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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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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수항은 신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서인 및 노론의 중진으로 활동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그는 예송 논쟁에서 서인 측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영의정을 역임하고 현종 묘정에 종사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진도로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과 《갑진북정록》 등이 있으며, 맹호림과 이영후가 드라마에서 김수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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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기본 정보
이름김수항
원래 이름金壽恒
김수항 선생 영정
김수항 선생 영정
출생일1629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689년 4월 9일
사망지조선 전라도 진도군
구지(久之)
문곡(文谷)
시호문충(文忠)
본관신 안동
학력1651년 알성문과 병과 급제
분야성리학
배우자안정 나씨 부인
자녀6남 1녀 (그 중 아들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金昌緝. 緝의 음이 도 있고 도 있기 때문에 김창집이라고도 하고 그의 큰형과 구별하여 김창즙이라고도 한다., 김창립)
부모김광찬(부)
연안 김씨 부인(모)
형제김수흥
정당서인
관직 생활
직책조선 이조참의
재임1659년 4월~1660년 2월
직책2조선의 영의정
재임21680년 5월 1일~1687년 9월 1일
임금조선 효종
조선 현종
임금2조선 숙종

2. 주요 이력

신 안동 김씨로 좌의정 김상헌의 손자이며 인목대비는 그의 이모할머니였다. 영창대군정명공주는 이종숙과 외종이모였다. 노론 4대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의 아버지이며,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의 종조부이다. 김조순의 5대조이며 순원왕후의 6대조, 철인왕후의 7대조이다. 자(字)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인노론의 중진, 예송 논쟁 당시 서인 주요 논객으로 활동했다. 송시열의 주자가례에 의한 1년 복설을 지지했다. 2차례 예송에서 남인과 대립,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하고, 현종 묘정에 종사되었다.

반시, 진사시, 알성문과, 춘당대문과, 중시 등 5번 과거에 급제했다.

시험 종류합격 연도 및 내용
반시1645년 (인조 23) 수석 합격
진사시1646년 합격
알성 문과1651년 (효종 2) 장원 급제
춘당대문과 정시1654년 9월 17일 5등 합격
문과 중시(重試)1656년 급제



1654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쳐 1656년(효종 7)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2] 대사간, 형조참의 등을 거쳐 1659년 이조참의, 승지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61년(현종 2) 이조참판 등을 거쳤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의 부음으로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형 김수흥,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복(大功服, 9개월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공세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숙종 즉위 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윤휴, 허적, 허목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그러나 다시 영암에 부처되었다가 석방, 1680년 영의정이 되고, 1681년 현종실록의 편찬총재관을 지냈다.

1682년 김익훈의 처벌을 놓고 서인노론소론으로 갈라질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였다.[3]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전라남도 진도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3. 생애

1629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뒤에 경기도 포천군 영평면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증조부는 김극효, 할아버지는 김상헌, 아버지는 김광찬이며, 어머니는 연안 김씨이다. 인목왕후가 그의 이모할머니이고 영창대군은 그의 외당숙이다.[11] 큰형은 김수증, 둘째 형은 김수흥이다. 안정 나씨와 혼인하여 김창집, 김창협 등 6형제를 두었으며, 그의 처남 나량좌는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12]

1645년 (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64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51년 (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4년 9월 17일 춘당대문과 정시에 5등으로 합격하였고,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1653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시강원 사서, 경기도도사, 사헌부지평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같은 해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춘당대 문신 정시에 합격하여 효종에게 말을 하사받았고,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겸 중학교수와 한학교수를 겸하였다. 1655년 교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고, 수찬,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 시강원 보덕 등을 지냈다.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가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656년 문과 중시[4]에 급제하였다.

1656년 홍문관 응교를 거쳐 의정부사인을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5], 사간원대사간, 형조참의, 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다. 1657년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조참의,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궁가의 하인들의 폐단을 막아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승지를 맡았다. 1658년 승지, 부제학을 거쳐 1659년 실록찬집청 당상으로 효종릉비의 전서와 인선왕후 비석의 전서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를 놓고 논쟁이 발생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왕위는 계승하였지만 둘째 아들이니 주자가례에 의해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남인 측에서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자와 다름없다며 3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1660년남인 윤선도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며 송시열의 사형을 청하자 그는 같은 당인 송시열을 지지하여,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윤선도(尹善道)를 공격, 탄핵하여 유배시켰다.[1]

