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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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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사범은 당나라 말기 군벌로, 874년에 태어나 평로군 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는 유교적 통치를 펼치고 민본 정치를 실현했으며, 주전충과의 갈등 속에서 황제를 지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905년 평로군을 떠나 하양 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후량 건국 후 주전충의 명령으로 일가가 몰살당했다. 후량 멸망 후 후당 장종에 의해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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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범
기본 정보
왕사범의 모습
왕사범의 모습
인물 정보
이름왕사범
로마자 표기Wang Sabeom
생몰년연도 미상
시대당나라 말기 ~ 오대십국 시대
출신지의무군
사망년도918년
사인독살
봉호제왕(齊王)
관직 및 직위
절도사태녕군 절도사
평로군 절도사
추증중서령
시호충무(忠武)
가족 관계
아버지왕경숭
동생왕사동
양자왕경인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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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흠
주우정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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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광

2. 당나라 말기 군벌 할거와 왕사범의 등장

왕사범 치하 영토를 포함한 당나라 멸망 전 군벌 지도


당나라 말기는 황소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과 군벌들의 할거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사범은 평로군 절도사 왕경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경무는 평로군을 장악하고 당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나, 그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2. 1. 평로군 절도사 왕경무

889년, 희종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소종이 뒤를 이었다. 이때 왕사범의 아버지 왕경무가 사망하자, 군인들은 당시 15세였던 왕사범이 그 뒤를 잇도록 지지했다. 왕사범은 임시 절도사 직함을 자칭했지만, 왕경무의 부하였던 디주(棣州, 현재의 빈저우, 산둥) 지사 장섬(張蟾)은 왕사범을 지지하지 않고 황실 정부에 다른 절도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소종은 장군 최안전을 평로의 절도사로 임명했고, 장섬은 최안전을 디주로 맞아들여 왕사범에 대한 작전을 조율했다. 891년, 왕사범은 장섬을 공격하기 위해 장교 루홍(盧弘)을 파견했지만, 루홍은 군대를 돌려 청주를 공격하려 했다. 왕사범은 루홍에게 선물을 보내, 만약 루홍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절도를 넘겨줄 의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루홍은 왕사범을 믿고 성에 들어갈 때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왕사범의 부하 유순이 왕사범의 명령에 따라 루홍을 암살했다. 왕사범은 군대를 사열하고 격려한 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디주를 공격하여 장섬을 사로잡아 처형했고, 최안전은 황실 수도 장안으로 도망쳤다. 소종은 그를 평로의 절도사로 임명했다.[1]

2. 2. 왕사범의 가계와 초기 생애

왕사범은 희종 통치 시기인 874년에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왕경무였는데, 왕사범이 태어날 무렵 또는 나중에 평로 절도사가 되었다. 왕경무와 왕사범의 어머니는 모두 평로의 수도인 청주(青州) 출신이었다.[5] 그는 적어도 한 명의 형인 왕사열(王師悅)과 적어도 네 명의 남동생, 즉 왕사극(王師克), 왕사회(王師誨), 왕사로(王師魯), 왕사열(王師悅)이 있었다.[6][7] 881년 또는 882년에 왕경무는 절도사 안사루(安師儒)를 몰아내고 평로를 장악한 뒤, 임시 절도사 직함을 자칭했다.[5] 그는 후에 새로운 제나라 황제를 자칭한 농민 반란 지도자 황소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당나라 관리 장준의 설득으로 당나라에 다시 충성을 바쳤다. 그는 당시 제나라에 대항하는 전반적인 작전을 지휘하던 재상 왕탁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8] 이후 왕탁에 의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5]

889년, 희종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소종이 뒤를 이었을 때, 왕경무가 사망했다. 군인들은 당시 15세였던 왕사범이 그의 뒤를 잇도록 지지했다. 따라서 왕사범은 임시 절도사 직함을 자칭했지만, 왕경무의 부하인 디주(棣州, 현재의 빈저우, 산둥)의 지사인 장섬(張蟾)은 왕사범을 지지하지 않고, 대신 황실 정부에 다른 절도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소종은 장군 최안전을 평로의 절도사로 임명했고, 장섬은 최안전을 디주로 맞아 왕사범에 대한 작전을 조율했다. 891년, 왕사범은 장섬을 공격하기 위해 장교 루홍(盧弘)을 파견했지만, 루홍은 군대를 돌려 청주를 공격하려 했다. 왕사범은 루홍에게 선물을 보내 루홍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루홍에게 절도를 넘겨줄 의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루홍은 왕사범을 믿고 성에 들어갈 때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후, 왕사범의 부하 유순은 왕사범의 명령에 따라 루홍을 암살했다. 왕사범은 그런 다음 군대를 사열하고 그들에게 친절한 말로 격려한 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디주를 공격했다. 그는 장섬을 사로잡아 처형했고, 최안전은 황실 수도 장안으로 도망쳤다. 소종은 그 후 그를 평로의 절도사로 임명했다.[1]

