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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행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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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행밀은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한 인물로, 도적에서 시작하여 군벌로 성장했다. 노주를 점령하고 당나라 조정의 회유로 노주자사에 임명되었으며, 892년 양저우를 점령하여 회남 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장강 중류 지역을 제압하고 오왕에 봉해지는 등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흑운도 친위군단의 지휘권을 서온과 장호에게 넘겨 실권을 잃었다. 양행밀은 주전충과의 대립 속에서 세력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905년 사망하고 장남 양악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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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행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행밀 (楊行密)
작위오왕 (吳王)
출생852년
사망905년 12월 24일
묘소이정에 위치한 흥릉 (興陵)
양 (楊)
행밀 (行密)
작위 정보
작위오왕 (吳王)
재위 기간902년 – 905년
이전오왕으로 선포됨
이후양악 (홍농군왕)
작위 정보
작위홍농군왕 (弘農郡王)
재위 기간895년 – 902년
이전없음
이후오왕으로 선포됨
관직 정보
관직회남절도사 (淮南節度使)
재임 기간887년 – 888년
재임 종류임기
이전진언
이후손유
관직 정보
관직회남절도사 (淮南節度使)
재임 기간892년 – 905년
재임 종류임기
이전손유
이후양악
왕조 정보
왕조
연호천우 (天祐): 904–905
연호 정보당 소종의 연호를 사용함. 905년은 천우 1년이었음.
묘호태조 (太祖) (양부에 의해 추존)
시호처음 무충왕 (武忠王) (당나라에 의해 추존), 나중 효무왕 (孝武王) (양륭연에 의해 추존), 최종 무황제 (武皇帝) (양부에 의해 추존)
개인 정보
양 (楊)
이름행밀 (行密)
화원 (化源)
출생 연도852년
사망 연도905년 11월 24일
사망 장소양주 광릉
부친양부 (楊怤)
배우자정실 주부인, 측실 사부인, 왕부인
자녀슬하 6남 5녀
관직여주 아장(牙將) → 회남 압아(押牙) → 여주자사 → 선흡도관찰사 → 영국군(寧國軍)절도사 → 회남절도사
소속
소속낭유복(郞幼復) → 고병 → (사실상 독자 세력) (명목상) 당 희종 → (명목상) 당 소종

2. 생애

당나라 말 혼란기에 양행밀은 여주 합비(廬州合肥, 현재 안후이성 합비시) 출신으로, 처음에는 도적이었으나 이후 군에 들어가 세력을 키웠다. 고향 노주를 점령한 후 당나라는 회유책으로 그를 노주자사에 임명하였다.[2] 892년 양저우(揚州)를 점령하여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가 되었고, 장강 중류 지역을 제압하여 일대에 세력권을 구축했다. 이후 남하하는 주전충(후량 건국 전)과 대립하며 회하를 경계로 세력을 확보했다. 오월과는 소주(蘇州)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소주는 오월의 차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한 세력을 바탕으로 902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오왕에 봉해졌다. 양행밀은 자립하면서도 당나라의 신하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여 죽을 때까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15]

양행밀의 주요 군사력은 흑운도(黑雲都)라는 친위군단이었다. 흑운도는 도적 무리와 당나라 잔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검은 갑옷으로 무장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양행밀은 흑운도를 이끌고 반대 세력을 제압했으나,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흑운도의 지휘관 서온과 장호(張顥)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1]

905년 양행밀은 병사하였고, 장남 양악이 뒤를 이었다.[4]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당나라 말기 혼란기에 여주 합비(廬州合肥; 현재 안후이성 합비시) 출신인 양행밀은 처음에는 도적이었으나, 이후 군에 들어가 세력을 키웠다. 고향 노주를 점령한 후, 당나라는 회유책으로 그를 노주자사에 임명하였다.[2]

양행밀은 852년 당나라 선종 치세에 태어났으며, 안후이성 허페이의 옛 이름인 루저우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농부였다.[2] 젊은 시절 톈쥔과 그는 친한 친구였고,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6] 그는 젊은 시절 체격이 좋았다고 전해지며, 당나라 희종의 건부(乾符) 연간(874~879)에 산적이 되었다가 붙잡혔다. 그러나 루저우 지사 정기는 그의 비범한 외모에 감탄하여 "그대는 언젠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어찌 산적이 되려 하는가?"라고 말하며 그를 풀어주었다. 양행밀은 이후 루저우 민병대의 병사가 되어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

그러나 그의 지휘관은 그를 경계하여 당시 지사 랑유푸(郎幼復)에게 양행밀을 원정 임무로 보낼 것을 설득했다. 양행밀은 나중에 그의 지휘관을 만나 작별 인사를 할 때, "당신의 목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며 지휘관을 죽이고 민병대를 장악하여 스스로 지휘관이라고 선언했다. 랑유푸는 그를 통제할 수 없었고, 화이난 절도사 고변에게 보고하여 고변이 양행밀을 새로운 지사로 임명해 랑유푸 자신을 교체할 것을 권했다. 고변은 동의했고, 희종은 고변의 추천에 따라 그와 같은 임명장을 발행했다.[7]

중화 3년 (883년), 양행밀은 노주 자사로 임명되어 "회남 절도사" 고변의 휘하에 들어갔다.[7]

