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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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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이어》는 1982년 재즈 기획자 앤서니 우드와 저널리스트 크리시 머레이가 창간한 영국의 음악 잡지이다. 프리 재즈와 프리 즉흥 연주를 포함한 다양한 음악 장르를 다루며, 1984년 나임 아타알라에게 매각된 후 월간으로 발행 주기가 변경되었다. 리처드 쿡, 마크 싱커, 토니 헤링턴 등 여러 편집장을 거치며 재즈 외 다양한 장르로 범위를 확장했고, 2000년에는 직원들이 잡지를 인수하여 독립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와이어》는 "The Invisible Jukebox" 및 "The Primer"과 같은 특집 기사와 컴필레이션 CD 시리즈를 제공하며, 디자인과 사진, 연말 결산 호를 통해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비주류 음악에 대한 헌신과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전문성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난해하고 현학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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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 (잡지)
기본 정보
와이어 잡지 로고
로고
제목The Wire
잡지 종류음악 잡지
창간1982년 여름
창립자앤서니 우드, 크리시 머레이
발행 빈도월간
언어영어
본사 위치런던, 잉글랜드
발행인토니 헤링턴
회사The Wire Magazine Ltd. (독립 소유)
ISSN0952-0686
웹사이트thewire.co.uk
편집장
현재 편집장데릭 월름슬리
이전 편집장 타임라인
1982년 여름 – 1984년 봄앤서니 우드
1984년 여름 – 1992년 가을리처드 쿠크
1992년 가을 – 2000년 봄토니 헤링턴
2000년 봄 – 2003년 가을크리스 보먼
2003년 가을 – 2023년 가을앤 헵킨스

2. 출판 역사

《더 와이어》는 1982년 창간 이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다루며,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다. 2005년 작가 빌 마틴은 《더 와이어》를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자료"라며 "영어 잡지 중 이와 견줄 만한 잡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15]

1980년대는 영국과 미국에서 음악 저널리즘 시장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더 와이어》는 《The Face》, 《Kerrang!》, 《Maximumrocknroll》, 《Mixmag》 등과 함께 이 시기에 창간된 음악 잡지 중 하나였다. 작가 사이먼 워너는 《더 와이어》가 "독자층의 규모에 비해 과도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청취자뿐만 아니라 음악 제작자와 프로듀서도 이 잡지의 기사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당시 잡지들은 대부분 독자층을 좁혀 제품 차별화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Kerrang!》는 헤비 메탈 음악을, 《The Source》는 힙합 음악을 다루는 식이었다. 또한, 대중 시장 소비자를 위한 대중 비평과 언더그라운드 음악 애호가를 위한 지적 비평이라는 두 가지 스타일의 글쓰기가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더 와이어》는 편집자 토니 헤링턴의 말처럼 "지성주의"보다 "지능"을 선호하며, "고급" 쪽에 위치했다.

《더 와이어》는 1990년대 주요 영국 음악 잡지 중 하나였으며, 디지털 저널리즘의 부상과 인쇄 독자의 감소 이전까지 인쇄 잡지 산업의 정점을 경험했다. 그러나 《더 와이어》는 꾸준한 발행 부수를 유지하며, 다른 잡지들이 폐간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도 인쇄를 계속했다. 2000년대에는 《Fact》, 《Rock-A-Rolla》 등과 함께 음악 언더그라운드를 다루는 중요한 독립 출판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더 와이어》는 1982년 창간 이후 소유주 및 편집장의 변화와 함께 음악적 초점의 변화를 겪었다.