현종(顯宗) 1년 1월 16일 대사간(大司諫), 1월 28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거쳐 3월 10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2일 승지(承旨)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뒤 비가 와서 숙마(熟馬) 1필씩 하사(下賜)받았다.[1] 같은 해 7월 13일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이 되었다가 8월 23일 예조참판(禮曹參判), 같은 해 9월 1일 부제학(副提學), 11월 9일 이조참판(吏曹參判), 현종(顯宗) 2년 4월 22일 명성왕후 김씨의 책봉식 당시 중전 책례 옥책 제술관(中殿 冊禮 玉冊 製述官)에 제수되었다.[1] 같은 해 7월 18일 겸동지경연(兼同知經筵)을 겸하고, 윤 7월 15일 겸동지의금(兼同知義禁)을 겸하였다.[1]

현종(顯宗) 3년 5월 5일 다시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같은 해 5월 6일 대사헌(大司憲), 5월 25일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9일 청나라 사신(使臣) 원접사(遠接使)로 연경에 파견되었다.[1]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김수항은 송시열과 함께 자의대비의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며 기년설(만 1년)을 주장하는 남인과 맞섰다. 그러나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면서 서인이 실각하고, 형 김수흥이 파면되었다.[6]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 윤휴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 복창군, 복평군 형제의 추문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원주, 영암 등으로 유배되었다.

1676년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영의정에 올랐다. 현종실록 편찬총재관을 지냈으며, 남인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의 사형을 반대하고 구명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680년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87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김종직 추증을 주청하여 1694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게 했다.

1681년 태조의 어진(御眞)을 전주로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장희빈이 낳은 왕자 균(경종)이 아직 강보에 싸여 있고 인현왕후는 젊으며,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송시열과 함께 반대하였다. 그는 남인이 왕자 정호를 정치적으로 악용할 것을 경고했고, 송시열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며 시기상조라고 주장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는 죄로 김방걸 등의 탄핵을 받고 삭탈되었다. 그해 윤 3월 21일 양사의 합계로 전라남도 진도위리안치되었다.[9] 이후 예조판서 민암을 비롯한 남인 경재 수십 인의 공격과 사헌부, 사간원의 합계로 4월 9일 회갑을 불과 네 달 앞두고 진도 배소에서 사사되었다.[9]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4월 2일에 사면 복관되었다.[8] 1886년 (고종 23년)에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1. 생애 초기

1629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뒤에 경기도 포천군 영평면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증조부는 김극효, 할아버지는 김상헌, 아버지는 김광찬이며, 어머니는 연안 김씨이다. 인목왕후가 그의 이모할머니이고 영창대군은 그의 외당숙이다.[11] 큰형은 김수증, 둘째 형은 김수흥이다. 안정 나씨와 혼인하여 김창집, 김창협 등 6형제를 두었으며, 그의 처남 나량좌는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12]

1645년(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64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51년(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4년 9월 17일 춘당대문과 정시에 5등으로 합격하였고,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3. 1. 1. 출생과 가계

1629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뒤에 경기도 포천군 영평면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증조부는 김극효, 할아버지는 김상헌, 아버지는 김광찬이며, 어머니는 연안 김씨이다. 인목왕후가 그의 이모할머니이고 영창대군은 그의 외당숙이다.[11] 큰형은 김수증, 둘째 형은 김수흥이다.

안정 나씨와 혼인하여 김창집, 김창협 등 6형제를 두었다. 그의 처남 나량좌는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12]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13]

