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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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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사웅은 병마절도사 증 영의정 원준량의 손자이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아들로,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원균을 따라 참전했다. 18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그를 12세의 어린아이로 폄하하여 논란이 일었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는 기록과 달리, 1646년까지 생존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선무원종공신 2등에 추서되었으며, 족보에 따라 사망 시기와 이순신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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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웅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원사웅
한자 표기元士雄
대기(大器)
출생일1575년
출생지조선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 도일리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사망일1646년 이전
사망 원인미상
국적조선
본관원주(原州)
봉호원성군(原城君)
가족 관계
아버지원균
어머니파평 윤씨
배우자전주이씨, 창녕성씨
자녀원필, 원염
친척할아버지 원준량, 숙부 원연, 원용, 원전, 사촌 형 원사립
경력
복무조선군
복무 기간? ~ 1597년(?)
최종 계급훈련원정
참전임진왜란, 정유재란
서훈적평책훈 2등

2. 생애

원사웅은 병마절도사영의정 원준량의 손자이자 경상우수영 우수사 원균과 파평 윤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궁마에 능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원균을 따라 전장에 출정하였다.

경상우수영 사후장(伺候將)으로 활약하였으며, 1594년 4월 경상우수영에서 원균 등이 노획한 조총 70정을 왕에게 바쳐 특별 포상으로 승급되기도 했다.

경상좌수사 이순신은 12세 된 첩의 어린 아들이었다는 이유로 원사웅을 비방하였고, 이후 자신에 대한 비방이 매우 심해지자 원사웅은 이를 해명하려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갔다. 선조는 억울함을 청하는 그를 특별히 불러보고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는 은전을 입었으며, 그 뒤 훈련원정에 제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 기록은 물론이고 다른 비공식 사료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원씨 가문 족보에서만 하사품을 내렸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은 아예 관련 사료를 찾아볼 수가 없다.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해전에서 아버지 원균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때 전사하지 않고 1646년에 사망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전사했을 가능성은 없다.

선무원종공신 2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추서되었다.

3. 논란과 의혹

== 논란과 의혹 ==

원사웅과 관련해서는 사망 시기 논란, 이순신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사망 시기 논란 ===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해전에서 아버지 원균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원주 원씨 족보에 있지만, 공식 기록인 십구공신회맹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전후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1]

1604년부터 1728년까지 작성된 십구공신회맹록의 기록을 보면, 원사웅은 1646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날짜내용
1604년 10월 28일15공신회맹록, 호종, 선무, 청난 3공신 책훈 후.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원릉군(原陵君) 원균 적장자(嫡長子)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鍊院正) 신(臣) 원사웅
1613년 3월 12일19공신회맹록, 위성, 익사, 정운, 형난 4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자(長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신(臣) 원사웅
1625년 4월 17일17공신회맹록, 정사, 진무 2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자(長子) 절충장군(折衝將軍) 전첨지중추부사(前僉知中樞府事) 신(臣) 원사웅
1628년 9월 13일19공신회맹록, 소무, 영사 2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자(長子) 가선대부(嘉善大夫) 원성군(原城君) 신(臣) 원사웅
1646년 9월 3일20공신회맹록, 영국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손(長孫) 전력부위(展力副尉) 행충좌위부사용(行忠佐衛副司勇) 신(臣) 원필(元珌)
1680년 8월 30일
(1689년 7월 25일 취소, 1694년 10월 12일 회복)
20공신회맹록, 보사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손(長孫)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충좌위부사과(行忠佐衛副司果) 신(臣) 원필(元珌)
1728년 7월 18일21공신회맹록, 분무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손(長孫) 학생(學生) 신(臣) 원진서(元震瑞)



1720년에 발간된 원씨 족보에도 원사웅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1]

子 士雄(承嫡), 字大器, 乙亥生, 當壬辰倭亂從原陵君軍, 多有捷獲之功, 而浮謗太甚, 以伸卞事, 持狀啓, 詣行在, 特蒙引對, 賜饋面諭, 卽除訓正, 賊平後策功二等, 後登武科, 官至同知, 襲封原城君, 娶萬戶綾州具三樂女, 生一子, 繼娶昌寧成汝學女, 生一子, 墓在振威馬山酉坐原.중국어