소유주기간
앤서니 우드1982년 – 1984년 10월
나임 아타알라
나마라 그룹
1984년 10월 – 2000년 12월
크리스 본, 토니 헤링턴, 벤 하우스, 앤 힐데 네셋, 앤디 테이트, 롭 영2000년 12월 – 현재



편집자기간
앤서니 우드1982년 – 1985년 6월
리처드 쿡1985년 7월 – 1992년 6월
마크 싱커1992년 7월 – 1994년 2월
토니 헤링턴1994년 3월 – 2000년 2월
롭 영2000년 3월 – 2004년 2월
크리스 본2004년 3월 – 2015년 2월
데릭 월슬리2015년 3월 – 현재



1999년 잡지 전단에는 "주류가 아닌" 음악을 주제로 광고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더 와이어》는 재즈에서 벗어나 다양한 현대 음악을 다루면서도 아방가르드를 우선시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1982년 창간 이후 월간 발행 부수는 약 7,000부에서 20,000부 사이를 오갔다.[1]

2. 1. 1982년: 재즈 잡지로 창간

''The Wire''는 1982년 여름, 분기별 재즈 잡지로 처음 발간되었다. 이 잡지는 재즈 기획자 앤서니 우드와 저널리스트 크리시 머레이가 공동 창립했다.[1] 우드와 머레이는 사무실 공간이 없어 세인트 마틴 레인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잡지의 첫 번째 호를 준비했다.[2] 이들은 크네브워스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과 캠던 재즈 페스티벌에서 콘서트 관람객들에게 첫 번째 호를 판매했다.[1][2]

당시 독일은 유럽, 특히 유럽 프리 재즈의 문화 중심지로 여겨졌다.[3] 영국보다 독일에서 재즈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 더 높았고, 영국 재즈 씬이 실제로는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전용 언론 보도가 있었다.[3] 우드는 잡지의 편집 정책과 범위를 설명하는 소개 기사에서, ''The Wire''가 당시 영국 재즈 관련 글쓰기에 제대로 서비스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25세 미만의 청취자들을 목표로 삼을 의도였다고 썼다.[4] 당시 인쇄된 유일한 다른 영국 재즈 잡지는 ''재즈 저널''이었는데, 우드는 이 잡지가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Jazz Journal''의 존경받는 신사들은, 기껏해야 재즈가 1948년을 넘어섰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하고, 최악의 경우 현재 발전을 부정합니다."[4] 게다가 우드는 영국의 주간 잡지 ''멜로디 메이커''가 1982년까지 재즈 보도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언급했다.[4]

''The Wire''는 경계를 넓히는 음악가들을 강조할 것이며, 우드는 처음부터 프리 재즈와 프리 즉흥 연주가 "음악의 타당성을 여전히 의심하는 반대자들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수 있도록 충분히 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선언했다.[4] 이 잡지는 미국 재즈 색소폰 연주자 스티브 레이시의 곡 "The Wire"에서 이름을 따왔다. 잡지는 그가 보여준 "음악적 선견지명"을 따라 하기를 희망했다.[4] 20년 후, 레이시의 곡은 박스 세트 ''The Wire 20 Years 1982–2002''의 오프닝 트랙으로 사용되었다.[5]

2. 2. 1983-84: 나마라 그룹 인수

나임 아타알라의 나마라 그룹이 1984년에 《더 와이어》를 인수하면서 나마라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나마라 그룹에는 《리터러리 리뷰》와 쿼텟 북스도 포함되어 있었다.[3] 새로운 소유주와 함께 1984년 10월호부터 발행 주기를 분기별에서 월간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토니 헤링턴은 나마라 그룹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타알라의 '자유 방임'적인 태도와 잡지의 편집상의 자유는 1980년대 영국의 다른 음악 잡지들의 상황과 대조를 이루었다. ''NME'', ''멜로디 메이커'', ''사운즈''와 같은 주간지들 사이의 경쟁은 1980년대에 심화되었고, 이러한 간행물들은 발행 부수, 광고 및 상업적 매력을 우선시하기 시작하여 편집상의 제약을 초래했다. ''와이어 (잡지)''는 작가들에게 상당한 편집상의 요구 사항이나 스타일 수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따라서 프리랜서들에게 매력적인 간행물이 되었는데, 이들은 포스트 펑크 시대에 영국의 주간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2. 3. 1985-1992: 재즈 외 장르로 확장

