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공녀 이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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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마 공녀 이사벨라는 스페인의 인판타로 태어나 파르마 공작 필리포의 딸로, 18세기 유럽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바이올린 연주, 신학, 철학에 재능을 보였으며, 1760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와 결혼했지만, 남편보다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다. 이사벨라는 3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여러 번의 유산과 딸의 죽음을 겪었으며, 1763년 둘째 아이를 낳은 지 5일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녀는 교육론, 공주들의 운명, 인간론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교육과 여성의 지위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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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녀 이사벨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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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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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스페인어: Isabel María Luisa Antonieta de Borbón-Parma 독일어: Isabella Maria Ludovica Antonia von Bourbon-Parma 프랑스어: Isabelle-Marie-Louise-Antoinette de Bourbon-Parme |
출생일 | 1741년 12월 31일 |
출생지 | 부에 Retiro 궁전, 마드리드, 스페인 왕국 |
사망일 | 1763년 11월 27일 |
사망지 | 호프부르크 왕궁, 빈, 오스트리아 대공국, 신성 로마 제국 |
매장지 | 마리아 테레지아 지하 묘, 황실 묘지, 카푸친 교회 (빈), 오스트리아 |
배우자 | 요제프 2세 (1760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테레지아 폰 외스터라이히 (1762년–1770년) 마리아 크리스티나 |
가문 | 부르봉파르마 가문 |
아버지 | 파르마 공작 필리포 |
어머니 | 루이즈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
2. 생애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아버지 필리프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부모와 함께 파르마로 이주했다.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애정을 받으며 자랐으나, 10세 때 여동생 마리아 루이사가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관심은 동생에게 옮겨갔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철학, 윤리, 이과 학문에 관심이 깊었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된다.
1760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요제프와 결혼했다. 남편 요제프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깊이 사랑했으며,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비롯한 합스부르크-로렌 가문 일가에게도 환영받았다. 특히 시아버지 프란츠 1세의 총애는 요제프의 누나 마리아 안나의 질투를 살 정도였다. 결혼 전부터 요제프의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미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졌고, 결혼 후에도 그녀와 가장 친밀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몽상적인 성격으로 내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으며, 남편의 깊은 애정에 부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합스부르크-로렌 가문 후계자의 아내 역할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사벨라는 1762년 3월 19일 첫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힘겹게 출산했다. 이후 두 차례 유산을 겪었다. 1763년 11월 22일, 둘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네를 임신 중 천연두에 걸려 조산했고, 아이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사벨라 역시 병세가 악화되어 남편 요제프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며칠 뒤인 11월 27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
2. 1. 젊은 시절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의 인판타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파르마 공국으로 이주하여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연주와 신학, 철학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지만,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 사망 후 우울증을 겪었다.[1]2. 1. 1. 마드리드에서의 유년기

이사벨 마리아 루이사 안토니에타는 1741년 12월 31일 마드리드의 부엔 레티로 궁전에서 스페인의 필리프와 그의 아내 루이즈 엘리자베스 드 프랑스 사이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출생 당시 스페인의 인판타였으나, 이후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
이사벨라의 부모는 사촌 지간이었으며,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는 루이 15세의 장녀였다. 당시 12세였던 어머니는 18세의 아버지와 결혼했는데, 프랑스 궁정에서는 상속자가 아닌 필리프와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야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결혼 생활에서 주도권을 잡고 남편의 지위 상승과 부르봉 왕가의 권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시어머니이자 스페인의 실권자였던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와 갈등하면서도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는 이틀간의 힘든 출산 끝에 14세의 나이로 이사벨라를 낳았다. 출산 두 달 후, 아버지 필리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떠났고, 이사벨라가 8살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이사벨라에게 거의 애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벨라는 어린 시절 7년 동안 마드리드에 있는 조부모의 왕실에서 자랐다. 할머니인 엘리자베트 파르네세 여왕은 이사벨라를 매우 아꼈으며, 멀리 있는 아들 필리프에게 손녀의 소식을 꾸준히 전했다. 할머니의 편지에 따르면,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는 딸에게 매우 차갑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이사벨라가 떼를 쓸 때마다 '군사 훈련'이라 불릴 정도로 심하게 체벌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사벨라를 '고집스럽고 견딜 수 없다'고 여겼다. 이사벨라는 프랑스 출신의 유모인 곤잘레스 후작 부인(마리-카트린 드 바세쿠르-그리니)에게 맡겨졌는데, 그녀는 포르투갈의 바르바라의 시녀 출신으로 예절과 계층 의식이 강했다. 이사벨라는 유모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고, 이는 어머니의 질투를 유발하기도 했다.