아들 사웅(적통을 승계하다), 자(字)는 대기(大器), 을해년(1575)에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에 원릉군(原陵君)을 따라 종군하여 첩획(捷獲)의 공이 많이 있었는데, 뜬 비방이 매우 심하여 이를 신변(伸卞)할 일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특별히 불러보시고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는 은전을 입었으며, 곧바로 훈련원 정을 제수(除授)받았다. 왜적을 평정한 후에 (선무원종) 2등공신으로 책훈되었다. 그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다. 만호(萬戶) 능주 구삼락(具三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이어 창녕 성여학(成汝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묘는 진위현(振威縣) 마산(馬山)의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한국어

그러나 1921년에 발간된 족보에는 원사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5]

子 士雄, 字大器, 宣祖乙亥生, 登武科, 官同中樞, 襲封原城君, 宣祖三十年丁酉七月日殉節, 壬辰之亂, 從統制公軍, 統制公多捷獲之功, 而浮謗甚囂, 以伸卞事, 持狀啓詣行在, 特蒙引對賜饋面諭, 除訓鍊正, 賊平策勳二等. 配 綾城具氏 父萬戶三樂, 配 昌寧成氏 父汝學, 墓 振威馬山酉坐.중국어

아들 사웅(士雄), 자(字)는 대기(大器), 선조 을해년(1575)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이르렀으며,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선조 30년 정유년 7월 일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통제사공(統制使公)을 따라 종군(從軍)하였는데, 통제공이 많은 첩획(捷獲)의 공을 세웠으나 뜬 비방이 심히 많았기에 신변(伸卞)할 일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니 (선조께서) 특별히 불러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시는 은전을 입었으며, 훈련원 정을 제수(除授)받았다. 왜적이 평정되고 나서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배(配)는 능성 구씨로 부친은 만호(萬戶) 삼락(三樂)이다. 배(配)는 창녕 성씨로 부친은 여학(汝學)이다. 묘(墓)는 진위현(振威縣)의 마산(馬山)의 유좌(酉坐)에 있다.한국어

1720년의 족보와 비교하면 전사했다는 내용을 넣기 위해 임진왜란 이후의 행적을 전부 삭제한 것이 확인된다. 원씨 집안 족보의 변경 내용과 다른 공식 기록들을 고려하면 원사웅의 임진왜란 전사는 사실이 아닌 조작으로 보인다.[1] 실제 사망 년도는 1646년 사망 등의 이유로 논의되는 승계가 언급된 점을 미루어 보아 대략 1646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순신과의 관계 ===

임진왜란 당시 원사웅은 18세 소년이었으나, 이순신은 그가 12세의 어린아이라고 무고하여 논란이 되었다.[6] 원균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6] 이순신은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상황에서 장수끼리 갈등을 일으킬 위기로 비춰져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를 내리게 된다.[6]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이었고,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誣陷)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6]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이순신은 보고서에 "원균이 10여 세에 불과한 아들을 외람되게 공로자 명단에 올렸다"고[7] 했는데, 조사 결과 원사웅은 어엿한 청년으로 충분히 전공을 세울 만 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된 것은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일” 때문이 아니라, “이순신이 원균 또는 원균의 아들을 모함한 일”과, 부산의 왜군 진영을 이원익의 휘하에서 태워버린 작전을 자신의 작전인 양 거짓 보고를 올린 사건 등이 겹쳐 이루어진 일이다.[7]

이순신의 보고에는 원균의 아들이 12세였다고 했지만, 이는 원균의 서자인 10살 된 첩의 아들이고, 적자인 원사웅은 임진왜란 초기에 18세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20대의 성인이었다.

하지만 위에 적힌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8]

하지만 3년 전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것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 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이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위의 언급과 달리 이덕형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0]

3. 1. 사망 시기 논란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해전에서 아버지 원균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원주 원씨 족보에 있지만, 공식 기록인 십구공신회맹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전후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1]

다음은 여러 공신 책훈 후 작성된 십구공신회맹록의 기록들이다.