2. 2. 노주자사 시절

당나라 말기 혼란 속에 양행밀은 처음엔 도둑이었다가 군에 들어가 세력을 규합하여 고향 노주를 점령하였다. 당나라는 회유책을 써서 그를 노주자사에 임명하였다.[7]

883년, 고변의 부하 유공초와 요귀례가 고변이 총애하는 술사 여용지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여용지는 고변의 신임을 얻어 회남의 정치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다. 여용지는 그들을 고발했고, 고변은 그들을 농민 반란군과 싸우도록 내보냈다. 이후 여용지는 양행밀에게 유공초와 요귀례가 노주를 공격하려 했다는 거짓 정보를 은밀히 전달했다. 양행밀은 유공초와 요귀례를 매복하여 죽이고 고변에게 반란을 계획했다고 알렸다. 고변은 이 사건이 여용지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반란"을 진압한 양행밀을 포상했다.[7]

884년, 고변의 조카 고유가 인근 서주(舒州, 현재의 안칭시, 안후이성) 지사로 재임하던 중 현지 농민 반란군 진유의 공격을 받자 양행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양행밀은 대응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부하 이신부를 보내 진유를 속여 노주에서 대규모 군대가 도착하고 있다고 믿게 했다. 진유는 도주했다. 이후, 당나라 봉국절도사(奉國, 본부는 현재의 주마뎬시, 허난성)였으나 당나라에 반기를 든 진종권이 동생을 보내 노주를 공격하자 양행밀은 전준을 보내 격퇴했다. 한편, 다른 농민 반란군 오경과 이본이 서주를 공격하자 고유는 서주를 버리고(고변에게 처형당했다). 양행밀은 부하 도아와 장훈을 보내 오경과 이본을 공격했고, 도아와 장훈이 오경과 이본을 사로잡아 처형한 후 양행밀은 도아를 서주 지사로 임명했다.[7]

886년, 회남의 지사들이 세력 확장을 위해 제멋대로 서로 공격하는 듯했는데, 수주(壽州, 현재의 루안시, 안후이성) 지사 장오는 부하 위건을 보내 노주를 공격했다. 양행밀은 전준, 이신부, 장훈을 보내 저항하게 했고, 그들은 위건의 공격을 격퇴했다. 한편, 초주(滁洲, 현재의 추저우시, 안후이성) 지사 허경은 서주를 공격했고, 도아는 저항하지 못하고 노주로 도주하여 허경이 서주를 점령하게 했다. 886년, 고변의 명령에 따라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양행밀은 이름을 흥민에서 흥미로 바꿨다.[8]

2. 3. 회남 절도사 장악 전쟁

887년, 고변의 부하 비사다는 여용지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켜 화이난의 수도 양주(揚州중국어)를 포위했다. 당시 여용지는 고변과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고변은 비사다와 타협하려 했지만 여용지는 반대했다. 여용지는 고변의 이름으로 양싱미에게 양주를 돕도록 명령을 보냈다. 양싱미는 책사 위안시(袁襲중국어)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모으고, 인근 허주(和州, 현대의 차오후, 안후이)의 지저우인 쑨돤(孫端중국어)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여 양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여용지는 고변과 그의 조카 고제(高傑중국어)가 자신을 배신하여 이미 양주에서 도망쳐 톈창(天長, 현대의 추저우)에서 합류했고, 비사다의 한때 동맹이었던 장선젠(張神劍중국어)도 합류했는데, 그는 비사다가 그에게 원하는 전리품을 주지 않아 비사다를 배신했다. (이 시점에서 비사다는 친옌에게서 지원을 받았는데, 친옌은 쉬안서 순찰구(宣歙, 현대의 쉬안청, 안후이)의 지휘관이었고, 그는 장선젠에게 전리품 분배는 친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알려 장선젠의 분노를 샀다.)[9]

양싱미는 이 연합군을 이끌고 양주를 포위했다. 친옌과 비사다는 처음에는 포위를 막았지만, 반격 시도는 양싱미에게 격퇴되었고, 그들의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한편, 포위된 양주는 식량이 부족해 심각한 기근과 식인 풍습으로 이어졌다. (포위 중에 친옌은 고변을 죽였고, 양싱미는 이에 대해 크게 애도했다.) 몇 달 후, 양싱미는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를 고려했지만, 어느 날 밤, 여용지의 전 부하 장선웨이(張審威중국어)가 성문을 열어 양싱미의 군대를 들여보냈다. 친옌과 비사다는 도망쳤고, 양싱미는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임시 군사 지휘관 칭호를 주장했고, 여용지와 충성을 의심받는 다른 여러 장교들을 죽였으며, 장선젠도 포함되었다.[9]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진종권의 장군 쑨루가 그 지역에 도착했다. 그는 진종권이 화이난 순찰구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었다. (진종권이 쑨루를 소환하려 하자, 쑨루는 이론상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진종권의 형제 친종헝(秦宗衡중국어)을 죽이고 소환을 거부하여 이 시점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친옌과 비사다는 쑨루와 합세했고, 쑨루는 즉시 양싱미를 위협하는 태세를 취했다. 위안시는 양싱미의 군대가 오랜 포위로 지쳐있고, 양주의 백성들이 기아에 직면해 있어서, 양싱미가 쑨루와 대적할 상태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양싱미에게 도시를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양싱미는 동의했고, 피난을 준비하여 루주로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즉시 실행하지는 않았다.

