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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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녕군은 조선의 왕족으로, 태종의 서자이며 신빈 신씨의 아들이다. 1425년 온녕군에 봉해졌으며, 성품이 호방하고 무예에 능했다. 세종 재위 기간에 잦은 물의를 일으켜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 145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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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녕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온녕군 溫寧君 | 
| 휘 | 정(䄇) | 
| 시호 | 양혜(良惠) | 
| 작위 | 조선 태종의 왕자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출생일 | 1407년 | 
| 아버지 | 태종 | 
| 어머니 | 신빈 신씨 (신녕궁주) | 
| 배우자 | 익산군부인 순천 박씨 | 
2. 생애
1454년(단종 2년) 5월 12일에 온녕군은 사망하였다. 조정과 저자를 3일간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마포 40필, 저포 3필, 쌀과 콩 100석, 종이 200권을 내렸다.
2. 1. 초기 생애
이름은 정(䄇)이며, 1425년(세종 7년) 가정대부(嘉靖大夫) 온녕군에 봉해졌다. 1426년(세종 8년) 서교에서 매사냥을 하였는데 꿩을 쏘아 맞히자, 세종이 기뻐하며 내구마를 하사하였다.[1]성품이 호방했으며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지혜가 있고 현명하여 매사를 알아서 예의와 절도에 맞게 행하여, 종실에서 영특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1430년(세종 12년) 정월 초하룻날 입궐하여 조반할 때, 혜령군과 함께 홀을 가지고 익안대군의 손자인 신의군의 양관을 쳐서 잠(箴)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화가 난 신의군이 온녕군의 양관을 걷어차 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종부시로부터 탄핵을 받아 온녕군과 혜령군은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잘못이지만, 조카가 당숙의 양관을 걷어차는 행동은 부도덕한 일로 간주되어 신의군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2]
같은 해 6월, 종학(宗學)에서 혜령군과 서로 치고 옷깃을 찢으며 다투어 종부시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세종은 혜령군의 종학 출입을 금하고 엄벌에 처하였으며 온녕군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3]
1434년(세종 16년) 겨울 3개월 동안 종학에 결석한 일수가 가장 많아, 세종은 온녕군의 구사를 모두 거두어갔다.[4] 1438년(세종 20년)에는 국기일(國忌日)에 술과 안주를 장만해 가지고 산에 올라가 놀았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5]
2. 2. 잦은 물의와 탄핵
1430년(세종 12년) 정월 초하루, 혜령군과 함께 홀로 익안대군의 손자 신의군(愼宜君)의 양관을 쳐서 잠(箴)을 떨어뜨렸다. 이에 화가 난 신의군이 온녕군의 양관을 걷어찼다. 종부시는 온녕군과 혜령군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잘못이지만, 조카가 당숙의 양관을 걷어찬 것은 부도덕하다며 탄핵했고, 신의군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2]같은 해 6월, 종학(宗學)에서 혜령군과 서로 치고 옷깃을 찢으며 다투어 종부시로부터 탄핵받았다. 세종은 혜령군의 종학 출입을 금하고 엄벌에 처했으나, 온녕군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3]
1434년(세종 16년) 겨울, 3개월 동안 종학에 결석한 일수가 가장 많아 세종은 온녕군의 구사를 모두 거두었다.[4] 1438년(세종 20년)에는 국기일(國忌日)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산에 올라가 놀았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받았다.[5]
2. 3. 사망
1454년(단종 2년) 5월 12일에 사망하였다. 조정과 저자를 3일간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마포 40필, 저포 3필, 쌀과 콩 100석, 종이 200권을 내렸다.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아버지 | 태종 | 
| 어머니 | 신빈 신씨 | 
| 부인 | 익산군부인 순천 박씨 | 
| 아들(양자) | 우산군 이종 (근녕군의 차남) | 
| 며느리 | 문성군부인 문화 류씨 | 
| 손자 | 용성군 이원 | 
| 손자 | 무풍군 이총 | 
| 손자 | 한산군 이정 | 
| 손자 | 화원군 이간 | 
| 손자 | 금천군 이변 | 
| 손자 | 청양군 이건 | 
| 손녀 | 유탄과 혼인 | 
| 손녀 | 이수려와 혼인 | 
4. 관련 작품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배우 윤승원이 온녕군 역을 연기했다.[1]
4. 1. TV 드라마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배우 윤승원이 온녕군 역을 연기했다.[1]참조
[1] 
서적
 
세종실록
 
1426-09-06
 
[2] 
서적
 
세종실록
 
1430-01-14
 
[3] 
서적
 
세종실록
 
1430-06-18
 
[4] 
서적
 
세종실록
 
1434-01-02
 
[5] 
서적
 
세종실록
 
143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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