날짜내용
1604년 10월 28일15공신회맹록, 호종, 선무, 청난 3공신 책훈 후.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원릉군(原陵君) 원균 적장자(嫡長子)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鍊院正) 신(臣) 원사웅
1613년 3월 12일19공신회맹록, 위성, 익사, 정운, 형난 4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자(長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신(臣) 원사웅
1625년 4월 17일17공신회맹록, 정사, 진무 2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자(長子) 절충장군(折衝將軍) 전첨지중추부사(前僉知中樞府事) 신(臣) 원사웅
1628년 9월 13일19공신회맹록, 소무, 영사 2공신 책훈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자(長子) 가선대부(嘉善大夫) 원성군(原城君) 신(臣) 원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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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손(長孫) 전력부위(展力副尉) 행충좌위부사용(行忠佐衛副司勇) 신(臣) 원필(元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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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공신(宣武功臣) 원균 장손(長孫) 학생(學生) 신(臣) 원진서(元震瑞)



1720년에 발간된 원씨 족보에도 원사웅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1]

子 士雄(承嫡), 字大器, 乙亥生, 當壬辰倭亂從原陵君軍, 多有捷獲之功, 而浮謗太甚, 以伸卞事, 持狀啓, 詣行在, 特蒙引對, 賜饋面諭, 卽除訓正, 賊平後策功二等, 後登武科, 官至同知, 襲封原城君, 娶萬戶綾州具三樂女, 生一子, 繼娶昌寧成汝學女, 生一子, 墓在振威馬山酉坐原.중국어

아들 사웅(적통을 승계하다), 자(字)는 대기(大器), 을해년(1575)에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에 원릉군(原陵君)을 따라 종군하여 첩획(捷獲)의 공이 많이 있었는데, 뜬 비방이 매우 심하여 이를 신변(伸卞)할 일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특별히 불러보시고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는 은전을 입었으며, 곧바로 훈련원 정을 제수(除授)받았다. 왜적을 평정한 후에 (선무원종) 2등공신으로 책훈되었다. 그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다. 만호(萬戶) 능주 구삼락(具三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이어 창녕 성여학(成汝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묘는 진위현(振威縣) 마산(馬山)의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한국어

그러나 1921년에 발간된 족보에는 원사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5]

子 士雄, 字大器, 宣祖乙亥生, 登武科, 官同中樞, 襲封原城君, 宣祖三十年丁酉七月日殉節, 壬辰之亂, 從統制公軍, 統制公多捷獲之功, 而浮謗甚囂, 以伸卞事, 持狀啓詣行在, 特蒙引對賜饋面諭, 除訓鍊正, 賊平策勳二等. 配 綾城具氏 父萬戶三樂, 配 昌寧成氏 父汝學, 墓 振威馬山酉坐.중국어

아들 사웅(士雄), 자(字)는 대기(大器), 선조 을해년(1575)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이르렀으며,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선조 30년 정유년 7월 일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통제사공(統制使公)을 따라 종군(從軍)하였는데, 통제공이 많은 첩획(捷獲)의 공을 세웠으나 뜬 비방이 심히 많았기에 신변(伸卞)할 일로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니 (선조께서) 특별히 불러 음식물을 하사하고 면유(面諭)하시는 은전을 입었으며, 훈련원 정을 제수(除授)받았다. 왜적이 평정되고 나서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배(配)는 능성 구씨로 부친은 만호(萬戶) 삼락(三樂)이다. 배(配)는 창녕 성씨로 부친은 여학(汝學)이다. 묘(墓)는 진위현(振威縣)의 마산(馬山)의 유좌(酉坐)에 있다.한국어