한편, 화이난 순찰구의 전개에 대해 당나라 조정 역시 피로감을 느끼고, 주취안중 쉬안우 순찰구(宣武, 현대의 카이펑, 허난)의 군사 지휘관에게 화이난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하도록 위임했다. 주전충은 양싱미를 부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부하 리판(李璠중국어)을 임시 군사 지휘관으로 발표했다. 그는 고위 자문관 장옌판(張延範중국어)을 양주로 보내 양싱미에게 자신의 선의와 결정을 전달했다. 양싱미는 처음에 장옌판을 환영했지만, 주전충이 리판을 임시 군사 지휘관으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장옌판은 두려워하며 쉬안우로 도망쳤다. 한편, 리판은 남쪽으로 가는 길에 스푸 간화 순찰구(感化, 현대의 쉬저우, 장쑤)의 군사 지휘관에게 매복당했는데, 그는 주전충이 자신 대신 화이난을 맡게 된 것에 분노했다. 양싱미와 스푸가 모두 그를 배신하자, 주전충은 화이난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는 이후 조정에 양싱미를 임시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 888년 봄, 쑨루(이 시점에서 친옌과 비사다를 죽이고 그들의 군대를 장악했다)는 마침내 양주를 공격하여 쉽게 함락시켰다. 쑨루는 군사 지휘관 칭호를 주장했다. 양싱미는 도망쳤고, 위안시의 제안에 따라 루주로 돌아가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9]

중화 3년 (883년), 양싱미는 노주 자사로 임명되어 "회남 절도사" 고변의 휘하에 들어갔다. 고변은 어리석게도 방사 여용지를 중용하게 되었고, 차츰 여용지가 권력을 잡고 독단적인 행보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회남의 장수 필사탁은 여용지의 독단적인 행보에 불안과 불만을 품고, 중화 5년 (885년), 필사탁은 관찰사 진언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고변은 두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양싱미는 거병하여 모반을 일으킨 필사탁과 진언을 격파하고 양주에 들어가 회남유후를 자칭했다. 그때 성내에서는 기근이 일어났지만, 양싱미는 군량을 주어 민중을 구제했다. 그 후, 양싱미는 진종권·손유의 세력과 강회 지방을 두고 다투었지만, 이내 강회 지방 일대를 점령하고, 경복 원년 (892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회남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 4. 손유와의 전쟁

孫儒중국어가 결국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었던 양행밀은 888년 가을, 남쪽으로 진격하여 중천(鍾傳)이 지배하던 진남절도사(현재의 장시성난창)를 공격해 그 영토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원희(袁襲)는 중천이 수년 동안 진남을 소유하고 있었고 공격에 잘 대비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양행밀에게 조황(趙黃)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양행밀은 이에 동의했고, 당시 상원(上元, 현재의 장쑤성난징)에 있던 독립 장군 손단(孫端)과 장웅(張雄)에게도 조황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9]

조황의 주력이 손유와 장웅의 공격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양행밀은 쉽게 양쯔강을 건너 선주(宣州)를 포위했다. 조황의 동생 조건지(趙乾之)가 치주(池州, 현재의 안후이성츠저우) 지사로 조황을 돕기 위해 오자, 양행밀은 도아(陶雅)를 보내 그를 막았고, 도아는 그를 격파하여 진남으로 도주하게 했다.[9] 889년, 선주에서 식량이 고갈되자 조황의 부하 주진사(周進思)가 그를 내쫓았다. 그는 양주로 도망치려 했으나 전준(田濬)에게 붙잡혔다. 양행밀이 이 소식을 당 소종에게 보고하자 소종은 양행밀을 선주 지사로 임명했다. 한편, 조황의 오랜 친구였던 주전충은 사신을 보내 양행밀에게 조황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행밀은 조황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원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황을 처형하고 그의 머리를 주전충의 사신에게 보냈다.[9]

양행밀은 전준을 보내 창주(常州, 현재의 장쑤성창저우)를 공격하게 했는데, 창주는 전류(錢鏐)의 부하 두릉(杜稜)이 점령하고 있었다. 전준은 두릉을 기습하여 그를 생포하고 창주를 점령했다. 양행밀은 또한 마경언(馬敬言)을 보내 윤주(潤州, 현재의 장쑤성전장)를 점령하게 했고, 마경언은 그렇게 했다. 이후 소종은 선사를 군정으로 승격시켜 영보(寧國)로 이름을 바꾸고 양행밀을 그 절도사로 임명했다. 양행밀은 또한 이우(李友)를 보내 소주(蘇州, 현재의 장쑤성쑤저우)를 점령하게 했으나, 이후 손유가 공격하여 소주를 점령하고 이우를 죽였다. 당시 윤주에 있던 양행밀의 부하 안인의(安仁義) 역시 윤주를 버리고 손유가 윤주를 점령하도록 했다. 손유가 여주(廬州)를 공격했을 때, 양행밀이 여주를 방어하도록 남겨두었던 채주(蔡儔) 역시 손유에게 항복했다.[10]

