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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마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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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마 겐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데뷔하여 2005년까지 활약하며, 1999년 일본 시리즈 우승, 2003년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 2006년에는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에 진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2009년에는 일본 대표팀으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에 기여했고, 2010년 한신 타이거스로 복귀하여 센트럴 리그 포수 최다 안타 기록을 세우고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2012년 은퇴 후에는 낚시 관련 방송 등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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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마 겐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신 타이거스 시절의 조지마 겐지 (2010년 5월 25일 한신 고시엔 구장)
한신 타이거스 선수 시절 (2010년 5월 25일 한신 고시엔 구장)
이름조지마 겐지
일본어 표기城島 健司 (Jōjima Kenji)
출생일1976년 6월 8일
출생지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시 아이노우라 지역
신장182cm
체중89kg
포지션포수, 1루수
투구/타석우투우타
선수 경력
NPB 드래프트1994년 드래프트 1위
NPB 데뷔1995년 5월 31일
MLB 데뷔2006년 4월 3일
NPB 마지막 경기2012년 5월 9일
MLB 마지막 경기2009년 10월 3일
소속 팀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95-2005)
시애틀 매리너스 (2006-2009)
한신 타이거스 (2010-2012)
국가대표
대표팀일본
올림픽2004년 하계 올림픽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수상 내역
NPB 올스타10회 (1997-2005, 2010)
일본 시리즈 우승2회 (1999, 2003)
퍼시픽 리그 MVP2003년
미쓰이 골든 글러브7회 (1999-2005)
베스트 나인6회 (1999-2001, 2003-2005)
올림픽 메달
아테네 올림픽2004 아테네 야구 동메달
WBC 메달
WBC2009 로스앤젤레스 금메달
NPB 통산 기록
타율0.296
홈런244
타점808
MLB 통산 기록
타율0.268
홈런48
타점198

2. 프로 입단 전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태어나 4살 때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은퇴 경기에서 인사하는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지켜보면서 프로 야구 선수를 동경하게 되었다.[7] 초등학교 4학년 때 소년 야구팀에서 포수를 맡았고, 중학교 3학년 때 프로 야구 OB에 의한 야구 교실에서 오 사다하루로부터 칭찬받은 후 농담삼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권유를 받을 정도로 요미우리에 대한 기분이 높아졌다. 벳푸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강한 어깨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아 포수로 지명되면서 “자신은 포수로 뛰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여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했고, 고교 통산 70홈런을 기록했다.[7]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 진출한 적은 없었지만 조지마의 활약상이 야구계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조지마는 요미우리에 들어가는 것을 내다보면서 도토 대학 야구 연맹에서 힘을 기르겠다고 판단했고, 고마자와 대학의 추천 입학이 정해졌다. 그리고 프로팀에 입단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스카우트가 두 번째를 만나러 갔을 때에는 결국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8] 그러나 이 무렵에 조지마가 프로 입단을 희망하면서 요미우리를 비롯한 세이부 라이온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의 3개 구단을 지망하고 있었지만 역지명을 할 수 없는 고교생이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이 아닌 프로 입단이라고 생각한 다이에의 네모토 리쿠오는 1994년 드래프트 회의 전날에 1순위로 지명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9] 아마추어 야구계와의 마찰을 두려워한 커미셔너 사무국이 경고를 주었지만, 당시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인재라고 불렸던 오노 히토시만이 아마추어 동결 선수가 되고 조지마가 누락되면서 지명이 가능하게 되었고, 다이에는 그 선언대로 1순위 지명을 했다.

조지마는 요미우리의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오 사다하루가 다이에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 후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의 요청에 의해 다이에의 입단을 결정했다.[10] 이 일을 계기로 프로 입단을 거부한 선수에게 지명할 수 없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11]

2. 1. 유소년 시절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태어나 4살 때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은퇴 경기에서 인사하는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지켜보면서 프로 야구 선수를 동경하게 되었다.[7] 초등학교 4학년 때 소년 야구팀에서 포수를 맡았고, 중학교 3학년 때 프로 야구 OB에 의한 야구 교실에서 오 사다하루로부터 칭찬받은 후 농담삼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권유를 받을 정도로 요미우리에 대한 기분이 높아졌다. 벳푸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강한 어깨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아 포수로 지명되면서 “자신은 포수로 뛰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여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했고, 고교 통산 70홈런을 기록했다.[7]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 진출한 적은 없었지만 조지마의 활약상이 야구계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조지마는 요미우리에 들어가는 것을 내다보면서 도토 대학 야구 연맹에서 힘을 기르겠다고 판단했고, 고마자와 대학의 추천 입학이 정해졌다. 그리고 프로팀에 입단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스카우트가 두 번째를 만나러 갔을 때에는 결국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8] 그러나 이 무렵에 조지마가 프로 입단을 희망하면서 요미우리를 비롯한 세이부 라이온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의 3개 구단을 지망하고 있었지만 역지명을 할 수 없는 고교생이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이 아닌 프로 입단이라고 생각한 다이에의 네모토 리쿠오는 1994년 드래프트 회의 전날에 1순위로 지명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9] 아마추어 야구계와의 마찰을 두려워한 커미셔너 사무국이 경고를 주었지만, 당시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인재라고 불렸던 오노 히토시만이 아마추어 동결 선수가 되고 조지마가 누락되면서 지명이 가능하게 되었고, 다이에는 그 선언대로 1순위 지명을 했다.

조지마는 요미우리의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오 사다하루가 다이에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 후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의 요청에 의해 다이에의 입단을 결정했다.[10] 이 일을 계기로 프로 입단을 거부한 선수에게 지명할 수 없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11]

2. 2. 고등학교 시절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태어난 조지마 겐지는 4살 때 오 사다하루가 은퇴 경기에서 인사하는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보면서 프로 야구 선수를 동경하게 되었다.[7] 초등학교 4학년 때 소년 야구팀에서 포수를 맡았고, 중학교 3학년 때 프로 야구 OB에 의한 야구 교실에서 오 사다하루에게 칭찬을 받고 농담 섞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권유를 받으면서 요미우리에 대한 동경이 커졌다.[7]

벳푸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 포수로 지명되었다. "나는 포수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 고교 통산 70홈런을 기록했다.[7] 1993년 가을 큐슈 대회에 진출했지만 1회전에서 가고시마 상업 고등학교에 패했고, 1994년 여름에도 현 예선에서 패하며 고시엔 대회 진출은 이루지 못했다.

