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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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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이후 운영되었으며, 알브레히트 대공의 보수적인 성향으로 인해 군사 혁신에 소극적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1914년까지 주요 전쟁을 피했지만 이탈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와의 전쟁 계획을 유지했다. 육군은 제국 내 도시 지역의 불안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으며, 187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다. 1868년 현역 병력은 35만 5천 명이었으나, 징병률은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낮았다. 육군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소통을 위해 육군 슬라브어를 개발했다. 장교단은 가톨릭이 지배적이었고, 유대인도 지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반유대주의적 감정이 나타나기도 했다. 군사 통역 부족과 언어 문제는 군사 조직에 병참 장애를 초래했고, 민족적 증오와 정치적 폭력을 야기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약 36,000명의 장교와 414,000명의 부사관 및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공동군, 오스트리아 제국 방위군, 헝가리 왕립 방위군, 향토방위군, 슈탄츠쉬첸 등으로 구성되었다. 육군은 다양한 계급과 제복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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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스트리아-헝가리 문장
오스트리아-헝가리 문장
원어 이름 (독일어)Landstreitkräfte Österreich-Ungarns (직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육군)
원어 이름 (헝가리어)Császári és Királyi Hadsereg (직역: 제국 및 왕립 육군)
존속 기간1867년–1918년
국가오스트리아-헝가리
충성오스트리아 황제
병과공동 육군(Gemeinsame Armee)
제국-왕립 란트베어(Kaiserlich-Königliche Landwehr)
왕립 헝가리 혼베드(Magyar Királyi Honvédség)
종류육군
규모약 7,800,000명 (1917년)
지휘 구조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
지휘관
총사령관오스트리아 황제
주요 지휘관프란츠 그라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전투
주요 전투대동방 위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2. 역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이후 육군의 주요 결정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촌이자 군사 고문이었던 알브레히트 대공이 맡았다.[3] 역사학자 존 키건과 앤드루 휘트크로프트에 따르면, 알브레히트 대공은 군사 및 민간 문제 모두에서 확고한 보수주의자였으며, 모든 형태의 혁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3]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1867년과 1914년 사이에 주요 전쟁을 피했지만, 여러 소규모 군사 행동을 벌였다.[3] 참모진은 이탈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에 대한 주요 전쟁 계획을 유지했다.[3] 19세기 말, 육군은 제국 도시 지역의 불안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다.[3] 1882년과 1887년에는 비엔나에서, 1897년 11월에는 그라츠에서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프라하에서 체코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사용되었다.[3]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휘하의 군인들은 1902년 트리에스테에서 이탈리아 폭도들을 진압하기도 했다.[3]

1878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다.[3] 요시프 필리포비치와 스테판 요바노비치가 지휘하는 군대는 현지 무슬림과 정교회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3] 마글라이와 투즐라에서 좌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는 10월에 점령되었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사상자는 5,000명 이상이었다.[3]

1868년 육군 현역 병력은 35만 5천 명이었으며, 동원 시 총 80만 명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4] 그러나 이는 프랑스, 북독일 연방, 러시아 등 100만 명 이상 동원 가능한 유럽 열강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4] 1900년경 제국 인구가 거의 5천만 명으로 증가했지만, 육군 규모는 1889년 설정된 상한선에 묶여 있었다.[5]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인구의 0.29%만 징집했는데, 이는 독일 0.47%, 러시아 0.35%, 프랑스 0.75%에 비해 낮았다.[5]

징집병 민족 구성은 다민족 제국 현실을 반영했다. 1906년 기준 징집병 1,000명당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7]

민족인원
독일인267명
헝가리인223명
체코인135명
폴란드인85명
루테니아인81명
크로아티아인67명
루마니아인64명
슬로바키아인38명
슬로베니아인26명
이탈리아인14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장교단은 종교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지배적이었다. 1896년 장교 1,000명 중 종교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8]

종교인원
가톨릭791명
개신교86명
유대교84명
그리스 정교회39명
동방 가톨릭 교회1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사 통역 부족에 시달렸다. 상위 계급 장교들은 대부분 독일어(오스트리아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소수 병사만 독일어를 사용해 군사 조직에 병참 장애물을 초래했다.[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군사 예산이 적었다. 1895년 2억 6200만 크라운에서 1906년 3.06억으로 예산이 증가했지만, 이는 이탈리아를 포함한 다른 주요 유럽 국가에 비해 훨씬 적은 ''1인당'' 지출이었다.[3] 낮은 징병률 또한 군사적 약점에 기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간 인구의 0.29%만 징병한 반면, 독일은 0.47%, 프랑스는 0.75%를 징병했다.[3]

