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아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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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아리노리는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의 정치가, 외교관, 교육자이다. 그는 영국 유학을 통해 서양 학문을 접하고, 메이지 정부에서 외국관 권판사, 주미 변무 공사, 초대 문부대신 등을 역임하며 근대화에 기여했다. 메이지 유신 운동의 일원으로서 종교의 자유, 세속 교육, 여성 평등, 국제법을 옹호했으며, 영어 공용화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889년, 일본 제국 헌법 선포일에 국수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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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아리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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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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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모리 아리노리 (森 有礼) |
출생일 | 1847년 8월 23일 |
출생지 | 가고시마현 |
사망일 | 1889년 2월 12일 |
사망지 | 도쿄 |
직업 | 외교관, 각료, 교육자 |
국적 | 일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모리 아리노부 (森 有恕) |
형제 | 요코야마 야스타케 (横山 安武) |
장인 |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 具視) |
장모 | 이와쿠라 마키코 (岩倉 槇子) |
처남 | 이와쿠라 도모야스 (岩倉 具義) 이와쿠라 도모사다 (岩倉 具定) 이와쿠라 도모쓰네 (岩倉 具経) |
처제 | 도다 고쿠시 (戸田 極子) |
처남 | 이와쿠라 미치토모 (岩倉 道倶) |
배우자 | 모리 쓰네 (森常, 전처) 모리 히로코 (森寛子, 후처) |
자녀 | 모리 기요시 (森清, 장남) 모리 아키라 (森明, 삼남) |
손자 | 모리 아리타케 (森有剛) 모리 아리마사 (森有正) 세키야 아야코 (関屋綾子) |
관직 | |
초대 문부대신 | 제1차 이토 내각 구로다 내각 |
임기 시작 | 1885년 12월 22일 |
임기 종료 | 1889년 2월 12일 |
참의원 의관 | 임기 시작: 1884년 5월 7일 임기 종료: 1885년 12월 22일 |
외무대보 | 임기 시작: 1878년 임기 종료: 1879년 |
학력 | |
출신 학교 | 조시칸 사쓰마 번 개성소 |
경력 | |
이전 직업 | 무사 (사쓰마번 번사) 외교관 |
훈장 및 작위 | |
추증 | 정2위 |
훈장 | [[File: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38px]] 훈1등욱일대수장 |
작위 | 자작 |
2. 생애
모리 아리노리는 1847년 사쓰마국 가고시마성 아래에서 사쓰마 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시칸에서 한학을, 번립 양학교인 가이세죠에서 양학을 공부했다. 당시 일본은 개국(1853), 미일 수호 통상 조약(1858), 메이지 유신(1868)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사쓰에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사쓰마 번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모리는 1864년 가이세죠에 입학하여 서양 학문을 공부했다.[33]
1865년 영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고다이 도모아쓰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86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음 해 6월에 귀국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33] 1869년 정부에 건의한 개혁안 중 ‘폐도안’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어 학습소를 열기도 했다. 1870년 다시 신정부에 임용되어 주미변무공사로 미국에 건너갔으며, 1872년부터 1873년까지 미국의 초대 공사를 지냈다.[33] 귀국 후에는 메이로쿠샤를 조직하여 메이지 계몽 운동을 이끌었다.