이사벨라의 교육은 당시 공주에게 요구되던 기준에 맞춰 이루어졌으며, 가정 내 체벌은 아버지의 지시와 어머니의 동의 하에 시행되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어릴 적 매우 활기차고 장난기 많은 아이여서 늘 뛰어다니고 기어오르며 가구나 장식물을 부쉈다고 회상했다. 나비 쫓기, 승마, 밧줄 묘기 등을 좋아했으며 글쓰기, 노래, 그림 그리기도 즐겼다. 유모는 그녀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밧줄, 말, 그네 등을 빼앗았고, 이사벨라는 점차 조용히 자신을 즐겁게 하는 법을 배우며 내면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훗날 "머릿속에는 항상 구름이 가득했고, 한 번에 수십만 개의 아이디어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1746년, 한 프랑스 특사는 네 살의 이사벨라가 이미 자신의 신분과 미래를 인지하고 있다며 '위엄'을 칭찬하면서도, 어머니의 냉담함에 대해 언급했다. 10살까지 친구 없이 엄격한 통제 속에서 외동딸로 자란 그녀의 유년기는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에 의해 '고독하고 엄격했다'고 평가된다. 이사벨라는 바이올린 연주와 신학, 철학에도 재능을 보였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우울증을 겪게 된다.
1749년 1월 6일부터 10월 7일까지, 이사벨라는 파르마로 가는 길에 외가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베르사유에 머물렀다. 당시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의 유일한 손녀였던 그녀는 프랑스 궁정에서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화려하고 활기찬 프랑스 궁정 분위기는 엄격한 스페인 궁정 예법에 익숙했던 7살의 이사벨라에게 처음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극장, 오페라, 무도회, 콘서트 등 궁정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초기에는 이러한 활동을 즐기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폴 달베르 드 뤼느는 기록했다. 이 시기 이사벨라는 어머니 및 외할머니와 소통하는 프랑스어보다 유모에게 배운 스페인어를 더 편하게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사벨라는 베르사유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리 왕비를 따라 오페라, 연극, 콘서트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프랑스 왕족으로 대우받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왕실 근위대의 경례를 받고 어머니, 고모들과 같은 의자에 앉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한번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의 처소에서 공연을 선보여 큰 찬사를 받기도 했다. 베르사유 체류 이후 이사벨라는 외가 식구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점차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2. 1. 2. 파르마에서의 청소년기


이사벨라는 원래 마드리드의 부엔 레티로 궁전에서 스페인의 인판타로 태어났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그녀의 아버지 필리프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스페인 인판타 지위를 잃고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
1749년 11월 20일, 8세가 된 이사벨라는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와 함께 파르마에 도착했다. 당시 공국은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궁전은 거의 폐허 상태였다. 이사벨라는 스페인과 프랑스인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을 '사고력에 무지하다'고 여기며 파르마를 떠나고 싶어 했다.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는 루이 15세의 장녀였음에도 군주나 왕위 계승자가 아닌 필리프와 결혼한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낮은 지위와 상대적인 빈곤에 불만을 품고 자녀들의 권위 있는 결혼을 성사시키는 데 몰두했다. 이를 위해 어머니는 1752년 8월부터 1753년 10월까지, 그리고 1757년 여름에 베르사유를 방문하여 이사벨라의 결혼을 협상했다. 이 기간 동안 이사벨라와 동생들은 파르마에 머물렀다.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는 이사벨라에게 거의 애정을 보이지 않았고, 이사벨라가 떼를 쓸 때마다 '군사 훈련'이라 불릴 정도로 심하게 체벌했다. 이사벨라는 프랑스 출신의 유모 곤잘레스 후작 부인(마리-카트린 드 바세쿠르-그리니)에게 맡겨져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는데, 이는 어머니의 질투심을 유발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냉담함은 주변에도 알려져, 이사벨라의 유력한 혼사 기회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프랑스 원수 아드리앙 모리스 드 노아이유 공작은 루이즈 엘리자베스에게 딸에게 더 많은 애정을 보일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루이즈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모성애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사벨라의 교육은 당시 공주에게 요구되던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고, 아버지의 명령과 어머니의 동의 하에 가정 내 체벌이 수반되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활기차고 장난기 많은 아이였으며, 나비 쫓기, 승마, 밧줄 묘기 등을 즐겼고 글쓰기, 노래,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유모가 밧줄, 말, 그네 등을 금지하자, 이사벨라는 조용히 자신을 즐겁게 하는 법을 터득하며 내면적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훗날 '머릿속에는 항상 구름이 가득했고, 한 번에 수십만 개의 아이디어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1746년, 한 프랑스 특사는 4세의 이사벨라가 보이는 '위엄'을 칭찬하며 그녀가 이미 자신의 신분을 인지하고 있다고 언급하는 한편, 어머니의 냉담함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0세까지 친구 없이 엄격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의 어린 시절은 '고독하고 엄격했다'고 평가된다.
