리페 2세에게, 오스트리아 지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각각 물려주었다. 오스트리아 계열의 조상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셋째 아들을 제외한 세 명이 성인이 되었다. 차남 페르디난트는 귀천상혼으로 인해 자손에게 계승권이 없었다. 장남 막시밀리안 2세의 남계 자손은 17세기에 모두 끊어졌고,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넷째 아들 카를의 계보도 남계가 단절되었다.[68]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를 알브레히트는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의 차녀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했지만, 황제의 사위라는 것만으로는 계승권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68] 카를 알브레히트 자신은 페르디난트 1세의 장녀 안나의 자손이었고, 페르디난트 1세의 남계 자손이 끊어진 지금, 자신이 적법한 상속자라고 주장했다.[68][69]

2. 3. 슐레지엔을 둘러싼 분쟁

슐레지엔(슈레지엔)을 둘러싼 분쟁은 1523년 호엔촐레른가의 방계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가 예겐도르프(크르노프) 영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라치보르 공국과 오펠른 공국 또한 협정에 따라 호엔촐레른가의 영지가 될 예정이었으나, 삼십년 전쟁 당시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몰수되었다.[70] 리그니츠(레그니차), 브리크(브제크)], 볼라우의 3개 공국 또한 1675년에 페르디난트 1세의 사례와 다르다는 이유로 몰수되었다.[70] 1696년

2. 4. 프로이센의 부상

1701년 1월 18일,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의 왕"(König in Preußen)으로 즉위하여 프로이센 왕국이 탄생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군정과 재정을 함께 관할하는 기관과 지방 귀족 대표인 지방 장관, 군주로부터 파견된 지방 위원을 통합하여 군제를 강화하였다.[73]

제2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23년에 군사재정관리국을 설립하여 선왕의 정책을 계승,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다.[74] 용병 의존에 따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1716년에 육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교를 양성하였다.[74] 1733년에는 칸톤 제도에 기반한 농민 징병제를 정식으로 성립시켜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육군 강국으로 발돋움했다.[75]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문화적 소양도 뛰어나, 생애 동안 다양한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1738년에는 『유럽 여러 국가 체제의 현황에 관한 고찰』을 저술하였고, 1739년에는 『마키아벨리 반론』을 통해 계몽사상에 기반하여 "군주는 국민의 첫 번째 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자연권으로서 국민의 복지를 위해 군사를 중시하고 즉위 후 친정을 실시하였다.[76] 그러나 이는 프로이센의 이익을 위해 기존의 세력 균형을 무력으로 변경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했다.[77]

1740년 10월, 프리드리히 왕세자가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대왕)으로 즉위한다. 프리드리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과 남편 프란츠 슈테판의 황제 선출에는 이의가 없었으나,[78] 율리히-베르크와 슐레지엔에 대해서는 프로이센에게 합법적인 상속 요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합스부르크 가문 및 프랑스와의 대결을 결심하였다.[72]

2. 5. 국제 정세

프랑스는 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1738년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72] 스페인은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대립하여 1739년부터 젠킨스의 귀 전쟁에 휘말렸다. 영국은 율리히-베르크 문제로 왕실 간에 인척(姻戚)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대립했다.[72] 프로이센의 서쪽 상황은 이와 같았고,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러시아-튀르크 전쟁(1735년-1739년)의 결과 1739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패배했다. 따라서 프로이센은 가장 약한 오스트리아를 노리고 세력 균형을 시도하게 되었다.[79]

주로 오스트리아를 지원한 것은 프랑스와 대립하는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후에 작센 선제후령과 사르데냐 왕국도 오스트리아 편에 참전했다. 이에 적대적인 쪽에는 프로이센,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선제후령이 있었다.