1875년에는 히토쓰바시 대학의 전신인 상업강습소를 설립하였고, 이후 청나라 대사, 외무부 차관, 영국 공사 등을 역임했다. 1876년 1월 24일에는 이홍장과 조선 문제에 관한 회담을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메이지 유신에 관한 날카로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34]
1884년 영국 공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문부성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1885년 제1차 이토 내각의 초대 문부대신으로 취임하여 교육 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1886년 3월, 학교령을 공포하고,[33] 국가주의적 교육관을 바탕으로 군대식 교육 도입 등을 강조했다.[29]
1889년 2월 11일 일본 제국 헌법이 선포된 날, 니시노 분타로에게 피습되어 다음 날 사망했다.[35] 니시노 분타로는 모리 아리노리가 이세 신궁에서 불경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36]
2. 1. 서양 유학과 국제 경험
1865년, 사쓰마 번의 영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고다이 도모아쓰 등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서양 학문을 배웠다.[6] 런던에서는 조슈 파이브와 교류하였고, 이후 러시아 제국을 여행하며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다. 1867년에는 로렌스 올리펀트의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가, 올리펀트가 신봉하는 신흥 종교 단체에서 토마스 레이크 해리스와 함께 생활하며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7] 또한 미국의 교과서를 수집하기도 했다.2. 2. 메이지 정부 관료 생활
1868년 6월 귀국하여, 7월 25일 메이지 정부의 외국관 권판사에 임명되었다.[8][9] 22세의 젊은 나이로 고위 관리가 되어 월봉 200엔을 받았으나, 9월 10일 사메지마 나오노부와 함께 자신들의 "감봉 탄원서"를 제출하며 30엔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1869년 정부에 6건의 개혁안을 건의했는데, 그중 무사가 칼을 차는 것을 버리고 법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폐도안’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사직하고 고향 가고시마(구 사쓰마 번)로 돌아가 영어 학습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870년 9월 신정부에 다시 임용되었고, 10월에는 주미변무공사(駐米弁務公使)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10]
1872년부터 1873년까지 미국의 초대 공사를 역임하며, 미국의 교육 제도와 사회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72년 2월 3일,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일본 교육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그 회신을 모아 1873년 Education in Japan영어(『일본에서의 교육』)을 간행했다. 1872년 11월 25일에는 워싱턴에서 Religious Freedom in Japan영어(『일본에서의 종교의 자유』)을 발표했다.
1873년 여름 귀국 후,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슈, 니시무라 시게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쓰다 마미치, 미쓰쿠리 린쇼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협회인 메이로쿠샤를 조직했다. 메이지 계몽 운동의 일원으로서 교육의 자유, 종교로부터 독립된 교육, 여성 평등, 국제법 준수를 주장했으며,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배울 것을 주장하여 '영어 국어화'론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1874년 5월부터 1875년 2월까지 『메이로쿠 잡지』에 "처첩론"을 발표하여 일부일처제를 주장했다.
1875년, 도쿄 긴자 오와리초에 사립 학원인 상법강습소(히토쓰바시 대학의 전신이자 일본 최초의 상업대학 (비즈니스 스쿨))를 설립했다. 주영 공사 시절 허버트 스펜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해 2월 6일, 후쿠자와 유키치가 증인이 되어 막신 히로세 히데오의 딸 히로세 쓰네와 결혼하면서 3개 조항을 교환하고 혼인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는 계약 결혼의 시초로 불린다.
같은 해 11월, 청나라 공사가 되었다. 1876년 1월, 바오딩부(베이징 남쪽)에서 이홍장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 중 메이지 유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모리 아리노리가 “서양 학문은 유용하지만 중국 학문은 7할이 구식이라 3할밖에 취할 바가 없다”고 하자, 이홍장은 “메이지 유신은 잘한 일이나 이전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모방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이에 모리 아리노리는 “옛날 의복은 넓고 편해서 무사안일한 사람에게 적당하지만 근면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천년 전 우리 조상이 중국 의복의 우수한 점을 보고 받아들였다면 현재는 서양의 장점을 보고 배우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홍장이 “옛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따르는 것은 독립정신을 포기하고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자, 모리 아리노리는 “외압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일축했다.[34]
1879년 11월, 영국 공사가 되었다.
2. 3. 이홍장과의 회담
1876년 모리 아리노리가 청나라 주재 공사 시절, 李鴻章|이홍장중국어과 조선 문제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24] 이 회담에서 모리는 메이지 유신과 서양 학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서양 학문의 유용성과 일본 근대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이홍장중국어과 논쟁을 벌였다.[24]2. 4. 문부대신과 교육 개혁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범한 1885년 12월, 모리 아리노리는 초대 문부대신으로 취임했다.[33] 그는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까지 문부대신을 역임하며 일본 교육 제도 전반의 개혁을 추진했다. 1886년 3월에는 학교령을 공포하여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사범학교 등 근대적 학교 제도를 확립했다.[33]모리 아리노리의 교육관은 '국가 번영'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를 위해 교과서 편찬, 체조 연병 수업, 지역 주민 교육, 사범학교에 군대식 교육 도입,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군대식 체조' 실시, 17세부터 27세 남성에게 조련(調練) 수업을 받도록 하여 호국 정신 함양 등을 강조했다.[29]
모리 아리노리는 여성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 육성을 위해서는 교양 있는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모양처 교육을 강조했다.[29] 그러나 여성의 역할을 가정에 한정하는 시대적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주의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일본의 엘리트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교육 시스템에 책임이 있는 반동 분자로 비난받았으며, 동시대인들로부터는 일본 문화와 전통을 희생시키면서 일본 사회에 원치 않는 서구화를 강요한 급진적인 인물로 비난받았다.