파르마에서 이사벨라의 부모는 1751년에 남동생 페르디난도와 여동생 마리아 루이사를 낳았다. 어머니는 이 두 동생에게는 더 많은 애정을 보였으나, 이사벨라는 질투심 없이 동생들의 존재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부재중일 때, 이사벨라는 아버지에게 동생들의 안부를 전하는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사냥을 위해 매년 7개월간 콜로르노 공작 궁전에서 지내며 자녀들과 떨어져 있었고, 이사벨라는 아버지에게 동생들의 수면 습관이나 이앓이와 같은 일상적인 소식을 담은 메모를 보냈다. 겨울철(11월~4월)에는 아버지가 필로타 궁전에서 어린 동생들과 함께 지냈으나, 이사벨라는 여전히 자르디노 궁전에서 유모와 함께 지냈다.
이사벨라는 바이올린 연주와 신학, 철학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1757년 여름,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가 사망하자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1]
2. 2. 결혼 생활
1760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상속자인 요제프 대공과 결혼하였다. 요제프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이사벨라에게 첫눈에 반해 깊이 사랑했지만, 이사벨라는 남편의 깊은 애정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하고 합스부르크-로렌 가문 후계자의 아내로서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결혼 후 이사벨라는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인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일원들에게도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특히 시아버지 프란츠 1세는 이사벨라를 매우 아꼈다.
이사벨라는 결혼 생활 중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내세와 영혼의 구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몽상적인 면모를 보였다. 본래 건강이 약했던 그녀는 1762년 첫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힘겹게 출산한 후,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두 차례 유산을 겪었다. 1763년 둘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네를 임신 중 천연두에 걸려 조산하였고,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사벨라 역시 병세가 악화되어 남편 요제프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며칠 뒤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2. 1. 요제프 대공과의 결혼
이사벨라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상속자인 요제프 대공과 결혼하였다. 지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사벨라에게 요제프는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보다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에게 더욱 강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잔인한 자매여, 비록 나는 방금 전에 그대를 떠나왔지만 이렇게 또 그대에게 편지를 써요. 내 운명을 알게 될 때를 기다리는건 참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대가 나를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니면 나를 강에 던져버리고 싶은지 알게되는 것도요. 내가 사랑에 깊이 빠져있다는건 뿐에 나는 아는게 없네요." 이러한 이사벨라의 깊은 애정은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다른 남자를 사랑할 때에도 계속되었으며, 이는 종종 동성애적 관계로 해석되기도 한다.
2. 2. 2. 결혼 생활과 남편과의 관계
1760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상속자인 요제프 대공과 결혼하였다. 요제프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이사벨라에게 첫눈에 반해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보다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애칭: 미미)에게 더 강한 애정을 느꼈다. 그녀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는 열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으며, 일부 구절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관계로 해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편지에서 이사벨라는 "내가 사랑에 깊이 빠져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네요"라고 쓰기도 했다. 초기 역사가들은 이를 당시의 과장된 우정 표현으로 보았으나, 후대 연구자들은 두 사람 사이에 낭만적, 혹은 성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3] 이사벨라 자신도 남긴 글에서 "어떤 남자도 여자 없이 살 수 없지만, 어떤 여자도 남자 없이 살 수 있다"고 언급하여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기도 한다.[3]결혼 후 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일원들에게도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시아버지인 프란츠 1세는 이사벨라를 매우 아꼈는데, 이로 인해 요제프의 누나 마리아 안나가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몽상적인 성격으로 내세의 영혼 구원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고, 남편의 깊은 애정에 부응하는 것을 힘들어하며 합스부르크-로렌 가문 후계자 아내로서의 역할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우울증(당시 용어로는 멜랑콜리아)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활동적이었음에도 때때로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양극성 장애의 증상일 수 있으며 가족력의 영향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을 했고, 결혼 생활의 압박, 힘든 임신, 동성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편지에서 교리가 금지하지 않았다면 자살했을 것이라고 고백하며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기기도 했다. 1763년에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환청을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사벨라는 본래 건강이 약한 편이었고, 1762년 3월 19일 첫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힘겹게 출산했다. 시부모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출산의 고통과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으며, 이후 두 차례 유산을 겪었다. 1763년 11월 22일, 둘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네를 임신 중이던 이사벨라는 천연두에 걸려 조산했고, 아이는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사망했다. 남편 요제프가 필사적으로 간호했지만, 이사벨라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 3.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관계
이사벨라는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과 결혼했지만, 남편보다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애칭: 미미)와 훨씬 더 깊은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사벨라의 약혼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며,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 결혼 후에도 이사벨라는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대상으로 여겼고, 두 사람 사이에는 매우 각별한 우정과 정신적 교감이 오갔다. 이러한 관계의 깊이와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2. 3. 1.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우정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상속자인 요제프 대공과 결혼하였지만, 남편인 요제프보다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다. 이사벨라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잔인한 자매여, 비록 나는 방금 전에 그대를 떠나왔지만 이렇게 또 그대에게 편지를 써요. 내 운명을 알게 될 때를 기다리는건 참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대가 나를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니면 나를 강에 던져버리고 싶은지 알게되는 것도요. 내가 사랑에 깊이 빠져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네요.
