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시게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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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시게자네는 1568년 다테 사네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다테 마사무네 휘하에서 활약하며 오슈 정벌에 기여했다. 그는 히토토리바시 전투, 구리야마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이후 와타리 성주가 되어 영지를 개발하고 농정을 추진했으며, 1646년 양자 다테 무네자네에게 가독을 양위하고 164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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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시게자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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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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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테 시게자네 (伊達 成実) |
로마자 표기 | Date Shigezane |
출생 | 1568년 |
사망 | 1646년 7월 17일 |
별명 | 도고로 (藤五郎) |
신분 | |
가문 | 다테 씨 (와타리 다테 가문) |
주군 | 다테 데루무네 → 다테 마사무네 → 다테 다다무네 |
번 | 센다이 번 |
관위 | 아와노카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테 사네모토 |
어머니 | 교세이인 (다테 하루무네의 둘째 딸) |
배우자 | 정실: 와타리 고젠 (와타리 시게무네의 장녀) 계실: 이와키 고젠 (니카이도 모리요시의 딸) |
자녀 | 딸, 고조마루 양자: 다테 무네자네 (다테 마사무네의 아홉째 아들) |
군사 경력 | |
소속 | 다테 씨 |
지휘 | 니혼마쓰 성 |
주요 참전 | 히토토리바시 전투 고리야마 전투 스리아게하라 전투 스가가와 공방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마쓰카와 전투 오사카 전투 |
기타 | |
묘소 | 다이유지 (미야기현와타리군와타리정) |
2. 생애
永禄 11년(1568년) 시노부군(信夫郡) 오모리성(大森城)주 다테 사네모토(伊達実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시종(時宗)의 승려 료잔(了山) 화상[4](다테군(伊達郡) 아와노무라(粟野村) 센넨지(専念寺) 주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덴쇼 13년(1585년) 히토토리바시 전투(人取橋の戦い)에서 다테군이 궤멸되는 와중에도 분전하여 다테 테루무네를 탈출시켰다. 덴쇼 14년(1586년) 9월 13일 오모리성에서 니혼마쓰성(二本松城)주로 옮겨졌고, 시노부군과 다테군 대신 아다치군(安達郡) 33개 읍(약 38,000석)[5]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와타리 시게무네(亘理重宗)의 장녀 와타리 고젠(亘理御前)과 결혼했다. 덴쇼 16년(1588년) 구리야마 전투(郡山合戦)에서는 적은 병력으로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広)의 공세를 막고 오우치 사다쓰나(大内定綱)를 회유하여 귀순시켰다. 덴쇼 17년(1589년) 스리아게하라 전투(摺上原の戦い)에서는 적의 측면을 기습하여 전투 초반의 열세를 뒤집는 등 다테군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덴쇼 18년(1590년) 5월, 다테 테루무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했을 때 구로카와성(黒川城)에서 수비를 맡았다. 같은 해 10월 가사이 오사키 잇키(葛西大崎一揆) 진압에 종군했지만, 잇키 선동이 발각되어 다테 테루무네가 히데요시에게 상락을 명령받자, 고쿠분 모리시게(国分盛重)와 함께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 인질로 나오성(名生城)에 들어갔다. 덴쇼 19년(1591년), 다테 테루무네가 이와데야마성(岩出山城)으로 이봉되자, 시게자네는 니혼마쓰 대신 쓰노다성(角田城)주 다데 무네자네(田手宗実)의 이구군(伊具郡) 16개 마을과 시바타군(柴田郡) 1개 마을을 받고 쓰노다성으로 거성을 옮겼다.[5]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 종군했다. 귀국 후 다테 테루무네를 따라 후시미의 다테 저택에 있었다. 분로쿠 4년(1595년) 6월 4일, 정실 와타리 고젠이 후시미에서 병사했다. 같은 해 8월 24일 히데쓰구 사건과 관련된 서약에 이시카와 요시무네(石川義宗) 다음으로 서명했다.
이후 시게자네는 후시미에서 다테 가문을 떠났고, 쓰노다성은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은 야다이 가게요리에게 접수되었다. 이때 쓰노다성 아래 저택에서 저항한 시게자네의 가신 하다 미쓰나가 등 30여 명이 전사했고, 시게자네의 가신단은 해체되었다.