NME 직원이었던 리처드 쿡이 1985년 7월 편집장으로 취임하면서, ''The Wire''는 재즈 외의 다양한 장르를 다루기 시작했다. 1987년 "블랙 먼데이" 시장 붕괴 때까지 영국 백인 힙스터들 사이에서 재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고, 이러한 변화는 잡지에도 반영되었다. 쿡은 잡지를 새롭게 단장하여 새로운 영국 재즈 힙스터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지만, 동시에 더욱 다원적이고 다장르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철학적이고 지적인 경향의 하우스 스타일을 개발하여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자크 아탈리의 ''소음''과 같은 철학적인 내용도 다루었다.

쿡의 지휘 아래 ''The Wire''는 마이클 잭슨, 프린스, 필립 글래스, 존 리 후커, 밴 모리슨 등 비재즈 아티스트들을 표지에 등장시켰다.[8] 또한, 엘비스 코스텔로, 스트라빈스키, 모차르트, 프랭크 자파, 프로코피예프, 밥 말리, 하이든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기사를 다루었다.[8]

쿡은 1991년 재즈 포럼에서 ''The Wire''가 국내 및 국제 판매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월간 발행 부수를 15,000~20,000부로 추산하며, 25,000부까지 도달하기를 희망했다.[8]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잡지 발행인이었던 크리스 파커는 이러한 변화가 판매에 "눈에 띄는" 증가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젊은 힙스터 독자를 모집할 때마다, 하워드 라일리나 스탠 트레이시가 또 다른 앨범을 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지 알고 싶어하는 열렬한 재즈 팬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판매 부수에 미친 영향과는 별개로, 쿡의 동료들은 그가 ''The Wire''를 더 접근하기 쉬운 간행물로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브라이언 모튼은 쿡의 편집 아래 ''The Wire''가 "소규모 동인 잡지에서 주류 재즈는 물론 아방가르드까지 다루는 보다 광범위한 음악 저널로 진화했지만, 팝 음악, 소울 음악, 레게, 클래식 음악과 같은 다른 음악 분야로도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의 재즈 평론가 존 포드햄은 쿡이 ''The Wire''의 내용과 디자인을 변형시켜 더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2. 4. 1992-1994: 마크 싱커 편집장 시절

Close-up of a man with medium-length hair, glasses and a short goatee
마크 싱커(2014년 사진)는 《와이어 (잡지)》의 편집장으로 짧지만 논란이 많은 재임 기간을 거쳤다. 그는 해고되었지만, 그의 편집장 시절은 회고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92년 6월, 쿡은 폴리그램 UK로 자리를 옮기면서 마크 싱커가 그 뒤를 이었다.[1] 쿡의 퇴사는 잡지 창간 100호와 겹쳤는데, 이는 싱커에게는 예고 없는 사건이었다.[2] 싱커는 18개월 동안 편집장으로 재임했지만 과감한 편집 방식을 취했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 동안, 표지에 음악가들의 초상화가 실리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신 소파나 장난감 로봇과 같은 고립된 물체의 추상적인 사진이 자주 사용되었다.[3] 싱커는 "음악과 검열", "신체적 욕망의 영역에서의 음악", "음악과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광범위한 주제에 특집호를 할애했으며, 이러한 주제에 대한 다수의 논쟁적인 에세이를 의뢰했다.[2] 회고적으로 그는 자신의 편집장으로서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Money lost? Threats of closure? Ignore all that. Old (as in, I just made 'em up) punk rules of thumb: contradiction is *where it's at*: don't hide it, flaunt it. NO FUTURE NO FUTURE NO FUTURE: treat every issue as the last, throw everything you've got at the material. I wanted (he wrote, looking back a decade later) a journal that would entertain, taunt, tease, fascinate, excite, wound, puzzle, *fuck with*, alert, amused readers. A space for a speculative, playful, malicious, fearless imagination, which would leave a shadow of questioning in the mind when it vanished (as we all assumed it would).|돈을 잃고 있다고? 폐쇄 위협을 받고 있다고? 그런 건 다 무시해. 오래된 펑크 룰 오브 썸(방금 만들어낸 규칙): 모순이 바로 핵심이야. 그걸 감추지 말고 드러내. NO FUTURE NO FUTURE NO FUTURE: 모든 호를 마지막 호인 것처럼 취급하고, 가진 자료로 모든 걸 쏟아부어. 나는 (그는 10년 후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독자를 즐겁게 하고, 조롱하고, 놀리고, 매료시키고, 흥분시키고, 상처 입히고, 당황하게 하고, 엿 먹이는, 경계심 있고, 재미있는 저널을 원했어. 사라질 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 마음속에 질문하는 그림자를 남기는, 사변적이고 장난스럽고 악의적이며 두려움 없는 상상력을 위한 공간을 말이야.영어