조지마는 요미우리 입단을 목표로 도토 대학 야구 연맹에서 실력을 키우고자 고마자와 대학에 추천 입학이 정해졌고, 프로팀 입단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8] 그러나 이전에는 프로 입단을 희망하며 요미우리를 비롯한 세이부, 다이에 3개 구단을 지망하고 있었다.[9] 1994년 드래프트 회의 전날, 다이에의 네모토 리쿠오는 1순위 지명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9] 아마추어 야구계와의 마찰을 우려한 커미셔너 사무국이 경고했지만, 다이에는 선언대로 1순위 지명을 강행했다. 조지마는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했지만, 오 사다하루가 다이에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의 요청에 의해 다이에 입단을 결정했다.[10] 이 사건을 계기로 프로 입단을 거부한 선수에게 지명할 수 없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11]

2. 3. 대학 진학 번복과 다이에 호크스 입단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태어난 조지마 겐지는 4살 때 오 사다하루가 은퇴 경기에서 인사하는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보면서 프로 야구 선수를 동경하게 되었다.[7] 어린 시절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강한 애정을 품고 성장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소년 야구팀에서 포수를 맡았고, 중학교 3학년 때 프로 야구 OB가 개최한 야구 교실에서 오 사다하루에게 칭찬을 받고 농담 섞인 요미우리 입단 권유를 받으면서 요미우리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졌다.[7]

베푸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 포수로 지명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포수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없었던, 치고 지키고 달리는 포수"를 목표로 굳게 결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하며 고교 통산 70홈런을 기록했다.[7] 비록 고시엔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조지마의 활약은 야구계에 널리 알려졌다.

조지마는 요미우리 입단을 목표로 도토 대학 야구 연맹에서 실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고마자와 대학의 추천 입학을 받아 프로 입단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8] 그러나, 조지마는 내심 프로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고, 요미우리를 비롯한 세이부 라이온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3개 구단을 지망하고 있었다. 1994년도 드래프트 회의 전날, 다이에의 네모토 리쿠오는 조지마가 대학 진학이 아닌 프로 입단을 희망한다고 판단하여 1순위 지명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9] 아마추어 야구계와의 마찰을 우려한 커미셔너 사무국이 경고했지만, 다이에는 예정대로 조지마를 1순위로 지명했다.

당시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인재라고 불렸던 오노 히토시만이 아마추어 동결 선수가 되고 조지마가 누락되면서 지명이 가능하게 되었다.[9] 조지마는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했지만, 평소 동경하던 오 사다하루가 다이에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의 직접적인 설득에 의해 다이에 입단을 결심하게 되었다.[9] 이 사건을 계기로 프로 입단을 거부한 선수에게는 지명할 수 없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10] 결과적으로 선수를 빼앗긴 고마자와 대학 관계자는 "앞으로 다이에에 우리 학교 선수는 입단시키지 않겠다"며 격노했다고 한다.[11]

3.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

1999년 4월 30일, 조지마의 다이에이 입단에 큰 영향을 준 네모토 구단 사장이 사망하자, 조지마는 네모토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각오로 시즌에 임했다. 처음으로 전 경기 출전을 달성했고, 팀내 유일하게 3할 대 타율(.306, 리그 3위)을 기록하며 다이에 구단 최초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리그 우승이 결정된 순간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해 최우수 배터리 상을 수상했지만, 회견에서 구도는 조지마에게 "아직 멀었다"고 일축했고, 조지마는 "내년에도 쿠도 씨와 이 상을 탈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래도 쿠도 씨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내년에는 다른 사람과 받고 싶다"고 대답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고 퍼시픽 리그 챔피언십을 차지하면서 처음으로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그는 타율 0.306에 33개의 2루타와 17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치로 스즈키와 마쓰이 가즈오에 이어 리그 3위에 해당하는 타율이었다. 그는 2루타 부문에서 3위를 차지했고, 첫 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3. 1. 1995년 ~ 1996년: 프로 데뷔와 2군 시절

입단 초 조지마 겐지는 타격에서는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포수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혹평을 받았다.[12] 당시 배터리 코치였던 다쓰카와 미쓰오를 포함하여 노무라 가쓰야, 모리 마사아키 등 포수 출신 선수들은 "포수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13] 한때 오 사다하루 감독도 1루수로 전향시킬 의향을 밝혔고, 실제로 1군 정규 경기에서 1루와 2루 수비를 보기도 했다.

1995년, 코칭 스태프의 방침에 따라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5월 31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후쿠오카 돔)에서 대타로 프로 첫 출전을 기록했다. 7월 9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프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고, 7월 14일 오릭스전(후쿠오카 돔)에서는 8번, 포수로 첫 선발 출전했다. 그러나 그 해 2군 웨스턴 리그에서 1개의 홈런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프로 2년 차인 1996년에는 개막부터 2군에서 육성되었고, 8월 24일에 2군에서의 신기록인 2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9월 3일 1군으로 복귀하여 남은 경기에서 거의 전 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9월 10일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전(후쿠오카 돔)에서는 구보 야스오를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오프에는 요시타케 신타로 등과 함께 윈터 리그에 파견되었다.

3. 2. 1997년 ~ 1999년: 주전 포수 도약과 리그 우승

1997년에는 1군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어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고, 같은 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역대 최연소인 21세에 포수 부문 1위로 선정되었다.[14] 그 해 타율 3할 8리(프로 야구 역대 포수 최연소 3할 타율),[14] 15홈런, 68타점을 기록했다. 구도 기미야스, 다케다 가즈히로 등 베테랑 투수와 배터리 코치 와카나 요시하루, 지바 롯데에서 이적해 온 다무라 후지오 등의 가르침으로 팀의 주전 포수가 되었다. 특히 구도에게서는 경기 중 배구나 이닝 교체 중에 벤치 앞에서 설교를 듣는 등 철저한 지도를 받았다.[12] 와카나는 조지마에게 텐진 번화가에서 교차로에 서서 지나가는 여성이 어느 가게에 갈지 생각하라는 관찰력 훈련을 시켰다.

1998년에는 122경기에 출장했지만 타율 .251로 부진했다. 하지만 팀은 난카이에서 다이에로 양도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A클래스(3위)에 진입했다.

1999년 4월 30일, 조지마의 다이에이 입단에 큰 영향을 준 네모토 구단 사장이 사망하자, 조지마는 네모토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각오로 시즌에 임했다. 처음으로 전 경기 출전을 달성했고, 팀내 유일하게 3할 대 타율(.306, 리그 3위)을 기록하며 다이에 구단 최초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리그 우승이 결정된 순간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해 최우수 배터리 상을 수상했지만, 회견에서 구도는 조지마에게 "아직 멀었다"고 일축했고, 조지마는 "내년에도 쿠도 씨와 이 상을 탈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래도 쿠도 씨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내년에는 다른 사람과 받고 싶다"고 대답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조지마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고 퍼시픽 리그 챔피언십을 차지하면서 처음으로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그는 타율 0.306에 33개의 2루타와 17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치로 스즈키와 마쓰이 가즈오에 이어 리그 3위에 해당하는 타율이었다. 그는 2루타 부문에서 3위를 차지했고, 첫 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3. 3. 2000년 ~ 2002년: 부상과 슬럼프

2000년에는 오른손 골절 부상으로 84경기 출전에 그쳤지만,[15] 팀은 리그 2연패를 달성하여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다. 조지마는 시리즈 타이 기록인 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활약하여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15] 비록 일본 시리즈 우승은 놓쳤지만, 7월 17일 니혼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9회말 2사 2루 상황에 이와모토 츠토무를 상대로 사요나라 안타를 기록하고,[16] 9월 2일 오릭스전에서는 연장 10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히라이 마사시를 상대로 사요나라 홈런을 치는 등[17] 결정적인 순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같은 해 조지마의 고향인 나가사키 현 사세보 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조지마 겐지 베이스볼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2001년에는 타율은 .258로 부진했지만, 개인 통산 처음으로 30홈런을 넘어선 31홈런(리그 9위)을 기록했다.[18] 포수의 30홈런 이상 기록은 역대 5번째였다. 4월 13일 오릭스와의 경기 9회에는, 사상 15번째 1이닝 2홈런을 기록했다.[18] 이 경기 6회에도 홈런을 기록하며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의 1경기 3홈런은 사상 4번째 기록이었다. 고쿠보 히로키 (44홈런, 리그 4위), 마쓰나카 노부히코 (36홈런, 리그 6위), 이구치 다다히토 (30홈런, 리그 12위)와 함께 퍼시픽 리그 최초이자 일본인 선수로서는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4명의 선수가 30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2002년 시즌 도중, 수비 과정에서 타구에 쇄골을 맞아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조지마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닛폰햄에서 다구치 마사노리가 입단했다. 홈런은 리그 12위인 25개를 기록했고 타율은 .293(리그 10위)으로 3년 만에 리그 10위권에 복귀했다.