군사 항공 분야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뒤처졌다. 1893년 기구 부대가 설립되었지만, 대부분 요새 포병에 배속되었다.[3] 1914년 군사 항공 예산은 프랑스 예산의 약 1/25 수준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48대의 1선 항공기만 가지고 전쟁에 참전했다.[3]

2. 1. 1867년 타협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이후인 1867년부터 1895년까지 육군의 주요 결정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사촌이자 군사 고문이었던 알브레히트 대공이 맡았다.[3] 역사학자 존 키건과 앤드루 휘트크로프트에 따르면, 알브레히트 대공은 군사 및 민간 문제 모두에서 확고한 보수주의자였으며, 모든 형태의 혁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3] 그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육군은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전투력이 약화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패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3]

2. 1. 1. 계획 및 작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1867년과 1914년 사이에 주요 전쟁을 피했지만, 여러 소규모 군사 행동을 벌였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모진은 이탈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에 대한 주요 전쟁 계획을 유지했다.[3] 19세기 말, 육군은 제국 도시 지역의 불안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다.[3] 1882년과 1887년에는 비엔나에서, 1897년 11월에는 그라츠에서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프라하에서 체코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사용되었다.[3]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휘하의 군인들은 1902년 트리에스테에서 이탈리아 폭도들을 진압하기도 했다.[3]

1878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다.[3] 요시프 필리포비치와 스테판 요바노비치가 지휘하는 군대는 저항이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지 무슬림과 정교회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3] 마글라이와 투즐라에서 좌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는 10월에 점령되었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사상자는 5,000명 이상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전투로 인해 지휘관과 정치 지도자 간의 비난이 오갔다.[3]

2. 1. 2. 규모, 민족 및 종교 구성

1868년, 육군의 현역 병력은 35만 5천 명이었으며, 동원 시 총 80만 명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4] 그러나 이는 프랑스, 북독일 연방, 러시아와 같이 100만 명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던 유럽 열강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규모였다.[4] 1900년경 제국의 인구가 거의 5천만 명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규모는 1889년에 설정된 상한선에 묶여 있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인구의 0.29%만을 징집했는데, 이는 독일의 0.47%, 러시아의 0.35%, 프랑스의 0.75%에 비해 낮은 수치였다.[5] 1889년의 군사법은 1912년이 되어서야 개정되어 연간 징집 규모를 늘릴 수 있었다.[5][6]

징집병의 민족 구성은 다민족 제국의 현실을 반영했다. 1906년 기준 징집병 1,000명당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7]

민족인원
독일인267명
헝가리인223명
체코인135명
폴란드인85명
루테니아인81명
크로아티아인67명
루마니아인64명
슬로바키아인38명
슬로베니아인26명
이탈리아인14명



다양한 민족 간의 소통을 돕기 위해, 육군은 주로 체코어를 기반으로 하는 육군 슬라브어라는 간단한 언어를 개발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장교단은 가톨릭 신자가 지배적이었다. 1896년, 장교 1,000명 중 종교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8]

종교인원
가톨릭791명
개신교86명
유대교84명
그리스 정교회39명
동방 가톨릭 교회1명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주요 유럽 열강의 군대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유대인을 정규적으로 지휘관직에 임명하는 거의 유일한 군대였다.[8] 이중 군주국의 유대인 인구는 4.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포함)였지만, 유대인은 예비 장교단의 거의 18%를 차지했다.[9] 유대인의 군 복무에 대한 공식적인 장벽은 없었지만, 이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같은 중요 인물들이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표현하면서 이러한 관용은 어느 정도 침식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또한 개신교 장교를 차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2. 1. 3. 언어 문제와 번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사 통역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는 제국의 부분적인 국가 역량 부전과 실수의 주요 원인이었다. 상위 계급 장교들은 대부분 독일어(구체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소수의 병사들만이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군사 조직에 병참 장애물을 초래했다.[4] 헝가리어독일어 사용자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많은 비 오스트리아 병사들의 분노를 샀다. 군사 명령 전달은 비효율적이었고, 관료주의적이고 기능 장애적인 시스템은 개별 민족 부대가 최고사령부로부터 고립되게 만들었다.[4]