싱커의 비전은 나중에 "가시 돋치고, 기묘하며, 팬진 겸 블로그와 같은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당시 발행인 아델 야론의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도시 음악과 라이프스타일 월간지"라는 이상과 충돌했다.[4] 잠재적인 구매자가 싱커의 해임을 요구했고, 싱커의 표현에 따르면 거래의 "신부 값"의 일부가 되면서 야론은 싱커를 해고했다.[2]

싱커의 편집장 시절은 짧고 논란이 많았지만, 음악 평론가들은 회고적으로 그의 편집 결정을 칭찬하며 잡지의 미래 방향에 미친 그의 영향을 강조했다. 프랑스 작가 겸 음악가인 루빈 스타이너는 1993년 8월 비요크를 표지로 한 호를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하며, 이후 《와이어 (잡지)》가 더 이상 재즈 잡지로 간주될 수 없게 될, 커버리지의 끊임없는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여겼다.[5]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매거티 램은 싱커의 재임 기간을 "선구적"이라고 칭하며, 잡지가 "번성하는 제도적 존재"가 되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고 말했다.[6] 피치포크(Pitchfork)에서 톰 유잉은 싱커가 의뢰한 논쟁적인 기사가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거나 몰아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고, 둘 다를 달성했지만, 사람들이 '논쟁을 시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편안한 공간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3]

2. 5. 1994-1999: "Adventures in Modern Music"

토니 헤링턴은 싱커가 해고된 후 1994년 3월부터 편집장으로 취임했다.[5] 헤링턴은 1980년대부터 잡지에 프리랜서로 기고했지만 편집 경험은 거의 없었고, 그 전 해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야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떠났고, 헤링턴은 발행인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6] 1995년 1월, 잡지는 "Adventures in Modern Music"이라는 새로운 부제를 채택하여 2012년까지 사용했다.

1990년대, 오랜 기간 기고자인 사이먼 레이놀즈 (''2011년 사진'')는 "포스트록" 장르를 만들었고, 그가 "하드코어 컨티뉴엄"이라고 칭한 레이브의 다양한 발전에 대한 영향력 있는 에세이를 썼다.


헤링턴이 편집장이 된 지 두 달 후, 잡지는 사이먼 레이놀즈가 "포스트록" 장르의 경계를 정의하는 영향력 있는 기사를 게재했다.[5] 이 장르와 관련된 아티스트들은 1990년대 중후반 일렉트로니카, 일비언트, 글리치와 같은 새로운 하위 장르와 함께 잡지의 초점이 되었다. 10년 동안 레이놀즈는 레이브 이후의 영국 댄스 음악 트렌드에 대한 일련의 에세이를 기고했으며, 정글, 드럼 'n' 베이스, 하드스텝, 뉴로펑크, 2-스텝 개러지를 다루었다. 이 에세이들은 미국에서 시작된 하우스테크노에서 갈라져 뚜렷한 영국 스타일이 된 다양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전자 댄스 음악의 전통인 "하드코어 컨티뉴엄"에 대한 그의 이론으로 절정에 달했다.[6]

