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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성 천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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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쓰노미야성 천장 사건은 1622년,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혼다 마사즈미가 모반 혐의로 실각한 사건이다. 혼다 마사즈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았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에 권력 다툼에 휘말려 우쓰노미야성 보수 공사 및 낚시 천장 설치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은 낚시 천장이라는 민화를 낳았으며, 사건의 진위와 막부의 대응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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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성 천장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우쓰노미야성 천장 사건
발생 장소우쓰노미야성
발생 시기게이초 2년 (1597년)
관련 인물하시바 히데야스
후루타 시게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리
배경
시대적 배경도요토미 정권 말기
하시바 히데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후루타 시게카쓰다도 스승,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
사건 전개
사건 발단우쓰노미야성 개축 중 천장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저주하는 글귀 발견
후루타 시게카쓰의 역할천장 글귀 발견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
하시바 히데야스의 해명결백 주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주 의혹 제기
사건 결과
하시바 히데야스우쓰노미야성에서 추방, 오사카성 연금
후루타 시게카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잃음
사건 영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상 강화도요토미 정권 내 영향력 확대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조짐내부 분열 심화
기타
사건의 진실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음.
참고 자료여러 역사 기록 및 연구 존재

2. 배경

혼다 마사노부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연로(年寄)였고, 그의 아들 혼다 마사즈미슨푸의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이었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자신의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하여 그 지위는 굳건했다.

겐나 2년(1616년), 이에야스와 마사노부가 잇따라 사망하자, 마사즈미는 시모쓰케 오야마번의 영주가 되었고, 히데타다의 연로(이후 노중)까지 올랐다. 그러나 마사즈미는 선대부터의 가신임을 믿고 권세를 부려 히데타다와 그의 측근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1619년 10월, 후쿠시마 마사노리개역(영주 신분 박탈)된 후, 마사즈미는 이에야스의 유언이라며 오쿠다이라 타다마사를 시모쓰케 우쓰노미야번에서 시모사 고가번으로 옮기고, 자신은 우쓰노미야 15만 5천 석으로 영지를 늘렸다. 이로 인해 마사즈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 카노 고젠 등 여러 인물에게 반감을 샀다.[1]

2. 1. 혼다 가문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뢰

혼다 마사노부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연로(年寄)였고, 그의 아들 혼다 마사즈미는 슨푸의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이었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자신의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하였고, 그 지위는 확고했다.

겐나 2년(1616년), 이에야스와 마사노부가 잇따라 사망하자, 마사즈미는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시모쓰케 오야마번 5만 3000석의 영주가 되었고, 히데타다의 연로(이후 노중)까지 올랐다.

2. 2. 히데타다 시대의 권력 변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버지 혼다 마사노부가 사망한 후, 혼다 마사즈미는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시모쓰케 오야마번 5만 3천 석의 영주가 되었고,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노중까지 올랐다.[1] 그러나 마사즈미는 선대부터의 가신이라는 점을 믿고 권세를 부려 히데타다와 그의 측근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1]

1619년 10월, 후쿠시마 마사노리개역(영주 신분 박탈)된 후, 마사즈미는 이에야스의 유언이라며 오쿠다이라 타다마사를 시모쓰케 우쓰노미야번 10만 석에서 시모사 고가번 11만 석으로 옮기고, 자신은 오야마 5만 3천 석에서 우쓰노미야 15만 5천 석으로 영지를 늘렸다.[1] 이로 인해 마사즈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 카노 고젠 등 오쿠다이라 가문과 오쿠보 가문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에게도 반감을 샀다.[1] 카노 고젠은 마사즈미가 우쓰노미야로 영전하면서 격하된 시모사 고가로 옮겨간 타다마사의 할머니였고, 카노 고젠의 딸은 개역된 오쿠보 타다치카의 아들 오쿠보 타다츠네의 정실이었다.[1]