이러한 상황은 제국 내에서 민족적 증오와 정치적 폭력을 야기했다. 언어적으로 소외된 대대들은 자신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오스트리아 사령관에 대항하여 반란혁명을 선동했다. 탈영과 반란은 슬라브 대대,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대대에서 가장 흔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모든 대대가 이러한 병참적 어려움을 겪었다. 대대가 오스트리아 사령관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탈영 또는 반란 시도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5]

2. 1. 4. 재정 및 장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군사 예산이 적었다. 1867년 군사 예산은 전체 정부 지출의 약 25%를 차지했지만, 1873년 경제 위기로 큰 타격을 입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걸쳐 군사 예산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다른 주요 유럽 국가들보다 군대에 더 적은 돈을 지출했다.[3]

1895년 2억 6200만 크라운에서 1906년 3.06억으로 예산이 증가했지만, 이는 이탈리아를 포함한 다른 주요 유럽 국가에 비해 훨씬 적은 ''1인당'' 지출이었으며, 인구가 훨씬 많은 러시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3] 낮은 징병률 또한 군사적 약점에 기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간 인구의 0.29%만 징병한 반면, 독일은 0.47%, 프랑스는 0.75%를 징병했다.[3]

군사 항공 분야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뒤처졌다. 1893년에 기구 부대가 설립되었지만, 대부분 요새 포병에 배속되었다.[3] 1914년 군사 항공 예산은 프랑스가 지출한 금액의 약 1/25 수준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48대의 1선 항공기만 가지고 전쟁에 참전했다.[3]

3. 지휘 구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복잡한 군사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세 개의 주요 육군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연합 군주는 제국 궁정 및 외무부 장관, 전쟁부 장관, 재무부 장관의 세 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공통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제국 전쟁부 장관은 육군과 해군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

육군은 최고의 육군 부대였다. 최고의 장비를 갖추었고, 군주의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는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시에는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와 헝가리 훈베드를 지휘 구조에 흡수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육군은 평시에도 군단으로 조직되었지만, 란트베어와 훈베어는 영토별 구역으로 조직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의 공동 통치령으로 관리되었다. 따라서 보스니아 사수대의 현지 병력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을 통해 제국 전쟁부 장관에게 종속되었다. 육군의 일반적인 평시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참모본부 ()
제1 군단 (크라쿠프)
제2 군단 ()
제3 군단 (그라츠)
제4 군단 (부다페스트)
제5 군단 (포조니)
제6 군단 (카사)
제7 군단 (테메슈바르)
제8 군단 (프라하)
제9 군단 (라이트메리츠)
제10 군단 (프셰미실)
제11 군단 (렘베르크)
제12 군단 (나지세벤)
제13 군단 (자그레브)
제14 군단 (인스브루크)
제15 군단 (사라예보)
제16 군단 (모스타르)



군주의 오스트리아 부분(공식적으로는 '''제국 평의회에 대표된 왕국 및 영토''', 비공식적으로는 간단히 ''치슬라이타니아'')은 자체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제국 전쟁부와 완전히 독립된 제국 및 왕립 국가 국방부가 포함되었다. 평시에는 제국-왕립 란트베어와 그 아래의 부대가 있었다.

란트베어 고등 사령부 ()
의 란트베어 수비 사령부
의 란트베어 사령부
그라츠의 란트베어 사령부
프라하의 란트베어 사령부
라이트메리츠의 란트베어 사령부
크라쿠프의 란트베어 사령부
프셰미실의 란트베어 사령부
렘베르크의 란트베어 사령부
라구사의 란트베어 사령부
인스브루크의 란트베어 방어 사령부
티롤 및 포어알베르크의 고등 국방 당국(더 높은 지위와 자율성을 가진 사령부)



군주의 헝가리 부분(공식적으로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영토''', 비공식적으로는 간단히 트란스라이타니아)도 자체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부처 중 하나는 제국 전쟁부와 완전히 독립된 헝가리 왕립 훈베드부였다. 평시에는 다음 기관에 대한 완전한 권한과 책임을 가졌다.