3. 4. 2003년: MVP 수상과 일본 시리즈 우승

조지마 겐지는 2003년, 스스로 '슈퍼 캐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무라 가쓰야 이후 역대 두 번째로 포수로서 시즌 전 경기 출전을 달성했다.[19] 7월 27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전에서는 1경기 6안타를 기록하며 오기 아키라와 리그 타이 기록을 세웠다.[20] 타율 .330(리그 6위), 34홈런(리그 3위), 119타점(리그 2위)을 기록하며 타격 3개 부문에서 모두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특히 타점은 최종전까지 리그 1위를 기록했으나, 마쓰나카 노부히코에게 역전당했다.[20]

마쓰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다다히토, 페드로 발데스와 함께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같은 팀에서 100타점 타자 4명을 배출하며, '다이하드 타선'의 일원으로서 5번 타자 역할을 완수하며 팀의 3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20] 사이토 가즈미 등 젊은 투수진을 이끌며 포수로서도 활약하여 퍼시픽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20] 포수의 퍼시픽 리그 MVP 선정은 노무라 가쓰야 이후 30년 만의 쾌거였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000년 일본 시리즈에 이어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시리즈 4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20] 2003년 시즌에는 좌완 투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34개의 홈런을 모두 우완 투수에게서 기록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이가와 게이, 7차전에서 트레이 무어에게 홈런을 쳐냈다. 당시 퍼시픽 리그에는 좌완 투수가 적어, 정규 시즌에는 우완 투수 상대 타격 연습에 집중하고, 일본 시리즈를 대비해 센트럴 리그 좌완 투수들을 염두에 둔 타격 연습을 한 것이 주효했다.[20]

시즌 종료 후에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출전하여 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를 맡았다.

3. 5. 2004년 ~ 2005년: 올림픽 출전과 메이저리그 진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4번 타자와 주전 포수로서 활약하며 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21] 페넌트레이스에서는 팀이 리그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며 리그 우승을 놓쳤다. 개인으로서는 퍼시픽 리그 신기록(포수)이 되는 시즌 타율 .338(리그 3위)를 기록했으며, 6월 1일에는 출장 939경기만에 통산 1000안타를 달성하는 등 1952년의 도이가키 다케시와 같은 속도를 기록했다.[21]

아테네 올림픽 이전까지는 타격 3개 부문 모두 마쓰나카 노부히코와 치열한 타이틀 경쟁을 펼쳤지만, 올림픽 참가로 인한 이탈로 인해 결국 마쓰나카가 타격 부문 3관왕을 달성했다.

2004년에는 2004년 하계 올림픽 참가로 인해 일본 리그 시즌 일부를 놓쳤지만, 여전히 타율 .338, 36홈런으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조지마는 22번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며 이치로의 이전 퍼시픽 리그 기록인 18개를 깼다. 그는 홈런 1개, 2루타 2개, 4타점을 기록하며 일본이 캐나다 야구 국가대표팀을 11–2로 꺾고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378의 타율로 올림픽 선수 중 5위, 7득점으로 7위를 기록했다.

2005년 6월 4일에는 개인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고, 7월 중순에는 오른쪽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 8월 28일 1군에 복귀했지만, 9월 22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자신이 친 타구에 왼쪽 다리를 다쳐 전치 2개월의 부상을 입는 등 남은 경기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 조지마를 대신해서 포수를 맡은 마토바 나오키가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여 리그 우승을 놓친 충격으로 벤치에 쓰러져 울었을 때 목발을 짚은 조지마는 마토바의 활약을 칭찬하며 위로했다.[23] 그 해에는 부상 때문에 슬럼프를 겪으면서도 통산 4,000타수를 기록했고 포수로서의 통산 타율 .299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를 기록했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메이저 리그시애틀 매리너스와 3년 계약을 맺으면서 아시아 출신 포수 최초로 메이저 리거가 되었다.

호크스의 7번의 올스타였던 조지마는 2005년 시즌 중 116경기에서 타율 0.309, 24홈런과 57타점을 기록한 후, 두 번의 부상(골절 포함)으로 인해 시즌이 단축되면서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4.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시애틀 매리너스 선수 시절 (2007년)


메이저 리그 진출 첫 해인 4월 3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의 개막전(세이프코 필드)에 7번·포수로서 첫 출전하여, 바톨로 콜론으로부터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면서 메이저 리그 이적 후 첫 안타와 첫 홈런(동시에 첫 타점)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인 선수로는 역대 두 번째 데뷔전 홈런 기록이었다.[24] 4월 4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전에서는 팀으로서는 1984년 앨빈 데이비스 이후 처음으로 데뷔전부터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24]

9월 15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코프먼 스타디움)부터 타순은 3번으로 배정되었고, 9월 19일 텍사스 레인저스전(레인저스 볼파크 인 알링턴)에서는 일본인 메이저 리거 1년차로서 마쓰이 히데키를 웃도는 개인 최다인 17호 홈런을 기록했다. 9월 2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U.S. 셀룰러 필드)에서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포수로서 최다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18호 홈런을 때려냈다. 10월 1일 시즌 마지막 경기인 레인저스전(세이프코 필드)에서는 마지막 타석에서 벡 로저스가 가지고 있던 아메리칸 리그 신인(포수)으로서의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인 146개(1962년)를 44년 만에 경신하는 안타를 기록했다.[24]

최종적으로 타율 2할 9푼 1리, 18홈런, 76타점을 남겼는데, 18홈런은 일본인 메이저 리거 1년차 최다 기록이며, 타율 2할 9푼 1리는 이치로에 이어 일본인 메이저 리거 1년차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신인왕 투표에서는 투수 3명에 이어 4위에 그쳤지만, 여러 매체로부터 "지금까지와 다른 언어로 새로운 투수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 정도의 타격 성적을 거둔 것은 우리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라는 칭찬을 받았다.[25]

타석에서 스윙하는 조지마(2006년)


타석에서의 조지마(2006년)

4. 1. 2006년: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데뷔



메이저 리그 진출 첫 해인 2006년 4월 3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의 개막전(세이프코 필드)에 7번·포수로서 첫 출전하여, 바톨로 콜론으로부터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면서 메이저 리그 이적 후 첫 안타와 첫 홈런(동시에 첫 타점)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인 선수로는 역대 두 번째 데뷔전 홈런 기록이었다.[24] 4월 4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전에서는 팀으로서는 1984년 앨빈 데이비스 이후 처음으로 데뷔전부터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24]