『정종기』에 따르면, 히토토리바시 전투 후 시부카와성에 있을 때, 하인이 실수로 화약 상자에 불을 붙여 성이 전소되었다. 이 화재로 시게자네는 오른손 손가락이 모두 붙는 큰 화상을 입었다. 귀참 후 다테 마사무네와 관계는 원만했던 것으로 보이며, 다테 마사무네가 시게자네에게 "별 용무는 없지만, 요즘 만나지 못해 편지를 썼다"는 내용의 편지도 남아 있다.[10]
2018년 7월 22일, 시게자네 탄생 450년을 기념하여 스리아게하라 전투를 소재로 한 노 「스리아게」(오쓰키 헤이센 작)가 홋카이도 이다테시에서 상연되었다.[11]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덴쇼 7년(1579년), 다테 시게자네는 대모리성에서 관례를 치렀다. 이때 에보시오야(관례를 주관하는 사람)는 다테 테루무네였다.[4] 덴쇼 11년(1583년), 시게자네는 가독을 이어받아 대모리성주가 되었고,[5] 다테 영토 남쪽의 방위를 담당했다.2. 2. 다테 마사무네 휘하에서의 활약
다테 마사무네가 오슈를 정벌할 때, 시게자네는 용맹을 떨쳐 마사무네가 오슈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시게자네는 '결코 뒷걸음질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백 개의 다리가 달린 지네가 붙은 투구를 애용하며 스스로를 '용맹 무쌍'이라 칭했다.[4]마사무네가 임진왜란에 참전했을 때 시게자네도 따라갔으나,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 못해 마사무네와 불화하여 다테 가문을 떠났다. 에치고 우에스기 가문에 초대받았지만 사양하고, 가타쿠라 가게쓰나 등의 설득으로 돌아와 다시 마사무네와 함께했다. 마사무네의 일기를 대신 써주기도 하였다.[5]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시게자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로부터 5만 석의 봉록으로 가신이 될 것을 권유받았으나, "원래 가신 집안에 봉직할 생각은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6] 오쿠보 다다치카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도 권유를 받았으나, 마사무네의 봉공구 때문에 결렬되었다. 같은 해 가을, 다테 마사카게·가타쿠라 가게쓰나 등의 설득으로 귀참하여, 7월의 시로이시 성 공격에도 이시카와 아키미츠의 군에 속하여 참가했다.
2. 3. 와타리 영주 시대
1603년 2월 10일, 가타쿠라 가게쓰나가 시로이시성으로 이동하면서, 다테 시게자네는 와타리성에 들어가 와타리 군 23개 마을, 5095석[7]을 받았다.시게자네는 다테 마사무네의 딸 고로하치히메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혼례(1606년) 때 사자로 참석했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고, 1622년 모가미씨가 개역되자 노베자와 성을 접수하는 등 여러 중책을 맡았다. 마사무네 사후, 2대 번주 다테 다다무네 아래에서도 가문의 장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38년에는 전년도에 발생한 홍수 대책 비용으로 막부로부터 은 5,000관을 빌린 것에 대한 사례를 올리기 위해 다다무네의 명으로 에도로 향했다. 이때 연회 자리에서 오슈 지방의 군담을 요청받은 시게자네는 센도 인토리바시 전투를 이야기하여, 발을 가리고 듣고 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외적인 역할과 더불어, 시게자네는 영지 개발과 부흥에도 힘썼다. 농업 발전을 위해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12세기에 개척된 이와지조 용수를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이구군 히가시코사카의 취수구(코사카 둑)에서 와타리군 야테니바에 이르는 하토하라 용수를 새로 건설했다. 또한, 해안가의 경작에 부적합한 지역을 활용하기 위해, 오가군 나가토하마(현: 이시노마키시)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도리노우미 주변 4곳(도리야자키하마·하코네다하마·나가토로하마·오하타하마)에 염전을 만들었다. 후에 우타군 10개 마을[8](현: 신치정 지역)에 200관을 추가로 받았을 때는 신누마우라 연안(이마이즈미하마·이마가미하마)에도 염전을 개척했다.
1644년에 실시된 간에이 총검지의 결과에 따라 영지 재편이 이루어졌는데, 와타리 영지는 산출된 관고가 받았을 당시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이에 따라 2할 출목을 걸고 구 기준치의 5/6로 줄여 계산해도 여전히 2,000관을 초과했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증가했지만 실제로는 영지의 일부가 회수되어, 와타리군 23개 마을, 우타군 10개 마을, 이구군 1개 마을, 단자와군 2개 마을에서 총 2,000관으로 조정되었다.[5] 이러한 시책 덕분에 시게자네 사후에도 신전 개발이 계속되어, 와타리 다테씨의 최종적인 표고는 24353석에 달했다.
1646년 2월 9일, 외아들인 구조마루가 요절하여, 종질이자 양자인 다테 무네자네(와타리 다테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같은 해 6월 4일에 사망했다. 향년 79세. 묘소인 다이오지(大雄寺)[3]에 있는 다테 시게자네 묘소는 1974년에 실모토 묘소, 다테 사네우지 묘소와 함께 와타리정 지정 문화재가 되었고, 1979년에는 다테 시게자네 묘소(부속: 목조 채색 갑주상)가 미야기현 지정 유형 문화재가 되었다.
1879년에는, 그의 유덕을 기리는 와타리 군민의 요청으로, 와타리 성 혼마루 터에 세워진 와타리 신사에 무사하토시오노미코토로서 제사 지내고 있다.