관계이름비고
증조부김극효(金克孝)
양조부김상헌(金尙憲, 1570 ~ 1652)좌의정 증영의정 청음
친조부김상관(金尙觀, 1566 ~ 1621)장단부사 증좌찬성
친조모의령 남씨남응정(南應井)의 딸
아버지김광찬(金光燦, 1597 ~ 1668)동지중추부사 증의정부영의정
외조부김내(金琜, 1576 ~ 1613)
외조모초계 정씨(草溪 鄭氏, 1575 ~ 1640)
어머니연안 김씨인목왕후의 아버지 연안부원군 김제남의 손녀
누나김복희(金復喜, 1614 ~ ?)
누나김계희(金繼喜, 1616 ~ ?)
누나김영희(金永喜, 1620 ~ ?)
김수증(金壽增, 1624 ~ 1701)공조참판 곡운
김수흥(金壽興, 1626 ~ 1690)의정부영의정 퇴우당
여동생김태희(金兌喜, 1632 ~ ?)
여동생김묘현(金妙賢, 1633 ~ ?)
서모이름 미상양민 출신
이복 남동생김수징(金壽徵, 1636 ~ 1706)
이복 남동생김수응(金壽應, 1640 ~ 1695)
이복 남동생김수칭(金壽稱, 1642 ~ 1704)
이복 남동생김수능(金壽能, 1644 ~ 1704)
이복 여동생양천 허씨 허서(許墅)의 처
장인나성두(羅星斗, 1614 ~ 1663)
장모경주 김씨김남중(金南重)의 딸
부인안정 나씨(安定 羅氏, 1630 ~ 1703)
장남김창집(金昌集, 1648 ~ 1722)의정부 영의정
며느리박세남(朴世楠)의 딸
손자김제겸(金濟謙, 1680 ~ 1722)
손자김호겸(金好謙, 1681 ~ 1699)
손녀여흥 민씨 민창수(閔昌洙)의 처
차남김창협(金昌協, 1651 ~ 1708)성균관대사성 예조판서
며느리연안 이씨이단상(李端相)의 딸
손녀대구 서씨 서종유(徐宗愈, 1672 ~ 1720)의 처
손녀이태진(李台鎭)의 처
손녀김운(金雲, 1680 ~ 1700)
손녀고령 박씨 박사한(朴師漢, 1677 ~ ?)의 처
손녀기계 유씨 유수기(兪受基)의 처
손자김숭겸(金崇謙, 1682 ~ 1700)
3남김창흡(金昌翕, 1653 ~ 1722)사헌부집의 증이조판서
며느리경주 이씨이세장(李世長)의 딸
손자김양겸(金養謙, 1675 ~ 1728)
손자김치겸(金致謙, 1677 ~ 1747)
손자김후겸(金厚謙, 1687 ~ 1727)
4남김창업(金昌業, 1658 ~ 1722)화가
며느리전주 이씨익풍군(益豐君) 이속(李涑)의 딸
손자김우겸(金祐謙, 1676 ~ 1709)
손자김언겸(金彦謙, 1686 ~ 1738)
손자김신겸(金信謙, 1693 ~ 1738)
손자김비겸(金卑謙)
며느리(측실)이름 미상
서손녀화원부부인 안동 김씨(花原府夫人 安東 金氏, 1681 ~ 1710)조문명의 정부인
서손자김윤겸(金允謙, 1711 ~ 1775)
5남김창즙(金昌楫, 1662 ~ 1713)예빈시주부
며느리남양 홍씨홍처우(洪處宇)의 딸
손녀안동 김씨(安東 金氏, 1680 ~ ?)
손자김용겸(金用謙, 1702 ~ 1789)
장녀안동 김씨(安東 金氏, 1665 ~ 1680)
사위이섭(李涉, 1664 ~ 1692)
6남김창립(金昌立, 1666 ~ 1683)
손자김후겸(金厚謙)


3. 1. 2. 수학과 과거 급제

1645년(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64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51년(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4년 9월 17일 춘당대문과 정시에 5등으로 합격하였고,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3. 2. 정치 활동

1653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시강원 사서, 경기도도사, 사헌부지평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같은 해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춘당대 문신 정시에 합격하여 효종에게 말을 하사받았고,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겸 중학교수와 한학교수를 겸하였다. 1655년 교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고, 수찬,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 시강원 보덕 등을 지냈다.

같은 해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가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656년 문과 중시[4]에 급제하였다.

1656년 홍문관 응교를 거쳐 의정부사인을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5], 사간원대사간, 형조참의, 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다. 1657년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조참의,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궁가의 하인들의 폐단을 막아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승지를 맡았다.

1658년 승지, 부제학을 거쳐 1659년 실록찬집청 당상으로 효종릉비의 전서와 인선왕후 비석의 전서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3. 2. 1. 관료 생활과 1차 예송 논쟁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를 놓고 논쟁이 발생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왕위는 계승하였지만 둘째 아들이니 주자가례에 의해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남인 측에서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자와 다름없다며 3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는 송시열, 송준길의 설을 지지,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자의대비 상복의 기년설(朞年說, 1년복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허목, 윤휴, 홍우원은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니까 장남과 다를 바 없다며 3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1660년남인 윤선도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며 송시열의 사형을 청하자 그는 같은 당인 송시열을 지지하여,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윤선도(尹善道)를 공격, 탄핵하여 유배시켰다.[1]

현종(顯宗) 1년 1월 16일 대사간(大司諫), 1월 28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거쳐 3월 10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2일 승지(承旨)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뒤 비가 와서 숙마(熟馬) 1필씩 하사(下賜)받았다.[1]

