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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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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시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48년 진사가 되고 1656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현종 때 암행어사로 활약하며 탐관오리를 적발했고, 남인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며 숙종 때 서인 세력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이후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경신대출척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고, 기사환국으로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갑술환국으로 다시 추탈되었다. 저서로는 《수촌문집》이 있으며, 정종로의 《입재집》과 유명천의 《퇴당집》에 그의 신도비명과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2. 생애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남인 세력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648년(인조 26) 진사가 되었고 1656년(효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현종 대에 여러 관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고, 평안도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탐관오리를 적발하기도 했다.

이후 남인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여 현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특히 숙종 즉위 후에는 청남의 핵심으로서 서인 세력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송시열 등 서인 주요 인물들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며 영의정 허적 중심의 탁남과도 대립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남인의 영수로 부상했고, 1679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인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직이 회복되었으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관작이 최종적으로 추탈되었다.

2. 1. 관직 진출과 초기 활동

1648년(인조 26년) 진사가 되었고, 1656년(효종 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에 임명되었다. 현종 대에는 정언, 문학 등을 거쳐 부수찬이 되고 수찬, 정언을 지낸 뒤 지평, 교리, 수찬, 부교리를 거쳤다. 이후 교리, 정언을 거쳐 헌납, 이조좌랑을 지내다 수찬, 교리, 부응교, 사인을 거쳐 평안도 청남 암행어사로 나가서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이후 남인의 선봉장이자 남인 언관이 되어 집의, 응교를 거쳐 사인과 경차관을 지냈다. 곧바로 승지가 되었고, 30대 초반에 현종의 신임을 얻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우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2. 2. 남인 정권 장악과 활동

현종 때 정언, 문학 등을 거쳐 부수찬, 수찬, 지평, 교리, 부교리, 헌납, 이조좌랑, 부응교, 사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를 적발하기도 했다. 점차 남인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남인 언관으로서 활동했으며, 집의, 응교, 사인, 경차관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현종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우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674년 숙종 즉위 후 빈전도감제조를 지냈으며, 당시 서인 세력이었던 송시열, 김수항, 김수흥, 민정중, 민유중 등을 정치적으로 몰아내는 데 남인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청남의 핵심 인물로서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영의정 허적을 중심으로 한 탁남 세력과 대립하기도 했다.

강화유수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이조판서, 대사헌, 우참찬, 지의금부사, 호조판서, 대사헌을 하고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남인의 영수로서, 1679년 우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인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이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2. 3. 관직 생활과 말년

1648년(인조 26) 진사가 되었고,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에 임명되었다. 현종 때에는 정언, 문학 등을 거쳐 부수찬이 되었고, 이후 수찬, 정언, 지평, 교리, 수찬,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다시 교리, 정언을 거쳐 헌납,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수찬, 교리, 부응교, 사인을 거쳐 평안도 청남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이후 남인의 선봉장이자 언관으로 활동하며 집의, 응교를 거쳐 사인과 경차관을 역임한 뒤, 승지로 발탁되었고, 30대 초반에 현종의 신임을 얻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우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지냈으며,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빈전도감 제조를 맡았으며, 당시 송시열, 김수항, 김수흥, 민정중, 민유중서인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남인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청남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영의정 허적을 중심으로 한 탁남 세력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이후 강화유수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조판서, 대사헌, 우참찬, 지의금부사, 호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남인의 영수로서 활동하던 중 1679년(숙종 5)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관직이 회복되었으나, 갑술환국(1694년, 숙종 20) 이후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

2. 4. 사후 복권과 추탈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관직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에는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3. 저서


  • 《수촌문집》

4. 전기 자료


  • 정종로, 《입재집》 권33, 우의정 수촌 오 공 신도비명
  • 유명천, 《퇴당집》 권4, 우의정 오 공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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