2. 4. 만년
마사무네의 일기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1] 말년에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자신의 무용담인 오슈군담을 들려주기도 했다.[1]3. 인물과 일화
다테 시게자네의 투구(兜)에는 누에를 본뜬 앞장식이 붙어 있었다. 이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누에의 습성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9] 이 누에 앞장식은 현재 남아있는 곤이토오도시 고마이도 구소쿠(紺糸威五枚胴具足, 홋카이도 다테시 소장)와 와타리정의 대웅사 목상갑주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종기』에 따르면, 인취교 전투 후 시부카와성에 머물 때, 시게자네의 시종이 실수로 화약 상자에 불을 붙여 성이 모두 타버렸다. 이 화재로 시게자네는 오른손 손가락이 모두 붙어버릴 정도의 큰 화상을 입었고, 평생 그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귀참 후에는 정종과의 관계도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정종이 시게자네에게 "별다른 용무는 없지만, 요즘 만나지 못해 편지를 썼다"는 내용의 편지도 남아 있다.[10]
다테 씨(다테 백작가(센다이 본번))의 가부(집사)인 사쿠나미 세이료는 저서 『동번사고』(1915년)에서 "시게자네는 사람됨이 영특하고 용맹하며, 한때 무쌍의 용사라고 불렸다"라고 평가했다(권 13「이타치 시게자네전」).
2018년 7월 22일, 시게자네의 탄생 450년을 기념하여 스리아게하라 전투를 소재로 한 노 「스리아게」(오오츠키 헤이센 작)가 홋카이도 다테시에서 상연되었다.[11]
4. 관련 작품
5. 계보
- 아버지: 이다테 사네모토
- 어머니: 교쇼인
- 정실: 와타리 고젠 (와타리 시게무네의 장녀, 1595년 사망)
- * 여자 (요절)
- 계실: 이와키 고젠 (니카이도 모리요시의 딸, 이와키 쓰네타카의 미망인, 1620년 사망)
- * 고조마루 (1611년 ~ 1614년)
- 양자: 이다테 무네자네 (이다테 마사무네의 아홉째 아들)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이다테 사네모토 |
어머니 | 교쇼인 |
정실 | 와타리 고젠 (와타리 시게무네의 장녀) |
계실 | 이와키 고젠 (니카이도 모리요시의 딸, 이와키 쓰네타카의 미망인) |
양자 | 이다테 무네자네 (이다테 마사무네의 아홉째 아들) |
이다테 마사무네와는 사촌 형제이자, 동시에 사촌간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구분 | 이다테 시게자네 기준 | 이다테 마사무네 기준 |
---|---|---|
외가 쪽 | 사촌 (어머니의 형제의 자녀) | 해당 없음 |
아버지 쪽 | 사촌간 (아버지의 사촌의 자녀) | 사촌 (아버지의 형제의 자녀) |
참조
[1]
웹사이트
みぃはぁ版・平成伊達治家記録別館鬼庭家の人々
http://www008.upp.so[...]
[2]
웹사이트
伊達成実(読み)だて しげざね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伊達成実」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9
[3]
문서
당초의 寺号는 「웅산사」였으나, 정덕 2년(1712년)에 3대 번주·綱宗(웅산공)의 법호 「견성원전 웅산전위대거사」를 피해 「대웅사」로 개칭. 동시에 성실의 법명도 「대웅사전」으로 개명되었다.
[4]
문서
성실이 왜리성으로 이주하면서, 구사의 료산화상을 왜리에 초청하여, 게이쵸 11년(1606년)에는 화상을 위해, 성하의 조마치에 전념사를 건립했다.
[5]
간행물
延宝7年(1679年)「御知行被下置御帳」(佐々久編『仙台藩家臣録』(歴史図書社、1978)第1巻3~4頁所収)
佐々久
1679
[6]
문서
천문의 난에 의해 파탄이 된, 에치고 우에스기씨 당주·우에스기 사다미츠가 성실의 아버지·지모토를 양자로 맞이하는 이야기가 실현되었다면, 게이쇼는 실가·우에다 나가오씨의 당주로서 성실을 섬기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테씨의 문장으로 유명한 「대나무에 참새」는 원래 우에스기씨의 문장이며, 이 양자 인연의 인출물로서, 명도·우사미 사다미츠와 함께 지모토에게 증정된 것이다.
[7]
문서
관영 21년(1644년)까지 센다이번에서는 1반=360보로 계산(전국 표준은 1반=300보)
1644
[8]
문서
관영 총검지 후의 촌나누기에서 고쿠라바타무라가 후쿠다무라에, 츠리시하마가 야지고야무라에 편입된 것에 의해, 우타군에 있어서 센다이번령의 촌수는 11에서 9로 감소하고 있다.
[9]
웹사이트
伊達成実
http://www.datenawat[...]
2021-09-30
[10]
문서
「伊達政宗文書」1800・平成『仙台市史』資料編所収
[11]
뉴스
戦国合戦、勇壮に 伊達成実生誕450年記念し能「摺上」上演
https://www.hokkaido[...]
道新web室蘭版
2018-07-25
[12]
문서
성실이 만년(관영 연간)에 마사무네의 전기를 스스로 저술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많은 이본이 존재하는 위에, 제목도 다른 『마사무네기』·『다테 일기』나, 더 나아가 일화 부분을 원형으로 한 『마사무네공 고명어집』등도 있기 때문에, 이들 각본은 편찬 과정에서 성실 자신이 기록한 각서(자필 고본)로부터의 발췌를 바탕으로 각색을 더한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으며, 향후의 보다 더욱의 사료학적·서지학적 연구의 진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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