잡지는 1997년 10월에 웹사이트 thewire.co.uk를 개설했다. 1999년까지 잡지는 월간 발행 부수가 약 20,000부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2. 6. 2000-현재: 직원 인수 및 독립 운영

2000년 3월 롭 영이 편집장이 되었다. 그해 늦여름, 잡지 직원들은 남마라 그룹으로부터 잡지를 매입했다. 헤링턴은 나임 아타알라가 은퇴를 준비하고 잡지를 팔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직접 매입을 제안했다. 아타알라는 "당신에게 얼마나 지급하는지 알고 있는데, 당신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7] 헤링턴은 동료 직원들과 상의하고, 대출을 확보하여 약 6개월 동안 아타알라와 협상했다.[8] 헤링턴, 영, 크리스 본, 벤 하우스, 앤 힐데 네세트, 앤디 테이트 등 6명의 정규 직원은 2000년 12월 21일에 회사를 매입했고, 2001년 2월호에 판매를 발표했다.[9] 이후 잡지는 독립적으로 발행되고 있다.

2002년, 잡지는 특별호와 책 ''Undercurrents: The Hidden Wiring of Modern Music'' 출판, 3CD 박스 세트 ''The Wire 20 Years 1982–2002'' 발매를 통해 창간 20주년을 기념했다.

2000년대에 ''와이어 (잡지)''는 덥스텝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2000년대에 여러 음악 장르가 ''와이어 (잡지)'' 지면에서 처음 만들어지거나 정의되었는데, 2001년 필립 셔번에 의해 마이크로하우스가, 2003년 데이비드 키난에 의해 뉴 위어드 아메리카가, 2009년 키난에 의해 최면 팝이 만들어졌다.[7][8][9]

2007년, ''와이어 (잡지)''는 호당 약 17,500부 판매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잡지의 월 발행 부수는 20,000부였으며, 구독자는 9,000명이었다. 2013년, 잡지는 당시 25,000페이지에 달하는 전체 아카이브를 Exact Editions 사이트를 통해 구독자에게 제공했다.

3. 내용

The Wire영어는 다양한 아방가르드 및 실험 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월간 잡지이다. 1999년 잡지 구독 전단에는 "주류가 아닌" 음악을 주제로 광고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The Wire''는 재즈에 대한 독점적인 보도에서 전반적인 현대 음악으로 전환하면서 아방가르드를 우선시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1982년 창간 이후 월간 발행 부수는 약 7,000부에서 약 20,000부 사이를 기록했다.[1]

미국과 영국 음악 저널리즘 시장에서 ''The Wire''는 1980년대에 창간된 음악 잡지 세대 중 하나였다. 작가 사이먼 워너에 따르면, ''The Wire''는 "독자층의 규모에 비해 과도한 영향력"을 가졌는데, "청취자뿐만 아니라 음악 제작자와 프로듀서도 이 잡지의 기사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The Wire''는 인구 통계 및 취향을 기반으로 독자층을 좁혀 제품 차별화를 꾀했다. 편집자 토니 헤링턴은 잡지가 "지성주의"보다 "지능"을 선호한다고 언급하며, ''The Wire''가 고급 문화 쪽에 위치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록 저널리스트의 글을 싣기 시작한 정치 및 문화 잡지인 ''New Statesman''과 포스트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이먼 레이놀즈와 같은 학문적 성향의 새로운 작가 그룹을 고용한 ''Melody Maker''와 유사한 접근 방식이었다.