3. 경과

1622년(겐나 8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주기를 맞아 닛코 도쇼구를 참배하고 우쓰노미야성에서 숙박할 예정이었으나, 히데타다의 누이 가노 고젠의 밀고와 어태부인의 병환을 이유로 미부성에서 숙박하고 에도성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8월, 데와국 야마가타번 모가미 요시토시의 개역 때, 마사즈미는 상사(上使)로서 야마가타성을 접수하러 갔다. 그 와중에 히데타다는 마사즈미에게 11개 조의 죄상을 추궁했다. 이타미 야스카츠와 다카기 마사쓰구가 심문했을 때, 마사즈미는 11개 조에 대해 명확하게 답변했으나, 야스카츠가 추가로 제기한 3개 조(성의 수축에 있어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장군 직속의 네고로 동심(根来同心)을 처형한 것, 조총을 무단으로 구입한 것, 우쓰노미야성 수축에서 허가 없이 빠져나가는 구멍 공사를 한 것)[2]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했다. 결국 마사즈미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 유리군에 5만 5000석을 받는 처분을 받았다.

마사즈미는 모반 혐의에 억울함을 느껴 5만 5000석을 사양했지만, 히데타다는 분노하여 혼다 가문을 개역했다. 마사즈미는 구보타번주 사타케 요시노부에게 맡겨져 데와 요코테유배되었다. 이후 마사즈미는 1000석의 부양을 받았고, 1637년(간에이 13년) 3월, 73세의 나이로 아키타 요코테성에서 생을 마감했다.[2]

3. 1. 우쓰노미야성 보수와 낚시천장 모함

1622년(겐나 8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주기를 맞아 닛코 도쇼구를 참배한 후 우쓰노미야성에서 1박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마쓰다이라 마사즈미는 성의 보수 공사와 어성(御成) 어전(御殿)을 조성하게 했다. 4월 16일, 히데타다가 닛코로 향하자, 히데타다의 누이이자 오쿠다이라 다다마사의 할머니인 가노 고젠으로부터 "우쓰노미야성의 보수 공사에 미비한 점이 있다"는 밀고가 있었다.

내용의 진위 확인은 미루고, 4월 19일, 히데타다는 "어태부인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우쓰노미야성 숙박을 취소하고 미부성을 거쳐 21일 에도성으로 귀환했다.[2]

3. 2. 모가미 요시토시 개역과 혼다 마사즈미의 죄상

1622년(겐나 8년), 데와국 야마가타번 모가미 요시토시가 개역될 때, 혼다 마사즈미는 상사(上使)로서 야마가타성 접수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 와중에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마사즈미에게 11개 조의 죄상을 추궁했다.[2]

혐의 내용은 조총 비밀 제조, 우쓰노미야성 혼마루(본성) 석축 무단 수리, 우쓰노미야성 침소에 낚시 천장을 설치하여 히데타다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 등이었다.[2] 이타미 야스카츠와 다카기 마사쓰구가 사자로 파견되어 11개 조에 대해 묻자, 마사즈미는 명확하게 답변했다. 그러나 야스카츠가 추가로 제기한 3개 조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했다.[2]

추가된 3개 조는 성 수축 과정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장군 직속 네고로 동심(根来同心) 처형, 조총 무단 구입, 우쓰노미야성 수축 중 허가 없이 빠져나가는 구멍 공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2]

결국 마사즈미는 영지를 몰수당했다. 다만, 선대로부터의 충성을 고려하여 데와 유리군에 5만 5000석을 주라는 명이 내려졌다. 마사즈미는 모반 혐의에 억울함을 느껴 5만 5000석을 사양했으나, 오히려 히데타다의 분노를 사 혼다 가문은 개역되었다. 마사즈미는 구보타번주 사타케 요시노부에게 신병이 인도되어 데와 요코테유배되었다.[2]