훈베드 고등 사령부 (부다페스트)
헝가리 왕립 제1 부다페스트 훈베드 지구 사령부
헝가리 왕립 제2 세게드 훈베드 지구 사령부
헝가리 왕립 제3 카사 훈베드 지구 사령부
헝가리 왕립 제4 포조니 훈베드 지구 사령부
헝가리 왕립 제5 콜로즈바르 훈베드 지구 사령부
헝가리 왕립 제6 자그레브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지구 사령부(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헝가리와의 개인 연합에 있었으며, 훈베드에 여섯 번째 영토 지구로 통합된 현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향토 방위군을 포함)[6]


4. 1914년 7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은 약 36,000명의 장교와 414,000명의 부사관 및 병사로 구성되었다.[3] 공식 명칭은 제국 및 왕립(k.u.k.)이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 방위군은 제국-왕립(k.k.), 헝가리 왕립 방위군은 왕립 헝가리(k.u.)로 불렸다. 전쟁 발발 후에는 예비군과 1914년 신병을 포함하여 335만 명이 동원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공식적으로 최고 사령관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1914년 프란츠 요제프는 84세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이 실제로 군대에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7] 콘라트는 이탈리아세르비아와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사용할 것을 옹호하는 등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선호했다.

1914년 7월 11일,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이 프란츠 요제프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작전 및 전술 계획에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프리드리히는 1917년 2월까지 최고 사령관 직을 맡았고, 이후 카를 1세 황제가 직접 이 직무를 맡았다.

4. 1. 공동군 (Common Army)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군단 지역


국방군(k.u.k.—황실 및 왕립)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3]

구분구성
군단16개
보병 사단49개 (76개 보병 여단, 14개 산악 여단)
기병 사단22개 (44개 기병 여단)
보병 연대102개 (각 4개 대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병 연대(보스니쉬-헤르체고위니쉐) 4개 (각 4개 대대)
티롤 사격 연대티롤 사격 연대(티롤러 카이저예거) 4개 (각 4개 대대)
사격 대대사격 대대(펠트예거) 32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격 대대(보스니쉬-헤르체고위니쉐 펠트예거 바탈리온) 1개
야전 포병 연대야전 포병 연대(펠트카노넨-레기멘터) 42개, 야전 곡사포 연대(펠트하우비츠-레기멘터) 14개
기마 포병/중곡사포 대대기마 포병 대대(원래 기마 포병 사단으로 명명) 15개, 중곡사포 대대(원래 중곡사포 사단으로 명명) 14개
산악 포병 연대산악 포병 연대(게비르그스아르틸러리 레기멘터) 11개
요새 포병 연대/대대요새 포병 연대(페스퉁스아르틸러리 레기멘터) 6개, 독립 요새 포병 대대(젤브스트. 페스퉁스아르틸러리 바탈리온) 8개
기병 연대용기병 연대(드라거너) 15개, 흉갑 기병 연대(후사렌) 16개, 울란 연대(울라넨) 11개
수송 대대수송 대대(철도) 16개
공병 대대 등공병 대대(사포이르/피오니에르) 23개, 교량 건설 대대(브뤼켄 바탈리온) 1개, 철도 연대(아이젠반-레기멘트) 1개, 전신 연대(텔레그래픈-레기멘트) 1개


4. 2. 오스트리아 제국 방위군 (Imperial-Royal Landwehr)

제국-왕립 란트베어(독일어: k.k. 또는 kaiserlich österreichisch/königlich böhmisch)는 오스트리아 자체의 방어를 담당하는 오스트리아의 상비군이었다.

구분내용
보병 연대35개 란트베어 보병 연대 (Landwehr Infanterie-Regimenter): 각 3개 대대
창기병 연대6개 란트베어 창기병 연대 (울란)
야전 포병 대대8개 란트베어 야전 포병 대대 (Feldkanonen), 8개 란트베어 야전 곡사포 대대 (Feldhaubitz)
산악 보병


4. 3. 헝가리 왕립 방위군 (Royal Hungarian Landwehr)

헝가리 왕립 란트베어 (königlich ungarische Landwehr) 또는 헝가리 왕립 헌병 (k.u. Honvéd)은 헝가리의 상비군이었다. 헌병의 일부는 크로아티아 왕립 란트베어 (Kraljevsko hrvatsko domobranstvo)였으며, 1개 보병 사단 (헌병 7개 사단 중)과 1개 기병 연대 (헌병 10개 연대 중)로 구성되었다.

헝가리 왕립 방위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종류수량
란트베어 구역 (honvéd katonai kerület)6개
보병 사단 (honvéd gyalogos hadosztály)2개
기병 사단 (honvéd lovassági hadosztály)9개
보병 여단 (honvéd gyalogosdandár)4개
독립 보병 여단 (honvéd önálló gyalogdandár)12개
기병 여단 (honvéd lovasdandár)18개
보병 연대 (honvéd gyalogezred)32개
훌사르 연대 (honvéd huszárezred)10개
야전 포병 연대 (honvéd tábori tüzérezred)8개
기마 포병 대대 (honvéd lóvontatású tüzérosztály)2개



k.u.k. 군의 보병 연대는 각 4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k.k. 및 k.u. 란트베어의 보병 연대는 각 3개 대대로 구성되었지만, "티롤 란데스쉬첸" (티롤 사총병)의 제3 연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1915년, 별명이나 명예로운 이름을 가진 부대는 전쟁부의 명령에 따라 이를 잃게 되었다. 그 이후 부대는 번호로만 지정되었다. 예를 들어, k.u.k. Infanterie-Regiment (Hoch und Deutschmeister) Nr. 4는 Infanterie-Regiment No. 4 (제4 보병 연대)가 되었다.