''The Wire''는 1990년대 주요 영국 음악 잡지 중 하나였으며, 이 시기는 디지털 저널리즘의 부상과 인쇄 독자의 전반적인 감소가 나타나기 전 인쇄 잡지 산업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The Wire''는 꾸준한 발행 부수를 유지했으며, 다른 잡지들이 폐간되거나 온라인 전용으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쇄되었다. ''The Wire''는 ''Fact'', ''Rock-A-Rolla'', ''Dusted'' 및 수많은 블로그와 함께 2000년대 음악 언더그라운드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독립 출판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1998년부터 잡지와 함께 배포되는 일련의 새로운 음악 컴필레이션 CD 시리즈를 ''The Wire Tapper''라고 한다. 이 잡지는 1994년부터 "Adventures in Modern Music"이라는 문구를 사용해 왔으며, 2011년 "Adventures In Sound And Music"으로 변경되었다. ''Wire Tapper'' CD 외에도 구독자들은 레이블, 국가 및 페스티벌 샘플러를 받는다.

매달 수많은 앨범 리뷰 외에도, 이 잡지는 아티스트에게 알려지지 않은 트랙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인 "The Invisible Jukebox"와 장르 또는 아티스트에 대한 심층적인 기사인 "The Primer"과 같은 특집 기사를 제공한다. 또한 매 호마다 특정 도시의 아방가르드 음악 현장을 소개한다. 음악적 초점 외에도, 이 잡지는 커버 아트와 혼합 매체 예술 작품을 다룬다.

2003년 1월부터 ''The Wire''는 런던 커뮤니티 라디오 방송국 Resonance FM에서 매주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잡지의 문구를 제목으로 사용하고 ''The Wire''의 구성원들이 교대로 진행한다.

''The Wire''는 2017년 6월에 400번째 호를 기념했다.[13]

3. 1. 디자인 및 사진

《와이어》는 전속 사진작가를 고용하지 않고, 모든 사진을 프리랜서에게 의뢰하거나 뮤지션과 음반사에 자체 홍보 사진을 제공하도록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잡지에는 나이젤 셰프란, 토드 히도, 톰 헌터, 피터 휴고, 알렉 소스, 클레어 쉴랜드, 레온 추, 제이크 월터스, 후안 디에고 발레라, 마이클 슈멜링, 마크 펙메지안, 호마 타카시와 같은 사진 작가들의 작품이 게재되었다.[1]

《와이어》의 첫 번째 아트 디렉터는 테리 콜먼이었다.[2] 1986년 1월, 폴 엘리먼이 아트 디렉터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해 7월, 그는 2001년까지 잡지가 변형하여 계속 사용할 세리프 서체 로고를 처음 선보였다.[2] 1988년 7월, 루시 워드가 엘리먼의 뒤를 이어 아트 디렉터가 되었고 더 폭넓은 글꼴을 도입했다.[2] 엘리먼과 워드는 모두 《와이어》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추구하며 단순한 타이포그래피, 흑백 사진, 넉넉한 여백을 선호했다.[3]

엘리먼과 워드의 1980년대 후반 《와이어》 작업은 그래픽 디자인 분야 동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뉴욕》, 《더 빌리지 보이스》와 같은 잡지의 전 디자인 디렉터였던 로버트 뉴먼은 《와이어》의 미니멀한 디자인이 영국과 미국의 잡지 디자인에서 나타난 1980년대 후반의 화려한 트렌드와 대조를 이룬다고 말했다.[3] 뉴먼은 엘리먼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더 빌리지 보이스》 레이아웃에 스타일리시한 요소를 차용했다고 밝혔다. 뉴먼은 엘리먼과 워드가 "그 시대(또는 다른 시대)의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잡지 표지 중 일부를 제작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눈에 띄게 현대적인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3] 분기별 디자인 잡지 《아이》의 편집자이자 소유주인 존 L. 월터스는 그들의 디자인이 당시 다른 전문 잡지들처럼 "직접 만든 것 같거나 학술 논문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 잡지가 "음악가들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그들의 디자인은 스타든, 회색빛 베테랑이든, 젊은 신인이든 상관없이 그들을 돋보이게 했다"고 덧붙였다.[4] 존 오라일리는 엘리먼의 《와이어》 작업을 "1980년대 가장 흥미롭고 활기찬 작품" 중 하나로 꼽았으며, 이 작품이 네빌 브로디의 당시 작품과 4AD 레코드 레이블을 위한 본 올리버의 디자인과 "어떤 종류의 우울함"을 공유한다고 말했다.[5]

