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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구니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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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1846년 시나노국(현재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대장성에서 지조개정에 참여했다. 이후 고치현 권현령, 현령을 역임했으나, 내무경의 허가 없이 군 합병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사임했다. 1880년대에는 재무성 조사국장, 예산국장, 재무차관을 거쳐, 1892년과 1900년 두 차례 대장대신을 지냈다. 대장대신 재임 기간 중 긴축 재정을 추진했으나, 내각 내 불통일로 사임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 유럽과 미국을 외유하고, 러일 전쟁 전후 대 러시아 강경론을 주장했다. 와타나베는 독신으로 지냈으며, 1919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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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구니타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와타나베 구니타케
와타나베 구니타케
이름와타나베 구니타케
일본어 표기渡辺国武 (わたなべ くにたけ)
출생일1846년 3월 29일
출생지일본, 나가노현오카야시
사망일1919년 5월 11일
사망지일본, 시즈오카현이즈시
국적일본
가족 관계
아버지와타나베 마사노리
와타나베 치아키
양자와타나베 치후유
손자와타나베 타케시
경력
직업정치가, 각료
칭호/훈장훈일등욱일대수장, 자작
관직
제2대, 제4대, 제9대 대장대신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제4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재임 기간1892년 8월 8일 ~ 1895년 3월 17일
1895년 8월 27일 ~ 1896년 9월 18일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4일
제4대 체신대신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재임 기간 (체신대신)1895년 3월 17일 ~ 1895년 10월 9일
제6대 후쿠오카현지사후쿠오카현령
재임 기간 (후쿠오카현지사)1881년 8월 12일 ~ 1882년 5월 11일
관선 제6대 도쿠시마현지사도쿠시마현지사
재임 기간 (도쿠시마현지사)1876년 ~ 1879년
관선 제3대 고치현지사고치현지사
재임 기간 (고치현지사)1876년 8월 26일 ~ 1879년 6월 7일

2. 생애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1846년 시나노국 토보리 마을(현재 나가노현 오카야시)에서 다카시마 번을 섬기는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5]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와 형에게 양육되었다. 번의 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후, 사쿠마 쇼잔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에도로 보내졌으나, 사쿠마 쇼잔이 암살되면서 번의 에도 저택에 머물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5]

1868년, 교토 궁궐 경비 임무를 맡은 스와 다다아야의 수행원으로 교토로 상경하였으며, 이때 오쿠보 도시미치를 처음 만났는데, 오쿠보의 통행증이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궁궐 입장을 거부했다.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와타나베와 그의 형제는 도쿄로 소환되었고, 대장성에서 오쿠보의 도움으로 자리를 얻었다. 1873년 대장성에 합류했다. 정한론 논쟁과 자유 민권 운동으로 인해 오쿠보는 와타나베를 내무성의 문제 해결사로 불렀고, 1876년 고치현도쿠시마현 지사, 1877년 세이난 전쟁 발발 후 후쿠오카현 지사, 1879년 고치현 지사를 역임했다. 오쿠보 사후, 교토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고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연구했다.[1]

1881년 정부 개편으로 1882년 마쓰카타 마사요시에 의해 재무성 조사국장으로 정부에 복귀, 1886년 예산국장, 1888년 재무 차관을 역임했다.[1]

1892년 시나가와 야지로의 선거 스캔들로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임 후,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정부는 예산 교착 상태에 놓였는데, 야당은 공공 지출 삭감을, 군부는 군함 건조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메이지 천황의 개입으로 해결되었고, 와타나베는 1896년 3월 17일 마쓰카타에게 대장대신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같은 해 8월 27일부터 9월 18일까지 다시 맡았다.[2] 통화 제도 위원회 설립에 참여했다.[3]

제2차 이토 내각에서 1895년 일본 통신성 대신, 이토의 부수상으로도 활동했다.[1]

1900년 입헌정우회 창립 조직자 중 한 명이었으며, 정치적 임명 문제로 이토와 불화를 겪었음에도, 1900년부터 1901년까지 제4차 이토 내각에서 다시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었다.[5] 설탕세와 주세 부과, 정부 기업 축소를 통해 긴축 예산을 시행하려 했으나, 중의원 통과 후 귀족원에서 저지되어 의회 교착 상태를 초래, 결국 사임했다.