5. 향토방위군 (Landsturm)

란트슈투름은 34세에서 55세 사이의 남성으로 구성된 예비군이었다. 란트슈투름은 오스트리아에서 총 136개 대대 규모의 40개 연대, 헝가리에서 총 97개 대대 규모의 32개 연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제1선 부대의 보충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나, 20개 여단은 나머지 육군과 함께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1]

6. 계급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계급은 크게 장교, 부사관, 병사로 구분되었다.

'''장교 계급'''

계급독일어헝가리어비고
원수Feldmarschall|원수deTábornagy|원수hu
상급대장Generaloberst|상급대장deVezérezredes|상급대장hu1915년 신설
병과대장General der Infanterie|보병대장de
General der Kavallerie|기병대장de
Feldzeugmeister|야전대포장de
Gyalogsági tábornok|보병대장hu
Lovassági tábornok|기병대장hu
Táborszernagy|야전대포장hu
중장Feldmarschalleutnant|중장deAltábornagy|중장hu
소장Generalmajor|소장deVezérőrnagy|소장hu
대령Oberst|대령deEzredes|대령hu
중령Oberstleutnant|중령deAlezredes|중령hu
소령Major|소령deŐrnagy|소령hu
대위Hauptmann|대위de
Rittmeister|기병대장de
Százados|대위hu
Kapitány|기병대장hu
상위Oberleutnant|상위deFőhadnagy|상위hu
소위Leutnant|소위deHadnagy|소위hu



'''부사관 계급'''

계급독일어헝가리어비고
수석 상사Stabs-Feldwebel|수석 상사deTörzsőrmester|수석 상사hu1913년 신설
상사Feldwebel|상사de
Wachtmeister|기병 상사de
Feuerwerker|포병 상사de
Őrmester|상사hu
소대장Zugsführer|소대장deSzakaszvezető|소대장hu
하사Korporal|하사deTizedes|하사hu
병장Gefreiter|병장deŐrvezető|병장hu
준위Offiziersstellvertreter|준위deTiszthelyettes|준위hu1915년 신설
사관후보생Fähnrich|사관후보생deZászlós|사관후보생hu1908년부터 상급 준위로 개편



'''병사 계급'''

병사 계급은 병과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

보병기병공병소총수
Infanterist|보병de
Honvéd|보병hu
Dragoner|용기병de
Husar|검기병de
Ulan|경기병de
Kanonier|화포병deJäger|엽병de


7. 제복

헌병군단 대위

참조

[1] 문서 langx|de|Landstreitkräfte Österreich-Ungarns|lit=Land Forces of Austria-Hungary; langx|hu|Császári és Királyi Hadsereg|lit=Imperial and Royal Army
[2] 서적 The Army of Francis Joseph https://archive.org/[...] Purdue University Press
[3] 문서 Who's Who in Military History: From 1453 to the Present Day
[4] 간행물 Multilingualism in the Transleithanian part of the Austro-Hungarian Empire (1867-1918): Policy and practice https://www.ceeol.co[...] 2012-04-14
[5] 간행물 Economic nationalism and economic integration: the Austro-Hungarian Empire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1: AUSTRO-HUNGARIAN EMPIRE https://onlinelibrar[...] 2012-05-14
[6] 웹사이트 Austro-Hungarian Land Forces 1848-1918 http://www.austro-hu[...] 2018-10-04
[7] 웹사이트 Austria in 1914 http://www.spartacus[...] 2009-02-17
[8] 문서 The German word Standschütze is derived from Schützenstand or Schießstand, which means "firing point" or "firing range", and generally refers to the members of a local shooting club – the Schießstand, Schützenstand or Schützenverein – in German-speaking countries. These were in essence volunteer militia. They still exist today, albeit their role is purely social and ceremonial.
[9] 문서 enrolliert is the Austrian military jargon for "enrolled" (from the Old French enro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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