이러한 이사벨라의 강렬한 감정은 때때로 동성애적 사랑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다른 남성을 사랑하게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2. 3. 2. 학자들의 관계 평가
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 2세보다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에게 훨씬 강렬한 애정을 느꼈다. 그녀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들은 이러한 깊은 감정을 잘 보여준다. 편지 중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잔인한 자매여, 비록 나는 방금 전에 그대를 떠나왔지만 이렇게 또 그대에게 편지를 써요. 내 운명을 알게 될 때를 기다리는건 참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대가 나를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니면 나를 강에 던져버리고 싶은지 알게되는 것도요. 내가 사랑에 깊이 빠져있다는건 뿐에 나는 아는게 없네요.
이러한 편지 내용과 관계의 깊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사벨라의 감정을 동성애적 사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원본 자료에서는 이를 '레즈비언적 사랑'이라고 직접 언급하며,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다른 남자를 사랑할 때에도 이사벨라의 감정은 계속되었다고 서술한다.
2. 4. 출산과 말년
이사벨라는 1762년 3월 20일 첫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낳았다.[4] 이후 두 차례의 유산을 겪었으며, 1763년 네 번째 임신 중 천연두에 걸렸다. 이로 인해 우울증이 악화되었고,[3] 같은 해 11월 22일 둘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조산했으나 아이는 곧 사망했다. 이사벨라 역시 출산 후 회복하지 못하고 5일 뒤인 11월 27일 사망했다.2. 4. 1. 마리아 테레지아 출산
1762년 3월 20일 이사벨라는 첫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는 할머니인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따 마리아 테레지아로 이름 붙여졌다. 이사벨라는 원래 몸이 약한 편이었고, 첫 출산 과정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녀는 다시 임신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요제프 대공과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자 후계자를 원했으므로, 이사벨라는 다시 임신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시부모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는 "우리도 처음에는 딸이었어. 아들도 곧 가질 수 있을 거야"라며 격려했지만, 이사벨라는 절친한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미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고통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되는 건가"라며 출산의 고통과 후계자 압박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했다.2. 4. 2. 유산과 둘째 아이 출산
이사벨라는 결혼 생활 3년 동안 네 번의 임신을 했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762년 3월 20일, 그녀는 첫 아이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낳았다. 이사벨라는 첫 출산의 고통 때문에 다시 임신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남자 후계자를 바라는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요제프 2세의 기대로 인해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이후 이사벨라는 1762년 8월과 1763년 1월, 두 차례 유산을 겪었다. 네 번째 임신 중에는 천연두에 걸렸고, 이는 그녀의 우울증을 더욱 악화시켜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1763년 11월 22일, 이사벨라는 예정보다 3개월 일찍 둘째 아이를 조산했으나 이번에도 딸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이사벨라가 아끼던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따 마리아 크리스티나로 지었지만,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사벨라 역시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5일 뒤인 1763년 11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남편 요제프 2세가 필사적으로 간호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이사벨라가 낳은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마리아 테레지아 엘리자베트 필리핀 루이즈 요제파 요안나 | 1762년 3월 20일 | 1770년 1월 23일 | 7세의 나이에 흉막염으로 사망. |
이름 없는 아이 | 1762년 8월 | 1762년 8월 | 유산. |
이름 없는 아이 | 1763년 1월 | 1763년 1월 | 유산. |
마리아 크리스티나 | 1763년 11월 22일 | 1763년 11월 22일 | 3개월 조산으로 태어나 출생 직후 사망. |
2. 5. 죽음과 영향
1763년 여름, 황실 가족은 쇤브룬 궁전에서 지냈다. 임신 6개월이었던 이사벨라는 호프부르크 궁전으로 돌아가기를 꺼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빈 주변에는 천연두가 유행하고 있었다. 11월 18일, 빈에 도착한 지 나흘 만에 이사벨라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곧 천연두 진단을 받았다. 시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는 아직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어 감염 위험 때문에 간호를 중단해야 했고, 이후 남편 요제프와 시누이 마리안,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마리가 그녀를 돌보았다.고열로 인해 조산이 시작되었고, 11월 22일 이사벨라는 딸을 낳았다. 아기는 이사벨라의 요청에 따라 마리아 크리스티나로 세례를 받았으나 같은 날 사망했다. 출산 후 이사벨라는 거의 의식을 잃었으며, 죽음에 대해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결국 11월 27일 새벽, 스물두 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5] 그녀의 시신은 전염성이 높아 부검이나 방부 처리 없이 황실 묘소의 마리아 테레지아 묘역에 안장되었고, 딸 크리스티나의 관은 그 아래에 놓였다.[5] 이사벨라를 비롯한 여러 황실 자녀들이 천연두로 사망하거나 고통받은 일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1768년 어린 가족 구성원들에게 인두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인두법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데 기여했다.

