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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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정 만세운동은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북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3월 13일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북간도 지역의 만세운동 확산에 기여했으며, 명동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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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 3·1 운동
3·1 운동은 1919년 일본의 무단 통치에 저항하여 시작된 한국의 독립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1919년 3월 - 3·1독립선언서
1919년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하고 2·8 독립 선언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며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간도 - 대한통의부
대한통의부는 1920년대 초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자 자치 정부로서, 여러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통해 조직되었으며, 군사 및 자치 행정 체계를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내부 갈등과 분열로 해체되었다. - 간도 - 윤명선 (1900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관리를 지낸 윤명선은 학무국장 윤치오의 아들이자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의 동생으로, 만주국 젠다오 성 차장까지 지냈으나 해방 후 피습당해 사망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 - 광복절
광복절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기념하는 날로서,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국경일 및 공휴일로 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의 날로 기념한다. - 한국의 독립운동 - 3·1 운동
3·1 운동은 1919년 일본의 무단 통치에 저항하여 시작된 한국의 독립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용정 만세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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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만세운동 | |
전체 | 한국의 독립운동 |
명칭 | 용정 만세운동 |
날짜 | 1919년 3월 13일 |
지역 | 북간도 용정 |
목적 | 3·1 운동의 북간도에서의 개최 |
종류 | 만세, 시위, 집회 |
원인 | |
원인 |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
결과 | |
결과 | 진압 |
참가 세력 | |
시위대 | 한국인 |
병력 | 도 병력 |
시위대 인원 | 3만여 명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84572.html |
병력 인원 | 불명 |
주요 인물 | 김약연 |
피해 | |
사망자 | 19명 |
부상자 | 30여 명 |
기타 |
2. 배경
1919년 초 파리 강화회의 개최 소식은 북간도 한인 사회에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에 김약연을 중심으로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한인 사회 내부의 열망은 니콜리스크에서의 회합과 독립선언서 작성 등으로 이어지며, 용정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을 형성하였다.
2. 1. 국제 정세
1919년 1월 25일과 28일, 김약연의 주도로 소영자(小營子)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당시 파리 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간도 한인 사회에 알려진 상황이었다. 김약연은 2월 6일 니콜리스크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러한족중앙총회에 앞서,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후 김약연, 정재면, 이중집, 문병호, 윤동철, 정기영 등은 ‘간도대표단’을 구성하여 2월 25일 니콜리스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훈춘, 노령에서 온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선출했다.2. 2. 북간도 한인 사회의 움직임
1919년 1월 25일과 28일, 김약연의 주도로 소영자(小營子)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 시기는 파리 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간도 한인 사회에 알려진 때였다. 김약연은 2월 6일 니콜리스크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러한족중앙총회에 앞서,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후 김약연, 정재면, 이중집, 문병호, 윤동철, 정기영 등은 ‘간도대표단’을 조직하여 2월 25일 니콜리스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훈춘과 노령에서 온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으며,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선출하였다.3. 전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의 소식이 3월 7일 간도 지역에 전해지자, 용정 등지에서는 3월 10일부터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며 항일 시위 개최를 요구하였다.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간도조선독립운동 의사부는 당초 계획을 앞당겨 3월 13일에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3월 13일, 용정의 서전평야(瑞甸平野)에서 명동학교를 비롯한 12개 학교 학생과 교직원 등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태극기를 들고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연길 도윤 맹부덕(孟富德)이 이끄는 병력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사용된 총탄이 일본제로 확인되면서 일제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3. 1. 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된 후, 그 소식이 3월 7일 간도 일대에 전해졌다. 이에 국자가(局子街)와 용정(龍井)에서는 3월 10일부터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3·1 운동을 기념하고 항일 시위를 열 것을 간도조선독립운동 의사부에 요구했다.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의사부는 당초 3월 18일로 계획했던 일정을 앞당겨 3월 13일에 거사를 치르기로 결정했다.마침내 3월 13일, 용정의 서전평야(瑞甸平野)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명동학교를 포함한 12개 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여 독립 의지를 다졌다. 참가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아가 시위를 벌였다. 이에 연길 도윤은 맹부덕(孟富德)이 이끄는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인지 일본군인지 명확하지 않은 무장 세력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9명이 목숨을 잃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사용된 총탄은 일본제로 알려져 일본 측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3. 2. 만세 시위