2. 3. 왕사범, 평로군 절도사를 잇다

왕사범은 희종 통치 시기인 874년에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왕경무였는데, 왕사범이 태어날 무렵 또는 나중에 평로 절도사가 되었다. 왕경무와 왕사범의 어머니는 모두 평로의 수도인 청주(青州) 출신이었다.[5] 그는 적어도 한 명의 형인 왕사열(王師悅)과 적어도 네 명의 남동생, 즉 왕사극(王師克), 왕사회(王師誨), 왕사로(王師魯), 왕사열(王師悅)이 있었다.[6][7] 881년 또는 882년에 왕경무는 절도사 안사루(安師儒)를 몰아내고 평로를 장악한 뒤, 임시 절도사 직함을 자칭했다.[5] 그는 후에 새로운 제나라 황제를 자칭한 농민 반란 지도자 황소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당나라 관리 장준의 설득으로 당나라에 다시 충성을 바쳤다. 그는 당시 제나라에 대항하는 전반적인 작전을 지휘하던 재상 왕탁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8] 이후 왕탁에 의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5]

889년, 희종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소종이 뒤를 이었을 때, 왕경무가 사망했다. 군인들은 당시 15세였던 왕사범이 그의 뒤를 잇도록 지지했다. 따라서 왕사범은 임시 절도사 직함을 자칭했지만, 왕경무의 부하인 디주(棣州, 현재의 빈저우, 산둥)의 지사인 장섬(張蟾)은 왕사범을 지지하지 않고, 대신 황실 정부에 다른 절도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소종은 장군 최안전을 평로의 절도사로 임명했고, 장섬은 최안전을 디주로 맞아 왕사범에 대한 작전을 조율했다. 891년, 왕사범은 장섬을 공격하기 위해 장교 루홍(盧弘)을 파견했지만, 루홍은 군대를 돌려 청주를 공격하려 했다. 왕사범은 루홍에게 선물을 보내 루홍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루홍에게 절도를 넘겨줄 의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루홍은 왕사범을 믿고 성에 들어갈 때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후, 왕사범의 부하 유순은 왕사범의 명령에 따라 루홍을 암살했다. 왕사범은 그런 다음 군대를 사열하고 그들에게 친절한 말로 격려한 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디주를 공격했다. 그는 장섬을 사로잡아 처형했고, 최안전은 황실 수도 장안으로 도망쳤다. 소종은 그 후 그를 평로의 절도사로 임명했다.[1]

3. 평로군 절도사 왕사범

왕사범은 평로군 절도사로서 유교적 통치와 민본 정치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노력했으며, 다른 군벌들과의 외교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했다.[6] 인근의 다른 절도사들이 주전충에게 정복당하는 상황에서도 왕사범은 사실상 주전충의 봉신이 되어 세력을 유지했다.[9]

왕사범은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술에 취해 사람을 죽인 외삼촌을 처벌한 일화나,[5] 청주의 중심 현인 익도의 현령에게 존경을 표한 일화[1]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3. 1. 유교적 통치와 민본 정치

왕사범은 학문에 정진하고 유교를 숭상하며 공정한 정치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른 군벌들과 외교 관계를 잘 유지하여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생활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다른 군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6]

한편, 왕사범이 평로를 통치하는 동안, 인근의 세 절도사, 즉 산둥성 태안에 본부를 둔 천평절도사, 산둥성 제녕에 본부를 둔 태녕절도사, 장쑤성 쉬저우에 본부를 둔 감화절도사는 주요 군벌인 주전충(朱全忠)의 선무절도사에게 정복당했다. 그 결과 897년까지 왕사범은 사실상 주전충의 봉신이 되었다.[9]