3. 주요 참전국 및 동맹 관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참전국과 그 동맹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측프로이센 측



이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슐레지엔을 침공했고, 이는 제1차 슐레지엔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1]

영국과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했는데, 이는 유럽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영국은 프랑스와 식민지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경계했다. 사르데냐 역시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과 맞섰다.[1]

작센은 초기에 프로이센 편이었으나, 이후 오스트리아 측으로 동맹을 변경했다.[1]

4. 전쟁의 경과

1745년은 호엔프리드베르크, 케셀스도르프, 퐁트누아 등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해였다. 1745년 1월 8일 바르샤바에서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작센이 사국 동맹을 맺었다. 12일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가 사망하면서 황제 위가 공석이 되었고, 카를 7세의 아들은 선거에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

바이에른군은 파펜호펜 전투에서 대패하고,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뮌헨을 포기해야 했다. 4월 22일 〈퓌센 화약〉으로 막시밀리안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 대공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지원하는 조건으로 영지를 보존받았다. 이로써 황제군은 사실상 소멸되었고 프리드리히는 고립되었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에 집중했고, 5월 10일 루이 15세와 작센군은 투르네를 공략하고 컴벌랜드 공작의 지원군을 퐁트누아에서 격파했다.

슐레지엔에서는 국지전이 계속되었다. 5월 말 프리드리히는 약 6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켄슈타인에 막사를 쳤다. 크르코노셰산맥 후방에는 카를 공이 85,000명의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다. 7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카를 공은 퇴각하였다.

엘베 강 상류에서 양측의 움직임으로 여름이 지나갔다. 오스트리아는 황제 선거를 위해 마인과 , 프랑크푸르트를 주시했고, 트라운 원수는 선제후들을 압박하여 프란츠 대공이 9월 1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즉위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영국과 함께 선거결과를 인정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을 통해 브레슬라우 조약을 따르려 했고, 작센도 이에 가담했다. 카를 공의 움직임은 조르 전투를 야기했고, 프리드리히는 9월 30일 승리했다.

루토프스키의 작센 군과 오스트리아군 일부는 베를린을 협공하려 했다.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으로 이동, 11월 24일 카톨리슈-헨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하고, 괴를리츠에서 11월 25일 적군을 격퇴했다. 데사우 영감 휘하의 프로이센 2군은 마그데부르크에서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 루토프스키를 상대했다. 루토프스키는 케셀스도르프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레오폴트는 12월 14일 공격, 작센 군과 동맹군들을 격파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포기했고, 12월 25일 〈드레스덴 화약〉으로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 영유권을 확고히 하였다.

필립 5세의 가족 (루이-미셸 반 루의 작품)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 공국 정복을 목표로 스페인과 나폴리 왕국 연합군이 모였다. 1741년, 몬테마르 공작 지휘 아래 4만 명의 연합군이 모데나로 진격했지만, 오토 페르디난트 폰 트라운 백작이 모데나를 점령하고 프란체스코 3세 데스테, 모데나 공작에게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1742년 초,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는 토리노 조약을 체결했다.[8][9] 트라운 원수는 스페인과 나폴리군을 방어했고, 나폴리는 영국 함대 도착으로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10] 스페인군은 포 강 유역에서 진격하기 어려워졌고, 프랑스를 통해 이탈리아로 추가 파견되었다. 사르데냐와 스페인 군대는 이제르 계곡에서 프랑스 개입 없이 전투를 벌였다. 1742년 말, 가주 백작이 몬테마르 공작의 뒤를 이었다.[11]

1743년, 스페인군은 캄포 산토에서 승리했지만,[12] 요한 게오르크 크리스티안, 롭코비츠 공작이 합류하여 스페인군을 리미니로 후퇴시켰다. 루소는 이를 "가장 훌륭한 군사 작전"이라고 칭찬했다.[13] 알프스 산맥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첫 번째 카스텔델피노 전투(1743년 10월 7일~10일)였다.

174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 대한 정책은 부르봉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는 반대편에 있었다.[15] 펠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하여 스페인 왕이 되었고, 이탈리아 지배권은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사르데냐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의 간섭에 반대했다.[16] 1744년 사보이아는 스페인-프랑스 연합군(갈리스판 군대)의 북부 이탈리아 정복 계획에 직면했다.