1919년 3월 13일, 용정의 서전평야(瑞甸平野)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명동학교를 비롯한 12곳의 학교에서 모인 학생들과 직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연길 도윤은 맹부덕(孟富德)이 이끄는 병력을 출동시켰다. 시위대를 향해 중국군인지 일본군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들이 총을 발포하였고, 이 사건으로 19명이 목숨을 잃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사용된 총탄은 일본에서 제조된 것으로 알려졌다.3. 3. 일제의 무력 진압
3월 13일, 용정의 서전평야(瑞甸平野)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시위가 시작되자, 연길 도윤(道尹)은 맹부덕(孟富德)이 이끄는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인지 일본군인지 명확하지 않은 무장 세력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 발포로 인해 19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사건 이후 현장에서 수습된 총탄이 일본제로 확인되면서, 이 진압 과정에 일제가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4. 결과와 의의
이 운동은 북간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었으며, 비록 많은 희생이 따랐으나[2] 이를 계기로 간도 전역에 대중적인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확산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2] 운동 이후 북간도 전역에서는 약 한 달 반 동안 47차례의 항일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며 8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는 등[3] 항일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한편 일제는 이 운동을 빌미로 명동학교를 탄압하였고[2], 이는 향후 학교 폐교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 1. 인명 피해
이 운동은 북간도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중 사망자나 부상자의 수가 가장 많았다.[2]4. 2. 항일 운동 확산
이 운동은 북간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었으며, 사망자나 부상자 수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이 운동을 계기로 간도 전역에 대중적인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2] 3월 13일부터 4월 말까지 북간도에서는 총 47차례의 항일 집회와 시위가 열렸고, 여기에 참여한 인원은 86,670명에 달했다.[3] 특히 훈춘에서는 3월 20일에 시작되어 3월 30일과 4월 1일에도 시위가 이어졌다.[3]지역 | 횟수 | 참가 인원 |
---|---|---|
연길현 | 18차 | 약 37,870명 |
화룡현 | 12차 | 약 13,550명 |
왕청현 | 11차 | 약 27,960명 |
훈춘현 | 3차 | 약 2,050명 |
안도현 | 3차 | 약 1,100명 |
합계 | 47차 | 약 86,670명 |
한편 일제는 이 운동을 빌미로 명동학교를 ‘불령한 사상을 가진 자들의 소굴’로 지목하며 탄압했고[2], 이는 결국 명동학교 폐교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명동학교 학생들은 3.13 만세운동 이후에도 만세운동을 널리 알리고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 및 교직원들이 조직한 충렬대(忠烈隊)는 3.13 운동에 단원 전체가 참여했으며, 이후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 김상호(金尙鎬)의 지도 아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용정의 장날이었던 4월 12일, 충렬대는 토성포(土城浦)에 숨어 있다가 시장으로 진입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충렬대는 이후 간도 지역의 학생과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맹호단(靑年猛虎團)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청년맹호단은 친일 행위를 하는 한인들을 감시하는 활동을 펼쳤다. 단원들은 용정촌, 국자가, 두도구 등지에서 친일 성향의 한인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거나, 일본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한인 경찰 간부나 순사에게 사직을 강요하기도 했다. 11월 24일에는 음력 개천절을 기념하여 상점 철시와 태극기 게양 운동을 벌였고, 다음 날인 25일에는 남양평에 있는 조선인 거류민회장 박만수의 집을 습격했다.
4. 3. 명동학교의 역할
명동학교 학생들은 용정 만세운동 이후의 만세운동을 전파하고 주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 및 교직원들이 조직한 충렬대(忠烈隊)는 3.13 운동에 모든 단원이 참여하였으며, 이후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사 김상호(金尙鎬)가 이끌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용정의 장날이었던 4월 12일, 충렬대는 토성포(土城浦)에 잠복하여 있다가 시장으로 진입하는 만세운동을 벌였다.한편 충렬대는 간도의 학생들과 청년들을 모아 청년맹호단(靑年猛虎團)으로 확대, 재조직되어, 친일 행위를 하는 한인들을 감시하는 활동을 벌였다. 맹호단원들은 용정촌, 국자가, 두도구 일대에서 친일 한인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고, 일본 총영사관에 재직하는 한인 경부나 순사에게 사직하라고 협박하였다. 11월 24일에는 음력 개천절에 상점을 휴업하고 태극기를 게양하자는 운동을 벌였으며, 25일에는 남양평에 있는 조선인 거류민회장 박만수의 집을 습격하였다.
일제는 이 운동을 계기로 명동학교를 ‘불령한 사상을 가진 자들의 소굴’로 규정하였으며[2], 이는 향후 명동학교 폐교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참조
[1]
뉴스
‘3·13 독립만세운동’ 만주 용정 그날의 기록들
http://www.hani.co.k[...]
한겨레
2019-04-11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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