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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반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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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옹진반도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옹진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선인민군은 옹진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38경비 제3여단을 투입했고, 이에 맞서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는 옹진반도의 지형적 특성과 국군의 방어선 취약점, 그리고 미흡한 정보 수집 및 판단으로 인해 국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국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 속에서도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부포항을 통해 철수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국군의 피해를 키웠으며, 이후 전개될 전쟁의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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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반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관련 작전폭풍 작전 (북한)
서부 지역 작전 (대한민국)
날짜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6일
장소옹진반도
결과조선인민군의 승리
대한민국 국군의 성공적인 철수
영토 변경조선인민군이 옹진군과 강령군 점령
교전 세력
지휘관
조선인민군최현
김후친
대한민국 국군백인엽
병력 규모
조선인민군제3 경비여단 (-3개 대대)
제1 보병연대
대한민국 국군제17 보병연대
피해 규모
조선인민군 (대한민국 주장)581명 사망
SU-76M 5대 파괴
장갑차 5대 파괴
대한민국 국군제7 보병연대:
113명 사망
371명 부상
64명 실종
총합 (배속 부대 및 경찰 포함): 326명 사망
관련 정보
관련 정보옹진반도 전투

2. 작전지역의 특징

북위 38도 분계선 서쪽 끝에 위치한 옹진반도멸악산맥의 여맥으로 이어진 반도이다. 이 지역은 동·서·남쪽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38선해주만으로 육로가 차단되어 있었다.[2]

지역 중앙부에 국사봉이 우뚝 솟아 그 지맥이 사방으로 뻗어 지역 내를 감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락산과 까치산(일명 작오산) 주변에서는 1949년에 북한군의 38도선 침범으로 비롯된 치열한 전투가 세 차례나 반복되기도 했었다.[2] [3]

지역 내의 취야와 태탄에는 인민군의 보급시설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특히 취야는 강령~양원 도로의 분기점인 동시에 해주~옹진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옹진반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부포항은 국군의 유일한 후방지원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부포항은 간만의 차가 심하여 대형 선박은 하루에 두 번밖에 접안할 수 없었다. 부포와 인천 사이의 거리는 해상으로 90km이며, 페리가 편도로 이동하는 데 9시간이 걸렸다.[2]

3. 조선인민군의 상황

조선인민군은 1947년 7월 이후부터 옹진반도 서쪽 끝에서 배천까지를 38경비 제3여단(여단장 소장 최현)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여단은 4개 대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죽천에 집결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여단은 6월 21일에 3개 대대를 옥동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다음날 밤에는 제203전차연대로부터 1개 전차중대를 배속받은 북한군 제6사단 14연대가 취야로 이동하여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보다 앞서 6월 18일에는 38선에 전개한 각 사단과 38경비여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정찰명령 제1호가 하달되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정찰명령 제 1호
수신: 38경비 제 3여단 참모장
제목: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정찰명령 제 1호(1950년 6. 18)



1950년 6월 10일부터 23일 사이에 조선인민군은 군사 훈련을 위장하여 서부 지역에서 전면전을 위한 배치를 완료했다. 조선인민군 제3 38경비여단은 7개 대대를 옹진반도와 연백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한편, 사리원에 주둔하고 있던 제1 보병 연대와 보안대대는 제6 보병사단에서 분리되어 제3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취야로 이동했다. 그들의 임무는 상위 지휘부인 제1군단이 서울로 향하는 동안 옹진반도와 연안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2]

목표 달성을 위해 제3 38경비여단은 원래 7개 대대와 1개 연대로 전면적인 병렬 공격을 계획했으며, 제7 38경비대대를 예비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제3여단장 최현 준장은 전쟁 직전에 전선 병력이 너무 얇아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각 부대를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대신 계획을 수정했다. 제1 보병 연대는 강령으로 진격하여 대한민국 제17 보병 연대를 양분하는 임무를 받았다.[2]

이 지역의 조선인민군 병력은 제3 38경비여단 8,000명과 배속 부대 3,000명을 포함하여 11,000명이었다. 그들은 4문의 M-30 곡사포, 5문의 SU-76M 자주포, 32문의 M1927포, 45문의 M-42 대전차포, 95문의 82-PM-41 박격포, 16문의 120-PM-43 박격포 그리고 8대의 장갑차로 무장했다.[2]