3. 3. 혼다 마사즈미의 개역과 유배

1622년(겐나 8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주기를 맞아 닛코 도쇼구 참배 후 우쓰노미야성에서 1박할 예정이었다. 이에 혼다 마사즈미는 성 보수 공사와 어성(御成) 어전(御殿)을 조성했다. 그러나 히데타다의 누이 가노 고젠의 밀고로 공사에 미비점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히데타다는 어태부인의 병을 이유로 미부성에서 숙박하고 에도성으로 귀환했다.[2]

이후 데와국 야마가타번 모가미 요시토시의 개역 당시, 마사즈미는 상사(上使)로서 야마가타성을 접수했다. 그 와중에 히데타다는 마사즈미에게 조총 비밀 제조, 우쓰노미야성 혼마루(본성) 석축 무단 수리, 낚시 천장을 이용한 히데타다 암살 시도 등 11개 조의 혐의를 제기했다. 이타미 야스카츠와 다카기 마사쓰구가 11개 조에 대해 묻자 마사즈미는 명쾌하게 답변했으나, 야스카츠가 추가로 제기한 3개 조(성의 수축에 있어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장군 직속의 네고로 동심(根来同心)을 처형한 것, 조총을 무단으로 구입한 것, 우쓰노미야성 수축에서 허가 없이 빠져나가는 구멍 공사를 한 것)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했다. 결국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 유리군에 5만 5000석을 받는 것으로 변경되었다.[2]

마사즈미는 모반 혐의에 억울함을 느껴 5만 5000석을 사양했고, 히데타다는 분노하여 혼다 가문을 개역했다. 마사즈미는 구보타번주 사타케 요시노부에게 맡겨져 데와 요코테유배되었다. 이후 1000석의 버려진 부양을 받았고, 1637년(간에이 13년) 3월, 73세 나이로 아키타 요코테성 한 구석에서 생을 마감했다.[2]

4. 파문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져서, 영국 상관의 리처드 콕스네덜란드 상관의 레오나르도 캠프스는 "혼다 마사즈미 등에 의한 음모"로 보고 본국에 서간으로 전했다[3]。또한 강담이나 가부키의 좋은 소재가 되었지만, 그 내용은 다음 해인 1623년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모반 혐의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받고 있다. 근현대에도 영화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3]

4. 1. 진위 논란과 막부의 대응

혼다 마사즈미의 모반 증거는 전혀 없었고, 히데타다도 우쓰노미야 성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음을 겐와 8년(1622년) 4월 19일에 이노우에 마사나리에게 실시시킨 조사에서 확인했다. 이 전말은 마사즈미의 존재를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도이 도시카쓰 등의 모략이었거나, 가노 고젠(가메히메)의 원한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3]

히데타다 자신도 아버지 이에야스 때부터 막부에서 영향력을 크게 가지고,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마사즈미를 꺼림칙하게 생각했다는 설도 있다. 히데타다는 마사즈미의 처분에 대해 여러 다이묘에게 개별적으로 설명을 하는 이례적인 대응을 취했다. 통상 이럴 경우 여러 다이묘를 에도 성에 모아 명령을 내렸지만, 히데타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설명을 들은 당시의 오구라 번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히비(평소) 고호코(봉공) 아시쿠(잘못)"라는 이유였다고 아버지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서신을 보냈다.[3]

4. 2. 국제적 파장과 문화적 영향

이 사건은 영국 상관의 리처드 콕스네덜란드 상관의 레오나르도 캠프스가 "혼다 마사즈미 등에 의한 음모"로 보고 본국에 서간으로 전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알려졌다.[3] 이 사건은 강담이나 가부키의 좋은 소재가 되었지만, 그 내용은 다음 해인 1623년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모반 혐의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받고 있다. 근현대에도 영화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5. 민화 "낚시천장"