카를로스 3세 (안톤 라파엘 멩스의 작품)


콩티 공작은 라 미나 후작과 불화했다.[17] 갈리스판 군대는 1744년 6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도피네에서 재편, 포 강 하류 군대와 합류하려 했다.[18]

제노바 지원으로 중부 이탈리아 진출로가 열렸다.[17] 가주 백작은 남쪽으로 향했으나, 오스트리아 롭코비츠 공작이 저지했다. 1744년 6월~8월 벨레트리는 프랑스-스페인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 군사 기동의 장이 되었다.[19] 나폴리 왕(카를로스 3세)은 스페인을 지원, 1744년 6월 16일~17일 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벨레트리 전투에서 승리했다.[20]

1744년 8월 초, 나폴리 왕은 벨레트리를 방문했다.[20] 브라운 백작 휘하 6,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은 8월 11일 새벽 벨레트리를 기습, 나폴리 왕을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1] (두 번째 벨레트리 전투).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으로 이동, 콩티 공작에 맞서 사르데냐 왕을 지원했다. 가주 백작은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했고, 나폴리 왕은 귀환했다.

콩티 공작 (알렉시 시몽 벨의 작품)


알프스 산맥과 아펜니노 산맥 전투는 콩티 공작이 알프스 산맥을 내려오기 전부터 치열했다. 1744년 4월 20일 빌프랑슈 요새와 몽 알방 요새가 함락되었다. 콩티 공작은 7월 5일 피에몬테로 진격,[22] 7월 19일 페르롱에서 전투, 카스텔델피노 전투에서 카스텔델피노를 장악했다. 8월 8일~9일 밤 데몬테 전투에서 데몬테 요새를 함락시켰다.[24] 사르데냐 왕은 9월 30일 마돈나 델롤모 전투에서 패배했지만,[25] 콩티는 코니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도피네로 철수했다. 갈리스판 군대는 가주 백작 군대와 합류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사르데냐 군대가 사이에 자리 잡았다.

1745년, 1743년 웜스 조약으로[26] 제노바 공화국은 중립을 포기, 부르봉 진영에 가담했다.[27] 1745년 6월 26일, 제노바는 사르데냐에 전쟁을 선포했다.[27]

1745년 바시냐노 전투에서 제노바군의 돌격


마리아 테레지아는 롭코비츠를 슐렌부르크 백작으로 교체했다.[28] 1745년 봄, 가주 백작은 모데나에서 루카로, 마이유부아 원수는 이탈리아 리비에라를 통해 타나로 강으로 진격, 7월 중순 스크리비아 강과 타나로 강 사이에 집결했다. 피아첸차 행군은 오스트리아 사령관을 불렀고, 연합군은 9월 27일 바시냐노에서 사르데냐군을 격파, 알레산드리아, 발렌차, 카살레 몬페라토를 함락했다. 조미니는 이를 "Le plus remarquable de toute la Guerre프랑스어"라 칭했다.

스페인의 인판테 필립 (로랑 페슈의 작품)


1746년 초,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로 진입, 제노바를 점령했다. 아스티의 프랑스 수비대는 항복했다.[30] 막시밀리안 율리우스 브라운은 포 강 하류 연합군을 공격, 연락을 차단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밀라노 공국을 탈환, 북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분열, 마이유부아는 리구리아를, 스페인군은 브라운을 상대했다. 스페인군은 피아첸차에 진지를 구축, 인판테 필립이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군은 합류했지만, 사르데냐 군대가 추격,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앞에 있었다. 6월 16일 피아첸차 전투는 오스트리아군 승리로 끝났고, 스페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갈리스판 군대는 8월 12일 로토프레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단을 격파,[31] 오스트리아군은 제노바로 후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9월 6일 제노바를 점령했지만,[32] 알프스 산맥 습격에는 실패했다. 제노바는 봉기하여 12월 5일~11일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 벨-일 공작 지휘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했고(1747),[33] 제노바는 오스트리아 공성전을 견뎠다.[34] 벨-일 기사 지휘 프랑스 군단은 7월 10일 엑실 요새 공격 명령을 받았으나, 콜레 델라시에타 전투에서 패배했다.[35] 웜스 동맹군과 프랑스군 사이 산발적 전투는 아헨 조약 체결까지 계속되었다.

  • 제2차 실레시아 전쟁, 제1차 카르나틱 전쟁, 1741년-1743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킹 조지 전쟁, 젠킨스의 귀 전쟁,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 등은 하위 섹션에서 다루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만 한다.