2001년, 《와이어》 옆 사무실에서 일하던 디자인 팀인 Non-Format의 크제르 에크혼과 존 포르스가 주요 재설계를 완료했다. 에크혼과 포르스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잡지의 아트 디렉터였다.[6] 이전에 그들의 음악 패키지 디자인 작업을 알고 있던 헤링턴은 잡지 재설계를 위해 이 팀에 접근했다.[7] 이들은 현재 잡지의 로고를 디자인하는 것 외에도 2005년까지 잡지의 각 호를 디자인했다. 잡지의 전반적인 깔끔하고 모던한 미학을 유지하면서, 기능 디자인에 매우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부 사항을 통합했다.[8] 처음에 에크혼과 포르스는 특징을 위해 표준화된 템플릿에 의존하는 대신 거의 모든 호에 맞춤형 레이아웃과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많은 작업이 필요했고, 결국 한 번에 여러 달에 걸쳐 단일 스타일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9] 그들의 타이포그래피 작업은 종종 굽이치고 분기하는 컬리큐와 얽힌 삽화 요소를 포함하는 기본 글꼴에 정교한 변형을 추가했다. 카렌 소토산티는 그들의 전형적인 디자인 작업을 "별이나 꽃으로 만들어져 부정적인 공간으로 폭발하는 유형[과] 나무 가지나 새의 이미지와 병합된 유형"으로 묘사했다.[10]

데이비드 주리는 Non-Format의 디자인을 칭찬하며, 잡지가 "실험적인 헤드라인 글꼴, 여백 및 뛰어난 사진을 창의적으로 사용하여 자체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적었다.[11] Non-Format의 표지 디자인 중 주목할 만한 예로는 2004년 7월 호가 있는데, 알빈 루시어 작곡가를 콘서트에서 전극으로 기록한 신경 진동을 사용하여 묘사했다. 또한 2004년 12월 호 "In Praise of the Riff"는 표면에 반복적인 검은 선을 배치하고 로고를 페이지 절반 밖으로 오른쪽 하단으로 밀어냈다.[9] 2011년 《컴플렉스》는 MF 둠이 등장하는 2005년 3월 Non-Format 표지를 50대 힙합 잡지 표지 중 하나로 선정했다.[12]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와이어》가 사용한 다양한 로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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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잡지는 현재의 산세리프 로고를 사용했다.

3. 2. ''The Wire'' Rewind

1986년부터 매년 1월, ''와이어''는 평론가 투표를 포함한 연말 결산 호를 발행해 왔다.[13] 기고자들이 제출한 투표 용지를 모아 그 해 최고의 앨범 목록을 작성한다. 원래 이 설문 조사는 그 해 최고의 재즈 LP만 선정했다. 1992년에는 주요 설문 조사가 모든 음악 장르의 앨범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고, 2011년에는 "앨범"뿐만 아니라 모든 형식이나 매체의 릴리스를 받기 시작했다. 주요 전 장르 목록 외에도, 일반적으로 선택된 장르 내에서 최고의 릴리스를 담은 짧은 목록도 있다. 이 연말 결산 호는 1997년부터 Rewind라고 불린다.

