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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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쌍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정사에서는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촉한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롱시군 적도 출신으로, 뛰어난 무예와 유성추를 사용하는 용맹한 장수로 묘사되며,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우다 위연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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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쌍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왕쌍 |
원어 이름 | 王雙 |
로마자 표기 | Wáng Shuāng |
자 | 자전(子全) (《삼국지연의》에서만 등장) |
출생 | 미상 |
사망 | 228년 또는 229년 |
직업 | 군인 |
소속 | |
소속 국가 | 조위 |
섬긴 군주 | 조비 → 조예 |
기타 | |
관련 인물 | 왕쌍 (동음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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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사에서의 행적
왕쌍은 조인의 부하로 오나라와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으나, 이후 풀려나 촉한과의 전투에서 제갈량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23년, 유비(劉備)와 육손(陸遜)이 싸우는 틈을 타 위나라 조인(曹仁)이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주환(朱桓)에게 패했다. 이때 왕쌍은 오군에게 사로잡혀 무창으로 보내졌으나, 어떻게 위나라로 돌아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왕쌍은 촉한과의 전투를 위해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제갈량의 침략에 저항하는 임무를 맡은 위나라 장수 조진의 부하로 복무했다. 진창 공방전에서 위나라 장교 호질은 1,000명의 병력으로 촉한에 맞서 진창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위나라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텼다.
『삼국지』에는 왕쌍에 대해 조인 휘하에서 오를 침공해 포로가 된 뒤 석방되어 조진 휘하에서 촉한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밖에 없으므로, 이 두 사건에 등장하는 왕쌍이 같은 인물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불분명하다.
2. 1. 오나라와의 전투 (222년)
왕쌍은 처음에 위나라 장수 조인의 부하인 상조 휘하의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 222년, 조인이 보병, 기병, 수군으로 구성된 수만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오나라 장수 주환을 공격했을 때,[2] 상조는 오나라 병사들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중주 섬을 기습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3] 왕쌍은 상조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고, 그들은 저항 없이 중주에 상륙했다. 당시 주환은 위나라 주력 군대와 싸우느라 바빴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왕쌍과 상조를 상대하도록 지시한 후 매복을 쳐 적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계획대로 왕쌍과 상조는 매복에 걸렸다. 그들이 해안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배가 이미 빼앗겼고 퇴각로가 막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조는 죽을 때까지 싸웠고, 왕쌍은 오나라 군대에 사로잡혔다.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약 1,000명의 위나라 병사가 사망했고, 나머지 부대는 항복했다.[4]황초 3년(222년), 조비(문제)의 명을 받아 조인을 따라 오나라로 원정하여 유수 공격에 참여했다. 조인이 유수독 주환에게 대패하자 생포되어 무창으로 보내졌다(유수구의 전투).
2. 2. 제갈량의 북벌과 최후 (228년)
228년, 제2차 북벌에서 제갈량(諸葛亮)이 진창을 포위했으나, 학소(郝昭)가 굳게 지켜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 왕쌍은 촉군을 추격했으나, 제갈량에게 패하여 전사했다.[4]태화 2년(228년) 겨울, 진창성을 포위했던 촉한군이 병량 부족으로 철수했을 때[5], 조진 휘하에서 기병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 군의 반격에 패해 전사했다(진창 전투).[4]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왕쌍은 조진의 추천으로 조예에게 발탁되어 촉군과의 전투에 참여한다. 그는 60근이 넘는 칼과 유성추를 다루는 뛰어난 무예를 지닌 장수로 묘사된다. 진창 전투에서 사웅과 공기를 죽이고 장억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위연에게 죽임을 당한다.[1]
3. 1. 뛰어난 무예와 용맹
왕쌍은 삼국지연의에서 적도 출신이며, 자는 자전(子全)으로 묘사된다. 촉군을 막기 위해 출정하는 조진이 조예에게 천거하여 촉군과 싸우게 되었다. 키가 아홉 자에 달하고 60근이 넘는 칼과 유성추를 잘 다루는 것으로 나온다. 조예는 왕쌍을 호위장군(虎威將軍)에 임명했다.진창 전투에서 왕쌍은 촉군을 공격하여 사웅(謝雄)과 공기(龔起)를 죽이고, 장억에게 부상을 입혀 촉군의 사기를 꺾었다. 제갈량이 퇴각하자, 왕쌍은 조진의 명을 받아 촉군을 뒤쫓다가 위연에게 죽임을 당했다.[1]