조선인민군 육군 부대 목록[2]
부대지휘관비고
제3 38경비여단여단장 최현옹진반도 전투 참가 부대
제2 38경비대대옹진 북쪽
제4 38경비대대옹진 북쪽
제5 38경비대대옹진 서북쪽
제6 38경비대대옹진 서북쪽
제7 38경비대대예비대
제1 보병 연대 (배속)연대장 김후진옹진 북동쪽
제1 38경비대대백천 북쪽, 불참 부대
제3 38경비대대연안 북쪽, 불참 부대
(1) 보안대대 (배속)청단 북쪽, 불참 부대


4. 독립 제17연대의 방어태세

대한민국 육군본부1949년에 발생했던 옹진반도의 분쟁 상황과 지역적 특징을 고려하여, 앞으로 예상되는 국지적 분쟁과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어지침을 내렸다.[2]

옹진반도의 작전형태별 방어지침



이에 따라 제17연대는 1950년 2월부터 4월까지 지역 주민의 협조를 받아 연인원 6만여 명을 동원하여 주 진지의 유개화(덮개를 씌워 보호하는) 공사를 완료했다.[2] 그러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종심(세로로 깊이) 깊은 방어 진지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즉, 38도선 남쪽의 감제고지(사방을 감시하고 제압하기 좋은 고지)를 따라 구축된 방어선이 주 저항선이자 최후 저항선이었다.[2] 또한 제7야전포병대대, 공병대, 병참보급소, 야전병원, 헌병대 등이 배속되었고, 냉정리에는 경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었다.[2]

독립 제17연대의 배치 상황
구분배치
연대본부탄지말(옹진 북쪽 2km 지점)
좌전방, 제1대대두락산~호동 간 13.5km
우전방, 제3대대호동~초동 간 17.8km
연대 예비, 제2대대탄지말에 집결 주둔
지원부대탄지말, 옹진, 냉정리에 분산 주둔



제17연대의 방어 배치는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침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국부적 분쟁에 대비하여 태탄~옹진 접근로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넓은 관점에서 보면 전술적으로 중요한 취야~강령, 양원~부포 축선의 방어 태세는 약화되어 북한군의 공격에 방어 지역이 양분될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2]

6월 24일 제17연대는 육군본부로부터 휴가 및 외출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2] 이는 2~3일 전부터 조선인민군의 공격 태세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연대장은 제3대대에 M3 곡사포 1개 중대와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를 24일부로 배속하고 예하 부대와 옹진경찰서에 출동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도록 지시했다.[2]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는 45km 길이의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이는 연대 능력보다 훨씬 넓은 범위였다. 통상적으로 1개 사단이 10km를 담당했다. 게다가 많은 높은 산들이 38도선 위에 있어 방어선을 구축하는 연대에게 큰 지리적 불리함을 주었다. 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38도선 아래의 산에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민간인을 동원했는데, 이곳이 유일하고 마지막 주요 저항선이었다. 공사 중 북한의 공격으로 민간인 5명이 사망했다. 또한 백인엽 대령은 여러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고향을 지키기 위한 민병대를 창설했다.[2]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세 가지 방어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소규모 교전 시 38도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둘째는 전투가 이 지역에 국한될 경우 증원군이 올 때까지 주요 저항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북한이 전면전을 시작하면 연대는 최대한 많은 피해를 주면서 부포 항구에서 인천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연대와 민간인은 계획 1과 2에 대한 대피 훈련을 했지만, 계획 3에 대한 훈련은 하지 않았다. 군은 군인과 공무원 가족을 우선시하고, 그다음 선박 수용 능력에 따라 민간인을 대피시켰다.[2]

전쟁 한 달 전, 조선인민군 포병 참모 작전 장교 강창남 소령과 제3 38경비 여단 연락 장교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로 귀순하여 조선인민군의 전투 명령, 위치 및 훈련 상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2]

