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윤 (화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윤은 1946년 부산에서 태어나 1986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판화가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현실 동인 결성을 통해 리얼리즘 미술 운동을 제창하며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목판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한국 전통의 민중 문화를 연구하여 민족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흑백 목판화, 색채 목판화, 유화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으며, 특히 민중의 삶과 애환, 분노를 표현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사후에도 그의 작품과 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판화가 - 김수자 (서양화가)
    김수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대한민국미술대전과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덕성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하고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미술학부 서양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민국예술원 및 대한민국미술협회 회원으로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전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 대한민국의 판화가 - 조향숙
    조향숙은 1949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나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한국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불교미술을 주제로 유화와 목판화 작업을 병행하며 한국 전통 재료를 활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다.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운동가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운동가 - 유시민
    유시민은 경주 출신의 작가이자 정치인, 유튜버로, 민주화 운동 참여, 정계 입문 후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작가, 방송인, 유튜버로 활동하며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 - 김민기 (가수)
    김민기는 1970년대 저항가요를 대표하며, 가수,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했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연출했으며, 2024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 - 김현정 (1988년생 화가)
    김현정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국화가로서, '내숭 이야기' 전시 완판과 '내숭 올림픽' 개인전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국내외 유수 미술관에서 개인전 및 초대전을 개최하고 서울특별시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고 있다.
오윤 (화가) - [인물]에 관한 문서
한자
기본 정보
이름오윤
출생일1946년 4월 13일
사망일1986년 7월 5일
사망 장소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직업화가, 판화가
활동 기간1970–1986
학력
교육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
경력
경력현실과 발언 대표동인 겸 사무원장
작품 성향
사조민중 미술 (사회비판적 표현주의)
주요 작품
대표작칼노래
수상
수상2005년 옥관문화훈장 추서
영향 관계
영향받음김윤수, 김지하, 최민 등의 영향을 받음.
가족 관계
배우자박명자
부모오영수(부), 김정선(모)
형제오숙희(큰누나)
웹사이트
웹사이트두피디아 오윤

2. 생애

1946년 부산 동래구 낙민동에서 소설가인 오영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4][2] 유년기는 경남여고 미술과 교사를 지내던 아버지를 따라 바다가 보이는 동구 수정동 경남여자고등학교 관사에서 살았다.[14] 동래 학춤의 대가였던 할아버지와 삼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 동래 학춤은 현재 부산 동래에서 유래한 학의 움직임을 묘사한 한국의 가장 유명한 전통 무용 중 하나이다.

전후 혼란기인 1952년 수정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피난민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로 1953년 흙바닥에 책걸상을 놓고 수업하던 수성국민학교로 전학(분교)한다. 국민학교 4학년을 마친 1955년 서울 돈암동 신흥사 입구 배밭골로 이사와서, 돈암국민학교로 전학 왔다.[14] 내성적인 조용한 성격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에, 누나 오숙희와 친분이 있던 김지하와 알게 된다.[14]

1964년 고졸 후 재수를 통하여,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했다. 1968년 휴학하면서 한국 무전여행을 했다. 1969년 대학 복학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던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선언문”을 발표했다.[14]

1970년 8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 군대에 입대했으나,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1972년에 의병제대를 했다. 제대 후 경북 경주에서 윤광주, 오경환과 같이 전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라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 흙을 다루는 기술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경기 일산에서 임진택이 운영하는 전돌공장에서 조건영 등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14]

1976년 한윤수가 운영하는 청년사가 설립되어 삽화도 제작하고, 지리산, 한탄강 등 현장 답사를 다니기도 했다. 1977년 박명자와 결혼하고 수유리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슬하에 2남을 두었다. 1977년 3월 선화예술고등학교 미술학과 교사를 몇년동안 잠시 지내었다. 1979년 5월에 부친 오영수가 작고하고, 그해 11월 19일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14]

김지하의 시집 《오적(五賊)》과 이원수의 전래 동화집 《땅속나라 도둑귀신》의 판화 삽화와 표지화를 비롯하여 정치적 민주화 운동 및 투쟁을 지원한 포스터와 대형 걸개그림 제작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계속 참여하면서, 1982년 석형산, 김호득 등과 함께 서대문 미술학원을 설립하여 조소를 지도한다.