4. 1. 제1차 슐레지엔 전쟁 (1740년 ~ 1742년)

보헤미아 왕관의 영토; 1742년, 실레시아 대부분이 프로이센에 할양되었다


몰비츠 전투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에게 투표하는 조건으로 슐레지엔 지방의 일부 영토를 요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오데르 강과 군사적 요충지인 산맥, 그리고 비교적 쉬운 후방 연결선 확보와 오스트리아군의 약세를 고려하여 슐레지엔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가 요구를 거절하자, 프로이센은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 등의 지원을 받아 1740년 12월 16일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프로이센군은 일부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고 겨울을 보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이페르크 군단을 보내 슐레지엔 탈환을 시도했다. 1741년 3월 말,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을 우회하기 위해 북진했고, 프로이센군은 수세에 몰렸다.

1741년 4월 10일, 몰비츠 전투에서 약 2만 명의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했고, 화력이 우세한 프로이센군이 승리했다. 이 패배는 각국의 합스부르크가 개입을 불렀고, 프로이센의 부상을 알렸다. 프로이센군 야전 사령부에는 각국의 외교 사절이 방문했다. 같은 해 5월 28일, 님펜부르크 조약이 체결되어 바이에른, 프랑스, 스페인이 동맹을 맺었고, 프로이센과 작센도 가세하여 오스트리아는 서쪽에서 포위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6월 25일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하고 의회와 협상하여 헝가리의 지원을 얻었다. 그러나 코투지츠 전투 패배 이후, 1742년 7월 영국의 중재로 슐레지엔 대부분과 보헤미아의 1개 군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베를린 조약을 체결했다.[4]

4. 2. 오스트리아-작센 전쟁 (1741년)

Sachsende 선제후 겸 Polskapl 국왕 August III|아우구스트 3세pl는 합스부르크가 영토 상속권(왕비 Maria Josepha|마리아 요제파de는 Joseph I|요제프 1세de의 장녀였다)을 주장하며 보헤미아를 침공했으나, 평화 협상을 통해 곧 철수했다.[47]

4. 3.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전쟁 (1741년 ~ 1745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1741년 티롤 지방 등 상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를 점령하고, 174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다. 이 배경에는 바이에른과 비밀 조약을 맺은 프랑스가 있었으며, 프랑스도 일부 병력을 파병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헝가리의 수도였던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가서 헝가리 의회에서 직접 헝가리 귀족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헝가리는 출병을 승인했고, 반격에 나선 오스트리아는 상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바이에른·프랑스 연합군을 격퇴한 데 이어 바이에른까지 점령했다. 영토를 빼앗긴 카를 7세는 1745년 실의 속에 사망했고, 뒤를 이어 프란츠 슈테판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4. 4. 제2차 슐레지엔 전쟁 (1744년 ~ 1745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가 제1차 슐레지엔 전쟁 이후 라인 강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꼈다.[36] 1744년,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 카를 7세의 존엄, 프로이센의 자유, 유럽의 평화를 수호하고 황제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고 6만 명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보헤미아를 재침공했다.[36]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결전을 피하고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위협했으며, 현지 주민들의 반감과 빈곤으로 인해 군수 물자 조달이 어려워졌다.[36] 설상가상으로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면서 명분마저 잃게 되어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6]

1745년,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진군 예상 지역을 추측하여 평지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36] 1745년 6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6만 명과 오스트리아 연합군 7만 명이 격돌하여 프로이센군이 승리했다.[36]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영국을 중재로 평화 교섭에 나섰다.[36]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평화 협상 전에 일격을 가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자 분산 배치되어 있던 프로이센군 부대를 공격했다.[36] 프로이센군은 현지 주민들의 반발과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으며 조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면서 실레시아까지 후퇴했다.[36]

프리드리히 2세는 첩보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이 작센을 경유하여 베를린을 침공할 계획을 알게 되었다.[36] 이에 양동 작전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카를 공자 부대를 유인하고, 그 선봉대인 작센군을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격파했다.[36] 또한 별동대인 작센군 3만을 12월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격파하여 작센군의 전력을 무력화했다.[36] 프리드리히 2세는 드레스덴으로 주력 부대를 이동시켜 12월 말 드레스덴 조약을 통해 슐레지엔 영유권을 재확인받았다.[36]

