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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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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치 씨는 5세기 후반 에히메현 동부를 다스린 씨족으로, 이마바리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모노노베 씨의 후손인 오이치노 구니노 미야쓰코가 시조로 알려져 있으며, 7세기 백강구 전투 참전 기록이 있다. 8세기 율령제 시행 이후 이요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해적 평정 및 조정에 공헌하기도 했다. 11세기 이후 이요 지역에서 쇠퇴하였고, 고노 씨 등 분파가 존재한다. 오치 씨는 현재 이마바리시에서 흔한 성씨로 남아 있으며, 오야마즈미 신사와도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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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씨
개요
씨족 이름오치 씨
한자 표기越智氏
가나 표기오치우지 (おちうじ)
씨성오치 숙녜
기원고레이 천황의 손자 오치 왕?
종별황별?
본관이요국 오치 향
시조
시조고치 오비토 (小致命)
시조 설명물부 성 고이치 국조
시조 (다른 설)오치 왕
시조 (다른 설) 설명고레이 천황의 제3황자 이요 황자의 제3왕자?
주요 인물
씨조오치 마스미 (越智益躬)
후손
후손고노 씨 (무가)
후손야노 씨 (무가)
후손이요 귤 씨 (무가)
후손미시마 씨 (무가)
후손니이 씨 (무가)
후손이요 이마이 씨 (무가)
기타 정보
출자불명

2. 역사

이마바리시 오미시마정의 오야마즈미 신사에 따르면 카노 씨를 분가한 후에도 대대로 이곳의 신직(대축직)을 담당했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명을 대축 씨로 바꾸어 현재 이를 담당하는 미시마 가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한다. 오치 씨는 현재도 이마바리시에서 가장 많은 성씨로 남아 있다. 가바네 제도가 남아 있던 메이지 시대 초기의 공문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오치 스쿠네 히로부미"라고 성(카바네)과 휘(이름)을 기재하기도 했다.[3]

2. 1. 초기

오치 우지는 오치노사토(越智郷, 지금의 이마바리시 고쿠분 부근)를 본거지로 한다. 5세기 후반 긴키 정권(近畿政権)의 구니노 미야쓰코(国造) 제도에 따라, 현대 일본 에히메현 동부에 다섯 개의 구니노 미야쓰코가 존재했고 이들이 지역 지배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모노노베노 오오니이가와(物部大新河)의 손자 오이치노 구니노 미야쓰코(小市国造小致)가 오치 씨의 시조라 알려져 있다. 구니노미야쓰코 본기(国造本紀)에는 8세기 초 일본에서 시행된 율령제에 따라 14군으로 늘어나고 오이치노 구니노 미야쓰코 고무네(小市国造小致)는 오치노 고리(越智郡里)가 되었고, 이곳에 이요 고쿠후(国府)나 고쿠분지(国分寺)가 세워졌다고 한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오치 씨와 고쿠후의 관계에 대해 오치 씨가 원래 재지 호족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율령제 아래 고쿠후 위치는 고쿠분지 부근으로 비정하고 발굴 조사도 시행되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오치 인물로 최초로 역사 기록에 등장한 것은 오치 군대령(越智郡大領)의 선조라는 오치노 아타이(越智直)이다. 그는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왜병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관음보살(観音菩薩)의 영험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 귀국 후 관음보살을 모신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에 남아 있다. 해당 절의 장소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자체는 당시 일본 조정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오치 씨의 현지 지배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불교를 통해 현지 지배력을 재구축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요 역사에서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767년)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관위를 받았다는 오치 군대령 「오치노아타이 아스카마로(越智直飛鳥麻呂)」와 「오치노아타이 구니마스(越智直国益)」가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오치 씨였다. 덴랴쿠(天暦) 2년(948년) 이요 국에서 해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오치노 모치타다(越智用忠)」에게 관위가 주어졌고 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에서 조정 측에 서서 싸웠다고 한다. 에이엔(永延) 원년(987년) 후지와라 섭관 가문 당주 저택인 히가시 산조 저택(東三条第)에서 스모 시합이 벌어졌는데 오치노 쓰네요(越智常世)가 이요에서 조수로 참가하는 등 그 뒤로도 일본 역사에서 오치 씨는 자주 등장하였으나, 오치노 다메야스(越智為保)가 이요추포사(伊予追捕使)로 임명되었던 조호(長保) 4년(1002년) 이후 오치 씨가 이요 역사에서 큰 역할을 맡는 일은 없었다.