유성추를 사용하는 솜씨로 유명한 왕쌍은 진창 전투에서 조진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선봉 부대를 이끌고 촉나라 군대와 교전하였다. 촉나라 장수 장니를 심하게 부상시키지만, 요화와 왕평이 장니를 구출하여 그를 처치하는 데 실패한다. 왕쌍은 결국 한중 근처에서 화공으로 위연에게 최후를 맞이한다.[2]
《삼국지연의》에서 왕쌍의 자는 '''자전'''(《요코야마 삼국지》에서는 '''자금''')이며, 롱시군 적도현(현재의 간쑤성 딩시시 린타오현)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젊은 나이에 조진을 따라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어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싸운다. 60근(후한~삼국시대 척도로 약 13kg)의 대도를 휘두르고, 쇠로 된 강궁을 가볍게 당기는 완력에 더해 유성추라는 쇠구슬을 던져 백발백중이라고 자부하는 솜씨를 지녔다. 촉나라의 사웅과 궁기를 쳐 죽이고, 장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제갈량의 계략에 빠진 위연에게 참살당한다.[3]
3. 2. 위연과의 대결과 죽음
삼국지연의에서 왕쌍은 간쑤성 딩시시 적도 출신이며, 자는 자전(子全)이다. 조진이 조예에게 천거하여 제갈량을 막기 위해 촉군과 싸우게 되었다. 키가 아홉 자에 달하고 60근이 넘는 칼과 유성추를 잘 다루는 것으로 묘사된다. 조예는 왕쌍을 호위장군(虎威將軍)에 임명했다.왕쌍은 진창 전투에서 촉군을 공격하여 사웅(謝雄)과 공기(龔起)를 죽이고, 장억에게 부상을 입혀 촉군의 사기를 꺾었다. 제갈량은 조진을 격파한 후 촉으로 퇴각했는데, 왕쌍은 조진의 명을 받자마자 촉군을 뒤쫓다가 위연에게 죽임을 당했다.[1] 한중 근처에서 화공으로 위연에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되기도 한다.[2]
4. 평가 및 의의
왕쌍은 조비의 명을 받아 조인을 따라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주환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다.[5] 이후 석방되어 조진 휘하에서 촉한과 싸우다 제갈량에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지』에는 왕쌍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어,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4. 1. 정사와 연의의 차이
왕쌍은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삼국 시대 전후의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왕쌍은 유성추를 사용하는 솜씨로 유명하다. 진창 전투에서 조진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선봉 부대를 이끌고 촉나라 군대와 교전한다. 촉나라 장수 장니를 심하게 부상시키지만, 요화와 왕평이 장니를 구출하여 왕쌍을 처치하는 데는 실패한다. 왕쌍은 결국 한중 근처에서 화공으로 촉나라 장수 위연에게 최후를 맞이한다.[5]황초 3년(222년), 조비(문제)의 명을 받아 조인을 따라 오나라를 공격하여 유수 전투에 참여했으나, 조인이 유수독 주환에게 대패하자 생포되어 무창으로 보내졌다(유수구의 전투).
태화 2년(228년) 겨울, 진창성을 포위했던 촉한군이 식량 부족으로 철수했을 때[5], 조진 휘하에서 기병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 군의 반격에 패해 전사했다(진창 전투).
『삼국지』에는 위에 언급된 내용이 전부이므로, 조인 휘하에서 오나라를 침공해 포로가 된 뒤 석방되어 조진 휘하에서 촉한과 싸우다 전사한 것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 불분명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쌍은 자가 '''자전'''(《요코야마 삼국지》에서는 '''자금''')이며, 롱시군 적도현(현재의 간쑤성 딩시시 린타오현)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젊은 나이에 조진을 따라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어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싸운다. 60근(후한~삼국시대 척도로 약 13kg)의 대도를 휘두르고, 쇠로 된 강궁을 가볍게 당기는 완력에 더해 유성추라는 쇠구슬을 던져 백발백중이라고 자부하는 솜씨를 지녔다. 촉나라의 사웅과 궁기를 쳐 죽이고, 장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활약하지만, 제갈량의 계략에 빠진 위연에게 죽임을 당한다.
4. 2. 한국에서의 인식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쌍은 자가 '''자전'''(요코야마 삼국지에서는 '''자금''')이며, 롱시군 적도현(현재의 간쑤성 딩시시 린타오현)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젊은 나이에 조진을 따라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어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싸운다. 13kg의 대도를 휘두르고, 쇠로 된 강궁을 가볍게 당기는 완력에 더해 유성추라는 쇠구슬을 던져 백발백중이라고 자부하는 솜씨를 지녔다. 촉나라의 사웅과 궁기를 쳐 죽이고, 장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제갈량의 계략에 빠진 위연에게 참살당한다.4. 3. 역사적 의의와 한계
왕쌍은 조비의 명을 받아 조인을 따라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주환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다.[5] 이후 석방되어 조진 휘하에서 촉한과 싸우다 제갈량에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지』에는 왕쌍에 대한 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28-10-16
[2]
간행물
Huang'wu era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문서
曹真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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