3. 1. 1. 삼촌 처벌 일화

왕사범의 외삼촌 중 한 명이 술에 취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 가족이 왕사범의 삼촌을 고발하자, 왕사범은 처음에는 많은 현금을 보상으로 주어 가족들을 달래려 했다.[5] 그러나 피해자 가족은 보상을 거절했고, 왕사범은 법을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삼촌을 처벌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에 분노하여 3년 동안 그를 만나주지 않았지만, 왕사범은 매일 세네 번씩 어머니의 집을 찾아가 집 밖에서 절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5]

3. 1. 2. 현령 존경 일화

청주의 중심 현인 익도에 새로운 현령이 부임할 때마다, 왕사범은 직접 현령을 찾아가 존경을 표했다. 그는 현령에게 절하며 스스로를 "백성 왕사범"이라고 칭했다. 그의 부하들이 너무 과도한 겸손이라며 만류하자, 왕사범은 이는 지역 어른들에게 제대로 존경을 표하여 그의 후손들이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답했다.[1]

3. 2. 주전충과의 갈등

898년, 당나라 소종은 왕사범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10]

901년, 한전회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이 소종을 납치하여 장안에서 펑샹절도사(鳳翔, 현재 산시성 바오지시)로 데려갔다. 당시 펑샹절도사는 환관의 동맹 이모진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는 환관들이 소종과 재상 최인이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최인은 주전충을 소환했고, 주전충은 펑샹현을 포위했다.[10][11]

903년 초, 펑샹의 상황이 악화되자 한전회는 소종의 칙령을 발표하여 전국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주전충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왕사범은 주전충에 대항하여 봉기를 준비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유순만이 연주(兗州)를 점령했다. 왕사범은 양행밀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왕모장 등의 지원군과 함께 미주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주전충에게 패배하고 화평을 맺었다.[11][5][7]

3. 2. 1. 주전충에 대한 반격 시도

901년, 환관 세력이 최인의 주도로 소종을 납치하여 펑샹(鳳翔, 현재 산시성 바오지시)으로 데려갔다. 이는 소종과 최인이 환관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최인은 주전충을 불러들여 펑샹을 포위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903년 초, 환관들은 소종의 칙령을 내려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주전충을 공격하도록 했다.[11] 이 칙령은 왕사범을 주전충의 추종자로 지목하고, 양행밀에게 주전충 공격을 명하며 양행밀의 부하 주진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했다.[5] 왕사범은 "우리가 황제를 위한 외부 방어선인데, 천자가 갇히고 굴욕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까?"라며 반격을 결심했고, 은퇴한 재상 장준도 편지로 이를 독려했다.[11]

왕사범은 주전충의 정예군이 펑샹에 집중된 틈을 타, 부하들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선무군의 수도 변주(汴州)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유순만이 연주(兗州)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1]

이에 주전충의 조카 주우녕이 변주에서 왕사범 공격을 준비했고, 개총주가 형주(邢州, 현재 허베이성 싱타이시)에서 소환되었다. 주전충은 추가 병력을 보냈고, 왕사범은 이극용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칭찬 답장만 받았을 뿐, 실질적인 도움은 받지 못했다. 이 시기 이모진은 주전충에게 항복하고 황제를 넘겨 화평을 맺었다.[11] 903년 늦봄, 주전충의 주력군이 선무군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주우녕은 왕사범의 동생 왕사로의 제주 공격을 격퇴하고 왕사범과 유순의 통신을 차단했다.[7]

왕사범은 양행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양행밀은 왕모장을 파견했다. 왕모장과 왕사범의 동생 왕시휘는 연합하여 미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주우녕이 박창(博昌, 현재 빈저우)과 등주(登州, 현재 산둥성 옌타이시)를 점령하면서, 왕사범은 등주와 내주(萊州, 현재 옌타이시) 병력으로 방어에 나섰다. 주전충은 등주 병력을 격파했으나 병력이 지쳤고, 왕사범과 왕모장은 반격하여 주우녕을 죽였다. 주전충이 직접 공격했지만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고, 왕모장은 철수했다. 양행밀의 장군 장순도 미주에서 철수하여 왕사범은 고립되었다. 게다가 동생 왕사개는 주전충의 장군 양사후에게 포로로 잡혔다.[7]