이사벨라의 죽음은 남편 요제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는 평생 그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장인인 파르마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유일한 친구가 더 이상 없습니다. (...) 얼마나 끔찍한 이별인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 그리고 평생 불행하게 살 것입니다. (...) 나는 다시는 아무것도 즐거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토로했다. 아내를 잃은 후 요제프는 결혼 전보다 훨씬 더 냉소적이고 쉽게 짜증 내며 공격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1765년 마리아 요제파 폰 바이에른과 재혼했지만, 그는 새 아내를 극도로 혐오하고 학대했으며, 그녀 역시 결혼 2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요제프는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유일한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매우 아꼈으나, 이 딸마저 1770년 일곱 살의 나이에 흉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라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죽음 이후 "모두에게 큰 유감이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큰 유감"이라고 적었다.[3] 훗날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기도서에서는 이사벨라와 그녀의 딸의 미니어처 초상화가 발견되었는데, 그 뒷면에는 이사벨라를 '천사처럼 살다가 [천사]처럼 죽은' '가장 친하고 진실한 친구'라고 묘사하며 사망 날짜와 원인을 기록해 두었다.
이사벨라는 생전에 당시 우울증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멜랑콜리아 성향을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활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는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가 타무시노는 그녀의 문제가 양극성 장애의 한 형태였을 수 있으며, 두 명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유사한 증상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유전적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자신도 4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불행한 결혼 생활, 힘든 임신 과정, 그리고 동성애적 감정 사이에서 고뇌하며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편지에서 교회에서 금지하지만 않았다면 자살했을 것이라는 '큰 유혹'을 느낀다고 고백하며, 스스로를 '아무 쓸모없고', '나쁜 일만 한다'고 여겼다. 1763년에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는데, 이 목소리가 자신을 '평화롭고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이사벨라는 죽기 전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의 서류 중 일부는 요제프가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황후는 이사벨라의 글을 태우라고 지시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실행되지 않았다. 이사벨라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들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서류 속에 남았고, 그녀의 남편 알베르 카시미르는 이를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우정'의 증거로 여겼다. 이 편지들은 현재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19세기 말 알프레드 리터 폰 아르네트에 의해 일부가, 1959년 요제프 흐라스키의 저서 Die Persönlichkeit der Infantin von Parma|파르마 공녀의 개성de에서 검열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2008년에는 엘리자베스 바댕테르가 주석과 함께 전체 서신을 출판했다.
3. 이사벨라의 저술
이사벨라는 결혼 이후 자신의 삶과 주변 세계를 성찰하며 다양한 주제에 걸쳐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녀의 저술 활동은 17세였던 1758년에 쓴 Remarques politiques et militaires|르마르크 폴리티크 에 밀리테르fra(정치 및 군사 관찰)로 시작되었다.[3] 이후 Les Aventures de l'étourderie|레 자방튀르 드 레투르드리fra(놀라움의 모험)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종교적인 주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1764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으로 출판된 Méditations chrétiennes|메디타시옹 크레티엔fra(기독교적 성찰)에서는 가톨릭 관점에서 종교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또한, 인류의 관습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인 Traité historique des mœurs|트레테 이스토리크 데 뫼르fra(관습에 대한 역사적 논문)를 계획했으나, 고대 이집트인에 관한 첫 부분만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외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계 무역 참여 노력을 정리한 짧은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당대 사회와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Sur la sort des princesses|쉬르 라 소르 데 프랭세스fra(공주들의 운명에 관하여)에서는 정략결혼의 문제를, Traité sur les hommes|트라테 쉬르 레 좀fra(인간론)에서는 가부장제 사회를, 그리고 Réflexions sur l'éducation|레플렉시옹 쉬르 레뒤카시옹fra(교육에 대한 성찰)에서는 당시의 양육 방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또한 임종을 앞두고 남긴 Conseils à Marie|콩세이 아 마리fra(마리에게 주는 조언)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와 조언을 담았다.
