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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야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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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코야마 야스타케는 1843년 사쓰마 번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학자 요코야마 야스히로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 정한론과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며, 1870년 시폐 10개 조항을 담은 건언서를 제출한 후 할복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를 추모하는 비문을 지었다. 그의 아들 요코야마 소지로는 홋카이도청, 타이완 총독부 등에서 활동하며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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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야스타케
기본 정보
본명요코야마 야스타케 (横山安武)
출생1877년
사망1953년
직업일본의 역사가
분야일본사
활동도쿄 제국대학 교수
생애 및 경력
출생지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출신
학력도쿄 제국대학 사학과 졸업
경력도쿄 제국대학 조교수
도쿄 제국대학 교수
연구 분야일본 중세사, 특히 무로마치 시대사
주요 저서무로마치 시대사 연구 (室町時代史の研究)
일본 역사 (니혼사)

2. 생애

요코야마 야스타케는 메이지 시대 초, '정한론', '아이누 탄압 정책' 등 제국주의적 정책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1870년 7월 26일 밤, 야스타케는 시폐 10개 조항과 정한(征韓)의 불가함을 주장하는 두 통의 건의서를 집의원 문에 꽂아 넣은 후, 쓰번 저택 뒷문 앞에서 할복했다. 발견 당시 야스타케는 아직 의식이 있었으며, 곧바로 가고시마번 저택으로 옮겨져 간호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 날 27일 낮 무렵에 사망했다.[6] 야스타케는 오사코 사다키요 등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사이고 다카모리가 번정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사이고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다.[7] 번 저택은 야스타케를 시바 다이엔지에 안장했다.[8]

2. 1. 출생과 가계

덴포 14년(1843년) 사쓰마번 번사 모리 아리요시의 넷째 아들로 가고시마 성하의 조가야에서 태어났다.[4] 안세이 4년(1857년) 번에 출사하고 있던 유학자 요코야마 야스히로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잇고, 번에 출사하여 시마즈 히사미쓰고쇼로 모셨다.[1][5]

2. 2. 번에서의 활동과 유학

1857년(안세이 4년), 사쓰마번에 출사하고 있던 유학자 요코야마 야스히로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잇고 번에 출사하여 시마즈 히사미쓰고쇼로 모셨다.[1][5]

1868년(메이지 원년), 히사미쓰의 다섯째 아들 에쓰노스케(시마즈 타다츠구)의 곁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 번 밖에서의 유학을 권장했다. 1869년 5월 30일(메이지 2년 4월 19일)부터 사가(사가번)의 고도칸과 야마구치(야마구치번)의 메이린칸에 동행하여 함께 공부했다.[1][5]

1870년 2월 26일(메이지 3년 1월 26일), 야마구치번 체류 중 제대(諸隊) 해산을 동반한 야마구치번의 병제 개혁에 반대하는 기병대 등 일부 대원들에 의한 탈대 소동이 발생했다. 야마구치번 제대 탈퇴 병사 약 1000명이 번청을 포위하는 등 반란, 폭동을 일으켰다.[1][5] 야스타케는 다음 달에 소동을 보고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에쓰노스케를 남겨두고 가고시마로 귀국했기 때문에 히사미쓰의 불쾌감을 사 벌을 받을 뻔했으나, 자발적으로 곁을 지키는 역할에서 물러났다.[5]

그 후, 5월에 양명학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카스가 센안의 문을 두드렸으나, 센안이 근신칩거 중이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7월에 도쿄부로 올라가 타구치 분조의 문인이 되어 양명학을 배웠다.[5]

2. 3. 탈대 소동과 귀향

1870년 1월 26일, 야마구치번에서 제대(諸隊) 해산에 반대하는 기병대 등 일부 대원들이 탈대 소동을 일으켰다. 야마구치번 제대 탈퇴 병사 약 1000명이 번청을 포위하는 등 반란, 폭동을 일으켰다.[1] 야스타케는 다음 달에 소동을 보고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에쓰노스케를 남겨두고 가고시마로 귀국했기 때문에 시마즈 히사미쓰의 불쾌감을 사 벌을 받을 뻔했으나, 자발적으로 곁을 지키는 역할에서 물러났다.[5]

2. 4. 양명학 수학과 상경

1869년 5월 30일(메이지 2년 4월 19일)부터 사가 (사가번)의 고도칸에서, 이어서 야마구치 (야마구치번)의 메이린칸에서 시마즈 타다츠구와 함께 공부했다.[1][5] 1870년 2월 26일(메이지 3년 1월 26일), 야마구치번의 병제 개혁에 반대하는 기병대 등 일부 대원들에 의한 탈대 소동이 발생하여, 야마구치번 제대 탈퇴 병사 약 1000명이 번청을 포위하는 등 반란, 폭동을 일으켰다.[1][5]。 야스타케는 이 소동을 보고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에쓰노스케를 남겨두고 가고시마로 귀국했기 때문에 히사미쓰의 불쾌감을 사 벌을 받을 뻔했으나, 자발적으로 곁을 지키는 역할에서 물러났다.[5]