같은 해 7월 13일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이 되었다가 8월 23일 예조참판(禮曹參判), 같은 해 9월 1일 부제학(副提學), 11월 9일 이조참판(吏曹參判), 현종(顯宗) 2년 4월 22일 명성왕후 김씨의 책봉식 당시 중전 책례 옥책 제술관(中殿 冊禮 玉冊 製述官)에 제수되었다.[1]

같은 해 7월 18일 겸동지경연(兼同知經筵)을 겸하고, 윤 7월 15일 겸동지의금(兼同知義禁)을 겸하였다.[1]

현종(顯宗) 3년 5월 5일 다시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같은 해 5월 6일 대사헌(大司憲), 5월 25일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9일 청나라 사신(使臣) 원접사(遠接使)로 연경에 파견되었다.[1]

3. 2. 2. 2차 예송 논쟁과 홍수의 변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김수항은 송시열과 함께 자의대비의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며 기년설(만 1년)을 주장하는 남인과 맞섰다. 그러나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면서 서인이 실각하고, 형 김수흥이 파면되었다.[6]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 윤휴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 복창군, 복평군 형제의 추문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원주, 영암 등으로 유배되었다.

3. 2. 3. 경신환국과 집권

1676년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영의정에 올랐다. 현종실록 편찬총재관을 지냈으며, 남인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의 사형을 반대하고 구명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680년 보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87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김종직 추증을 주청하여 1694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게 했다.

3. 3. 유배와 최후

김수항은 1674년(현종 15년)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같은 해 7월 좌의정에 올랐다. 그해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자의대비 복상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송시열은 대공복(9개월)을 주장했고 김수항은 이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1년) 주장을 채택했다.[9]

현종은 송시열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김수항의 형 김수흥을 파면하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어 김수항에게는 판중추부사 직을 내렸으나 그는 출사를 거듭 사양하였다.

3. 3. 1. 원자 정호 문제와 기사환국

송시열, 송준길을 도와 서인의 주요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1차, 2차 예송 논쟁에서 윤휴, 윤선거, 허목, 이서우 등 남인의 맹공격을 받았다.[9] 송시열과 함께 왕자 균(昀, 후일 경종)의 세자 책봉을 시기상조라며 반대하여 남인소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1681년 태조의 어진(御眞)을 전주로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장희빈이 낳은 왕자 균(경종)이 아직 강보에 싸여 있고 인현왕후는 젊으며,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송시열과 함께 반대하였다. 그는 남인이 왕자 정호를 정치적으로 악용할 것을 경고했고, 송시열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며 시기상조라고 주장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는 죄로 김방걸 등의 탄핵을 받고 삭탈되었다. 그해 윤 3월 21일 양사의 합계로 전라남도 진도위리안치되었다.[9] 이후 예조판서 민암을 비롯한 남인 경재 수십 인의 공격과 사헌부, 사간원의 합계로 4월 9일 회갑을 불과 네 달 앞두고 진도 배소에서 사사되었다.[9]

이 사건은 경신출척 때 남인의 옥사를 다스릴 때 위관으로서 소론의 반대에도 오시수를 처형하여 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설과,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0]

3. 3. 2. 사후

金壽恒중국어진도에서 사사되자, 아들 김창협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뒤, 어머니 안정 나씨를 모시고 영평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였다.[8] 그의 자손들은 노론의 당원이 되었고, 5대손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다. 반면 처남 나량좌와 그의 후손들은 소론의 당원이 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4월 2일에 사면 복관되었다.[8] 1886년 (고종 23년)에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라남도 진도의 봉암사(珍島鳳巖祠), 영암 녹동서원(靈巖鹿洞書院), 경기도 포천의 영평 옥병서원(永平 玉屛書院), 양주 석실서원(楊州 石室書院), 전라북도 전주 호산사(全州 湖山祠) 등에 배향되었다.[8]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 28권과 《갑진북정록》(甲辰北征錄)이 전한다.

4. 평가와 비판

노론 측에서는 김수항이 조정에서 세 가지 큰 절의를 세웠다고 평가했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며 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 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1] 이러한 평가는 노론 측의 주장이었고, 반대로 소론 측에서는 김수항이 송시열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사림을 분열시켰다고 비판했다.[1] 현대에는 김수항이 지나치게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5. 저작

김수항은 《문곡집》, 《갑진북정록》 등을 저술했다.[1][2][3][4][5] 효종릉비 전서, 인선왕후묘비 전서, 송강 정철 신도비문, 윤광계 시문집 《귤옥졸고》 서문, 청주 신항서원 묘정비 등을 작성했다.