이사벨라가 남긴 많은 저술은 그녀 사후,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유품 속에서 남편 알베르트 카지미르 공작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이 문서들에 자신의 주석을 달아 합스부르크 가문 문서 보관소에 보관했다. 일부 저술은 1792년 부부의 소지품을 로테르담에서 함부르크로 옮기던 중 배가 난파되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겨진 저술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빈에서 헝가리의 모숀마자르오바르로 옮겨졌고, 1956년 화재로 일부 손상되었다. 현재 그녀의 저술 원고는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와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 분산 보관되어 있으며, Méditations chrétiennes|메디타시옹 크레티엔fra 등 극히 일부만 출판되었다. 이사벨라는 글쓰기 외에도 음악 작곡에도 재능을 보여 몇 편의 아리아와 송시를 남겼으며, 이 악보들은 부다페스트에 보존되어 있다.
원제 (프랑스어) | 한국어 번역 제목 | 내용 요약 및 비고 | 원고 보관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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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eils à Marie | 마리에게 주는 조언 |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편지. 합스부르크 왕가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조언.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LArt dcrire des lettres | 편지 쓰기의 기술 |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단편.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Les Aventures de létourderie'' | 놀라움의 모험 | 자서전.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Les Charmes de la fausse amitié | 거짓 우정의 매력 | 시누이 마리아 안나를 비판하는 내용.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Les Exercices de lesprit'' | 정신 수련 |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Le Vrai philosophe | 진정한 철학자 |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Méditations chrétiennes | 기독교 명상 |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으로 1764년 출판. 종교, 특히 죽음에 대한 성찰. [https://books.google.com/books?id=fGBxdsCWjakC 전문 보기(Google Books)]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Observations sur les Prussiens | 프로이센에 대한 관찰 |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Réflexions faites dans la solitude | 고독 속에서 한 성찰 |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Réflexions sur léducation'' | 교육에 대한 성찰 |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적 교육 철학. 당시 교육 방식 비판.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Remarques politiques et militaires (1758) | 정치 및 군사적 관찰 | 17세에 쓴 초기작. 정부와 전쟁에 대한 논평. 미출판. | 이탈리아 파르마 팔라티나 도서관 |
Sur la sort des princesses | 공주들의 운명에 관하여 | 정략결혼 비판. 공주의 삶에 대한 고찰.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Traité historique des mœurs | 관습에 대한 역사적 논문 | 인간 사회와 문화에 대한 미완성 개요.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Traité sur la réligion | 종교에 관한 논문 | 원본은 소실되고 필사본만 존재.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Traité sur les hommes | 인간론 | 가부장제 비판 및 여성의 평등 주장.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Vues générales que lon doit avoir pour bien élever un prince'' | 왕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가져야 할 일반적인 관점 | 왕자 교육법, 특히 역사 교육에 대한 내용 포함.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Vues sur le commerce | 무역에 대한 견해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Pièces sur la morale | 도덕에 관한 조각들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Questions à définir au sujet de gagner le cœur de lArchiduc'' | 대공의 마음을 얻는 것과 관련하여 정의해야 할 질문 |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남편 요제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3. 1. 교육론 (Réflexions sur l'éducation)
이사벨라는 자신의 저서 ''교육에 대한 성찰''(Réflexions sur l'éducation프랑스어)을 통해 당시 상류층 자녀들의 양육 방식을 비판했다. 이는 자신의 부모와 그들이 고용한 교사들, 특히 남동생 페르디난트를 학대한 가정교사 콩디야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1] 그녀는 자녀 교육의 전적인 책임을 부모에게 지우며, 자녀 양육을 낯선 이에게 맡기는 부모들을 '게으르고 무관심하며 나약하다'고 비판했다.이사벨라는 권위주의와 체벌을 강력히 거부했는데, 이러한 방식이 아이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폭력적이고, 고집 세며, 가혹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설명 없는 제한과 가혹한 처벌이 아이들로부터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경험을 빼앗는다고 주장했다. 결국 아이들의 유일한 행동 모델은 '폭력'이 될 것이었다 (남동생의 경우처럼). 그녀는 아이들에게 본질적인 '선한 의지와 자신감'이 있다고 믿었지만, 권위적으로 양육된 아이들은 '굴욕에 대한 비굴한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사벨라의 견해로는, 부모의 권위를 남용하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게 하고,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 '무감각하고 자기 비하적인' 존재로 만든다.