왕사범 군대의 사기는 높았지만, 왕사개가 포로로 잡혔기에 화평을 선택했다.[5] 그는 부절도사 이사업과 왕시월을 보내 항복을 제안하고 왕사로를 인질로 보냈다. 주전충은 이모진과 이계휘의 연합 공격을 우려하여 항복을 수락하고 왕사범을 임시 평로절도사로 재임명했지만, 자신의 장교들을 보내 등주, 내주, 자주(淄州, 현재 산둥성 쯔보시), 지주(Di Prefectures)를 접수하여 왕사범은 청주만 통제하게 되었다. 왕사범의 지시에 따라 유순도 연주를 항복시켰다.[7]

3. 2. 2. 양행밀의 지원과 좌절

898년, 당나라 소종은 왕사범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10]

901년, 환관들이 한전회를 중심으로 소종을 납치하여 황궁 장안에서 펑샹절도사(鳳翔, 현재 산시성 바오지시)로 데려갔다. 당시 펑샹절도사는 환관의 동맹 이모진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는 환관들이 소종과 재상 최인이 그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최인은 주전충을 소환했고, 주전충은 펑샹의 수도 펑샹현을 포위했다.[10][11] 903년 초, 펑샹의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자 한전회는 소종의 칙령을 발표하여 전국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주전충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11] 이 칙령은 특히 왕사범을 주전충의 추종자로 지목했으며, 회남절도사(淮南, 현재 장쑤성 양저우시) 양행밀에게 명령하는 과정에서 양행밀의 부하 주진에게 평로 절도사로 임명했다.[5] 칙령을 읽은 왕사범은 "우리는 황제를 위한 외부 방어선입니다. 우리가 여기 앉아서 천자가 갇히고 굴욕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까? 우리 군대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은퇴한 재상 장준의 편지를 받고 주전충에 대항할 것을 준비했다.[11]

주전충의 정예군 대부분이 펑샹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사범은 자신의 장교들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주전충이 통제하는 영토 전역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봉기를 일으키는 계획을 세웠다. 봉기 지역은 다음과 같다.

지역위치
선무군 수도 변주(汴州)
간화군 수도 서주(徐州)
태녕군 수도 연주(兗州)
천평군 수도 운주(鄆州)
제주(齊州)현재 산둥성 지난시
의주(沂州)현재 산둥성 린이시
하남부(河南)동경 뤄양
맹주(孟州)현재 허난성 자오쭤시
활주(滑州)현재 허난성 안양시
하중부(河中)현재 산시성 윈청시
섬주(陝州)현재 허난성 산먼샤시
괵주(虢州)현재 허난성 산먼샤시
화주(華州)현재 산시성 웨이난시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봉기를 계획한 평로의 장교들은 다른 사람들의 밀고로 인해 미리 체포되었다. 오직 유순만이 연주의 방어자들을 기습하여 점령할 수 있었다.[11]

이에 주전충의 조카 주우녕은 변주에서 왕사범을 공격할 준비를 했고, 개총주를 소환했다. 주전충은 또한 주우녕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 병력을 보냈다. 왕사범은 하동절도사(河東, 현재 산시성 타이위안시) 이극용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이극용은 왕사범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는 이모진이 주전충에게 항복하여 주요 환관들을 학살한 후 황제를 주전충에게 넘겨 화평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1] 903년 늦봄, 주전충의 주력군은 선무군으로 돌아왔고, 주우녕은 왕사범의 동생 왕사로가 제주를 공격하는 것을 격퇴하고 왕사범과 유순 사이의 통신을 차단했다.[7]

자신의 방어 위치가 위험해지자 왕사범은 양행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양행밀은 그의 장군 왕모장을 왕사범을 돕기 위해 보냈다. 그 후 왕모장과 왕사범의 동생 왕시휘의 연합군은 미주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우녕이 박창(博昌, 현재 빈저우시)과 등주(登州, 현재 산둥성 옌타이시)를 점령하면서 왕사범은 등주와 내주(萊州, 또한 현재 옌타이시)의 병력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주전충은 먼저 등주의 병사들을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병력을 지치게 했다. 왕사범과 왕모장은 공동으로 반격하여 전투에서 주우녕을 죽였다. 그 후 주전충이 직접 왕사범과 왕모장을 공격했지만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고, 왕모장은 패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한밤중에 철수했다. 양행밀의 장군 장순 또한 미주에서 철수하여 왕사범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동생 왕사개는 주전충의 장군 양사후가 린취(臨朐, 현재 웨이팡시)를 공격하면서 포로로 잡혔다.[7]