891년 봄, 손유는 공격을 강화하여 안인의와 전준을 계속 격파하고 선주로 진격했다. 패배로 인해 양행밀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이신부(李神福)와 태몽(臺濛)의 약간의 성공 이후에야 겨우 회복되었다고 한다. 손유는 황지(黃池, 현재의 안후이성우후)까지 진격하여 양행밀의 부하 유위(劉威)와 주언수(朱彥壽)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 후 손유의 군대는 홍수로 피해를 입었고, 그는 철수하여 양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하 강왕(康暀)과 안경사(安景思)를 보내 각각 합주(合州)와 추주(滁州)를 점령하게 했지만, 이신부가 곧 그들을 탈환했다.[10]

이후 양행밀과 주전충은 손유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손유는 이 소식을 듣고 먼저 양행밀을 파괴한 후 주전충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양주의 성인 남녀를 양쯔강 너머로 강제로 끌고 갔고, 노약자들은 살해했다. 손유가 양주를 떠나자 양행밀은 장순(張詢)과 이덕성(李德誠)을 양주로 보내 남아있는 식량을 장악하고 손유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게 했는데, 이는 그가 싸우지 않고도 도시를 점령할 수 있게 했다. 손유는 그 후 광덕(廣德, 현재의 선성)에서 양행밀을 포위했고, 양행밀은 부하 이간(李簡)의 노력으로 겨우 탈출했다. 손유는 그 후 선주로 진격했다. 양행밀은 당시 항주(杭州, 현재의 저장성항저우) 지역을 소유하고 있던 전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류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지만, 양행밀의 군대에 식량을 지원했다.[10]

892년 봄, 손유의 수적으로 우세한 군대가 그를 압박하자, 양행밀은 선주를 포기하고 동관(銅官, 현재의 안후이성퉁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고려했다. 유위, 이신부, 그리고 대우귀(戴友規)는 손유가 양행밀을 빠르게 파괴할 수 있다고 믿어 식량을 최소한으로 가져왔고, 양행밀이 손유와 교전하지 않고 손유의 군대를 지치게 하면 그를 파괴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양행밀을 만류했다. 대우귀는 더 나아가 양행밀에게 영보로 피난했던 양주 난민들을 양주로 돌려보내 정착하게 하여 손유의 군대가 양주를 놓치도록 시도하게 했다. 한편, 장순과 양행밀의 다른 부하들은 창주와 윤주를 다시 점령했다. 석보(石) 역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장순과 이덕성이 그의 군대를 격퇴하고 추주(楚州, 현재의 장쑤성화이안)를 점령했다.[11]

892년 여름, 손유의 군대는 충분히 지쳐 양행밀의 군대가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장순은 손유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더 나아가 손유의 군대는 질병으로 고통받았고, 손유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렸다. 식량이 고갈되자 그는 부하 유건봉과 마인(馬殷)을 인근 시골로 보내 식량을 약탈하게 했다. 양행밀은 손유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공격을 가해 그를 격파했다. 전준은 전장에서 손유를 생포했고, 양행밀은 손유를 처형하여 그의 머리를 당 소종에게 보냈다. 손유의 군대 대부분이 양행밀에게 항복했지만, 유건봉과 마인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양행밀은 승리하여 양주로 돌아가 다시 본거지로 삼았고, 전준을 선주에, 안인의를 윤주에 주둔시켰다. 소종은 양행밀의 보고를 받고 그를 회남절도사로 임명했으며, 전준을 영보의 절도사 대행으로, 안인의를 윤주의 지사로 임명했다.[11]

2. 5. 회남 통치

892년 양저우(揚州)를 점령하여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가 된 양행밀은 장강 중류 지역을 제압하여 일대에 세력권을 구축했다. 이후 남하하는 주전충(당시에는 후량 건국 전)과 대립하며 회하를 경계로 세력을 확보했다. 오월과는 소주(蘇州)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소주는 오월의 차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한 세력을 바탕으로 902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오왕에 봉해졌다. 양행밀은 자립하면서도 당나라의 신하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여 죽을 때까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15]

양행밀의 주요 군사력은 흑운도(黑雲都)라는 친위군단이었다. 흑운도는 도적 무리와 당나라 잔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검은 갑옷으로 무장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양행밀은 흑운도를 이끌고 반대 세력을 제압했으나,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흑운도의 지휘관 서온과 장호(張顥)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1]

905년 양행밀이 사망하자 장남 양악이 뒤를 이었다.[4]

2. 5. 1. 초기 통치

양행밀은 검소하게 생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세금 부담을 줄이고 인근 지역과의 상업을 장려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회남 지역을 빠르게 복구했다.[11] 그는 손유에게 항복했던 병사 5,000명을 흑운군(黑雲都)이라는 정예 부대로 편성하여 전투의 선봉에 세웠다.[11]

한편, 손유에게 항복했던 여주(廬州) 지주 채주(蔡縐)는 서주(舒州) 지주 예장(倪章)과 함께 양행밀에게 저항했다. 채주는 양행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전충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주전충은 이를 거부하고 양행밀에게 알렸다.[11] 양행밀은 이신부(李神福)를 보내 채주를 공격하고, 893년 가을 여주를 함락시켜 채주를 처형했다.[11] 그는 채주의 조상 무덤을 파헤치라는 제안을 거부하며 "채주의 행동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그를 경멸한다. 내가 어찌 그의 방식을 따르겠는가?"라고 말했다.[11] 이후 전준을 보내 예주(歙州)를 공격했고, 예주 백성들이 도야(陶雅)를 지주로 임명하면 항복하겠다고 하자 이를 수용하여 예주를 복속시켰다.[11]