간닌(寛仁) 2년(1018년) 이요노카미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에게 그의 쓰치미카도도노(土御門殿) 저택 가구 일체를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11, 12세기부터 국영 지배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재청관인(在庁官人)이라 불리던 지방 호족들이었고, 겐지는 이요노카미 부임 시절 오치 씨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나모토노 요리미쓰는 세이와 겐지 3대 당주로써 그의 이복동생이 야마토 오치 씨의 선조로 알려진 미나모토노 요리치카(源頼親)였던 점, 오치 씨는 이후 시기상으로 이요에서 자취를 감춘다는 점에서 오치 씨가 그들의 활약 거점을 이요에서 야마토로 옮겼다고 볼 수 있다.

오치 씨 분파였던 고노씨(河野氏) 기록인 예장기(予章記) 등에서 오치 씨를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전설적인 천황인 고레이 천황(孝霊天皇)의 제3황자였다는 이요 황자(伊予皇子)의 셋째 아들을 시조로 한다는 등의 수식이 더해져 있어 신빙성이 낮고, 오치 씨 자체 역사는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일반적으로 오치 씨 계보는 고노 씨의 것과 마구 뒤섞여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2. 2. 중기

오치 우지(越智氏)는 오치노사토(越智郷, 지금의 이마바리시 고쿠분 부근)를 본거지로 삼았다. 5세기 후반, 긴키 정권(近畿政権)의 국조(国造) 제도에 따라, 현재 일본 에히메현 동부에는 다섯 개의 구니노 미야쓰코가 설치되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모노노베노 오오니이가와(物部大新河)의 손자 오이치노 구니노 미야쓰코(小市国造小致)가 오치 씨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다. 국조본기(国造本紀)에 따르면, 8세기 초 일본에서 시행된 율령제에 따라 14군으로 늘어나고 오이치노 구니노 미야쓰코 고무네(小市国造小致)는 오치노 고리(越智郡里)가 되었으며, 이곳에 이요의 고쿠후(国府)나 고쿠분지(国分寺)가 세워졌다고 한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오치 씨와 고쿠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오치 씨가 원래 재지 호족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율령제 아래에서의 고쿠후 위치에 대해서는 고쿠분지 부근으로 비정하고 발굴 조사도 시행되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오치 씨의 인물로 최초로 역사 기록에 등장한 것은 오치 군대령(越智郡大領)의 선조라는 오치노 아타이(越智直)이다. 그는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왜병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관음보살(観音菩薩)의 영험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 귀국하고 나서 관음보살을 모신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에 남아 있다. 해당 절의 장소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조정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오치 씨의 현지에서의 지배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불교를 통해 현지에서의 지배력을 재구축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요 역사에서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767년)에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관위를 받았다는 오치 군대령 오치노아타이 아스카마로(越智直飛鳥麻呂)와 오치노아타이 구니마스(越智直国益)가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오치 씨였다. 덴랴쿠(天暦) 2년(948년)에 이요 국에서 해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오치노 모치타다(越智用忠)에게 관위가 주어졌고, 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에서 조정 측에 서서 싸웠다. 에이엔(永延) 원년(987년)에 후지와라 섭관 가문 당주의 저택인 히가시 산조 저택(東三条第)에서 스모 시합이 벌어졌는데, 오치노 쓰네요(越智常世)가 이요에서 조수로 참가하는 등 그 뒤로도 일본 역사에 오치 씨는 자주 등장하였으나, 오치노 다메야스(越智為保)가 이요추포사(伊予追捕使)로 임명되었던 조호(長保) 4년(1002년) 이후 오치 씨가 이요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맡는 일은 없었다.