4. 5.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

프랑스는 영국네덜란드 공화국의 참전을 억제하기 위해 1744년까지 양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해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를 침공하여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1748년 아헨 조약에 따라 이 지역에서 철군했다.[39]

4. 6. 오스트리아-스페인 전쟁



스페인은 부르봉 왕가의 왕 펠리페 5세를 국왕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에 넘겨준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되찾기 위해 1744년에 참전하였다.[14] 스페인군은 한때 밀라노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15]

4. 7. 유럽 외 전쟁

유럽 외 지역에서는 1739년부터 영국스페인 사이에 벌어진 젠킨스의 귀 전쟁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얽히게 되었다. 이 전쟁은 주로 카리브 해 일대에서 벌어졌으며, 영국은 에드워드 버논 제독의 지휘 아래 서인도 제도에서, 조지 앤슨 제독의 지휘 아래 혼곶 근처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작전 지연, 열악한 환경, 조선소의 부패, 육군과 해군 지휘관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739년 11월, 버논 제독은 포르토벨로(오늘날의 파나마)의 스페인 항만을 함락시켰으나, 이는 큰 의미 없는 승리였다. 스페인 사략선들은 서인도 제도와 유럽 사이의 영국 무역선에 큰 타격을 입혔다. 버논 제독은 카르타헤나(콜롬비아) 공격을 시도했으나, 작전 지연으로 인해 돈 블라스 데 레소 제독에게 방어할 기회를 주었고, 결국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서인도 제도에서의 전쟁은 1748년까지 교착 상태로 이어졌다. 앤슨 제독은 열악한 보급 상태와 부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칠레페루 해안으로 이동하여 필리핀 근처에서 스페인 갈레온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툴롱 해전 이후, 스페인 함대는 이탈리아로 항해하여 새로운 군대와 보급품을 전달했고, 이는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744년부터는 캐나다인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 전쟁이 벌어졌다. 북미에서는 조지 왕 전쟁이라고 불리는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영국군은 루이부르 요새를 점령했다가 프랑스에 반환했다. 인도에서는 뒤플렉스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 유리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마드라스를 점령했지만, 아헨 조약에 따라 반환되었다(제1차 카르나틱 전쟁).

4. 7. 1. 북아메리카 (조지 왕 전쟁)

이 전쟁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도 벌어졌다. 북아메리카에서는 킹 조지 전쟁으로 알려져 있는데, 1744년 5월 프랑스와 영국의 공식적인 전쟁 선포가 식민지에 도달한 후에야 시작되었다. 뉴프랑스와 뉴잉글랜드, 뉴욕, 노바스코샤의 영국 식민지 사이의 국경 지역에서는 주로 프랑스 식민군과 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이 영국 목표물을 공격하는 소규모 습격이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영국 식민지 주민들은 뉴프랑스에 대한 원정을 조직하려는 여러 시도를 하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루이부르 요새 점령이었다. 케이프브레턴 섬(일 드 로열)에 있는 요새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셜리가 조직하고 메인(당시 매사추세츠의 일부) 출신의 윌리엄 페퍼렐이 지휘하며, 왕립 해군 함대의 지원을 받은 식민지 민병대 원정(1745년 4월 29일 ~ 6월 16일)에 의해 함락되었다.

프랑스의 루이부르 탈환 원정은 1746년 악천후, 질병, 그리고 지휘관의 사망으로 실패했다. 루이부르는 마드라스와 교환하여 프랑스에 반환되었고, 이는 루이부르 점령으로 사략선의 소굴을 제거했다고 느꼈던 영국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 많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51]

4. 7. 2. 인도 (제1차 카르나티크 전쟁)

인도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으며, 이는 유럽에서의 군사적 우위 확보 및 인도 아대륙에 대한 정치적 개입의 시발점이 되었다. 마에 드 라 부르도네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도착과 함께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

1746년 9월, 부르도네는 마드라스 인근에 상륙하여 항구를 포위했다. 마드라스는 카르나틱의 주요 영국 정착지였으나, 요새화가 미흡하고 수비대가 적어 인도 내 유럽 세력의 상업적 성격을 드러냈다. 프랑스군 도착 6일 후인 9월 10일, 마드라스는 항복했다. 부르도네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현금을 지불하고 정착지를 돌려받는 조건에 합의했으나, 콩파니 데 앵드 인도 총독 뒤플레의 반대에 부딪혔다. 부르도네는 사이클론으로 함대가 파괴된 후 10월에 인도를 떠났고, 뒤플레는 합의를 파기했다.