우쓰노미야시에는 낚시천장(吊り天井, 쓰리텐조) 장치 제작에 참여한 젊은 대목장원의 딸의 사랑 이야기를 덧붙인 「낚시천장(吊り天井, 쓰리텐조)」이라는 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1] 이 민화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우쓰노미야성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급히 변경한 것과, 그 직후 혼다 마사즈미가 파면된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3][1] 민화 속 '영주'는 역사적 사실대로 혼다 마사즈미로 이야기되지만, '쇼군'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미쓰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1]

5. 1. 민화의 내용과 특징

옛날 옛적 에도 시대 초기에 우쓰노미야 인근 마을에 요시로라는 마음씨 좋고 솜씨 좋은 젊은 대목이 있었다. 장원은 요시로를 마음에 들어 하여 그의 딸 오하야와 결혼을 약속했다.[1] 어느 날 요시로는 장원으로부터 닛코 도쇼구에 참배하는 쇼군이 묵을 방을 짓는 데 선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쓰노미야성으로 향했다.[1] 성에는 시모쓰케국 각지에서 선발된 30명 정도의 대목들이 모였고, 호화로운 식사가 제공되었지만,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1] 요시로는 오하야를 그리워했다.

쇼군이 묵을 방은 한 달도 안 되어 완성되었지만, 솜씨 좋은 대목 10명이 추가로 선발되어 쇼군의 욕실을 짓게 되었다.[1] 요시로는 그중 한 명이었지만, 오하야를 만날 수 없어 괴로워했다.[1] 어느 날 요시로는 동료로부터 영주가 욕실 위에 吊り天井(쓰리텐조)를 설치하여 쇼군을 암살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1] 요시로는 밤중에 성을 탈출하여 오하야에게 달려갔다.[1] 요시로와 오하야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시로는 오하야에게 낚시천장의 도면을 맡기고 성으로 돌아갔다.[1]

성으로 돌아온 요시로는 목이 잘리고, 욕실 완성을 기다리던 대목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1] 오하야는 슬픔에 잠겨 낚시천장의 도면을 남기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1] 장원은 딸의 유서와 도면을 가지고 쇼군에게 달려가 낚시천장에 대해 알렸다.[1] 스즈메노미야 역에서 쇼군 일행을 만난 장원은 서장을 내밀며 급한 상황을 알렸다.[1]

낚시천장에 대해 알게 된 쇼군은 에도로 돌아갔고, 조사 결과 낚시천장과 대목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1] 영주는 성을 빼앗기고 아키타의 유리로 유배되었다고 한다.[1]

다른 이야기에서는 혼다 마사즈미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동생인 도쿠가와 다다나가를 3대 쇼군으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에미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주기 법요를 위해 닛코 참배를 가는 길에 우쓰노미야에 묵게 되자 낚시천장 암살을 계획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2] 마사즈미는 비밀 유지를 위해 대목들을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2]

대목 중에는 요고로라는 젊은 대목이 있었는데, 장원의 딸 오이네와 연인 관계였다.[2] 요고로는 성을 탈출하여 오이네에게 갔지만, 재회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목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2] 오이네는 요고로의 망령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2] 장원은 딸의 유서를 발견하고 쇼군에게 달려가 낚시천장에 대해 알렸다.[2] 낚시천장에 대해 알게 된 쇼군은 우쓰노미야에 묵지 않고 에도로 돌아갔고, 이에미쓰는 목숨을 건졌다.[2] 마사즈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2]

이 민화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우쓰노미야성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급히 변경한 것과, 그 직후 혼다 마사즈미가 파면된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3][1] 민화 속 '쇼군'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미쓰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1]

5. 2. 민화의 역사적 배경과 해석

우쓰노미야시에는 吊り天井(쓰리텐조, 매달린 천장) 장치 제작에 참여한 젊은 대목장원의 딸의 사랑 이야기를 덧붙인 「吊り天井(쓰리텐조)」라는 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1] 이 민화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우쓰노미야성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급히 변경한 것과, 그 직후 혼다 마사즈미가 파면된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2][1] 민화 속 '영주'는 역사적 사실대로 혼다 마사즈미로 등장하지만, '쇼군님'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미쓰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1]