2. 5. 암살
1889년 2월 11일 일본 제국 헌법 반포식 날, 국수주의자 니시노 분타로가 모리 아리노리를 칼로 옆구리를 찔렀다.[35] 니시노 분타로는 모리 아리노리가 이세 신궁에서 불경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36] 또한 니시노 분타로가 쓴 종이에는 '천황을 받드는 일본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려고 한다'고 적혀있었다. 모리 아리노리는 다음 날 사망했다.[35]3. 사상과 평가
모리 아리노리는 메이지 유신 운동의 일원으로, 서양의 여러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일본에 도입하고자 했다. 초대 미국 주재 일본 대사를 역임하면서 서양식 교육 방식과 사회 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2] 귀국 후에는 일본 최초의 근대 지식인 단체인 메이로쿠샤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과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며 6년제 의무 교육, 고등학교 설립 등 교육 제도 개혁("모리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지도 하에 중앙 부처는 학교 교육 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고, 하위 학교에서는 신유학적 도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으며, 고등 교육에서는 어느 정도의 지적 자유를 허용했다.[2]
1889년 메이지 헌법 반포 당일 초국수주의자에게 칼에 찔려 다음 날 사망했다. 암살범은 2년 전 이세 신궁 방문 당시 모리가 신궁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지 않고 지팡이로 신성한 휘장을 밀쳐냈다는 등 종교적 프로토콜을 위반한 것에 격분했다고 전해진다.[3]
그의 저작 중 일부는 W.R. 브레이스티드의 저서 ''메이로쿠 잡지: 일본 계몽주의 저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원래 ''메이로쿠 잡지''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다.[4]
모리는 장기 애호가로, 후쿠자와 유키치, 핫토리 킨타로, 요시카와 켄세이 등과 함께 명인 오노 고헤이의 후원자였다.
'''모리 아리노리의 저서 및 편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 | 내용 | 비고 |
---|---|---|
Religious Freedom in Japan : a memorial and draft of charter. 1872. | 「영문 일본 종교 자유론」 | 요시노 사쿠조 편집 대표, 니혼 효론샤 출판 등 |
On a representative system of government for Japan. | 「일본 정부 대의 정체론」 | 에무라 에이이치 교주, 이와나미 서점 출판 |
The proposed national assembly in Japan. Gibson Bros., printers, 1883. | ||
[http://openlibrary.org/works/OL5626405W/Life_and_resources_in_America Life and resources in America. 1871]. | ||
Education in Japan : a series of letters addressed by prominent Americans to Arinori Mori. New York : D. Appleton, 1873. | 「일본 교육책」, 『문학 흥국책』 | 하야시 라쿠치 역, 광문회, 1896년 5월 등 |
[http://openlibrary.org/works/OL1619562W/Leading_men_of_Japan Charles Lanman Leading men of Japan: with an historical summary of the empire. Boston, Mass. : D. Lothrop Co., 1883]. |
3. 1. 주요 사상
모리 아리노리는 메이지 계몽 운동의 일원으로서 종교의 자유, 세속 교육, 여성 평등권 (투표권 제외), 국제법 등을 옹호했다.[2] 그는 영어 공용화론을 주장하여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모리의 국어 영어화론에 대해 바바 타츠이, 니시 슈, 시미즈 우사부로, 쿠로카와 마사요리가 반대했다. 특히 쿠로카와 마사요리는 1875년 6월, '요요사담' 제2호에 '언어 문자 개혁의 설의 변'을 발표하여 모리의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13][14] 모리의 급진주의적인 생각은 당시 대중의 감각과는 괴리되어 "메이로쿠의 유령(아리노리)" 등으로 조롱받기도 했다.