9월 15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코프먼 스타디움)부터 타순은 3번으로 배정되었고, 9월 19일 텍사스 레인저스전(레인저스 볼파크 인 알링턴)에서는 일본인 메이저 리거 1년차로서 마쓰이 히데키를 웃도는 개인 최다인 17호 홈런을 기록했다. 9월 2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U.S. 셀룰러 필드)에서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포수로서 최다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18호 홈런을 때려냈다. 10월 1일 시즌 마지막 경기인 레인저스전(세이프코 필드)에서는 마지막 타석에서 벡 로저스가 가지고 있던 아메리칸 리그 신인(포수)으로서의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인 146개(1962년)를 44년 만에 경신하는 안타를 기록했다.[24]

최종적으로 타율 2할 9푼 1리, 18홈런, 76타점을 남겼는데, 18홈런은 일본인 메이저 리거 1년차 최다 기록이며, 타율 2할 9푼 1리는 이치로에 이어 일본인 메이저 리거 1년차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신인왕 투표에서는 투수 3명에 이어 4위에 그쳤지만, 여러 매체로부터 "지금까지와 다른 언어로 새로운 투수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 정도의 타격 성적을 거둔 것은 우리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라는 칭찬을 받았다.[25]

4. 2. 2007년 ~ 2009년: 주전 경쟁과 일본 복귀

2005년 11월 22일, 조지마 겐지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3년 총액 1,65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24] 4월 3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의 개막전에 '7번 타자·포수'로 출전하여 MLB 사상 첫 일본인 포수가 되었다.[24] 바톨로 콜론을 상대로 두 번째 타석에서 메이저 첫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했다.[24] 데뷔전 홈런은 마쓰이 가즈오에 이어 일본인 선수 역대 두 번째였다.[24] 이어진 4일 에인절스전에서는 팀에서 의 앨빈 데이비스 이후 데뷔전부터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24] 시즌 최종전인 10월 1일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는 마지막 타석에서 백 로저스의 아메리카 리그 신인 포수 시즌 최다 안타 기록 146개를 44년 만에 경신하는 안타를 날렸다.[24] 최종적으로 신인 일본인 선수로서는 2001년 이치로에 이어 2위인 타율 0.291, 최다 동률이자 1996년 댄 윌슨과 함께 신인으로서 구단 사상 최다인 18홈런, 76타점, 1위인 OPS 0.774를 기록했다.[24]

13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87, 14홈런, 61타점, OPS 0.755를 기록했고, 수비율(863수비 기회에서 0.998)과 도루 저지율(.465)에서는 양 리그 최고를 기록했다.[26] 7월 3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서 오른손 등에 타구를 맞아 부상했지만, 2000년에 골절되었을 때 삽입했던 금속판 덕분에 재 골절을 피할 수 있었다.[26] 오프 시즌에는 CBS 스포츠의 포수 랭킹에서 호르헤 포사다, 빅터 마르티네스, 러셀 마틴, 조 마우어에 이어 5위에 올랐고, "2007 This Year in Baseball Award"의 "Defensive Player" 부문에 포수로 유일하게 노미네이트되었다.[26]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4월 25일에는 3년 2,400만 달러로 계약을 연장했다.[27] 하지만 전반기 타율 0.213으로 타격 부진에 빠졌고, 8월에 들어 레귤러 자리를 잠시 잃었지만, 9월에는 제프 클레멘트가 무릎 수술로 시즌을 마감했기 때문에 다시 주전 포수로 기용되었다.[27] 최종적으로 112경기 출전, 자기 최저인 타율 0.227, 7홈런, 39타점을 기록했다.[28]

은 개막 전 3월에 개최된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의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32] 모든 경기에 포수로 선발 출전하여 일본의 2회 연속 2번째 우승에 기여했다.[32] 시즌에서는 주전 포수로 시작했지만, 4월과 5월에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29] 조지마가 부재한 사이에 신인 롭 존슨이 투수진의 신뢰를 얻었고, 조지마가 복귀한 후에도 출전 기회가 급감했다.[29] 타격은 2008년보다 다소 나아져 71경기 출전하여 타율 0.247, 9홈런, 22타점을 기록했다.[29] 수비 면에서는 규정 경기 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도루 저지율에서 자기 최고의 0.537을 기록했다.[29]

오프 시즌인 10월 19일에는 매리너스와의 잔여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 야구계에 복귀할 의향임을 발표했다.[32] 10월 27일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 의사를 표명했다.[33]

5. 한신 타이거스 시절

2009년 10월 19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2년 간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 야구계에 복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한신 타이거스가 영입에 나섰고, 친정팀 소프트뱅크도 영입 의사를 밝혔지만, 10월 27일 한신과 두 차례 교섭 끝에 입단 의사를 표명했다. 11월 13일 한신 입단이 정식 발표되었고, 4년 총액 20억 엔의 계약을 맺었으며 등번호는 2번으로 결정되었다.

2010년 3월 26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교세라돔 오사카)에서 결승 적시타를 날린 후, "나가사키현사세보에서 온 조지마입니다"라고 히어로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음 날인 27일 같은 구장, 같은 경기에서 연장 11회에 끝내기 홈런을 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인했다. 그해 시즌 전체에서 활약하여 전 경기 출장, 타율 .303(리그 12위), 28홈런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0월 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시즌 165번째 안타를 기록하여 1997년에 후루타 아쓰야가 기록한 164안타를 넘어 포수 센트럴 리그 최다 안타 기록을 갱신했다. 이로 인해, 조지마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양 리그의 포수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소속했던 2003년 다이에와 2010년 한신이 팀 안타수의 리그 기록을 세웠고, 두 해 모두 규정 타석을 채우며 기록에 크게 기여했다.[37] 또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여 포수로서 사상 최초로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양 리그에서 수상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왼쪽 무릎 반월판을 부상당한 것이 판명되어, 11월 9일에 수술을 받았다.[38]

2011년은 왼쪽 무릎 부상이 판명되었을 당시의 완치 6개월이라는 진단을 뒤엎고 예정보다 빨리 실전에 복귀했고,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개막이 연기된 것도 있어서 개막전에 출장했다. 그러나,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에서 착용했던 패드 때문에 왼쪽 무릎에 반흔이 생겼고, 이로 인해 무릎의 가동 범위가 넓어지지 않게 된 영향으로[40], 불과 38경기 출장에 그쳐 타율 .189, 5홈런, 13타점으로 타격 부진에 빠졌고, 수비면에서도 바운드 된 공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무릎이 완전하지 않아 오른쪽 팔꿈치 인대 손상과 허리 통증도 함께 겪었고[41], 6월 10일에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42] 8월 16일에 왼쪽 무릎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고, 1군에 복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2012년은 개막부터 1루수로 전념했지만, 5월 초에 왼쪽 좌골 신경통으로 인해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고, 요추추간판 헤르니아 수술을 받았다.[43] 8월에는 재활 출전했던 2군 경기에서 왼쪽 무릎 뒤쪽 근육 파열을 일으켰다.[44] 9월에는 2군 경기에 복귀했지만, 잇따른 치명적인 부상으로 포수로서의 복귀는 절망적이 되었다. 다음 해의 전력 구상에서도 제외되었고, 9월 28일에 그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45][46][47]