이후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83년 7월 간경화로 고려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에 퇴원하여 민간요법으로 치유를 했으나, 1984년 10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진도로 요양을 떠난다. 1985년 3월 서울로 와서 1986년 5월 3일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했다. 판화집 칼노래를 출간하고, 화실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1986년 7월 5일 마흔한 살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14]

현대 판화 선구자로 평가받았으며,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민화, 무속화, 불화, 탈춤, 굿 등 한국 전통의 민중 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민족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해학과 민중적 신명, 한이 날카로운 칼맛을 통한 표현적인 선을 통해 형식과 내용의 탁월한 통일을 보여준다. 한국 민화나 풍속화 같은 전통 미술의 형식을 빌러 강렬한 선과 형태로 민중의 삶과 애환, 분노를 표현을 표했던 오윤의 목판화는 민중 판화의 전형이 되었다.[15]

2. 1. 출생과 성장

1946년 부산 동래구 낙민동에서 소설가인 오영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4][2] 유년기는 경남여고 미술과 교사를 지내던 아버지를 따라 바다가 보이는 동구 수정동 경남여자고등학교 관사에서 살았다.[14] 동래 학춤의 대가였던 할아버지와 삼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 동래 학춤은 현재 부산 동래에서 유래한 학의 움직임을 묘사한 한국의 가장 유명한 전통 무용 중 하나이다.

전후 혼란기인 1952년 수정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피난민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로 1953년 흙바닥에 책걸상을 놓고 수업하던 수성국민학교로 전학(분교)한다. 국민학교 4학년을 마친 1955년 서울 돈암동 신흥사 입구 배밭골로 이사와서, 돈암국민학교로 전학 왔다.[14] 내성적인 조용한 성격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에, 누나 오숙희와 친분이 있던 김지하와 알게 된다.[14]

1964년 고졸 후 재수를 통하여,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했다. 1968년 휴학하면서 한국 무전여행을 했다. 1969년 대학 복학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던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선언문”을 발표했다.[14]

1970년 8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 군대에 입대했으나,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1972년에 의병제대를 했다. 제대 후 경북 경주에서 윤광주, 오경환과 같이 전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라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 흙을 다루는 기술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경기 일산에서 임진택이 운영하는 전돌공장에서 조건영 등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14]

1976년 한윤수가 운영하는 청년사가 설립되어 삽화도 제작하고, 지리산, 한탄강 등 현장 답사를 다니기도 했다. 1977년 박명자와 결혼하고 수유리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슬하에 2남을 두었다. 1977년 3월 선화예술고등학교 미술학과 교사를 몇년동안 잠시 지내었다. 1979년 5월에 부친 오영수가 작고하고, 그해 11월 19일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14]

2. 2. 대학 시절과 현실 동인 활동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한 오윤은[14] 1968년 휴학하고 한국 무전여행을 했다.[14] 1969년 복학 후,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선언문”을 발표했다.[14] 이들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심을 가지고,민화, 무속화, 탈춤 등 한국 전통 예술을 연구했다.[4]

1970년 8월 대학교를 졸업하고,[14] 젊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모임이자 한국 사회의 억압을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 운동 '현실과 발언'(현실과 발언/Reality and Utterance영어)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4] 1979년에는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14]

2. 3. 군 복무와 전돌 공장 시절

1970년 8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 군대에 입대했으나,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1972년에 의병제대를 했다.[14] 제대 후 경북 경주에서 윤광주, 오경환과 같이 전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라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 흙을 다루는 기술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경기 일산에서 임진택이 운영하는 전돌공장에서 조건영 등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14]