''와이어''의 평론가 투표는 잡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파격적이고 절충적인 선택으로 명성을 얻었다.[13]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매거티 램은 2007년에 ''와이어''가 "Kiss the Anus of the Black Cat이라는 앙상블이 '올해 가장 흥미로운 레코드 중 하나'를 만들었다고 선정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연례 베스트 목록"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2011년 제임스 페라로의 베이퍼웨이브 앨범 ''Far Side Virtual''을 올해의 릴리스로 선정했을 때, 시애틀 위클리의 에릭 그랜디는 "고의적으로 난해주의적인 영국의 잡지 ''와이어''의 2011년 베스트 목록이 제임스 페라로의 윈도우 '97 소프트 록 헬스케이프 ... 비치 보이스의 ''Smile Sessions''부터 로렐 할로와 Hype Williams까지 다양하게 1위를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4. 평가

《더 와이어》는 수년 동안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모두 받았다. 긍정적인 평가는 주로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전문성과 비주류 음악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다. 2005년 작가 빌 마틴은 《더 와이어》를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자료"라고 묘사하며 "영어 잡지 중에 이와 견줄 만한 잡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15] 2017년, 《노이지》의 조쉬 베인스는 이 잡지가 "다른 대부분의 간행물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모든 가능한 각도에서 소리와 음악을 자세히 조사"한다고 칭찬했다. 같은 해, 디자이너 애드리안 쇼네시는 《와이어》와 영국 영화 잡지 《사이트 & 사운드》를 "놓칠 수 없는" 유일한 잡지 두 개로 꼽았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난해하고 현학적이라는 비판이다. 1993년,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게일 브레넌은 《더 와이어》가 "놀라운 범위의 음악을 다루면서 좁고 부자연스러운 '펑크' 태도를 보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허세 부리는 잡지다"라고 평했다. 1999년에는 익명의 (Zine)인 "더 록 크리티컬 리스트"에서 《더 와이어》를 조롱하며, "방어적으로 거만하고, 유머 감각 없이 꽉 막히고, 기뻐하는 교사 같은 어구"라고 비판했다.

벤 왓슨은 잡지가 노이즈 음악을 다루는 편집 방식을 비판하며, 잡지가 노이즈 음악가들의 작품을 "매우 가치 있고, 대안적이며, 기업적이지 않다"고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왓슨은 잡지가 장르의 급진적인 정치적 차원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지하 유행의 피상적인 트렌드를 기반으로 노이즈 보도를 큐레이션해 왔다고 주장했다.

2007년 인터뷰에서 편집장 토니 헤링턴은 잡지가 "고장난 팩스 기계 위로 증기 롤러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는 음악에 대해 숙고하는 잡지의 명성에 대해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5. 출판물

와이어》에 게재된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1998년 쿼텟 북스에서 출판된 ''Invisible Jukebox''는 같은 이름의 정기적인 특집 기사를 모아 엮은 것이다. 이 특집에서는 인터뷰어가 음악가에게 여러 곡의 음악을 들려주면서 곡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일반적으로 음악가가 알고 있을 만한 곡들을 선정했다. 음악가는 아티스트와 제목을 맞추고 음악에 대해 논평해야 했다.[1] 2002년 컨티넘에서 잡지 창간 2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Undercurrents: The Hidden Wiring of Modern Music''는 현대 음악사에서 중요하지만 간과된 발전에 대한 새롭게 집필된 에세이와 이전에 게재되었던 에세이를 섞어 엮었다.[2] 베르소에서 출판된 ''The Wire Primers''(2009)는 다양한 장르와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19편의 에세이를 모았다.[3] ''Savage Pencil Presents Trip or Squeek's Big Amplifier''(2012)는 이전 12년간의 새비지 펜슬 만화를 모았다.[4] 가장 최근에는 ''Epiphanies: Life-changing Encounters With Music''(2015)가 작가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음악적 경험에 대한 정기적인 게스트 칼럼의 에세이를 엮었다.[5]

참조

[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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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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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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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문
[4] 논문
[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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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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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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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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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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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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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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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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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논문
[1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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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Avant Rock: Experimental Music from the Beatles to Björk https://archive.org/[...] Carus Publishing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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