왕사범 군대의 사기는 여전히 매우 높았고 장교들은 주전충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왕사개가 선무군에게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왕사범은 화평을 청하기로 결정했다.[5] 그는 부절도사 이사업과 왕시월을 보내 항복을 제안하고 왕사로가 인질로 복무하도록 했다. 주전충은 왕사범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그를 임시 평로 절도사로 재임명했지만, 자신의 장교들을 보내 등주, 내주, 자주(淄州, 현재 산둥성 쯔보시), 지주를 접수하도록 하여 왕사범은 실질적으로 청주만을 통제하게 되었다. 왕사범의 지시에 따라 유순 또한 연주를 항복시켰다.[7]

4. 평로군을 떠난 이후

왕사범은 905년까지 평로군에 머물렀다. 그해 주전충은 자신의 측근 이진을 왕사범을 대신하여 평로군 임시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진이 도착하자 왕사범은 평로군을 떠나 서쪽으로 변주로 향했다. 왕사범은 푸양에 도착하여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당나귀를 타는 등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변주에 도착했을 때 주전충은 여전히 그를 존경하는 손님으로 대했고, 하양 절도사(본부는 지금의 뤄양)로 임명했다.[12]

4. 1. 후량 건국과 왕사범 일가의 몰살

905년까지 왕사범은 평로에 머물렀다. 그 해 주전충은 자신의 측근 이진을 왕사범을 대신하여 평로의 임시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진이 도착하자 왕씨는 평로를 떠나 서쪽으로 변주로 향했다. 왕사범은 푸양에 도착하여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그 때부터 당나귀를 타며 겸손함을 보였다. 변주에 도착했을 때 주전충은 여전히 그를 존경하는 손님으로 대했고, 그를 하양 절도사(본부는 지금의 뤄양)로 임명했다.[12]

907년 주전충은 당나라의 애제에게 강제로 양위하게 하여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후량을 건국했다(주전충이 태조로 즉위).[2] 이후 왕사범은 하양에서 뤄양으로 소환되어 황궁 호위 장군이 되었다. 한편, 태조가 그의 아들과 조카들을 황자에 봉한 후,[6] 주우녕의 아내는 울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2]

陛下께서는 王氏를 皇族으로 만드시고, 王族들은 모두 榮光과 恩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臣妾의 남편만 不幸을 겪어 王師範의 叛亂으로 戰場에서 죽었습니다. 臣妾의 怨讐는 아직 살아 있고, 臣妾은 苦痛을 받고 있습니다.|폐하께서는 왕씨를 황족으로 만드시고, 왕족들은 모두 영광과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첩의 남편만 불행을 겪어 왕사범의 반란으로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신첩의 원수는 아직 살아 있고, 신첩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중국어

태조는 "이 도적을 잊을 뻔했군"이라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사신을 뤄양으로 보내 왕씨를 몰살하라고 명령했다. 사신이 뤄양에 도착하여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태조의 조서를 발표했다. 왕사범은 큰 연회상을 차리고 그의 일족과 함께 앉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특히 죄인들은 더욱 그렇다. 노인과 아이들이 질서 없이 흩어져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연회가 시작된 후 그는 어린 아이부터 시작하여 일족들을 구덩이로 데려가 처형하도록 명령했다.[2] 왕사범 자신과 그의 형제 왕사휘, 왕사월을 포함하여 약 200명이 죽었다. 925년, 후량이 멸망하고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새로 건국된 후당의 황제(장종)가 되었을 때, 장종은 왕사범에게 사후 명예를 수여하라고 명령했다.[6]

4. 2. 후당 장종의 사후 복권

925년, 후량이 멸망하고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새로 건국된 후당의 황제(장종)가 되었을 때, 장종은 왕사범에게 사후 명예를 수여하라고 명령했다.[6]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vol. 258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vol. 266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Academia Sinica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4] 문서
[5] 서적 New Book of Tang vol. 187 https://zh.wikisourc[...]
[6] 서적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vol. 13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vol. 264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vol. 255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vol. 261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vol. 262 https://zh.wikisourc[...]
[11] 서적 Zizhi Tongjian vol. 263 https://zh.wikisourc[...]
[12] 서적 Zizhi Tongjian vol. 265 https://zh.wikisourc[...]
[13] 서적 자치통감 권258 https://zh.wikisourc[...]
[14] 서적 자치통감 권266 https://zh.wikisourc[...]
[15] 웹사이트 음양력 변환기 http://sinocal.sinic[...] 중앙연구원
[1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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