1720년의 족보와 비교하면 전사했다는 내용을 넣기 위해 임진왜란 이후의 행적을 전부 삭제한 것이 확인된다. 원씨 집안 족보의 변경 내용과 다른 공식 기록들을 고려하면 원사웅의 임진왜란 전사는 사실이 아닌 조작으로 보인다.[1] 실제 사망 년도는 1646년 사망 등의 이유로 논의되는 승계가 언급된 점을 미루어 보아 대략 1646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2. 이순신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원사웅은 18세 소년이었으나, 이순신은 그가 12세의 어린아이라고 무고하여 논란이 되었다.[6] 원균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6] 이순신은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상황에서 장수끼리 갈등을 일으킬 위기로 비춰져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를 내리게 된다.[6]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이었고,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誣陷)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6]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이순신은 보고서에 "원균이 10여 세에 불과한 아들을 외람되게 공로자 명단에 올렸다"고[7] 했는데, 조사 결과 원사웅은 어엿한 청년으로 충분히 전공을 세울 만 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된 것은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일” 때문이 아니라, “이순신이 원균 또는 원균의 아들을 모함한 일”과, 부산의 왜군 진영을 이원익의 휘하에서 태워버린 작전을 자신의 작전인 양 거짓 보고를 올린 사건 등이 겹쳐 이루어진 일이다.[7]

이순신의 보고에는 원균의 아들이 12세였다고 했지만, 이는 원균의 서자인 10살 된 첩의 아들이고, 적자인 원사웅은 임진왜란 초기에 18세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20대의 성인이었다.

하지만 위에 적힌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8]

하지만 3년 전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것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 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이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위의 언급과 달리 이덕형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0]

4. 가계


  • 조부 : 원준량
  • 조모 : 남원 양씨 (양성지의 후손)
  • 숙부 : 원연 ([14], 1545년 ~ 1597년)
  • 숙부 : 원전 ([14], ? ~ 1597년)
  • 숙부 : 원용
  • 아버지 : 원균 (1540년 음력 1월 5일 ~ 1597년 음력 6월 19일)
  • 어머니 : 파평 윤씨 (1546년 ~ 1642년 9월 16일)
  • 누이 : 원씨 (한억(韓嶷)에게 출가)
  • 매부 : 한억 (현감 역임)
  • 서모 : 이름 미상
  • 서모 : 이름 미상
  • 부인 : 능성 구씨 (만호 구삼락의 딸)
  • 부인 : 창녕 성씨 (성여학의 딸)
  • 외조부 : 윤언성 (본관은 파평, 증 참판추증되고 파원군에 추봉되었다.)

원사웅의 친인척
관계이름비고
외조카한석망
외조카한석진
외조카한석신
외조카한석량무과 급제후 방어사, 부총관 역임
외조카한씨학생(學生) 유정(兪楨)에게 출가
외조카한씨남로성(南老星, 참판 역임)에게 출가
서제이름 미상
서매원씨이신춘(李新春)의 첩
서매부이신춘동지사 역임
서외조카이씨
서외조카윤안지
서매원씨왕족 의신군(義信君) 이비(李備)의 첩
서매부의신군 이비
서외조카원평령 이박
서외조카원계령 이경
서외조카원흥령 이거
서외조카원창령 이구
서외조카원양수 이정
서외조카원인령 이락
서매원씨승지 조정견의 첩
서매원씨병마절도사 정항(鄭沆)의 첩
아들원필충의위
자부전주이씨이담(李曇)의 딸
아들원염
손자원순격후일 증조부 원균의 신원을 요청하였다.
증손원진서


참조

[1] 서적 원주원씨 갑신보 고려대학교 1740
[2] 문서
[3] 승정원일기 尹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http://sjw.history.g[...] 1628-09-26
[4] 승정원일기 功臣嫡長에 대해 다시 下批한 내용 http://sjw.history.g[...] 1628-12-07
[5] 서적 원주원씨 신유보 국립중앙도서관 1921
[6] 서적 과학으로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새로운사람들 2003
[7]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8]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596-02-04
[9] 조선왕조실록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http://sillok.histor[...] 1598-12-07
[10] 서적 백호전서
[11]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597-01-01
[12] 문서
[13] 서적 인간 이순신 평전 북하우스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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