와다 쓰요시 감독으로부터, 9월 29일 1군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을 은퇴 경기로 출전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고사하고 같은 날 웨스턴 리그에서 열린 오릭스전(한신 나루오하마 구장)이 은퇴 경기가 되었다. "3번 타자·포수"로 선발 출장하여, 1회 무사 1·2루 상황에서 중전 적시타를 날렸다. 직후 대주자로 교체되어 물러났고, 경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후지카와 규지의 선창으로 헹가래를 받았다.[49] 10월 18일에 임의 은퇴가 공시되었다.[50]

5. 1. 2010년: 센트럴 리그 신기록과 골든 글러브 수상

2010년 3월 26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결승 적시타를 때려낸 후 히어로 인터뷰에서 “나가사키현사세보에서 온 조지마입니다”라고 말했다.[37] 다음날인 3월 27일 같은 경기에서 연장 11회에 끝내기 홈런을 쳐 홈으로 헤드 슬라이딩을 했다.[37] 그해 시즌 전체에서 활약하여 전 경기 출장, 타율 .303(리그 12위), 28홈런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0월 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시즌 165번째의 안타를 때려내 1997년 후루타 아쓰야가 기록한 시즌 164안타 기록을 깨며 포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37] 이것에 의해 조지마는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의 포수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같은 해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여 포수로서는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에서의 최초 수상자가 되었다.[37]

그러나 시즌 종료를 앞둔 상황에서 왼쪽 무릎에 부상당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11월 9일에 수술을 받았다.[38]

5. 2. 2011년 ~ 2012년: 부상과 은퇴

2011년, 왼쪽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빠른 실전 복귀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개막 연기로 개막전에 출전할 수 있었다.[40] 그러나 무릎 보호대의 영향으로 왼쪽 무릎에 반흔이 생겨 가동 범위가 제한되면서 타격과 수비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40] 38경기 출전에 그쳐 타율 .189, 5홈런, 13타점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오른쪽 팔꿈치 인대 손상과 허리 통증까지 겹쳐 6월 10일에 등록이 말소되었다.[41][42] 8월 16일에는 왼쪽 무릎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고, 결국 1군에 복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2012년에는 1루수로 전향했지만, 5월 초 왼쪽 좌골 신경통으로 등록 말소 후 요추추간판 헤르니아 수술을 받았다.[43] 8월 재활 중 2군 경기에서 왼쪽 무릎 뒤쪽 근육 파열을 일으켰다.[44] 9월에 2군 경기에 복귀했지만, 잇따른 부상으로 포수 복귀는 어려워졌다. 결국 9월 28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45][46][47]

9월 29일, 한신 나루오하마 구장에서 열린 2군 웨스턴 리그 오릭스전이 은퇴 경기가 되었다. 3번 타자 겸 포수로 선발 출전하여 1회 무사 1, 2루에서 중전 적시타를 기록한 후 교체되었다. 경기 후 후지카와 규지의 선창으로 동료 선수들에게 헹가레를 받으며[49] 18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0월 18일 임의 은퇴가 공시되었다.[50]

6.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야구계와 거리를 두고, 취미인 낚시 관련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51]

2013년 1월 RKB 마이니치 방송의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같은 해 4월 21일부터 정규 프로그램으로 승격된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그램인 『조지마 겐지의 J적인 낚시 TV』에 출연했다.[52] 같은 해 3월부터 월 1회 페이스로 방송되는 텔레비 나가사키의 골프 프로그램 『조지마 겐지와 카나야 타이치로의 More☆골프』에도 출연하고 있다.[52]

야구 관련으로는, 2013년 9월 28일에 후쿠오카 야후오쿠 돔에서 열린 사이토 카즈미의 은퇴 기념 세레모니에 등장하여, 사이토의 투구를 포수로서 받았다. 2018년 3월 10일에 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에서 열린 "자이언츠 vs 호크스 OB전"에 출전하여, 19년 만에 쿠도와 배터리를 이루었다.[53]

7. 선수로서의 특징

=== 수비 ===

조지마 겐지는 도루 저지율이 높았고, 탁월한 강견을 활용하여 앉은 채로 1루 견제나 2루 송구를 하기도 했다. 오사와 게이지는 "어깨를 다치기 때문에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발언했으며, 실제로 조지마 본인도 2005년에 앉은 상태에서 송구로 어깨를 다쳐 이후 앉은 채로 송구하지 않게 되었다.[57] 마리너스 이적 후, 던지는 것을 서두르는 경향과 릴리스 포인트가 불안정하다는 지적을 받아, 2007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빠르게 던지는 것이 아닌 어깨의 강점을 살려 2루 방향으로 어깨를 밀어내는 균형 잡힌 투구를 지도받았다.[57] 그 결과, 같은 해 도루 저지율은 메이저리그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2010년 한신으로 이적한 후에는 다시 앉은 채로 송구를 보여주게 되었고, "조 바주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도 기미야스는 조지마의 캐칭에 대해 "가장 서툴렀던 것은 조지마였다. 마지막까지 잘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58] MLB 시대의 캐칭은 프레이밍에 약간 어려움이 있었고,[59] 종합적인 수비력을 측정하는 수비율은 통산 마이너스였다.

리드 면에서는 스트라이크 선행과 초구 스트라이크를 모토로 내세웠고,[60] 타자가 칠 확률이 낮은 코스와 구종으로 과감하게 공격하여 삼진을 노렸다.[61][62] 그러나 이러한 리드 방식은 투수가 구종을 결정하는 것이 주류인 MLB의 방식과 잘 맞지 않았고, 펠릭스 에르난데스 등으로부터 불만을 사 "조지마가 포수일 때는 던지고 싶지 않다"는 투수가 늘어났다.[63] 이는 마리너스 시대에 계약 도중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으로 여겨진다.[63] 메이저리그 팀 동료 투수들은 조지마의 리드에서 볼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배구를 가장 싫어했다.[64]

NPB 전 심판원 사사키 마사노부는, 조지마는 수비 중에 말을 많이 하는 포수여서 "조금 판정에 집중하게 해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65]

=== 타격 ===

낮은 코스의 공을 잘 치는 편이다.2000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구도 기미야스가 던진 낮고 몸쪽으로 들어오는 완벽한 볼을 왼손으로 걷어 올려 홈런으로 연결했다[66]

=== 주루 ===

1루 도달 시간은 4.7초로 평균을 밑돌았으며, 2010년에는 리그 최다인 22개의 병살타를 기록했다.