2. 4. 결혼과 민중미술 운동

1977년 박명자와 결혼하고 수유리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며 슬하에 2남을 두었다.[14] 1979년 5월에 부친 오영수가 작고하고, 그해 11월 19일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14] 김지하의 시집 《오적(五賊)》과 이원수의 전래 동화집 《땅속나라 도둑귀신》의 판화 삽화와 표지화를 비롯하여 정치적 민주화 운동 및 투쟁을 지원한 포스터와 대형 걸개그림 제작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민화, 무속화, 불화, 탈춤, 굿 등 한국 전통의 민중 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민족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다.[15] 한국 민화나 풍속화 같은 전통 미술의 형식을 빌려 강렬한 선과 형태로 민중의 삶과 애환, 분노를 표현을 표했던 오윤의 목판화는 민중 판화의 전형이 되었다.[15] 그의 작품들은 '한'이라고 불리는 한국적인 슬픔의 개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목판화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한'을 표현했다.[5]

2. 5. 건강 악화와 사망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83년 7월 간경화로 고려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에 퇴원하여 민간요법으로 치유를 했다.[14] 1984년 10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진도로 요양을 떠났으나,[14] 1985년 3월 서울로 돌아왔다.[14] 1986년 5월 3일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하고, 판화집 칼노래를 출간했다.[14] 화실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다가 1986년 7월 5일 마흔한 살의 나이로 간경변으로 인해 짧은 생을 마쳤다.[14][8]

3. 작품 세계

오윤은 판화를 비롯하여 수채화, 유화, 삽화, 조각, 탈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창작했으며, 걸개그림이나 책 등으로 세상에 선보였다.[16] 1974년에는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 내외벽 벽화와 동대문 지점 외벽 장식 테라코타를 제작하는 등 조각 작품도 남겼다.[16]

1983년까지는 주로 흑백 목판화를 제작했는데, <세상사람들>, 아이를 지키는 어머니를 그린 <대지> 연작,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노동의 새벽> 등이 대표적이다.[17] <칼노래>, <북춤>, <앵적가> 등에서는 전통춤의 신명과 칼선의 리듬감을 표현했다.[17] 1984년부터는 간결한 장식적 색상을 도입한 작품을 선보였다.[17] <마케팅> 연작은 감로탱 불화, 콜라주, 키치 모자이크 등이 혼합된 파격적인 작업으로, 서구의 모더니즘, 팝 아트와 연결된다.[17]

그의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원귀도>, 신명과 주술의 세계를 그린 <도깨비>, <칼노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17] 특히 한국 전통 퇴마 의식인 굿을 주요 이미지 중 하나로 묘사했는데, 그중에서도 검무를 통해 전통 의식의 움직임을 전달하고자 했다.[11]

그의 작품 제목들은 서민들의 삶에 주목한 그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노동의 새벽>'', <대지>, <칼노래>, <원귀도> 등이 있다.[12] 그의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 더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12] 사망 20주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가나아트센터 등 주요 미술관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13] 마지막 시기의 대형 유화로는 《통일대원도》가 있다. 그는 유명한 판화가였지만, 그의 경력은 조각가로 시작되었으며, 판화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가면이나 삽화에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3. 1. 초기: 흑백 목판화

오윤은 판화를 비롯하여 수채화, 유화, 삽화, 조각, 탈 등으로 된 작품을 만들었으며, 걸개그림이나 책 등으로 세상에 선보였다.[16] 조각 작품으로 1974년 제작한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에 내외벽 벽화와 동대문 지점에 외벽 장식 테라코타가 있다.[16]

1983년까지 대부분 흑백 목판화를 만들었는데, <세상사람들>, 아이를 지키는 어머니를 그린 <대지>연작, 노동자의 헛헛한 뒷모습을 새긴 <노동의 새벽>, 노동자와 서민들의 곤한 삶을 컬컬한 흑백 선묘의 얼굴과 땅땅한 인체구도로 포착한 <칼노래>, <북춤>, <앵적가> 등 전통춤 몸놀림의 신명과 배경 칼선의 오밀조밀한 리듬감을 표현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17]