894년 봄, 무창 절도(武昌節度) 소속 황주(黃州) 지주 오도(吳討)가 양행밀에게 항복했다.[11] 두홍이 황주를 공격하자, 양행밀은 주연수를 보내 오도를 지원하여 무창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11] 양행밀과 주전충의 관계는 사주(泗州) 지주 장간(張諫)의 항복과 주전충의 차 압수 사건으로 악화되었다.[11] 895년 봄, 양행밀은 소종(昭宗)에게 주전충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2] 이후 양행밀은 수주(壽州)를 점령하고 주연수를 무관(團練使)으로 임명하여 현무(玄武)의 반격을 막아냈다.[12]

의승 절도(義勝) 절도사 동창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진해 절도(鎮海) 절도사 전류는 이를 핑계로 동창을 공격했다.[12] 양행밀은 전류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숙주(蘇州)를 공격했지만, 전류는 896년 여름 동창을 처형하고 의승을 점령했다.[12] 전류, 두홍, 종전(鍾傳)은 양행밀을 견제하기 위해 주전충과 동맹을 맺었다.[12] 소종은 양행밀에게 태부(太傅)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명예 직위를 수여하고 홍농왕(弘農王)으로 봉했다.[2]

897년 봄, 주전충은 천평 절도(天平)와 태녕 절도(泰寧)를 장악하고 회남으로 진격했다.[13] 양행밀은 주진(朱瑾)을 선봉으로 삼아 회하에 둑을 쌓고 물을 터뜨려 방사고의 군대를 궤멸시켰고(청구 전투), 주연수는 갈종주의 군대를 격파했다.[13] 이 승리로 양행밀은 회하와 장강 사이의 영토를 확고히 지배하게 되었다.[13]

898년 봄, 전류, 종전, 두홍, 왕사범은 소종에게 주전충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양행밀을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소종은 거부했다.[13] 주전충은 충의 절도(忠義)를 공격하여 조광린을 사로잡았고, 풍국 절도(奉國) 절도사 최홍(崔洪)은 부하 최경사에 의해 양행밀에게 투항했다.[13]

2. 5. 2. 후기 통치

양행밀은 오랜 전쟁으로 인구가 줄어든 회남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검소하게 생활하고 농업을 장려했다. 또한 세금 부담을 줄이고, 이웃 지역과의 상업을 장려하여 회남을 빠르게 회복시켰다.[11] 그는 손유에게 항복했던 병사 5,000명으로 흑운군(黑雲都)이라는 정예 부대를 조직하여 다른 군벌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세웠다.[11]

한편, 손유의 부하들 대부분은 양행밀에게 항복했지만, 이전에 양행밀의 부하였다가 손유에게 항복했던 채주예장과 함께 양행밀에게 저항했다. 채주는 양행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전충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주전충은 채주의 배신을 혐오하여 거절하고 이 사실을 양행밀에게 알렸다. 양행밀은 주전충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신부를 보내 채주를 공격하게 했으며, 893년 가을 여주를 함락시키고 채주를 처형했다. 그러나 채주의 조상 무덤을 파헤치라는 제안은 거부했다.[11] 이후 전준을 보내 예주를 공격했고, 예주 백성들이 도야를 지주로 임명하면 항복하겠다고 하자 양행밀은 이를 수용하여 예주를 항복시켰다. 양행밀은 황제가 임명한 지주 배수를 존경하여 황실 정부로 돌려보냈다. 한편, 예장은 서주를 버리고 도망쳤고, 양행밀은 이신부를 서주 지주로 임명했다.[11]

894년 봄, 무창 절도에 속한 황주 지주 오도가 양행밀에게 항복했다. 두홍이 황주를 공격하자, 양행밀은 주연수를 보내 오도를 지원했고, 이로 인해 무창과의 수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도는 이후 두홍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사임했고, 양행밀은 구장에게 지주직을 넘겨주었다.)[11] 한편, 양행밀과 주전충의 관계는 두 번의 분쟁으로 악화되었다. 주전충의 사신이 사주 지주 장간을 모욕하자 장간은 양행밀에게 항복했고, 양행밀의 부하 당령회가 변주에서 차를 팔아 이익을 보려 하자 주전충은 당령회를 구금하고 차를 압수했다.[11] 895년 봄, 양행밀은 소종에게 주전충의 죄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소종의 조정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양행밀은 이후 수주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주연수를 수주의 무관(團練使)으로 임명했다.[12]

한편, 의승 절도사 동창이 스스로를 낙평(羅平)의 황제로 칭했다. 진해 절도사 전류는 이를 핑계로 동창을 공격하려 했다. 양행밀은 전이 동창을 정복하는 것을 원치 않아 전을 설득하려 했고, 동창에게 황제 칭호를 취소하고 소종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양행밀은 태맹을 보내 숙주를 공격하는 한편, 동창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양행밀이 직접 숙주를 포위하여 점령했지만, 전의 동창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896년 여름, 동창은 결국 전에게 항복했고, 전은 동창을 처형하고 의승을 점령했다(이후 진동(鎮東)으로 개명). 한편, 전, 두홍, 종전은 모두 양행밀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주전충과 동맹을 맺었다.[12] 이 무렵 소종은 양행밀에게 태부(太傅)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명예 직위를 수여하고 홍농왕(弘農王)으로 봉했다.[2]