일본인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첫 번째 본루 도루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7. 1. 수비

조지마 겐지는 도루 저지율이 높았고, 탁월한 강견을 활용하여 앉은 채로 1루 견제나 2루 송구를 하기도 했다. 오사와 게이지는 "어깨를 다치기 때문에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발언했으며, 실제로 조지마 본인도 2005년에 앉은 상태에서 송구로 어깨를 다쳐 이후 앉은 채로 송구하지 않게 되었다.[57] 마리너스 이적 후, 던지는 것을 서두르는 경향과 릴리스 포인트가 불안정하다는 지적을 받아, 2007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빠르게 던지는 것이 아닌 어깨의 강점을 살려 2루 방향으로 어깨를 밀어내는 균형 잡힌 투구를 지도받았다.[57] 그 결과, 같은 해 도루 저지율은 메이저리그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2010년 한신으로 이적한 후에는 다시 앉은 채로 송구를 보여주게 되었고, "조 바주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도 기미야스는 조지마의 캐칭에 대해 "가장 서툴렀던 것은 조지마였다. 마지막까지 잘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58] MLB 시대의 캐칭은 프레이밍에 약간 어려움이 있었고,[59] 종합적인 수비력을 측정하는 수비율은 통산 마이너스였다.

리드 면에서는 스트라이크 선행과 초구 스트라이크를 모토로 내세웠고,[60] 타자가 칠 확률이 낮은 코스와 구종으로 과감하게 공격하여 삼진을 노렸다.[61][62] 그러나 이러한 리드 방식은 투수가 구종을 결정하는 것이 주류인 MLB의 방식과 잘 맞지 않았고, 펠릭스 에르난데스 등으로부터 불만을 사 "조지마가 포수일 때는 던지고 싶지 않다"는 투수가 늘어났다.[63] 이는 마리너스 시대에 계약 도중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으로 여겨진다.[63] 메이저리그 팀 동료 투수들은 조지마의 리드에서 볼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배구를 가장 싫어했다.[64]

NPB 전 심판원 사사키 마사노부는, 조지마는 수비 중에 말을 많이 하는 포수여서 "조금 판정에 집중하게 해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65]

7. 2. 타격

낮은 코스의 공을 잘 치는 편이다.2000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구도 기미야스가 던진 낮고 몸쪽으로 들어오는 완벽한 볼을 왼손으로 걷어 올려 홈런으로 연결했다[66]

7. 3. 주루

1루 도달 시간은 4.7초로 평균을 밑돌았으며, 2010년에는 리그 최다인 22개의 병살타를 기록했다.

일본인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첫 번째 본루 도루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8. 인물

조지마는 아내 마키, 아들 유타, 딸 미우와 함께 일본 사세보시에 거주하고 있다.[3] 그는 특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뛰기 전에는 "조지마 겐지" 대신 "조지 매켄지"(George Mackenzie)라고 스스로를 칭했다.[4]
낚시 애호가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낚시를 자주 다녔으며, 성인이 된 현재에도 바다 낚시 (특히 갯바위 낚시)를 좋아한다. 현역 시절부터 시즌 중에도 틈만 나면 낚시를 갈 정도로 낚시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3] 지역 신문인 나가사키 신문의 낚시 코너나 낚시 잡지에 "호크스의 조지마 선수"가 아닌 "사세보시의 조지마 씨"로 게재되기도 했다.[68] 히라도시의 낚시 숙소인 마루긴 낚시 센터 주최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69] 낚시꾼으로서의 평가도 높다. 규슈·주고쿠 지방의 지역 낚시 잡지 '낚시 팬'에서 과거 수 차례 잡지 표지를 장식했다.[70] 후쿠오카 지역 TV 방송국에서 조지마(와 기타 프로 야구 선수 몇 명)의 낚시를 메인 테마로 하는 설 특집 프로그램(TV 니시닛폰 '조지마 겐지의 메이저 피싱', 후쿠오카 방송 '조지마&마하라의 낚시 제일!')이 방송된 적이 있으며, 이 외에도 '피싱 라이프'(선 TV 외) 등 많은 낚시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해양 레저에 관심이 많아 일본 수난 구조회에 의한 '푸른 날개 모금'의 어드바이저로 2009년부터 취임했다.[71] 2011년에는 후쿠오카시의 낚시 용품 메이커 "AURA"의 상품 카탈로그에 등장했다.[72]
왕정치와의 관계조지마는 소프트뱅크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던 왕정치에 대해 "가장 유니폼이 잘 어울리고 멋있는 사람. 야구를 할 때 눈빛이 다르고, 그 나이에도 그렇게 야구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다. 고의 사구 때 공의 움직임과 함께 감독도 같이 뛰어올랐을 정도니까요"라고 말했다.[73]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예로 좋아하는 글귀를 쓰게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왕' 한 글자를 썼으며, 3단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왕으로부터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74][75] 왕정치 또한 상대가 누구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지마를 장래의 감독으로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2020년에 소프트뱅크의 회장 특별 어드바이저로 취임했을 때 왕은 "예스, 노를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남자이고, 선수들이 결단하는 데 플러스가 될 것이며, 선수들의 형님 같은 존재가 되어주길 바란다"라는 기대를 표했다.

2009년 오프에 한신에 입단한 하라구치 후미히토에게는 "살아있는 교재"가 되었고, 다음 해 2010년 오프에는 하라구치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았으며, 조지마 자신의 고향인 나가사키에서의 자율 훈련에도 동행했다. 야구계와 거리를 두고 있는 현재에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하라구치가 육성 선수에서 지배하 등록 선수로 승격되어 즉시 1군 승격까지 달성했을 때 연락을 받았다.[76]

8. 1. 낚시 애호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낚시를 자주 다녔으며, 성인이 된 현재에도 바다 낚시 (특히 갯바위 낚시)를 좋아한다. 현역 시절부터 시즌 중에도 틈만 나면 낚시를 갈 정도로 낚시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3] 지역 신문인 나가사키 신문의 낚시 코너나 낚시 잡지에 "호크스의 조지마 선수"가 아닌 "사세보시의 조지마 씨"로 게재되기도 했다.[68] 히라도시의 낚시 숙소인 마루긴 낚시 센터 주최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69] 낚시꾼으로서의 평가도 높다. 규슈·주고쿠 지방의 지역 낚시 잡지 '낚시 팬'에서 과거 수 차례 잡지 표지를 장식했다.[70] 후쿠오카 지역 TV 방송국에서 조지마(와 기타 프로 야구 선수 몇 명)의 낚시를 메인 테마로 하는 설 특집 프로그램(TV 니시닛폰 '조지마 겐지의 메이저 피싱', 후쿠오카 방송 '조지마&마하라의 낚시 제일!')이 방송된 적이 있으며, 이 외에도 '피싱 라이프'(선 TV 외) 등 많은 낚시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해양 레저에 관심이 많아 일본 수난 구조회에 의한 '푸른 날개 모금'의 어드바이저로 2009년부터 취임했다.[71] 2011년에는 후쿠오카시의 낚시 용품 메이커 "AURA"의 상품 카탈로그에 등장했다.[72]

8. 2. 왕정치와의 관계

조지마는 소프트뱅크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던 왕정치에 대해 "가장 유니폼이 잘 어울리고 멋있는 사람. 야구를 할 때 눈빛이 다르고, 그 나이에도 그렇게 야구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다. 고의 사구 때 공의 움직임과 함께 감독도 같이 뛰어올랐을 정도니까요"라고 말했다.[73]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예로 좋아하는 글귀를 쓰게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왕' 한 글자를 썼으며, 3단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왕으로부터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74][75] 왕정치 또한 상대가 누구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지마를 장래의 감독으로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2020년에 소프트뱅크의 회장 특별 어드바이저로 취임했을 때 왕은 "예스, 노를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남자이고, 선수들이 결단하는 데 플러스가 될 것이며, 선수들의 형님 같은 존재가 되어주길 바란다"라는 기대를 표했다.