백인엽 대령은 제3보병대대가 방어하는 지역, 즉 취야와 강령을 연결하는 도로에 집중하도록 대대 위치를 조정하여 조선인민군이 연대를 분할하는 것을 막도록 했다. 또한 그는 최근 북한의 활동이 이 지역에 추가 조선인민군 부대가 있음을 시사함에 따라 추가 병력을 요청했다.[2]

6월 20일부터 많은 조선인민군 차량과 고위 장교들이 전선에서 목격되었다. 6월 22일 밤, 해주에서 취야로 향하는 차량 행렬이 헤드라이트를 끄고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러한 모든 보고에도 불구하고, 육군 본부는 5월 말에 발령된 특별 경계령을 6월 23일 24시에 해제하고 병사들이 휴가를 가거나 기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백인엽 대령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다음 날, 5명의 유엔 옵서버가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가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라고 불평하며 "특별 경계령을 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한 후 서울로 돌아갔다. 그 결과, 백인엽 대령은 최전선 부대를 제외하고 비상 조치를 해제해야 했고, 이는 결국 방어선을 약화시켰다.[2]

제3보병대대는 해안에서 녹달산까지 연대의 우측을, 제1보병대대는 녹달산에서 두락산까지 좌측을 방어했다. 제2보병대대는 예비대로서 주로 옹진 북쪽에 위치한 옹진 광산의 연대 지휘부 근처에서 기본 및 전술 훈련을 수행했다.[2]

대한민국 육군 옹진반도 전체 병력은 제7보병연대 2,719명, 제7포병대대 526명, 대전차 중대 129명, 기타 지원 부대를 포함하여 총 3,600명이었다. 이들은 12문의 M3 곡사포, 6문의 M1 대전차포, 12문의 M1 박격포, 18문의 M2 박격포, 60문의 M9A1 로켓 발사기 및 25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했다.[2]

'''대한민국 육군'''[2]


  • 제17보병연대 - 연대장 백인엽 (사령부 옹진 광산)
  • * 제1보병대대 - 대대장 김희태 (연대 좌측, 사령부 마현)
  • ** 제1중대 - 중대장 강은덕 대위 (대대 예비, 사령부 마현)
  • ** 제2중대 - 중대장 한혁 소위 (대대 좌측, 사령부 운동)
  • ** 제3중대 - (대대 우측, 사령부 429고지)
  • ** 제4중대 - 중대장 손창술 소위 (화기 중대)
  • * 제2보병대대 - 대대장 송호림 소령 (연대 예비, 사령부 옹진 광산)
  • ** 제5중대 - 중대장 김교석 소위
  • ** 제6중대
  • ** 제7중대
  • ** 제8중대 - (화기 중대)
  • * 제3보병대대 - 대대장 오익경 소령 (연대 우측, 사령부 강령)
  • ** 제9중대 - 중대장 한홍 소위 (대대 중앙, 사령부 착산)
  • ** 제10중대 - 중대장 안제희 대위 (대대 좌측, 사령부 녹달산)
  • ** 제11중대 - 중대장 김종윤 소위 (대대 우측, 사령부 우현)
  • ** 제12중대 - 중대장 정규한 대위 (화기 중대)
  • * 제7포병대대 (배속) - 대대장 박정호 소령
  • ** 제1포대 - (연대 사령부에 배속)
  • ** 제2포대 - 중대장 서정선 소위 (토동의 제3대대에 배속)
  • ** 제3포대 - 중대장 김원길 소위 (동곡동의 제1대대에 배속)
  • * 대전차포 중대 (배속) - 중대장 노경억 대위 (3개 소대, 각 소대는 제1 및 제3대대, 연대 사령부에 배속)
  • * (1) 공병 중대 (배속) - 중대장 박준휘 소위 (연대 사령부에 배속)