모리는 일부일처제를 주장하고, 계약 결혼을 실천하는 등 가족 제도 개혁에도 앞장섰다. 히로세 츠네와의 결혼은 일본 최초의 계약 결혼으로, "각자가 아내, 남편일 것", "파기하지 않는 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것", "공유물에 대해서는 쌍방의 동의 없이 대차 매매하지 않을 것"의 3조로 구성되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가 증인이 되었다.[16] 츠네와는 결혼 11년 후 소행상의 이유로 이혼했다.[16]
3. 2. 긍정적 평가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 근대 교육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양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13][14] 또한, 국제법과 외교를 중시하며 국제 관계 개선에 힘썼다.3. 3. 부정적 평가
모리 아리노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유주의자들에게 일본의 엘리트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교육 시스템에 책임이 있는 인물로 비판받았다.[2]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일본 문화와 전통을 희생시키면서 일본 사회에 원치 않는 서구화를 강요한 급진적인 인물로 비난받았다.[2] 예를 들어, 그는 영어 사용을 옹호했다.[2]모리의 급진주의적인 생각은 당시 대중의 감각과는 괴리된 것이 있어, "메이로쿠의 유령(아리노리)" 등으로 조롱받기도 했다. 그의 국어 영어화론에 대해 바바 타츠이, 니시 슈, 시미즈 우사부로, 쿠로카와 마사요리가 반대했다.[13][14] 쿠로카와 마사요리는 1875년 6월, '언어 문자 개혁의 설의 변'을 '요요사담' 제2호에 발표하여 통렬하게 비판했다.[13][14]
모리는 메이지 유신 운동의 일원으로서 종교의 자유, 세속 교육을 옹호했지만, 신도에 대한 토론에서 "신도의 중심 사상은 죽은 자에 대한 경건한 숭배이다. 일본의 절대주의적 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교묘하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초기 역사 기록이라고 하는 서적은 신뢰할 만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15]
4. 연보
- 1847년 - 사쓰마국 가고시마성에서 사쓰마 번사의 5남으로 출생.[33]
- 1865년 - 고다이 도모아쓰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33]
- 1867년 - 로렌스 올리펀트의 권유로 미국 유학.[33]
- 1868년 - 귀국 후 권리판사에 임명되며 관료 생활 시작.[33]
- 1870년 - 주미변무공사(駐米弁務公使)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감.
- 1872년 ~ 1873년 - 미국의 초대 공사 역임.[34]
- 1873년 - 메이로쿠샤 결성.
- 1875년
- 히로세 쓰네와 계약 결혼.
- 상법강습소 (현 히토쓰바시 대학) 설립.
- 청나라 대사 부임.
- 1876년 - 이홍장과 회담.[34]
- 1879년 - 영국 공사 부임.
- 1885년 - 제1차 이토 내각 초대 문부대신 취임.[33]
- 1886년 - 학교령 공포.[33]
- 1889년 - 일본 제국 헌법 선포 당일 국수주의자 니시노 분타로에게 피습, 다음 날 사망.[35]
5. 가족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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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森有礼|近代日本人の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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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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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育家・外交官→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森有礼」、政治家→旺文社日本史事典 三訂版「森有礼」、思想家→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森有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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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育史における森有礼の評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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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元年12月4日 薩摩出身3人が外国官職員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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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993号「叙任及辞令」1886年10月20日。
『官報』
188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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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DLDC|2944930/7}}[...]
『官報』
188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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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1156号「叙任及辞令」1887年5月10日。
『官報』
188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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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섭 (199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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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아리노리 [森有礼] - 일본의 근대 교육제도를 창설한 초대 문부대신 (일본 관료, 김경리)
네이버 지식백과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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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아리노리 [森有礼] - 일본의 근대 교육제도를 창설한 초대 문부대신 (일본 관료, 김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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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과 일본
고려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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