그녀는 (부모가 받아들였던) 체벌이 헛되고 위험하며, '굳어진 마음'과 '천한 감정'에서 비롯된 훈육의 한 형태라고 여겼다. 이는 인간이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이성으로 설득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아이들에 대한 폭력은 어른의 '이해력'과 교육적 재능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동생의 익명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는 구타가 아이들에게 '증오', 부정직함, 그리고 '복수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유행하던 이러한 방식 대신, 그녀는 친절을 옹호했는데, 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약점, 굳건함과 이성의 실패'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3. 2. 공주들의 운명 (Sur le sort des princesses)

이사벨라는 "공주들의 운명"이라는 글에서 공주가 '불행한 장관의 정책의 희생자'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정략결혼을 통해 국가 간 동맹을 맺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러한 방식이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사벨라는 공주가 처한 '슬픈 상황' 속에서도 신의 뜻을 구하고 섬김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공주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 "위대한 군주의 딸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편견의 노예가 된다; 그녀는 단지 이 굴욕적인 영광과 위대함에 붙어있는 이 예법에 복종하기 위해 태어난다. [...] 그녀의 지위는 그녀가 주변 사람들을 알 수 없게 만든다. [...] 그녀가 지닌 지위는 그녀에게 약간의 이점을 가져다주기 보다는,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빼앗는다. [...]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지인이나 친구가 없다. [...]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결국, 그들은 그녀를 결혼시키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녀는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두도록 강요받는다. 가족, 고향, 그리고 누구를 위해? 그녀가 성격과 사고방식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 질투심으로, 최악의 경우 의심으로 그녀를 바라볼지도 모르는 가족을 위해."
3. 3. 인간론 (Traité sur les hommes)
이사벨라는 당시 가부장제 유럽 사회에서 남성의 지위와 행동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을 썼다. 이 글의 제목은 Traité sur les hommes|트라테 쉬르 레 좀fra(《인간론》)이었다. 그녀는 이 글에서 여성이 남성과 지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더 뛰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남성을 조롱했다.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남성을 '나쁜 짓을 하고, 참을성 없이 굴며 혼란을 일으키는' 쓸모없는 동물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자신의 경험, 어쩌면 남편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남성은 '감정이 부족하고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남자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삶을 '오락에 쓰고, 소리 지르고, 영웅 놀이를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자존심을 만족시키거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일'에만 소비한다고 비판했다.이사벨라는 왜 남성이 사회에서 여성보다 우위에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밝혔다. 그녀는 남성의 '잘못이 [여성의] 미덕을 더욱 빛나게 하고', 여성이 매일 더 나아지도록 만들며, 만약 '남성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지 않다면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사벨라는 여성의 '노예 상태'는 스스로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남성들 때문에 발생한다고 결론 내렸다.
3. 4. 마리아에게 주는 조언 (Conseils à Marie)
이사벨라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시누이 테셴 공작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긴 편지를 남겼다. Conseils à Marie|마리에게 주는 조언프랑스어이라는 제목의 이 편지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구성원들에 대한 이사벨라의 솔직한 평가와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 2세를 '주로 감정적이지 않은' 인물로 묘사하며, 그가 애정 표현이나 포옹과 같은 일반적인 애정의 표시를 아첨이나 위선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시아버지인 프란츠 황제에 대해서는 '존경스럽고 마음이 좋은' 사람이며 '신뢰할 수 있고 진실한 친구'라고 평가했지만, 동시에 나쁜 조언에 쉽게 흔들리는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에 대해서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 속에 '일종의 불신과 겉보기의 냉정함'이 섞여 있다고 분석했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죽음이 시어머니에게 아주 큰 손실은 아닐지라도 고통을 줄 것이며,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가졌던 우정을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옮겨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4. 유산
이사벨라는 결혼 생활 3년 동안 네 번 임신했으나, 두 번은 유산되었고 두 딸을 낳았다. 두 딸 중 한 명만 영아기를 넘겼지만, 안타깝게도 두 딸 모두 성인이 되지는 못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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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녀 마리아 테레지아 엘리자베트 필리핀 루이즈 요제파 요안나 | 1762년 3월 20일 | 1770년 1월 23일 | 7세에 흉막염으로 사망. |
이름 없는 아이 | 1762년 8월 | 1762년 8월 | 유산. |
이름 없는 아이 | 1763년 1월 | 1763년 1월 | 유산. |
대공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 1763년 11월 22일 | 1763년 11월 22일 | 3개월 조산으로 태어나 출생 직후 사망. |
이사벨라는 자녀 외에도 많은 글과 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녀가 남긴 다수의 에세이와 연구는 사후에 시누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서류 속에서 그녀의 남편 알베르트 카지미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알베르트는 이 문서들에 주석을 달아 합스부르크 가문 문서 보관소에 보관했다. 그는 1792년 부부의 소지품 운송 중 발생한 난파 사고로 일부 저작물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현재 보존된 자료가 풍부하여 추가적인 큰 손실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벨라의 저작물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빈에 보관되다가 헝가리 머저르오바르로 옮겨졌으나, 1956년 화재로 일부 손상되었다. 2024년 현재, 그 작품들은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와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다. 그녀의 저술 중 출판된 것은 극히 일부이다. 또한 이사벨라는 음악 작곡에도 재능을 보여 몇 곡의 아리아와 송시를 남겼으며, 이 작품들은 부다페스트에 보존되어 있다.
