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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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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운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으로, 1347년에 태어나 1404년에 사망했다. 그는 최록의 아들로 태어나 무관으로서 활약하며 왜구를 격퇴하고 여진족을 방어하는 등 국방에 기여했다. 고려 시대에는 전공총랑, 전주목사, 밀직부사 등을 역임했고,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충근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는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지중추부사, 이성도병마사 등을 거쳐 태종 대에 지중추부사, 참판승추부사 등을 지냈다. 사후에는 양장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세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최윤덕은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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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운해
원어명崔雲海
출생일1347년
출생지경상도 창원
사망일1404년 (향년 58세)
사망지조선 한성부
별명자는 호보(浩甫), 시호 양장(襄莊)
국적고려
국적조선
직책
임기1382년 3월 1일 ~ 1385년 8월 31일
군주고려 우왕 왕우
섭정문하시중 이인임(前)
직책
임기1393년 2월 1일 ~ 1396년 2월 29일
군주조선 태조 이단
섭정문하좌정승 조준(前)
가족 정보
배우자정실 창원 이씨 부인
후실 안동 권씨 첩실
자녀최윤덕(장남)
최윤복(차남)
최윤온(삼남)
최윤례(사남)
부모최녹(부), 평창 이씨 부인(모)
친인척최숙손(손자)
기타 정보
경력군인 겸 정치가
정당무소속

2. 생애

최운해는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에 경남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서 부친 평장사 최록과 어머니 평창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와 자태가 비범하고 지혜와 용맹이 출중하였다고 전해진다.

2. 1. 고려조

1366년(공민왕 15년) 19세에 부친 최록 장군의 전공(戰功)으로 인하여 음보(蔭補)로써 충용위산원(忠勇衛散員)에 임명되었다.[1]

1367년(공민왕 16년) 20세에 정경부인 창원이씨와 혼인하였고, 1376년에는 장자 윤덕이 태어났다.[1] 여러 벼슬을 거쳐 1382년에 전공총랑(典工摠郎)에 올랐다.[1]

1385년 충주병마사, 영주·순흥 등처 조전병마사 겸 경상도 병선도관영사로 왜구를 토벌하였다.[1] 특히 적이 약탈해간 소, 말 등 재물을 여러 차례 탈환하여 주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며, 궁핍한 백성들을 한곳에 모아 큰 솥에 죽을 끓여 기아를 구제하니 모두가 그 덕을 칭송했다.[1]

1386년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으며, 원주·충주·단양·제천 조전병마사로 왜구를 토벌하였다.[1] 1387년 충주목사를 지냈다.[1]

1388년 왜적이 전라도에 침입하여 전주목사로 임명되었고, 재임 중 최영 장군이 이끄는 북벌에 전라도부원수로 조민수 군단에 배속되어 참전하였다.[1] 위화도 회군 이후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충근좌명공신(忠勤佐命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1] 도순문사를 지내고, 1391년(공양왕 2년) 양광도 광주 등처 도절제사 겸 판광주목사가 되어 왜적을 토벌하였다.[1] 1392년 문하평리가 되었다.[1]

2. 2. 조선조

1392년 조선이 개국되면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이듬해에 양광도 도절제사가 되었다.[1]

1396년 지중추원사로 경상도 도절제사일 때 장자 윤덕과 같이 출전하여 경북 영해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1] 이때 태종이 윤덕을 불러 면담하고 능히 인재를 얻었노라 크게 칭찬한 후에 즉시 훈련관 부사직에 임명하였다.[1]

1397년 전 해에 경북 영해에서 항복했던 왜구들이 지울주사 이은 등을 납치해 간 사건이 폭로되면서 안변 진명포에 유배를 간 이후에 청해도수군에 충군되었다.[1]

1398년 태조 7년에 외적을 막을 장수가 없다 하여 사면되었으며,[1] 1399년 정종 원년에 전라도 도절제사로 왜구를 방어하였다.[1]

1400년 참판삼군부사로 예문관학사 송제대와 함께 남경에 정사로 다녀오다가 서원군에서 근수하는 사람을 먹이지 않았다 하여 군수 박희무를 구타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음죽으로 귀양을 갔다가 태종 원년에 사면되었다.[1]

1402년 태종 2년에 이성도병마사 겸 서북면순문사로 여진족을 방어하고 조사의의 난을 평정하였다.[1] 또한 함흥에 칩거하고 있던 태조를 시위하고 왔다.[1] 이후에 참판승추부사판내자시사가 되었다.[1]

1404년 태종 4년 7월 9일 향년 58세에 졸하니, 태종이 애통하여 3일간 정무를 정지하고 파주군 주내읍 반용산에 예장하였다.[1] 아들 넷을 두었는데, 세종 대에 좌의정을 지낸 정렬공 최윤덕, 최윤복, 최윤온, 최윤례이다.[1]

2. 3. 사후

1405년(태종 5년) 최운해의 공으로 나라의 예장과 증시법이 처음으로 정해졌고, 1406년(태종 6년)에는 양장(襄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양(襄)은 국가에 공이 있음을, 장(莊)은 백성에게 엄격함을 의미한다.[1] 세종 16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3. 가계

관계이름
조부최만(崔滿)
부친최록
모친평창 이씨
정실창원 이씨
후실안동 권씨
아들최윤덕, 최윤복, 최윤온, 최윤례


4. 연관 인물


  • 최탁: 최운해의 5대조이다. 고려 인종 때 호부상서와 상장군을 지냈다.[1]
  • 공민왕: 고려 제31대 왕이다.[1]
  • 최영: 고려 말의 장군이다.[1]
  • 조선 태조: 조선의 초대 왕이다.[1]
  • 조선 태종: 조선의 제3대 왕이다.[1]
  • 양촌 권근: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1]
  • 조민수: 고려 말의 무신이다.[1]
  • 권희달[1]
  • 간이당 최립: 최윤복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1]
  • 최산정: 최윤온의 후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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