5. 1. 저서

5. 2. 작품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양조부김상헌(1570 ~ 1652)좌의정영의정 청음
친조부김상관(1566 ~ 1621)장단부사 증좌찬성
친조모의령 남씨남응정(南應井)의 딸
아버지김광찬(1597 ~ 1668)동지중추부사 증의정부영의정
외조부김내(金琜, 1576 ~ 1613)
외조모초계 정씨(1575 ~ 1640)
어머니연안 김씨인목왕후의 아버지 연안부원군 김제남의 손녀
누나김복희(金復喜, 1614 ~ ?)
누나김계희(金繼喜, 1616 ~ ?)
누나김영희(金永喜, 1620 ~ ?)
김수증(金壽增, 1624 ~ 1701)공조참판 곡운
김수흥(1626 ~ 1690)의정부영의정 퇴우당
여동생김태희(金兌喜, 1632 ~ ?)
여동생김묘현(金妙賢, 1633 ~ ?)
서모이름 미상양민 출신
이복 남동생김수징(金壽徵, 1636 ~ 1706)
이복 남동생김수응(金壽應, 1640 ~ 1695)
이복 남동생김수칭(金壽稱, 1642 ~ 1704)
이복 남동생김수능(金壽能, 1644 ~ 1704)
이복 여동생양천 허씨 허서(許墅)의 처
장인나성두(羅星斗, 1614 ~ 1663)
장모경주 김씨김남중(金南重)의 딸
부인안정 나씨(1630 ~ 1703)
장남김창집(1648 ~ 1722)의정부영의정 몽와
며느리박씨박세남(朴世楠)의 딸
손자김제겸(金濟謙, 1680 ~ 1722)
손자김호겸(金好謙, 1681 ~ 1699)
손녀여흥 민씨민창수(閔昌洙)[11]의 처
차남김창협(1651 ~ 1708)성균관대사성 예조판서 농암
며느리연안 이씨이단상(李端相)의 딸
손녀대구 서씨서종유(徐宗愈, 1672 ~ 1720)[12]의 처
손녀이태진(李台鎭)의 처
손자김운(金雲, 1680 ~ 1700)
손녀고령 박씨박사한(朴師漢, 1677 ~ ?)의 처
손녀기계 유씨유수기(兪受基)의 처
손자김숭겸(金崇謙, 1682 ~ 1700)
3남김창흡(1653 ~ 1722)사헌부집의 증이조판서 삼연
며느리경주 이씨이세장(李世長)[13]의 딸
손자김양겸(金養謙, 1675 ~ 1728)
손자김치겸(金致謙, 1677 ~ 1747)
손자김후겸(金厚謙, 1687 ~ 1727)
4남김창업(1658 ~ 1722)화가
며느리전주 이씨익풍군(益豐君) 이속(李涑)의 딸
손자김우겸(金祐謙, 1676 ~ 1709)
손자김언겸(金彦謙, 1686 ~ 1738)
손자김신겸(1693 ~ 1738)
손자김비겸(金卑謙)
며느리(측실)이름 미상
서손녀화원부부인 안동 김씨(花原府夫人 安東 金氏, 1681 ~ 1710)조문명의 정부인
서손자김윤겸(金允謙, 1711 ~ 1775)
5남김창즙(金昌楫, 1662 ~ 1713)예빈시주부
며느리남양 홍씨홍처우(洪處宇)의 딸
손녀안동 김씨(安東 金氏, 1680 ~ ?)
손자김용겸(金用謙, 1702 ~ 1789)
장녀안동 김씨(安東 金氏, 1665 ~ 1680)
사위이섭(李涉, 1664 ~ 1692)
6남김창립(金昌立, 1666 ~ 1683)
손자김후겸(金厚謙)



김수항은 안정 나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6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창집, 차남 김창협, 3남 김창흡 등 아들들이 모두 노론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아들 몽와 김창집(1719년 기로소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초상)

7. 김수항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문서 김창집/김창즙
[2] 문서 3년복
[3] 문서 허영, 허새의 역모 사건
[4] 문서 특별 과거시험
[5] 문서 중시문과 합격
[6] 문서 허적의 남인 온건파 행보
[7] 문서 궁중여인 능욕 사건
[8] 문서 허적의 송시열, 김수항 사형 반대
[9] 문서 허적 처형 주장
[10] 웹사이트 (제목 없음) http://sunday.joins.[...]
[11] 문서 민진원
[12] 문서 서문중의 아들
[13] 문서 이항복의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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