5. 전투 발발과 전개 과정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은 붉은 신호탄과 함께 30분간 포격을 가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옹진반도에 배치된 대한민국 국군 제17연대는 기습 공격을 받았다.[3][2]
제1대대의 전투와 철수: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으로 국군 제1대대의 통신망이 모두 끊겼다. 제1대대는 우세한 화력의 조선인민군에게 밀려 철수했고, 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전사했다.[3][2]
제2대대의 반격과 철수: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예비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일시적으로 조선인민군을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연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사곶으로 철수했다.[3][2]
제3대대의 전투와 철수:제3대대는 조선인민군의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공격에 밀려 치마산 ~ 석계리 선으로 철수했다. 57mm 대전차포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당황했다. 제9중대는 저수지 옆에서 기습 공격으로 조선인민군을 일시 저지했으나, 결국 강령으로 분산 철수했다.[3][2]
강령 전투와 부포항 철수:국군 제17연대 본부와 직할대는 부포항으로 철수했다. 강령강 제방에 배치된 대전차포 중대는 조선인민군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했다. 제3대대는 죽교리~중기동 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하고, 공병대는 조촌교를 폭파했다.[3][2]

6월 25일 밤 11시 30분, 해군 LST-801함이 부포항에 도착하여 제17연대는 장비와 물자를 소각하거나 바다에 버리고 철수했다. 연대장은 마지막까지 남아 조선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하다가 조각배를 타고 부포항을 떠났다.[2]
사곶항 철수와 본대 합류:제2대대는 낙오병을 수습하여 사곶항으로 철수했다. 용호도 지서주임 김두의 경사의 도움으로 대성호를 지원받아 군인과 경찰을 수송하고, 민간인 수송 중 조선인민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중단했다. 제2대대는 연평도를 거쳐 6월 29일 군산항에 상륙하여 대전에서 본대와 합류했다.[2]
결과:독립 제17연대는 수원을 거쳐 대전 선화국민학교에서 재편성에 착수했다. 옹진반도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국군의 어려운 상황과 철수 과정을 보여준다.

6. 옹진지구 전투의 결과 및 영향

6월 28일 제17연대는 대전 선화초등학교에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집결해 충청남도 도청의 경호임무를 수행했고, 29일~30일에는 신병 5,000명을 모집하여 부대 재건을 시도했다. 6월 30일에는 1, 2대대의 병력이 집결하여 총 2,180명의 병력을 확보, 81%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전사자의 장비까지 수집하여 장비 부족 문제는 크지 않았다.[2]

7월 3일 한강 저지선이 무너지자, 제17연대는 신임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의 명령을 받아 1개 대대는 정부 경호를 계속하고, 나머지 부대는 7월 4일 서정리로 진출하여 저지선을 구축했다.[2]

대한민국 육군 제17보병연대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방어 진지를 강화하고, 지역 조직을 지방 방위 부대로 편성하여 군과 협력하도록 했다. 이러한 백선엽 연대장의 경계 태세 유지 결정 덕분에, 대한민국 육군은 조선인민군(KPA)의 침공 초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제17연대는 최전선에 2개 대대, 예비로 1개 대대를 운용했으며, 2개월마다 부대를 교대했다. 특히 제2대대는 소화기 및 중화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아, 이후 대한민국 육군의 반격에 기여했다.[2]

그러나 제17연대는 전체 전선을 방어하기에 병력이 부족했다. 대한민국 육군 본부는 탈북한 조선인민군 장교의 보고 등 여러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병력 부족으로 적극적인 순찰이 어려워 조선인민군이 방어선을 은밀히 돌파할 수 있었다. 망루와 통신 시스템은 조선인민군의 우선 공격 대상이 되어 전투 초기에 파괴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포병을 전선으로 이동시켜 근거리 화력 지원을 제공,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부대 간, 병참 간 통신 문제로 탄약 부족을 자주 겪었다. 통신 부족은 부대 간 협력을 방해했고, 특히 철수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초래했다. 또한 육군 본부의 지원 지연으로 많은 인명과 장비 손실이 발생했다.[2]

백선엽 연대장은 조선인민군의 전면적인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우세한 적군에 맞서 제17연대를 보존했다. 그러나 예비 대대를 너무 일찍 좌측 방어 지원에 투입하여, 조선인민군 제1보병연대가 우측 방어를 빠르게 붕괴시키고 강령으로 진격하여 대한민국 육군을 양분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2]