그의 작품 제목들은 서민들의 삶에 주목한 그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노동의 새벽''⟩(Dawn of Labour), ⟨대지⟩(The land), ⟨칼노래⟩(The song of sword), ⟨원귀도⟩(The lemures) 등이다.[12] 무용수들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불교 회화, 콜라주 및 모자이크라는 개념 아래 표현되어 한국 예술을 팝 아트와 모더니즘과 더욱 연결시켰다.[10] 그의 작품은 심지어 한국 전통 의례인 굿이나 퇴마 의식까지 다루었다.[10] 오윤이 묘사하고 싶어하는 주요 이미지 중 하나는 한국 전통 퇴마 의식인 ''굿''이다. 굿의 가장 인기 있는 이미지는 검무이며, 이는 그의 작품이 전통적인 퇴마 의식의 움직임을 전달하도록 이끌었다.[11]

3. 2. 후기: 색채 목판화와 유화

오윤은 판화를 비롯하여 수채화, 유화, 삽화, 조각, 탈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만들었으며, 걸개그림이나 책 등으로 세상에 선보였다.[16] 조각 작품으로는 1974년 제작한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 내외벽 벽화와 동대문 지점 외벽 장식 테라코타가 있다.[16]

1983년까지는 대부분 흑백 목판화를 만들었는데, <세상사람들>, <대지>연작, <노동의 새벽>, <칼노래>, <북춤>, <앵적가> 등에서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 전통춤의 신명 등을 표현했다. 1984년부터는 간결한 장식적 색상을 도입한 작품으로 변화를 꾀했다. <마케팅> 연작은 감로탱 불화, 콜라주, 키치 모자이크 등이 뒤얽힌 파격적 작업으로 서구의 모더니즘, 팝 아트와 맞닿아 있다.[17] <원귀도>, <도깨비>, <칼노래> 등에서는 신명과 주술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표현했다.[17]

무용수들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불교 회화, 콜라주 및 모자이크라는 개념 아래 표현되어 한국 예술을 팝 아트와 모더니즘과 더욱 연결시켰다. 그의 작품은 한국 전통 의례인 굿이나 퇴마 의식까지 다루었으며, 특히 검무 이미지를 통해 전통적인 퇴마 의식의 움직임을 전달하고자 했다.[10][11]

그의 작품 제목들은 서민들의 삶에 주목한 그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노동의 새벽>, <대지>, <칼노래>, <원귀도> 등이 그 예이다.[12] 그의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 더 큰 관심을 얻었으며,[12] 사망 20주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가나아트센터와 같은 주요 미술관에서 기념 전시가 열렸다.[13] 마지막 시기의 대형 유화로는 《통일대원도》가 있다.

3. 3. 주요 작품 경향

오윤은 판화를 비롯하여 수채화, 유화, 삽화, 조각, 탈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창작했다.[16] 1974년에는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 내외벽 벽화와 동대문 지점 외벽 장식 테라코타를 제작하는 등 조각 작품도 남겼다.[16]

1983년까지는 주로 흑백 목판화를 제작했는데, <세상사람들>, 아이를 지키는 어머니를 그린 <대지> 연작,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노동의 새벽> 등이 대표적이다.[17] <칼노래>, <북춤>, <앵적가> 등에서는 전통춤의 신명과 칼선의 리듬감을 표현했다.[17] 1984년부터는 간결한 장식적 색상을 도입한 작품을 선보였다.[17] <마케팅> 연작은 감로탱 불화, 콜라주, 키치 모자이크 등이 혼합된 파격적인 작업으로, 서구의 모더니즘, 팝 아트와 연결된다.[17]

그의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원귀도>, 신명과 주술의 세계를 그린 <도깨비>, <칼노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17] 특히 한국 전통 퇴마 의식인 굿을 주요 이미지 중 하나로 묘사했는데, 그중에서도 검무를 통해 전통 의식의 움직임을 전달하고자 했다.[11]

그의 작품 제목들은 서민들의 삶에 주목한 그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노동의 새벽''⟩, ⟨대지⟩, ⟨칼노래⟩, ⟨원귀도⟩ 등이 있다.[12] 그의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 더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12] 사망 20주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가나아트센터 등 주요 미술관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13] 마지막 시기의 대형 유화로는 《통일대원도》가 있다.