사임 이후 공적 활동에서 은퇴했다. 1904년-1905년 러일 전쟁 전 러시아를 방문, 전쟁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했다. 뇌졸중 후 도쿄 아자부 별장, 이후 이즈로 옮겨 1919년 73세로 사망했다. 독신으로 형 치아키의 셋째 아들 와타나베 치후유를 양자로 삼았다. 와타나베는 시와 산문을 썼으며, 고토 연주를 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846년 시나노국 스와군 (후의 나가노현 오카야시)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른 나이에 부모와 사별해 조모의 손에 자랐으며, 후에 번교(藩校)에 들어가 독서와 무예에 힘썼다. 처음에는 같은 신슈(信州) 출신의 사쿠마 쇼잔에게 배우려고 했으나, 쇼잔이 암살됨에 의해 에도 번저(藩邸)에서 일하면서 프랑스어 등을 배웠다.[5]

1868년 교토 어소(京都御所)의 경비를 위해 지방 영주 스와 다다아야를 따라 상경하였으며, 우연히 교토 어소의 경위(警衛)를 맡고 있었을 때, 감찰을 갖고 있지 않은 오쿠보 도시미치가 어소에 들어가려고 한 것을 거부한 것이 오쿠보와의 인연이 되었다.

2. 2. 오쿠보 도시미치와의 만남과 등용

1868년 (메이지 원년), 교토 고쇼의 경비를 위해 번주 스와 다다노리를 따라 교토로 상경하였다. 와타나베가 문 경비를 맡고 있을 때, 오쿠보 도시미치가 감찰 없이 고쇼에 들어가려 하자 이를 거부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쿠보 도시미치의 눈에 띄게 되었다.[1]

1871년 오쿠보에 의해 도쿄의 민부성(民部省)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후에는 대장성에서 대장경(大蔵卿) 오쿠마 시게노부, 조세두(租税頭) 마쓰카타 마사요시, 지조개정국 총재 오쿠보 도시미치 아래에서 지조개정(地租改正)에 관여하였다.[1] 1873년에는 대장성에 합류했다.[1]

정한론을 계기로 자유민권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면서, 1876년 고치현에 권현령(権県令)으로 파견되었고, 그는 내무경이 된 오쿠보에게 현지 사정을 전달하지 않고,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군에 호응해 거병을 일으키려 한 무리들을 진압하였다.[1] 1878년 고치 현령이 됐지만, 1879년 고치 현 내의 군(郡) 합병이 내무경의 허가 없이 행해졌다고 하여 현령에서 물러났다.[1] 이후 오쿠보를 돕는 데 실패한 그는 직책을 사임하고 교토로 은퇴하여 은둔 생활을 했다.[1]

2. 3. 자유민권운동 탄압과 지방관 시절

1871년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선으로 도쿄 민부성(民部省)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대장성에서 대장경(大蔵卿) 오쿠마 시게노부, 조세두(租税頭) 마쓰카타 마사요시, 지조개정국 총재 오쿠보 도시미치 아래에서 지조개정에 참여했다.[1]

정한론을 계기로 자유민권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1876년 고치현 권현령(権県令)으로 파견되었다.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내무경이 된 오쿠보에게 현지 사정을 상세히 알리지 않고,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군에 호응해 거병하려던 세력을 진압했다.[1] 1878년 고치 현령으로 승진했으나, 1879년 고치 현 내 군(郡) 합병이 내무경의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현령 직에서 물러났다.[1]

