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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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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안덕은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홍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신돈 숙청에 관여했다.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으며, 왜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김저의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공양왕 대에 다시 소환되었으나, 우왕 복위 모의 혐의로 파직되었다.

2. 생애

1361년 홍건적의 난안우 휘하에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1363년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1] 1365년 신돈의 참소로 유배된 이구수, 김귀, 박춘을 배인길과 함께 바다에 빠뜨려 죽였으며, 신돈이 수원부로 유배될 때 이성림과 함께 신돈 호송을 맡았다.[1]

우왕 2년(1376년) 안주부원수로서 심왕의 사망을 보고하고, 공민왕 시해 관련자 친족 처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1] 우왕 3년(1377년) 2월 양광도도원수가 되었다.[1] 이후 왜구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나, 때로는 패배하기도 했다.

우왕 14년(1388년) 4월, 요동 정벌 때 양광도도원수로서 심덕부, 박위와 함께 좌군에 소속되었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1] 창왕 1년(1389년) 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왜구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1]

창왕 1년(1389년) 11월, 김저와 정득후가 우왕의 밀명을 받아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우홍수와 함께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 이 사건으로 창왕이 폐위되고 우왕은 강릉, 창왕은 강화로 쫓겨났다. 대간들의 거듭된 탄핵 상소로 풍주(豊州)에 유배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0년) 4월에 소환되었다.[1] 그러나 대간들은 6월에 다시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했으나, 공양왕은 왕안덕이 위화도 회군 공신이며 죄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에 우왕 옹립 혐의를 확정하고 지방에서 편의에 따라 살도록 했다가, 얼마 후 임시 거주를 허락했다.[1]

2. 1. 초기 활동

1361년 홍건적의 난안우 휘하에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1363년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1]

1365년 신돈의 참소로 유배된 찬성 이구수, 첨의평리 김귀, 판밀직 박춘을 배인길과 함께 바다에 빠뜨려 죽였으며, 신돈이 수원부로 유배될 때 이성림과 함께 신돈 호송을 맡았다.[1]

2. 2. 왜구와의 전투

우왕 2년(1376년) 안주부원수로서 심왕의 사망을 보고하고, 공민왕 시해 관련자 친족 처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1] 우왕 3년(1377년) 2월 양광도도원수가 되었다.[1]

5월에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을 공격하자 이를 치러 나섰으나, 왜구는 고려군을 상대로 기만전술을 펼쳤다.[1] 왕안덕은 왜구의 군세를 보고 겁을 내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다가 돌아가는 적을 요격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왜구에게 간파당해 실패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1]

9월에 왜구가 다시금 홍주(洪州)를 공격해 불살랐을 때, 왕안덕은 노현(蘆峴)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1] 이후 왜구가 온수현(溫水縣)을 침략했을 때도 야습을 받아 많은 전사자를 냈다.[1] 왜구가 진포(鎭浦)를 거쳐 한주(韓州)로 침입하자, 왕안덕은 조정에 조전원수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1]

10월, 왜구가 영주(寧州)·아주(牙州)를 침략하자 왕안덕은 홍인계·인해·김득제·목충·왕빈 등과 함께 아주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세 명을 사로잡았으며, 병장기와 말 170여 필을 노획하였다.[1] 또한 괴주(槐州)에서 왜적을 쳐서 세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1]

우왕 9년(1383년) 6월, 왜구가 단양(丹陽)·제주(堤州)·주천(酒泉)·평창(平昌)·횡천(橫川)·영주(榮州)·순흥(順興) 등지를 노략질하자 양광도조전원수로 파견되었다.[1] 7월에는 괴주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한 왜구 2백 기를 김사혁(金斯革)·도흥(都興)과 함께 공격해 세 명의 목을 베었다.[1] 8월에는 계룡산(雞龍山)에 웅거한 왜구를 공격하고,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왜구와 싸워 8명의 목을 베었으며, 김사혁은 목천(木川) 흑점(黑岾)까지 추격하여 20명의 목을 베었다.[1] 우왕 11년(1385년) 다시 양광도도원수가 되었다.[1]

2. 3. 정치적 격변과 몰락

우왕 12년(1386년) 2월, 서해도도순문사로서 안렴사 배구, 해주목사 이숙림, 연안부사 안준 등과 함께 숙녕옹주 등을 모시고 서해도로 사냥 나온 우왕을 맞이했다.[1]

우왕 14년(1388년) 4월, 요동 정벌 때 양광도도원수로서 심덕부, 박위와 함께 좌군에 소속되었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1]

창왕 1년(1389년) 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10월에 옛 비인(庇仁) 땅에 주둔하던 왜구를 도체찰사로서 광주절제사 최운해, 양광도도절제사 이승원과 함께 공격하다가 도둔곶(都屯串)에서 크게 패했다. 이때 고려군 40여 명이 전사했고, 왕안덕은 말에서 떨어져 겨우 목숨을 건졌다.[1]

창왕 1년(1389년) 11월, 김저와 정득후가 우왕의 밀명을 받아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던 김저는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왕안덕, 우홍수와 공모하여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으로 창왕이 폐위되고 우왕은 강릉, 창왕은 강화로 쫓겨났다. 낭사 윤소종, 이첨, 오사충 등은 김저의 진술을 근거로 공양왕에게 상소를 올려 김저가 언급한 인물들을 모두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공양왕은 위화도 회군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변안열을 한양으로 유배(이후 처형)하는 선에서 그치고,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회군 공신들이 김저의 모의에 가담해 우왕을 복위시키려 했을 리 없다는 논리로 파직만 시켰다.[1]

윤소종 등의 대간은 거듭 왕안덕 등을 "신씨(우왕)를 맞아들여 왕씨의 왕통을 영원히 끊으려 한 대역죄인"이라며 극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고, 왕안덕은 풍주(豊州)에, 우홍수는 인주(仁州)에, 원상은 광주(光州)에 각각 유배되었다. 공양왕 2년(1390년) 4월에 다시 소환되었으나, 대간들은 6월에 다시 그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왕안덕이 위화도 회군 공신이며 죄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종학, 이을진, 이경도만 외지에 유배 보내는 데 그쳤다. 9월에 우왕 옹립 혐의를 확정하고 지방에서 편의에 따라 살도록 했다가, 얼마 후 임시 거주를 허락했다.[1]

3. 관직 연혁

시기관직
1363년 이전대호군(大護軍)
1383년 6월양광도조전원수
1385년양광도도원수
1386년서해도도순문사
1388년양광도도원수
1389년찬성사(贊成事)
1389년 10월도체찰사
1389년판삼사사
1390년강원군[2]


참조

[1] 서적 고려사 공양왕 원년(1389년) 11월 16일 경진
[2] 서적 고려사 공양왕 2년(1390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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