간닌(寛仁) 2년(1018년)에 이요노카미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에게 그의 쓰치미카도도노(土御門殿) 저택 가구 일체를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11, 12세기부터 국영 지배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재청관인(在庁官人)이라 불리던 지방 호족들이었고, 겐지는 이요노카미 부임 시절 오치 씨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나모토노 요리미쓰는 세이와 겐지의 3대 당주로써 그의 이복 동생이 야마토 오치 씨의 선조로 알려진 미나모토노 요리치카(源頼親)였던 점, 오치 씨는 이후 시기상으로 이요에서 자취를 감춘다는 점에서 오치 씨가 그들의 활약 거점을 이요에서 야마토로 옮겼다고 볼 수 있다.

2. 3. 후기

오치 우지(越智氏)는 오치노사토(越智郷, 지금의 이마바리시 고쿠분 부근)를 본거지로 삼았다. 5세기 후반 긴키 정권(近畿政権)의 구니노 미야쓰코(国造) 제도에 따라, 현대 일본 에히메현 동부에는 다섯 개의 구니노 미야쓰코가 존재했고 이들이 지역 지배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모노노베노 오오니이가와(物部大新河)의 손자 오이치노 구니노 미야쓰코(小市国造小致)가 오치 씨의 시조라 알려져 있다.[3] 율령제 아래에서 고쿠후(国府) 위치는 고쿠분지 부근으로 추정되어 발굴 조사가 시행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오치의 인물로써 최초로 역사 기록에 등장한 것은 오치 군대령(越智郡大領)의 선조라는 오치노 아타이(越智直)이다. 그는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왜병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관음보살(観音菩薩)의 영험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 귀국하고 나서 관음보살을 모신 절을 세웠다고 하는 이야기가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에 남아 있다. 해당 절의 장소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조정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오치 씨의 현지에서의 지배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불교를 통해 현지에서의 지배력을 재구축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요 역사에서 신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767년)에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관위를 받았다는 오치 군대령 오치노아타이 아스카마로(越智直飛鳥麻呂)와 오치노아타이 구니마스(越智直国益)가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오치 씨였다. 덴랴쿠(天暦) 2년(948년)에 이요국(伊予国)에서 해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오치노 모치타다(越智用忠)에게 관위가 주어졌고 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에서 조정측에 서서 싸웠다고 한다. 에이엔(永延) 원년(987년)에 후지와라 섭관 가문 당주의 저택인 히가시산조도노(東三条第)에서 스모 시합이 벌어졌는데 오치노 쓰네요(越智常世)가 이요에서 조수로써 참가하는 등 그 뒤로도 일본 역사에서 오치 씨는 자주 등장하였으나, 오치노 다메야스(越智為保)가 이요추포사(伊予追捕使)로 임명되었던 조호(長保) 4년(1002년) 이후 오치 씨가 이요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맡는 일은 없었다.

간닌(寛仁) 2년(1018년)에 이요노카미(伊予守)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에게 그의 쓰치미카도도노(土御門殿) 저택 가구 일체를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11, 12세기부터 국영 지배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재청관인(在庁官人)이라 불리던 지방 호족들이었고, 겐지(源氏)는 이요노카미 부임 시절 오치 씨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나모토노 요리미쓰는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3대 당주로써 그의 이복 동생이 야마토 오치 씨의 선조로 알려진 미나모토노 요리치카(源頼親)였던 점, 오치 씨는 이후 시기상으로 이요에서 자취를 감춘다는 점에서 오치 씨가 그들의 활약 거점을 이요에서 야마토로 옮겼다고 볼 수 있다.