2009년 오프에 한신에 입단한 하라구치 후미히토에게는 "살아있는 교재"가 되었고, 다음 해 2010년 오프에는 하라구치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았으며, 조지마 자신의 고향인 나가사키에서의 자율 훈련에도 동행했다. 야구계와 거리를 두고 있는 현재에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하라구치가 육성 선수에서 지배하 등록 선수로 승격되어 즉시 1군 승격까지 달성했을 때 연락을 받았다.[76]

9. 상세 정보

9. 1. 출신 학교

벳푸 대학 부속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9. 2. 선수 경력

조지마 겐지는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NPB 경력을 시작하여 2005년까지 활동했다. 1996년에는 17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41, 4홈런, 9타점을 기록했다. 1997년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아 120경기에 출장, 타율 .308, 15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성장했다. 1999년에는 135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306, 17홈런, 77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에는 140경기에 모두 출장하여 타율 .330, 34홈런, 119타점을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뛰며 MLB 무대를 경험했다. 2006년 데뷔 첫 해에는 144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91, 18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9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여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2010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며 NPB에 복귀했고, 2012년까지 활동했다. 2010년에는 144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303, 28홈런, 91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9. 3. 수상·타이틀 경력

; NPB

  • MVP : 1회(2003년)
  • 베스트 나인 : 6회(포수 부문: 1999년 ~ 2001년, 2003년 ~ 2005년) ※ 포수로 3년 이상 연속 수상 2회는 노무라 가쓰야, 이토 츠토무 뿐이다. 6회 수상은 노무라, 이토에 이은 퍼시픽 리그 역대 3위
  • 골든 글러브상 : 8회(포수 부문: 1999년 ~ 2005년, 2010년) ※ 7년 연속은 포수로서는 사상 최장, 8회는 역대 3위. 양 리그 수상은, 포수로서는 사상 유일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2회(1999년, 2003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회(2000년)
  • 최우수 배터리상 : 5회 ※ 5회는 후루타 아츠야, 이토, 아베 신노스케에 이은 역대 공동 4위
  • * 1999년 투수: 구도 기미야스
  • * 2000년 투수: 요시다 슈지
  • * 2001년 투수: 다노우에 게이자부로
  • * 2003년 투수: 사이토 가즈미
  • * 2004년 투수: 미세 고지
  • 월간 MVP : 3회(타자 부문: 1999년 6월, 2003년 4월, 2004년 6월)
  •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 1회 (2004년 제1전)
  • 홈런 더비 우승: 1회 (2010년 제1전)
  • "조지아 혼" 상 연간 대상: 1회 (2010년)
  • "조지아 혼" 상: 1회 (2010년도 제1회)
  • 하나노 퍼시픽 리그 대상: 1회 (1997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2003년)
  • 후쿠오카현 현민 스포츠 영예상 (2004년) [78]
  • 후쿠오카시 스포츠 영예상 (2004년) [79]
  • 사세보시 시민 영예상 (2005년) [80]
  • 산스포 MVP 대상: 1회 (2010년) [81]


; MLB

  • Baseball Digest영어 루키 올스타 팀 (포수 부문: 2006년) [82]

9. 3. 1. 수상


  • MVP : 1회(2003년)
  • 베스트 나인 : 6회(1999년 ~ 2001년, 2003년 ~ 2005년)
  • 골든 글러브상 : 8회(1999년 ~ 2005년, 2010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2회(1999년, 2003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회(2000년)
  • 최우수 배터리상 : 5회(1999년 ~ 2001년, 2003년, 2004년)[92]
  • 월간 MVP : 3회(1999년 6월, 2003년 4월, 2004년 6월)
  • ‘조지아혼’상 연간 대상 : 1회(2010년)
  • 최우수 선수: 1회 (2003년)
  • 베스트 나인: 6회 (포수 부문: 1999년 - 2001년, 2003년 - 2005년) ※ 포수로 3년 이상 연속 수상 2회는 노무라 가쓰야, 이토 츠토무 뿐이다. 6회 수상은 노무라, 이토에 이은 퍼시픽 리그 역대 3위
  • 골든 글러브상: 8회 (포수 부문: 1999년 - 2005년, 2010년) ※ 7년 연속은 포수로서는 사상 최장, 8회는 역대 3위. 양 리그 수상은, 포수로서는 사상 유일
  • 월간 MVP: 3회 (타자 부문: 1999년 6월, 2003년 4월, 2004년 6월)
  • 최우수 배터리상: 5회 ※ 5회는 후루타 아츠야, 이토, 아베 신노스케에 이은 역대 공동 4위
  • * 1999년 투수: 쿠도 키미야스
  • * 2000년 투수: 요시다 슈지
  • * 2001년 투수: 타노우에 케이조로
  • * 2003년 투수: 사이토 카즈미
  • * 2004년 투수: 미세 코지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 (1999년, 2003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1회 (2000년)
  •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 1회 (2004년 제1전)
  • 홈런 더비 우승: 1회 (2010년 제1전)
  • "조지아 혼" 상 연간 대상: 1회 (2010년)
  • "조지아 혼" 상: 1회 (2010년도 제1회)
  • 하나노 퍼시픽 리그 대상: 1회 (1997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2003년)
  • 후쿠오카현 현민 스포츠 영예상 (2004년) [78]
  • 후쿠오카시 스포츠 영예상 (2004년) [79]
  • 사세보시 시민 영예상 (2005년) [80]
  • 산스포 MVP 대상: 1회 (2010년) [81]
  • Baseball Digest영어 루키 올스타 팀 (포수 부문: 2006년) [82]

9. 3. 2. 국제 대회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2004년)[78][79]

9. 4. 주요 기록

wikitable

연도나이리그경기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총 루타타점도루도루 실패볼넷삼진타율장타율출루율
199518DAIPL121222200021001.167.167.231
199619DAIPL17585142042891039.241.483.290
199720DAIPL120432491332421520668622262.308.477.343
199821DAIPL12239553991901616658522767.251.420.309
199922DAIPL135493651513311723777623161.306.481.356
200023DAIPL8430338942229147501022748.310.485.377
200124DAIPL140534631381803124995943155.258.466.305
200225DAIPL115416601221802521574873041.293.517.348
200326DAIPL14055110118239234327119945350.330.593.399
200427DAIPL116426911442513627991654945.338.655.432
200528SFTPL116411701272242422957343332.309.557.381
201033HANCL144554761682902828191952753.303.507.352
201134HANCL38132725305431300816.189.326.243
201235HANCL243947100850024.179.205.214
통산:1323475668414062551224424178087237344547.296.508.355



'''첫 기록'''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홈런 : 2002년 5월 6일, 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7차전(후쿠오카 돔), 6회말에 마에카와 가쓰히코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221번째.
  • 통산 150홈런 : 2003년 10월 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8차전(Yahoo! BB스타디움), 2회초에 가토 다이스케로부터 솔로 홈런 ※역대 131번째.
  • 통산 1000안타 : 2004년 6월 1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0차전(후쿠오카 돔), 3회말에 고바야시 히로유키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220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2004년 9월 21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6차전(삿포로 돔), 5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400번째.
  • 통산 200홈런 : 2005년 6월 2일, 대 한신 타이거스 6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8회초에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83번째.