6월 25일, 연합 통신사(현재의 연합뉴스와는 다름) 기자 최기덕은 옹진반도에서 돌아와 국방부 홍보국장 김현수 대령에게 백선엽이 "해주로 진격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내용은 방송 중 오역되어 "해주로 진격"으로 보도되었으나, 백선엽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기덕은 공산주의 동조 및 옹호, 공공 질서 문란 혐의로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그는 이후 김 대령과 세부 사항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김 대령은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보도를 그대로 두었다.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언론은 6월 27일부터 6월 28일 사이에 "해주 함락"을 포함한 대한민국 육군의 승리에 대한 허위 보도를 내보냈다. 이러한 선전은 대한민국 육군 지휘관들의 정확한 전술 계획을 방해하여 군에 해를 끼쳤다. 또한, 이러한 허위 보도는 6월 23일부터 6월 25일 사이에 발생하지 않은 남한의 포격에 대한 북한의 주장을 강화하고, 전쟁 발발 책임을 대한민국에 돌리는 데 이용되었다.

7.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의 전력 비교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반도에서 벌어진 전투는 한국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에서 맞붙은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의 전력 차이는 상당했다.
조선인민군은 제3 38경비여단을 주축으로 총 11,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단 병력 8,000명, 배속 부대 3,000명) 또한, 이들은 М-30|M-30 곡사포ru 4문, СУ-76|SU-76M 자주포ru 5문, М1927|M1927 포ru 32문, М-42|M-42 대전차포ru 45문, ПМ-41|82-PM-41 박격포ru 95문, ПМ-43|120-PM-43 박격포ru 16문, 그리고 장갑차 8대등 다양한 종류의 화포와 장갑차로 무장하여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2]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제17독립보병연대를 중심으로 총 3,6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17보병연대 2,719명, 제7포병대대 526명, 대전차 중대 129명, 기타 지원 부대) 또한 이들은 M3 howitzer|M3 곡사포영어 12문, 6-pounder|M1 대전차포영어 6문, M1 mortar|M1 박격포영어 12문, M2 mortar|M2 박격포영어 18문, Bazooka|M9A1 로켓 발사기영어 60문, 그리고 기관총 25정을 보유하고 있었다.[2]

이러한 전력 차이는 옹진반도 전투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열세였던 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결국 옹진반도를 내주고 후퇴해야 했다.

다음은 양측의 전력을 비교한 표이다.

구분대한민국 국군조선인민군
총 병력3,600명11,000명
주력 부대제17독립보병연대제3 38경비여단
화력M3 howitzer|M3 곡사포영어 12문, 6-pounder|M1 대전차포영어 6문, M1 mortar|M1 박격포영어 12문, M2 mortar|M2 박격포영어 18문, Bazooka|M9A1 로켓 발사기영어 60문, 기관총 25정М-30|M-30 곡사포ru 4문, СУ-76|SU-76M 자주포ru 5문, М1927|M1927 포ru 32문, М-42|M-42 대전차포ru 45문, ПМ-41|82-PM-41 박격포ru 95문, ПМ-43|120-PM-43 박격포ru 16문, 장갑차 8대


8. 북한군 주요 지휘관

조선인민군 제3 38경비여단(여단장 최현):[2]


  • 제2 38경비대대
  • 제4 38경비대대
  • 제5 38경비대대
  • 제6 38경비대대
  • 제7 38경비대대(예비대)
  • 제1 보병 연대(연대장 김후진, 배속)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전쟁 옹진지구전투 326명 호국영령 넋 기렸다 http://www.kado.net/[...] 2023-09-15
[2] 웹사이트 6.25 전쟁사 2 (The History of the Korean War Book 2) https://www.imhc.mil[...]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Republic of Korea
[3] 웹사이트 옹진지구 전투 http://ki.warmemo.co[...] Korean History Information Center
[4] 웹사이트 국제신문(國際新聞) https://encykorea.ak[...] 2023-11-23
[5] 웹사이트 "해주 진격" 발언이 "해주 점령"으로 둔갑... 100만명 목숨 건 기만극 https://www.hankooki[...] 2020-07-02
[6] 웹인용 한국 전쟁 기념관 http://ki.warmemo.co[...]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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