2. 4. 대장성 복귀와 재정 정책

1881년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대장경이 되면서 와타나베는 후쿠시마현령으로 관직에 복귀했다.[1] 1882년 마쓰카타의 부름을 받아 대장성 조사국장으로 복귀했고, 1886년 회계국장을 거쳐 1888년 대장차관이 되었다.[1] 와타나베는 교토에서 은거하는 동안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우고 일체경을 독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와타나베 구니타케

2. 5. 대장대신 임명과 긴축 재정

1892년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의 선거 대간섭으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총사퇴하고, 제2차 이토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의 원훈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조직했는데, 전임 총리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대장대신으로 유력시되었으나 예상을 뒤엎고 와타나베 구니타케가 기용되었다.[2]

와타나베는 재임 기간 동안 정부 예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야당은 대폭적인 공공 지출 삭감을 요구했고, 군부는 더 많은 군함 건조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은 메이지 천황의 개인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해결되었다.[2] 와타나베는 1896년 3월 17일 마쓰카타에게 대장대신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같은 해 8월 27일부터 9월 18일까지 다시 대장대신 직을 맡았다.[2]

1900년, 와타나베는 이토 히로부미입헌정우회를 결성할 때 창립 조직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4] 그는 정치적 임명 문제로 이토와 갈등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부터 1901년까지 제4차 이토 내각에서 다시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었다.[5] 이 기간 동안 그는 설탕세와 주세 부과, 정부 기업 축소를 통해 긴축 예산을 시행하려 했다. 이 조치는 중의원을 통과했지만, 귀족원에서 저지되어 또 다른 의회 교착 상태를 초래했고, 결국 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와타나베는 긴축 재정을 위해 관영 사업 중지, 사업 연기, 주세, 설탕세 증세를 실시하려 했다. 중의원은 오쿠마 시게노부의 헌정본당의 찬성으로 통과했지만, 귀족원의 반대에 부딪혀 메이지 천황의 칙서로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메이지 34년도 및 메이지 35년도 예산안 편성에 즈음하여 긴축 재정을 주장하며 현재 진행 중인 것을 포함한 모든 공채 발행 사업의 중지를 제안했다. 정부와 정우회는 긴축 예산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당시 진행되던 공채 발행 사업의 완성을 우선시한다는 당내 합의를 얻어낸 직후였다.

이에 대해 구 헌정당 계열 각료뿐만 아니라, 사이온지 긴모치나 가네코 겐타로, 스에마쓰 겐초 등 관료 계열 각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내각 내에서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제4차 이토 내각은 내각 내 불통일로 총사퇴하게 되었다. 이때 와타나베는 사표 제출을 거부하고 이토에게 사표 철회를 요구했지만, 결국 내각 총사퇴 후에 유지 면관되었다.

2. 6. 입헌정우회 창립과 내각 불통일

1900년, 이토 히로부미입헌정우회를 결성할 때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창립 위원으로 참여했다.[4] 같은 해 제4차 이토 내각의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었다.[5]

와타나베는 긴축 재정을 위해 관영 사업 중지, 사업 연기, 주세, 설탕세 증세를 실시하려 했다. 이 정책은 오쿠마 시게노부의 헌정본당 찬성으로 중의원을 통과했지만, 귀족원의 반대에 부딪혔다. 메이지 천황의 칙서로 위기를 벗어났지만, 메이지 34년도 및 35년도 예산안 편성에 즈음하여 긴축 재정을 주장하며 현재 진행 중인 모든 공채 발행 사업 중지를 제안했다.

정부와 정우회는 긴축 예산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지방에서 정우회 대의사에게 쏟아지던 진정을 호시 토루와 하라 다카시가 필사적으로 막고, 당시 진행되던 공채 발행 사업 완성을 우선시한다는 당내 합의를 얻어낸 직후였다.

이에 대해 구 헌정당 계열 각료뿐만 아니라, 사이온지 긴모치, 가네코 겐타로, 스에마쓰 겐초 등 관료 계열 각료들에게도 비난을 받아 내각 내에서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제4차 이토 내각은 내각 불통일로 총사퇴하게 되었다. 와타나베는 사표 제출을 거부하고 이토에게 사표 철회를 요구했지만, 역부족으로 내각 총사퇴 후 유지 면관되었다.