'''기타'''

  • 올스타전 출장 : 9회(1997년 ~ 2001년, 2003년 ~ 2005년, 2010년)
  • 일본 시리즈 4개 홈런(2000년, 2003년) ※시리즈 타이 기록.
  • 1이닝 2홈런 : 2001년 4월 1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3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9회초에 기무라 마사히로, 기시카와 다카토시로부터
  • 1경기 6안타 : 2003년 7월 27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7차전(후쿠오카 돔)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 프로 야구 역대 포수로서의 시즌 최다 안타 : 182개(2003년)
  • 퍼시픽 리그 포수로서는 역대 시즌 최다 척살 : 1175(2003년, 1272차례의 수비 기회)
  • 퍼시픽 리그 포수로서는 역대 시즌 최고 타율 : .338(2004년)

9. 4. 1. 첫 기록

9. 4. 2.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홈런 : 2002년 5월 6일, 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7차전(후쿠오카 돔), 6회말에 마에카와 가쓰히코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221번째.
  • 통산 150홈런 : 2003년 10월 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8차전(Yahoo! BB스타디움), 2회초에 가토 다이스케로부터 솔로 홈런 ※역대 131번째.
  • 통산 1000안타 : 2004년 6월 1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0차전(후쿠오카 돔), 3회말에 고바야시 히로유키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220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2004년 9월 21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6차전(삿포로 돔), 5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400번째.
  • 통산 200홈런 : 2005년 6월 2일, 대 한신 타이거스 6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8회초에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83번째.

9. 4. 3. 기타


  • 올스타전 출장 : 9회(1997년 ~ 2001년, 2003년 ~ 2005년, 2010년)
  • 일본 시리즈 4개 홈런(2000년, 2003년) ※시리즈 타이 기록.
  • 1이닝 2홈런 : 2001년 4월 1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3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9회초에 기무라 마사히로, 기시카와 다카토시로부터
  • 1경기 6안타 : 2003년 7월 27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7차전(후쿠오카 돔)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 프로 야구 역대 포수로서의 시즌 최다 안타 : 182개(2003년)
  • 퍼시픽 리그 포수로서는 역대 시즌 최다 척살 : 1175(2003년, 1272차례의 수비 기회)
  • 퍼시픽 리그 포수로서는 역대 시즌 최고 타율 : .338(2004년)

9. 5. 등번호

조지마 겐지는 1995년부터 2012년까지 등번호 2번을 사용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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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Johjima leaves Seattle for Japan https://www.espn.com[...] 2009-10-19
[3] 웹사이트 Seattle Mariners Bio https://web.archive.[...]
[4] 서적 「スーパーキャッチャー城島健司(="Super catcher George Mackenzie")」 https://www.amazon.c[...]
[5] 웹사이트 会長付特別アドバイザー就任について https://www.softbank[...] 2019-12-20
[6] 웹사이트 城島健司CBO就任会見「未来の人に繋げていく、それが僕の仕事」 https://www.softbank[...] 2024-11-21
[7] 서적 日本プロ野球偉人伝 vol.13 1997→99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8] 웹사이트 【ドラフト会議物語32】ダイエーが城島を強行指名!王貞治監督の説得で入団へ【94年】 https://column.sp.ba[...] 2017-10-01
[9] 웹사이트 根本マジックで城島ダイエー入り/ドラフト回顧録1 https://www.nikkansp[...] 2019-10-07
[10] 웹사이트 【11月18日】1994年(平6) ダイエー“20年に1人の大型捕手”城島健司を強行指名 https://web.archive.[...] null
[11] 웹사이트 伊東勤、工藤公康、城島健司… ドラフト「裏ワザ」「強硬指名」で入団した8人の名選手(3ページ目) https://www.dailyshi[...] 2020-10-25
[12] 웹사이트 【辞めるまで嫌】キャッチャーとしての苦悩...○○で投げてくれる投手への感謝 https://www.youtube.[...] null
[13] 웹사이트 人との出会いが育てた日本初のメジャー捕手~城島健司■ https://www.1242.com[...] 二宮清純 プロフェッショナル列伝 2023-11-12
[14] 서적 プロ野球全記録 (2002年版) 実業之日本社
[15] 뉴스 ダイエー・城島が右手指を骨折 読売新聞 2000-04-14
[16] 뉴스 城島 久々と見せ場 復帰後バント失敗…「打ててよかったー」 読売新聞 2000-07-17
[17] 뉴스 城島 延長10回 サヨナラ弾 首位に1差 読売新聞 2000-09-03
[18] 서적 2002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3-05-05
[20] 웹사이트 投票結果(最優秀選手) {{!}} 2003年 表彰選手 https://npb.jp/award[...] null
[21]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04年プロ野球総決算号「激動」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5-01-01
[22] 웹사이트 マニュライフ生命 クライマックス パ http://www.seibulion[...] 2015-06-07
[23] 서적 応援ありがとう!2005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激闘の軌跡 ソフトバンククリエイティブ
[24] 웹사이트 城島、打席のテーマ曲は「笑点」 https://web.archive.[...] 2006-03-02
[25] 서적 メジャーリーグ・完全データ選手名鑑2007 廣済堂出版
[26] 웹사이트 http://mlb.yahoo.co.[...]
[27] 웹사이트 Mariners keep Kenji through 2011 http://seattle.marin[...] MLB.com 2008-04-25
[28] 웹사이트 Year-end awards: MVPs and LVPs, Cy Youngs and Yuks ... http://sports.espn.g[...] ESPN.com 2008-09-27
[29] 웹사이트 Seattle Mariners Fielding Statistics - 2009 http://sports.espn.g[...] ESPN
[30] 웹사이트 http://sports.espn.g[...]
[31] 웹사이트 http://espn.go.com/m[...]
[32] 웹사이트 Mariners catcher Kenji Johjima opts out of final two years of contract http://seattle.marin[...] Mariners.com 2009-10-19
[33] 뉴스 「城島獲得」へ阪神球団が1番に名乗り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09-10-21
[34] 웹사이트 争奪戦“不戦敗” 条件提示できず 竹内COO謝罪「スピード感足りなかった」 https://web.archive.[...] 2009-10-28
[35] 뉴스 http://hochi.yomiuri[...] 報知新聞 2009-10-28
[36] 웹사이트 鷹の象徴を継承した“小さな巨人”今宮=鷹詞2009〜たかことば〜 https://sports.yahoo[...] 2009-12-10
[37] 웹사이트 【虎戦士回顧録、あの時は…】城島健司氏 36歳電撃引退の真相 4億の契約残して決断 https://www.daily.co[...] 2020-03-29
[38] 뉴스 城島 来季開幕絶望的…左ひざ手術で復帰まで半年 https://web.archive.[...] スポーツニッポン 2011-06-10
[39] 뉴스 虎46年ぶり3戦連続完封!原口、驚異の防御率0・88リード https://www.sanspo.c[...] サンケイスポーツ 201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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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뉴스 城島、今季絶望…再度左膝手術 http://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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