897년 봄, 주전충은 전문주진을 격파하고 황하와 회하 사이의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진은 이극용이 보낸 시염, 이승사와 함께 회남으로 도망쳤다. 양행밀은 직접 고우(高郵)로 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전에 회남 군대가 수전에만 능했는데, 천평, 태녕, 하동에서 온 야전 병사들이 합류하여 야전 전투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극용은 양행밀에게 시염과 이승사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양행밀은 그들을 잘 대우했기 때문에 시염과 이승사는 실제로 하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회남에서 복무했다.[13]

897년 봄, 양행밀은 무창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주전충은 주우공을 보내 황주를 공격하게 했다. 구장은 주우공의 공격에 대응하여 황주를 버렸지만, 이후 주우공에게 사로잡혔다. 한편, 주전충은 회남을 다음 목표로 삼고, 방사고를 청구(清口)로, 갈종주를 안풍(安豐)으로 보내는 척했다. 회남 사람들은 주전충의 군대에 크게 당황했지만, 양행밀은 주진을 선봉 지휘관으로 삼아 회하에 둑을 건설했다. 양행밀이 방사고를 공격하자, 주진은 물을 터뜨려 방사고의 군대를 침수시키고, 양과 함께 방사고를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주연수 또한 갈종주의 군대를 격파했다. 두 장군이 모두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전충도 물러섰다. 이 청구 전투로 양행밀은 회하와 양쯔강 사이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했다.[13]

898년 봄, 전류, 종전, 두홍, 왕사범은 소종에게 주전충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양행밀에 대한 군사 작전을 선포할 것을 요청했지만, 소종은 거부했다. 한편, 주전충의 패배 소식을 들은 조광녕은 양행밀과 동맹을 맺었지만, 주전충이 이를 알아채고 충의를 공격하여 조광녕은 양과의 동맹을 포기했다. 마찬가지로, 주의 가신인 풍국 절도사 최홍 또한 양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고, 주가 이를 발견했을 때, 주는 장존경을 보내 최홍을 공격하게 했다. 최홍은 동생 최현을 인질로 보내고 주의 작전에 2,000명의 병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여 공격을 막았다. 그 후, 주가 최현을 풍국으로 돌려보내 약속한 2,000명의 병사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을 때, 최홍의 부하 최경사는 최현을 암살하고 최홍을 사로잡아 병사들과 함께 양의 영토로 도망쳤다.[13]

899년 봄, 양행밀과 주진은 간화의 수도 서주(徐州)를 공격했다. 주전충은 장귀후를 서주를 구원하게 한 후,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뒤따랐다. 양행밀은 주전충의 도착 소식을 듣고 물러났다.[13] 900년, 소종 황제는 양행밀에게 시중(侍中)이라는 명예로운 재상 칭호를 하사했다.[14]

901년 가을, 양행밀은 전류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사실로 믿고, 이신부를 보내 전류의 진해절도를 공격하게 했다. 전류는 고전무를 보내 저항했지만, 이신부는 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신부는 곧 전류가 암살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류의 반격을 막기 위해 그는 전류의 고향인 임안(臨安)을 점령한 상태에서 전류의 조상 무덤을 보호하고, 고전무를 집으로 편지를 쓰도록 허용했다. 또한 대규모 회남 지원군이 오는 척했다. 전류로부터 막대한 금전을 갈취한 후, 그는 물러났다.[14] (양행밀은 나중에 고전무를 진해로 돌려보내는 대신, 전류가 수주를 되찾았을 때 포로로 잡혔던 회남의 관리 진패를 돌려받았다.)[15]

901년 말, 환관들이 소종 황제와 재상 최인의 그들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알게 되자, 최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에 최인은 주전충을 군대와 함께 황도 장안으로 소환했다. 주전충의 도착 소식을 들은 환관들은 한전휘를 중심으로 소종 황제를 납치하여 이모진 영토로 도망쳤다. 주전충은 봉상의 수도 봉상부를 포위했다.[14] 봉상이 포위되자 소종 황제는 902년 봄에 양행밀에게 동쪽 절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리고, 중서령(中書令)이라는 명예로운 재상 칭호를 하사했으며, 그를 오왕으로 봉했다. 조서는 양행밀에게 동쪽에서 주전충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조서는 장준의 아들 이연이 전달했는데, 소종 황제는 그에게 황실의 성씨인 이씨를 하사했다. 이연은 이후 양행밀의 영토에 남아 당 황제의 대표로 봉사했지만, 양행밀도 스스로 황제의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양행밀은 그 후 주전충을 상대로 한 작전을 준비했다.[15]

양행밀이 주전충을 상대로 한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녕국절도사 전준은 장웅의 부하인 풍홍탁을 공격하려 했다. 풍홍탁은 인상적인 함대를 가지고 있었고 양행밀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준은 스스로 함대를 건조했고, 풍홍탁은 양행밀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사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함대를 이용하여 녕국의 수도 선주를 선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풍홍탁이 전준과 교전했을 때, 전준은 그를 격파하고 함대를 궤멸시켰다. 풍홍탁은 양행밀에게 복종했고, 양행밀은 그를 회남 부절도사로 임명했다. 양행밀은 이신부를 승주의 지사로 보냈다.[15]