2. 7. 정계 은퇴와 만년

와타나베는 내각의 불통일을 일으키면서 사표를 거부한 일로 인해 실각했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를 외유한 후, 러일 전쟁 전후에는 대러시아 강경론을 주장했으며, 전쟁 후에도 포츠머스 조약 반대를 주장했다. 그 후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아자부의 저택이나 이즈의 별장에서 조용한 만년을 보냈다. 1919년 5월 11일 사망했다. 향년 73세. 묘소는 다마 영원과 킨치인에 있다.[1]

와타나베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형 치아키의 삼남인 치후유를 양자로 맞이했다. 치후유는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 사법대신을 역임했다. 덧붙여, 손자 타케시는 초대 재무관을 지냈다.[1]

와타나베가 독신이었던 이유로, 하토야마 카즈오의 아내이자 하토야마 이치로의 어머니인 하루코에게 실연당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1]

와타나베 구니타케 묘(킨치인)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양부와타나베 마사노리
와타나베 치아키백작
조카와타나베 치후유사법대신, 와타나베 구니타케의 양자
증손와타나베 타케시대장성 재무관
증손와타나베 사토시물리학자
조카와타나베 치하루은행 중역, 부인은 오야마 이와오의 딸[19]
종손와타나베 마코토천황 시종장
조카와타나베 치카
조카사위노요리 킨조
외종손노요리 료지노벨 화학상 수상자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형인 와타나베 치아키의 셋째 아들 와타나베 치후유를 양자로 삼았다.[19]

4. 평가

와타나베 구니타케는 여러 내각에서 대장대신과 체신대신을 역임하며 일본 경제와 통신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재임할 당시 예산 문제로 인한 정치적 교착 상태를 겪었으며, 이는 메이지 천황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2] 또한, 통화 제도 위원회를 설립하여 일본 경제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통화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 기여했다.[3]

1900년에는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갔으나, 제4차 이토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재임할 당시 긴축 예산 정책이 귀족원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사임하게 되었다.

러일 전쟁 전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전쟁을 지지했으며,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말년에는 뇌졸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여 와타나베 치후유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시와 산문에 능했으며, 고토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참조

[1] 서적 The Autobiography of Ozaki Yukio: The Struggle for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Japan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논문 Indemnity consideration in Japanese Financial policy after Sino Japanese war of 1894–95 http://eprints.lib.h[...]
[3] 논문 Why did Countries Adopt the Gold Standard? Lessons from Japan http://cid.bcrp.gob.[...] 2009-07
[4] 논문 Political Leaders of Tokushima, 1868–1912 http://www.eastasian[...] 1993-12
[5] 서적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渡辺国武 https://kotobank.jp/[...]
[7] 간행물 『官報』第1019号「叙任」 1886-11-20
[8] 간행물 『官報』第1635号「叙任及辞令」 1888-12-10
[9] 간행물 『官報』第2776号「叙任及辞令」 1892-09-27
[10] 간행물 『官報』第1791号「叙任及辞令」 1889-06-20
[11] 간행물 『官報』第1929号「叙任及辞令」 1889-12-02
[12] 간행물 『官報』第2100号「叙任及辞令」 1890-07-01
[13] 간행물 『官報』第2357号「叙任及辞令」 1891-05-12
[14] 간행물 『官報』第3000号「叙任及辞令」 1893-06-30
[15] 간행물 『官報』第3644号「叙任及辞令」 1895-08-21
[16] 간행물 『官報』第813号、「宮廷録事 - 恩賜並追賜」 1915-04-21
[17] 간행물 『官報』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18] 웹사이트 中野文庫 - 旧・勲一等旭日大綬章受章者一覧(戦前の部) https://web.archive.[...]
[19] 뉴스 時事新報社第三回調査全国五拾万円以上資産家 https://dl.ndl.go.jp[...] 時事新報 191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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