오치 씨의 분파였던 고노씨(河野氏)의 기록인 예장기(予章記) 등에서 오치 씨를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전설적인 천황인 고레이 천황(孝霊天皇)의 제3황자였다는 이요 황자(伊予皇子)의 셋째 아들을 시조로 한다는 등의 수식이 더해져 있어 신빙성이 낮고, 오치 씨 자체의 역사는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일반적으로 오치 씨의 계보는 고노 씨의 것과 뒤섞여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3. 분파

오치 씨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3. 1. 오야마즈미 신사와의 관계

이마바리시 오오미시마정의 오야마즈미 신사에 따르면, 카노 씨에서 분가한 후에도 오치 씨는 대대로 이 곳의 신직(대축직)을 담당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명을 대축 씨로 바꾸었고, 현재 이를 담당하는 미시마 가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한다.

4. 현대의 오치 씨

8세기 초 율령제 시행으로 14군이 설치되면서 고치 국조는 오치군이 되었고, 이요의 고쿠후고쿠분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와묘류이쇼』에는 오치 씨와 고쿠후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오치 씨가 원래 이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다는 설도 있다. 율령제 하에서 고쿠후의 위치는 고쿠분지 근처로 추정되어 발굴 조사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오치 씨 인물은 오치군 대령의 선조인 오치 아타이이다. 그는 백촌강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관음보살의 영험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관음보살을 모시는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일본영이기』에 전해진다. 이는 지배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불교를 통해 지역 지배를 재건하려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가 건립한 고대 사찰 터의 위치는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

이요 지역 역사에서 신호경운 원년(767년)에 헌상품을 바치고 서위를 받은 오치군 대령 오치 아타이 아스카마로와 오치 아타이 구니마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덴랴쿠 2년(948년)에는 이요국에서 해적을 평정한 공로로 오치 모치타다가 서위를 받았으며, 이는 조평천경의 난에서 오치 가문이 정부군 측에서 싸웠음을 보여준다. 에이엔 원년(987년) 토산조다이에서 열린 스모에 이요 지역 조수(相撲)로서 오치 츠네요가 참가하는 등 이후에도 오치 가문의 인물들이 역사에 등장하지만, 조호 4년(1002년) 오치 타메보가 이요 추포사로 임명된 이후로는 이요 지역에서 오치 씨의 뚜렷한 활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간닌 2년(1018년), 이요노카미였던 미나모토노 요리미츠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 토미카도도노의 가구 일체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11~12세기 국영 지배의 실권은 재청관인이라 불리는 지방 호족들이 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겐지가 이요노카미로 재임하던 시기에 오치 씨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나모토노 요리미츠가 세이와 겐지 3대손이고, 이복동생으로 미나모토노 요리치카가 있다는 점, 그리고 오치 씨가 이후 이요 지역에서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시기적인 정황을 고려할 때, 오치 가문이 야마토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카노 씨가 기록한 『요장기』 등에는 오치 씨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지만, 고레이 천황의 셋째 황자 이요 황자의 셋째 왕자를 시조로 기록하는 등 윤색이 심하여 신빙성이 떨어진다. 오치 씨 자체의 역사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으며, 일반적으로 오치 씨 계보는 카노 씨 계보와 혼동되어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많다.

이마바리시 오오미시마정의 오야마즈미 신사에 따르면, 카노 씨가 분가한 후에도 오치 씨는 대대로 이 신사의 신직(대축직)을 담당했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명을 대축 씨로 바꾸었고, 현재는 미시마 가문이 그 역할을 이어받고 있다고 한다. 오치라는 성씨는 현재도 이마바리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씨 중 하나이다. 또한, 가바네 제도가 남아 있던 메이지 초기 공문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오치 스쿠네 히로부미"라고 성(가바네)과 휘(이름)를 함께 기재한 기록이 있다.

참조

[1] 문서 物部の一族である小致命(子到命=おちのみこと)が小市国造(おちのくにのみやつこ)に任命されて、越智郡を支配して直(あたえ)姓を称した。[[835年]]([[承和 (日本)|承和]]2年)11月に、その子孫の越智広成が直から宿禰姓を賜ったと述べている(『[[先代旧事本紀|旧事本紀]]』)。
[2] kotobank 2024-03-10
[3] 웹사이트 新撰姓氏録 https://www.digital.[...]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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