1870년 5월, 양명학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카스가 센안에게 배우려 했으나, 센안이 근신칩거 중이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7월에 도쿄부로 올라가 타구치 분조의 문인이 되어 양명학을 배웠다.[5]

2. 5. 할복 자결과 그 배경

메이지 시대 초기, 요코야마 야스타케는 정한론에 반대하여 할복 자결했다. 그는 당시 정부 고관들의 정책이 국가가 아닌 개인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시폐 10개 조항을 열거한 건의서를 남겼다.[9][11]

1870년 7월 26일 밤, 야스타케는 집의원 문에 건의서를 꽂아 넣은 후, 쓰번 저택 뒷문 앞에서 할복했다.[6] 발견 당시 그는 아직 의식이 있었으나, 다음 날 낮 무렵 사망했다.[6] 그는 오사코 사다키요 등에게 유서를 남겼으며,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신뢰를 나타냈다.[7]

야스타케는 "이미 국내가 피폐해진 시점에서 정한 따위는 할 수 없다"며 정한론에 반대했다.[9] 그의 자결은 정한론에 대한 항의이자, 정부 고관들의 자만심과 이와쿠라 토모미, 토쿠다이지 사네쓰네 등의 정책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11]

그의 죽음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정부는 시마즈 타다요시에게 제사료를 하사했다.[12] 사이고 다카모리는 야스타케를 추모하는 비문을 지었다.[13]

2. 6. 사후

요코야마 야스타케는 당시 활발하게 논의되던 정한론에 대해 "이미 국내가 피폐해진 시점에서 정한 따위는 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자결에는 정한론에 대한 항의의 의미가 있었다[9]。 또한 시폐 10개 조항에서는 정부 고관들의 자만심으로 정책이 국가가 아닌 개인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대국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령모개이며, 백성을 괴롭히고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고 단정했다. 더 나아가 이와쿠라 토모미나 토쿠다이지 사네쓰네는 공(功)의 유무를 판단하지 않고 애증에 따라 판단하고, 카스가 모와 같은 청렴한 자를 자주 억울하게 누명을 씌웠다고 들었다고 적고 있다. 야스타케는 앞으로는 이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도록 상소했다[11]

그의 죽음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이를 본 정부는 1870년 8월 10일 태정관에서 시마즈 타다요시에게 제사료 100JPY을 하사했다[12]사이고 다카모리1872년 8월에 비문을 지어 야스타케를 추모하고, 묘 옆의 깃발에 "정신, 해를 꿰뚫어 중화와 이적에 보이고, 기개, 서리를 능가하여 천지를 안다"라는 글을 썼다[13]

3. 가족

아들인 요코야마 소지로(1868~1909)는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나, 도쿄의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885년 삿포로 농학교에 입학하여 호레이스 스톡브리지에게 사사받았으며, 1889년에 졸업 후, 홋카이도청 지질 조사원, 동교 조교수를 거쳐 타이완 총독부의 기사가 되었다[14][15][16]。타이완에서는 농정 전반의 실무 외에도, 니토베 이나조의 측근으로서 제당업의 개선·진흥에 힘썼다[15]。1904년의 세인트루이스 만국 박람회에서는, 일본 회장 내에 세워진 타이완관의 건설 지도를 위해 파견되었다[17]러일 전쟁 후, 펑톈에서 농사 시험장과 농학교를 설립하여 만주의 농사 개량과 농업 기술자 육성에 힘썼다[14]

참조

[1] 서적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朝日新聞社 1994-11
[2] 서적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講談社 2015
[3] 서적 時弊十ヶ条 https://books.google[...] 扶桑社 2017-10-30
[4] 문서 삼崎(2008年) 112頁
[5] 문서 삼崎(2008年) 113頁
[6] 문서 삼崎(2008年) 113、114頁
[7] 문서 삼崎(2008年) 115頁
[8] 문서 삼崎(2008年) 114頁
[9] 문서 拳骨(2013)p.120
[10] 문서 삼崎(2008年) 121頁
[11] 문서 삼崎(2008年) 120頁
[12] 문서 삼崎(2008年) 117頁
[13] 웹사이트 横山正太郎書翰 http://www.library.p[...] 鹿児島県立図書館
[14] 웹사이트 横山壮次郎 https://kotobank.jp/[...]
[15] 간행물 展示 「台湾に渡った北大卒業生たち」第Ⅰ期・第Ⅱ期・第Ⅲ期 https://hdl.handle.n[...] 北海道大学大学文書館
[16] 웹사이트 横山壮次郎 / プリンス(ワシントン,D.C.) https://www2.lib.hok[...]
[17] 논문 セントルイス万国博覧会における「日本」の建築物 https://doi.org/10.3[...] 日本建築学会
[18] 뉴스 매화의 아픔 나눠야 친구가 됩니다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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