풍홍탁의 위협이 끝나자 양행밀은 주전충의 영토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이승사를 회남 본부에서 책임자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식량 보급 문제에 직면했는데, 식량 수송에 사용된 대형 선박이 운하에 갇혔기 때문이다. (서온은 대신 소형 선박으로 군대를 보급할 것을 제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양행밀은 서온의 조언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를 승진시켰다.) 그 후 회남군이 수주를 공격했지만 신속하게 점령할 수 없게 되자 양행밀은 물러났다. (양행밀의 작전이 실패하면서, 903년까지 이모진은 한전휘와 한을 따르는 다른 환관들을 죽이고 소종 황제를 주전충에게 항복하여 강화를 요청해야 했다. 주전충은 이후 남은 환관들을 학살하고 소종 황제를 장안으로 데려가 효과적으로 통제했다.)[15]

902년 가을, 전류의 부하 서완과 허재사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켜 항주를 탈취하려 했다. 그들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그들은 전준을 유인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전준이 항주에 도착하자, 그는 항주를 포위하고, 전류가 항복하면 더 이상의 추격 없이 진동절도로 물러나도록 허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전류는 거절했고, 고전무의 제안에 따라 전준을 막기 위해 양행밀의 도움을 구하기로 결정했다(이 시점에서 그는 여전히 양행밀의 봉신이었다). 그는 아들 전전료와 함께 고전무를 회남으로 사신으로 보냈다. 고전무는 양행밀에게 전준이 진해를 점령하면 그의 권력이 크게 증가하고 양행밀을 위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양행밀이 전준에게 철수를 명령하면, 전류가 전전료를 인질로 남겨두겠다고 제안했다. 양행밀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전전료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양행밀은 그 후 전준에게 철수를 명령했고, 그렇지 않으면 양행밀이 다른 사람을 보내 녕국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위협에 직면한 전준은 전류로부터 금전을 갈취하고 아들(전천관)을 인질로 삼게 한 후 철수했다.[15]

903년 봄, 양행밀은 이신부를 두홍의 무창절도를 공격하도록 보냈고, 유존이 이를 도왔다.[15] 한편, 왕사범은 봉상 포위 기간 동안 소종 황제의 조서를 받아 주전충을 공격했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주전충의 압도적인 공격에 직면하게 되자 양행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양행밀은 왕경인을 보내 그를 도왔고, 수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곧 수주에서의 공격을 철회했다. 또한 왕모장은 처음에는 왕사범과 협력하여 현무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 현무의 공격을 무기한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평로에서 철수하여 왕사범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903년 겨울까지 왕사범은 주전충에게 다시 복종해야 했다.[6]

한편, 전준은 전해에서 물러나도록 강요당한 것에 대해 양행밀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전해졌다. 그의 원한은 그가 양주에 가서 양행밀을 만나 녕국에 속했던 치주와 사주를 녕국에 반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양행밀이 거절했을 때 더욱 커졌다. 903년 여름, 전준과 당시 윤주의 부사로 있던 안인의는 양행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주연수를 유인하여 그들에게 합류하게 했다. 그리고 주전충에게 사신을 보내 그들을 돕기 위해 회남을 공격하는 척했다. 위협에 직면한 양행밀은 무창을 공격하고 있던 이신부를 불러들여 전준을 공격하게 하고, 왕모장과 서온을 안인의 공격하도록 보냈다. 양행밀은 주연수가 자신을 배반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뇌졸중에 걸린 척하며 아내인 주부인에게 주연수에게 본부를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양행밀의 말을 주연수에게 전달하는 편지를 썼다. 양행밀은 그 후 주연수를 양주로 소환했다. 양행밀의 진심을 믿고 주연수는 와서 체포되었고 양행밀에게 처형되었으며, 양행밀은 주연수의 형제들을 처형하고 주부인과 이혼했다.[6]

한편, 이신부는 전준의 부하 왕단과 왕건에 대해 초기의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전준은 선주를 떠나 이신부와 직접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이신부의 제안에 따라 양행밀은 전준이 선주를 떠난 후 태맹을 보내 선주를 공격하게 했다. 태맹이 도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준은 선주로 돌아와 태맹과 교전했다. 태맹은 양행밀의 이름으로 전준의 부하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들은 여전히 양행밀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 다음 공격을 가해 전준을 격파했다. 전준은 선주로 도망쳤다. 태맹은 선주를 포위했고, 전준이 반격을 시도하자, 태맹은 그를 격파하고 죽였다. 양행밀은 전준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전준의 어머니인 은부인을 사면하고, 그녀를 어머니로 계속 존경했다. 또한 그는 이전에 자신에게 반대했던 전준의 부하들을 자신의 부하로 편입했다.[6] (안인의는 계속 버텼고, 905년 봄까지 격파되어 처형되지 않았다.)[4]

전준이 격파되자 양행밀은 이신부를 녕국의 새로운 절도사로 임명했지만, 이신부는 이를 거절하고 무창에 대한 작전을 재개했다.[6] 대신 양행밀은 태맹을 지사(절도사가 아닌)로 임명했다.[4] 양행밀은 또한 고전무와 전전료를 전전료의 아내(그의 딸)와 함께 전류에게 돌려보냈다. 한편 주전충은 장안을 파괴하고 소종 황제를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도록 강요했다. 낙양으로 가는 여정에서 소종 황제는 양행밀, 이극용, 왕건에게 그를 구출할 시도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마지막 비밀 통신문을 보냈다. 세 명 중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충이 사신을 보내 양행밀에게 무창 공격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 했을 때, 양행밀은 "만약 천자가 장안으로 복귀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당신과의 관계를 재건할 것입니다."라고 응답했다.[6]