4. 수상

2005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5. 저서

오윤이 저술한 책으로는 1986년에 출간된 《칼 노래: 吳潤 版畵集》이 있으며, 그림마당·민에서 출판되었다. 오윤의 사후, 1996년 학고재에서 오윤 10주기 추모 판화전각집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을 출간했다. 2005년에는 나무숲에서 어린이 미술관 시리즈로 성완경과 허진무가 쓴 《오윤: 희망을새긴판화가》가 출간되었다. 2006년에는 컬처북스에서 《오윤: 낮도깨비 신명마당》이 출간되었고, 2007년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김문주와 오윤이 함께 쓴 《오윤: 한(恨)을 생명의 춤으로》가 출간되었다. 현실 문화 연구에서는 2010년에 《오윤: 칼을 쥔 도깨비》와 《오윤: 3115, 날 것 그대로 의 오 윤》을 출간하였다.

6. 평가 및 영향

참조

[1] 뉴스 민중의 애환 투박한 線으로 http://news.naver.co[...] Hankook Ilbo 2002-11-03
[2] 뉴스 오영수 문학관 '父子연계' 육성해야 http://news.naver.co[...] Newsis 2013-01-14
[3] 뉴스 춤추는 민중미술가 오윤의 재발견 http://news.naver.co[...] Yonhap 2012-09-18
[4] 뉴스 미술운동 '현실과 발언' 30주년..대규모 회고전(Large-scale commemorating exhibition on art movement to celebrate 30 years of Reality and Speech) http://news.naver.co[...] Yonhap 2010-07-23
[5] 뉴스 목판화 인생 30년 판화가 이철수 http://news.naver.co[...] Yonhap 2011-06-15
[6] 뉴스 ‘오윤 회고전’…판화오 조각으로 민중의 애환 아로새겨 http://news.naver.co[...] 2002-12-01
[7] 뉴스 12월 20일 화제의 전시 http://news.naver.co[...] Hankyoreh 2006-12-20
[8] 뉴스 민중미술 거장 오윤 전집 출간 http://news.naver.co[...] Yonhap 2010-07-20
[9] 뉴스 ‘리얼리즘 미술의 상징’ 오윤의 작품과 생애(The Lifetime of O Yoon, the symbol of Realism art) http://news.donga.co[...] Donga Ilbo
[10] 뉴스 ‘오윤’ 찢어진 눈 불같은 기운 생생 http://www.hani.co.k[...] Hankyoreh
[11] 뉴스 한과 신명의 30여점‘칼맛’…오윤 목판화전 http://news.naver.co[...] Kyunghyang Shinmun 2002-12-09
[12] 뉴스 희망을 새긴 ‘오윤 판화’ 다시본다(Look again on hope-inscripting printwork of O yoon) http://www.seoul.co.[...] Seoul Shinmun 2006-05-25
[13] 뉴스 12월 20일 화제의 전시 http://news.naver.co[...] 2006-12-20
[14] 논문 吳潤에 關한 批評的 硏究 2013-09-23
[15] 웹인용 '민중미술가' 오윤 회고전 18일까지 열려 http://www.vop.co.kr[...] 민중의소리 2011-05-04
[16] 저널 오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2013-09-23
[17] 웹인용 ‘오윤’ 찢어진 눈 불같은 기운 생생 http://www.hani.co.k[...] 2011-05-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