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야기・그1[1]):

  • 옛날 에도 시대 초기, 우쓰노미야 인근 마을에 요시로라는 솜씨 좋은 대목이 있었다. 장원은 요시로를 마음에 들어 하여 딸 오하야와 결혼을 약속했다. 어느 날, 요시로는 닛코 도쇼구에 참배하는 쇼군이 묵을 방을 짓는 데 선택되어 우쓰노미야 성으로 향했다. 성에는 시모쓰케국 각지에서 선발된 대목 30여 명이 모였고, 호화로운 식사가 제공되었지만 외출은 금지되었다. 요시로는 오하야를 그리워했다.
  • 쇼군의 방은 한 달도 안 되어 완성되었지만, 솜씨 좋은 대목 10명이 추가로 선발되어 쇼군의 욕실을 짓게 되었다. 요시로는 그중 한 명이었지만, 오하야를 만날 수 없어 괴로워했다. 어느 날, 요시로는 동료 대목 토메키치로부터 영주가 욕실 위에 쓰리텐조를 설치하여 쇼군을 암살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요시로는 밤중에 성을 탈출하여 오하야에게 달려갔다. 요시로와 오하야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시로는 오하야에게 쓰리텐조 도면을 맡기고 성으로 돌아갔다.
  • 성으로 돌아온 요시로는 목이 잘리고, 욕실 완성을 기다리던 나머지 대목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소문은 성 아래로 퍼져나가 오하야의 귀에도 들어갔다. 오하야는 슬픔에 잠겨, 편지와 쓰리텐조 도면을 남기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장원은 딸의 유서와 도면을 들고 스즈메노미야 역에서 쇼군 일행을 만나 사실을 알렸다.
  • 쓰리텐조에 대해 알게 된 쇼군은 에도로 돌아갔고, 우쓰노미야 성을 조사한 결과 쓰리텐조와 대목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영주는 성을 빼앗기고 아키타의 유리로 유배되었다.


다른 버전의 민화도 있다(이야기・그2[3]):

  • 혼다 마사즈미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동생인 도쿠가와 타다나가를 3대 쇼군으로 세우고 싶어 했지만, 이에미쓰가 쇼군이 되자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이에미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주기 법요를 위해 닛코 참배를 가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우쓰노미야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마사즈미는 가신과 모의하여 쓰리텐조를 설치하기 위해 대목들을 모았다. 비밀 유지를 위해 대목들의 외출은 금지되었다.
  • 대목들 중에는 요고로라는 젊은 대목이 있었는데, 장원의 딸 오이네와 연인 관계였다. 어느 날 밤, 요고로는 오이네를 그리워하며 성을 탈출했지만, 재회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쓰리텐조 완성 후, 대목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 오이네는 요고로의 망령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슬픔에 잠겨 편지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장원은 딸의 유서를 발견하고, 그 편지와 쓰리텐조 도면을 들고 닛코에서 우쓰노미야로 향하던 쇼군 일행을 만나 이이 카몬노카미에게 사실을 알렸다.
  • 쓰리텐조에 대해 알게 된 쇼군은 우쓰노미야에 묵지 않고 에도로 돌아갔고, 이에미쓰는 목숨을 건졌다. 마사즈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민화들은 혼다 마사즈미의 실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마사즈미는 쇼군을 암살하려 한 악인으로, 그의 음모에 희생된 대목들과 장원의 딸은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당시 민중들이 권력자의 횡포와 그에 대한 저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엿볼 수 있다.

6.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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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釣天井(吊り天井)とは、天井を綱などでつり下げておき、標的が部屋にいるときにその綱を切って落とし、標的を押しつぶして殺害する装置のことである。
[2] 서적 宇都宮市史 近世通史編
[3]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講談社学術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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