원제 (프랑스어) | 한국어 제목 | 출판 상태/세부 정보 | 원고 보관 위치 | 비고 |
---|---|---|---|---|
Conseils à Marie | 마리에게 보내는 조언 | Badinter에 의해 출판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황실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그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글 |
'LArt dcrire des lettres | 편지 쓰기의 기술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단편 작품들 중에서 발견됨 |
'Les Aventures de létourderie'' | 놀라움의 모험 | 미출판,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자서전 |
Les Charmes de la fausse amitié | 거짓 우정의 매력 | 미출판,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시누이 마리아 안나에 반대하여 작성됨 |
'Les Exercices de lesprit'' | 정신 수련 |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
Le Vrai philosophe | 진정한 철학자 | 미출판,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
Méditations chrétiennes | 기독교 명상 | 1764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령에 따라 출판됨; Google 도서에서 이용 가능;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다양한 종교적 주제, 특히 죽음에 대한 명상 |
Observations sur les Prussiens | 프로이센에 대한 관찰 | 미출판,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
Réflexions faites dans la solitude | 고독 속에서 한 성찰 | 미출판,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
'Réflexions sur léducation'' | 교육에 대한 성찰 | 미출판, Badinter 및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어린 시절의 불우한 경험에 기반한 계몽적인 교육 철학 |
Remarques politiques et militaires (1758) | 정치 및 군사적 관찰 | 미출판,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Biblioteca Palatina, 파르마 | 정부와 전쟁에 대한 논평 |
Sur la sort des princesses | 공주들의 운명에 관하여 | Badinter 및 Sanger에 의해 출판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정치적, 개인적 근거로 왕실 결혼에 반대하는 논쟁 |
Traité historique des mœurs | 관습에 대한 역사적 논문 | 미출판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인간 사회와 문화 관행에 대한 미완성 개요 |
Traité sur la réligion | 종교에 관한 논문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원본의 필사본만 존재 |
Traité sur les hommes | 인간에 관한 논문 | 미출판, Badinter 및 Sanger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분석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가부장적 사회에 반대하고 여성의 도덕적, 지적 평등을 주장 |
'Vues générales que lon doit avoir pour bien élever un prince'' | 왕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가져야 할 일반적인 관점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어린 대공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독일어 연구 포함 |
Vues sur le commerce | 무역에 대한 견해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
Pièces sur la morale | 도덕에 관한 조각들 | 미출판 |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 | |
'Questions à définir au sujet de gagner le cœur de lArchiduc'' | 대공의 마음을 얻는 것과 관련하여 정의해야 할 질문 | Badinter에 의해 출판됨 | 헝가리 국립 문서 보관소 |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남편 요제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 |
5. 가계도
아넨타펠 번호 | 이름 |
---|---|
1 | 파르마 공녀 이사벨라 |
2 | 파르마 공작 필리포 |
3 |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
4 |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 |
5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
6 |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
7 | 마리 레슈친스카 |
8 | 프랑스의 루이, 그랑 도팽 |
9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
10 | 파르마의 상속 공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
11 |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소피 |
12 | 부르고뉴 공작 루이 |
13 |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
14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
15 | 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 |
16 |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
17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
18 |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
19 | 헨리에타 아델라이드 |
20 | 파르마 공작 라누초 2세 파르네세 |
21 | 이사벨라 데스테 |
22 |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
23 |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
24 | 프랑스의 루이, 그랑 도팽 |
25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
26 |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
27 | 오를레앙의 안 마리 |
28 | 라파우 레슈친스키 |
29 | 안나 야브워노프스카 |
30 | 얀 카롤 오팔린스키 |
31 | 조피아 차르노프스카 |
참조
[1]
서적
L’Aile des Princes. Les filles de Louis XV
https://archive.org/[...]
Arthaud
2024-08-15
[2]
웹사이트
Isabella of Parma
https://www.habsburg[...]
2024-07-27
[3]
서적
Femmes des Lumières et de l’Ombre. Un premier féminisme (1774–1830)
https://hdl.handle.n[...]
Editions Vaillant
2024-08-15
[4]
서적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https://archive.org/[...]
Anchor Books
[5]
웹사이트
Maria-Theresien-Gruft
https://www.kapuzine[...]
2022-06-11
[6]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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