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월산대군 이정 태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월산대군 이정 태실은 조선 시대 왕족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태봉산 정상에 위치한다. 월산대군은 덕종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형으로, 그의 태실에는 태비 1기와 석함 1기가 남아 있다. 태비는 1462년에 조성되었으며, 석함 안의 태항아리와 지석은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이 태실은 서울 지역에서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태실이며, 조선 왕실의 안태 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태실 - 중종대왕 태봉
    중종대왕 태봉은 중종의 태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어 서울특별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석재 태 항아리, 태실비, 난간석으로 구성되어 조선 시대 묘제 및 왕실 의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고, 가평현이 가평군으로 승격되는 배경이 되었다.
  • 태실 - 예천 문효세자 태실
    예천 문효세자 태실은 요절한 문효세자의 태실로 조선 왕실 문화의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사적 제173호로 지정되었으며, 태실비와 태지석에는 문효세자의 탄생 및 태를 묻은 시기가 기록되어 있다.
  • 서울 서초구의 문화유산 - 헌인릉
    헌인릉은 서울에 위치한 조선 왕릉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헌릉은 가장 큰 규모를, 인릉은 섬세한 석물 조각을 특징으로 한다.
  • 서울 서초구의 문화유산 - 묘법연화경 권1-2
    묘법연화경 권1-2는 조선 시대 정희왕후가 간행한 대자본계 판본으로, 김수온의 발문과 도선의 홍전서가 수록되어 있으며 변상도가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월산대군 이정 태실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월산대군 이정 태실 정보

2. 월산대군

월산대군 이정(李婷, 1454년 ~ 1488년)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덕종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형이다. 왕가에서는 출산이 있을 때 왕족의 태를 보관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태실이라 하였으며, 태봉(胎封)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월산대군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2. 1. 생애와 업적

월산대군 이정(1454년 ~ 1488년)은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며, 덕종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형이다.

1460년(세조 6) 7세 때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ㆍ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하고, 망원정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하였다.

1473년 조정에서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하여 덕종의 맏아들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 비 인수왕후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사망하였으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그의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고 시호는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내렸다.

2. 2. 사후

월산대군의 태를 묻어 보관하던 태실에는 현재 태비 1기와 석함 1기가 남아 있다.[1]

태비는 전체적으로 윗부분이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난 형태(규수방부형, 圭首方趺形)로, 비 몸돌과 비 받침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1] 비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고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천순육년오월십팔일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立石)’이라고 새겨져 있어, 1462년(세조 8)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1]

석함은 윗부분이 땅 위에 드러나 있는데, 원래는 석함 안에 태를 넣어 보관하는 태항아리와 지석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 일본의 아타카(安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언제 반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1]

이 태실은 조선 성종의 형이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 이정의 태를 묻은 태실로, 비록 태항아리와 지석은 도굴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오늘날 서울 지역에서 원래 위치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태실이다.[1] 태를 신성시하여 명당을 골라 소중히 모셨던 조선 왕실의 안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태비와 석함, 그리고 태실군의 핵심을 이루는 태봉산 정상부를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1]

또한 태실 보호를 위해 민간인의 경작, 땔감 채취, 약초나 나물 채취 등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금표(禁標) 구역으로 추정되는 태봉산 전체 15,249.9m2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태실 주변의 역사ㆍ문화적 환경을 보존하고 있다.[1]

3. 월산대군 태실

조선 성종의 형이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1454~1488)의 태를 묻은 태실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태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왕가에 출산이 있을 때 왕족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의미하며,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월산대군 이정(1454년~1488년)은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으로, 덕종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고,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다.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고,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으며,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ㆍ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그는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하고, 망원정(望遠亭)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하였다.

1473년 조정에서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하여 덕종의 맏아들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인수왕후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그의 시문 여러 편이《속동문선 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고 시호는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내렸다.

3. 1. 구조와 특징

월산대군 이정 태실에는 태비 1기와 석함 1기가 남아 있다.

태비(胎碑)는 전체적으로 규수방부형(圭首方趺形)으로, 비 몸돌과 비 받침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고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천순육년오월십팔일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立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이 비가 월산대군이 월산군(月山君)으로 봉해진 1460년으로부터 2년 뒤인 146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함(石函)은 상부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다. 원래 석함 안에는 태를 봉안하는 태항아리와 지석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 일본의 아타카(安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언제 반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3. 2. 지정 사유

조선 성종의 형이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의 태를 묻은 태실로, 비록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도굴되어 일본 아타카(安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지만, 오늘날 서울 지역에서 원래 위치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태실이다.[1] 태(胎)를 신성시하여 명당을 골라 소중히 모셨던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태비와 석함, 그리고 태실군의 핵심을 이루는 태봉산 정상부를 문화재로 지정, 보존할 필요가 있다.[1]

태실 보호를 위해 민간인의 경작, 땔감 채취, 약초 채취 등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금표(禁標) 구역으로 추정되는 태봉산 전체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태실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1]

3. 3. 문화재 보호구역

태실 보호를 위해 민간인의 경작, 땔감 채취, 약초나 나물 채집 등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금표(禁標) 구역으로 추정되는 태봉산 전체(15249.9m2)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태실 주변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 이는 태실이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