904년 여름, 이신부는 무창을 공격하는 동안 병에 걸려 사망했다. 양행밀은 그를 유존으로 대체했다.[4] 한편 태맹도 죽었고, 양행밀은 태맹을 그의 장남 양악으로 대체했다.[4] 904년 겨울, 주전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창을 구원하려 했고, 다른 부하들을 보내 회남 영토를 약탈했다. 그는 또한 조연좌를 무창의 수도 어주(鄂州)로 보내 유존의 포위 속에서 두홍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905년 봄까지 유존은 어주를 점령하고 두홍과 조연좌를 포로로 잡았다. 그는 그들을 양주로 보내 처형했고, 양행밀은 무창을 자신의 영토에 합병할 수 있었다.[4]

그동안 조광녕은 양행밀과 왕건 모두와 계속 연락을 유지했는데, 이 상황은 결국 주전충의 분노를 샀다. 905년 여름, 그는 조광녕과 그의 형제 조광명을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조 형제는 궤멸되었고 조광녕은 회남으로 도망쳤고 조광명은 서천으로 도망쳤다. 주전충은 그들의 영토를 자신의 영토에 합병했다. 그의 성공 이후 그는 동쪽으로 향하여 회남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지만, 폭풍을 만나 철수했다.[4]

한편, 양행밀은 병이 깊어졌고,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 자연스러운 후계자는 그의 아들 양악이었지만, 회남의 참모들은 모두 양악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가지고 있었다. 양행밀이 주은에게 이 문제를 꺼내고 주은에게 선주에서 양악을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리라고 말했을 때, 주은은 이에 반대하며 양악이 술과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부적절한 후계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신 주은은 양행밀이 유위에게 절도를 맡기고 양행밀의 어린 아들들이 나이가 들면 그들 중 한 명에게 절도를 넘겨주도록 하는 제안을 했다. 서온과 장호는 이 제안을 실행 불가능하다고 비난했다. 양행밀이 다시 주은에게 양악을 소환하라고 말했을 때, 주은은 그런 명령을 작성했지만, 보내는 것을 미루었다. 그러나 서온과 장호는 그 명령을 찾아 보내었고, 양악은 905년 겨울에 양주에 도착했다. 양행밀은 그를 회남의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했고, 곧 사망했다. 회남 참모들의 요청에 따라 이연은 당 황실의 권위에 따라 양악을 새로운 회남 절도사 및 동쪽 절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양행밀의 뒤를 이었다.[4]

3. 가계도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국부인(國夫人)연국부인(燕國夫人)주씨(朱氏)주연수의 여동생
군군(郡君)태비(太妃)사씨(史氏)무창군군(武昌郡君)
태부인(太夫人)
? ~ 919년
태비(太妃)정목황후(貞穆皇后)왕씨(王氏)황태후(皇太后)? ~ 928년



양행밀에게는 여러 아들과 딸이 있었으나, 아들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있는 반면 딸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3. 1. 부모


  • 양부

3. 2. 부인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국부인(國夫人)연국부인(燕國夫人)주씨(朱氏)주연수의 여동생
군군(郡君)태비(太妃)사씨(史氏)무창군군(武昌郡君)
태부인(太夫人)
? ~ 919년
태비(太妃)정목황후(貞穆皇后)왕씨(王氏)황태후(皇太后)? ~ 928년


3. 3. 자녀

양행밀에게는 여러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들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있지만, 딸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3. 3. 1. 아들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홍농군왕양악886년 ~ 908년태비 사씨양오 제2대 군주
2홍농군왕양융연897년 ~ 920년태비 사씨양영, 양위양오 제3대 군주
3임천왕양몽? ~ 937년여강군공, 상산왕, 역양군공, 패역서인
4단양군공양부900년 ~ 938년정목황후 왕씨양오 제4대 군주
5신안군공양심? ~ 919년
6덕화왕양철파양군공, 평원왕


  • 열조 양악(楊渥중국어) - 어머니는 사씨 부인
  • 고조 양융연(楊隆演중국어) - 어머니는 사씨 부인
  • 임천왕 양몽(楊濛중국어)
  • 예제 양부(楊溥중국어) - 어머니는 왕씨 부인
  • 신안공 양심(楊潯중국어)
  • 덕화왕 양철(楊澈중국어)

3. 3. 2. 딸

순서봉호(공주)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심양장공주(尋陽長公主)890년 ~ 927년유신의 아내
2공주전류의 아들인 전원료錢元璙|전원료중국어의 아내
3공주장연휘蔣延徽|장연휘중국어의 아내
4공주남당이욱의 아들의 아내이자, 이후 서걸의 아내
5공주유인규劉仁規|유인규중국어의 아내
6순양공주서계의 아내


참조

[1] 문서 Adopted the era name of [[Emperor Zhaozong of Tang]]. 905 was the 1st year of ''Tiānyòu''.
[2]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https://archive.org/[...]
[3] 웹사이트 Academia Sinica http://sinocal.sini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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