안와르우딘 무하마드 칸은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여 마드라스를 탈환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는 프랑스군에게 쉽게 격파당했다. 이는 유럽군과 인도군 사이의 질적 차이를 처음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48]

프랑스는 카르나틱에 남은 영국 정착지인 쿠달로르의 포트 세인트 데이비드를 공격했으나, 1746년 12월 나와브 군대와 영국 수비대의 기습으로 실패했다. 1747년 초, 두 번째 원정대가 포트 세인트 데이비드를 포위했지만, 3월에 영국 해군 함대가 도착하자 철수했다. 1748년 6월, 마지막 시도로 쿠달로르 마을을 공격했으나 영국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에드워드 보스케이웬 제독이 군대와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면서 영국은 공세로 전환, 퐁디셰리를 포위했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뒤플레의 강력한 요새화로 인해 두 달 후 포위는 중단되었다.[49]

평화 협정으로 마드라스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반환되었고, 캐나다의 루이뷔르와 교환되었다. 그러나 7년 전쟁 발발 전까지 두 회사 간의 갈등은 대리전으로 이어졌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하이데라바드와 카르나틱 왕위 계승자들을 두고 다투었다.[50]

1745년, 커티스 바넷 휘하 영국 함대의 프랑스 상선 공격은 베르트랑-프랑수아 마에 드 라 부르도네가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의 파견으로 이어졌다. 1746년 7월, 네가파타남 앞바다에서 결정적이지 않은 충돌 후, 바넷의 후임 에드워드 페이트는 벵골로 철수하여 코로만델 해안에서 부르도네를 방해받지 않게 했다. 부르도네는 첸나이(마드라스) 근처에 상륙하여 육지와 바다에서 항구를 포위 공격(마드라스 전투)하여 9월 10일 항복을 받아냈다. 10월, 프랑스 함대는 사이클론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살아남은 함선들은 철수했다. 프랑스 육군은 쿠달로르에 있는 영국 정착지에 여러 차례 공격을 가했지만, 토마스 그리핀이 페이트를 대체하면서 영국의 해군 우세가 회복되어 프랑스가 수세에 몰렸다. 다른 프랑스 함대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보스케이븐 휘하의 대규모 영국 증원군 도착으로 영국은 육지와 바다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보스케이븐이 조직한 퐁디셰리 포위 공격(1748년 퐁디셰리 포위전)은 실패했다.

1744년부터 캐나다인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 전쟁이 벌어졌다. 인도에서는 프랑스 인도 총독 뒤플렉스가 인도 제후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영국령 마드라스를 점령하는 등 영국 동인도 회사에 유리하게 전투를 전개했지만, 아헨 조약에 따라 마드라스는 반환되었다(제1차 카르나틱 전쟁). 뒤플렉스는 재정적 부담이 큰 인도에서의 팽창주의를 싫어하는 본국 정부에 의해 후에 해고되었다.

1748년 후반,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보스케이웬의 퐁디셰리 포위 공격


동인도회사(1600년 설립)의 깃발

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과 북이탈리아의 파르마 공국 등 일부 영토를 잃었지만, 상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밀라노 등을 되찾아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일체성을 유지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도 확보했다.

오스트리아를 약화시키려던 프랑스의 시도는 실패했고,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도 미해결 상태로 끝났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획득하고 여러 전투에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대왕”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의도와는 달리, 곧 7년 전쟁에서 다시 같은 지역이 전장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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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necrometrics.[...]
[3]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necrometrics.[...]
[4]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necrometrics.[...]
[5]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necrometrics.[...]
[6]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necrometrics.[...]
[7] 웹사이트 Statistics of Wars, Oppressions and Atrocities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necromet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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