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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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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산대군은 조선 세조의 장손이자 덕종의 맏아들로, 성종의 형이며, 시문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고, 명나라에 그의 시가 알려지기도 했다. 예종 사후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으나, 순성명량경제 좌리공신에 책록되었고, 학문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며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는 여러 문헌에 수록되었으며, 묘소와 사당이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해 있다. 그는 여러 드라마에서 다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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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정
작위왕자, 대군
본관전주 이
출생1454년 12월 18일
출생 장소수양대군 사저, 한성부, 조선
사망1488년 12월 21일 (향년 34세)
사망 장소월산대군 사저, 한성부, 조선
묘소월산대군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 16-35)
아버지덕종
어머니소혜왕후
배우자승평부대부인 박씨
자녀덕풍군 이이
종교유교, 후에는 불교
휘, 자, 호
이정 (李婷)
자미(子美)
풍월정(風月亭)
시호
시호공간(恭簡), 후에 효문(孝文)
조선 왕족 정보
봉작대군
계보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2. 생애

세조의 장손이자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맏아들로, 성종의 친형이다. 어려서 할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그의 시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1457년 아버지 의경세자가 사망한 후에도 조부 세조의 보살핌 아래 궁중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月山君)에 봉해졌으며, 1468년 숙부인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왕위 계승 논의가 일어났다. 세조의 장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약하다는 이유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고, 동생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였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으나 이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동생 성종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성 자택 뒤뜰에 풍월정(風月亭)을 짓고 경기도 고양군에 별장을 마련하는 등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풍류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뛰어나 많은 시를 남겼으며, 이는 《동문선》(東文選)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전해지고 명나라에도 알려졌다. 정희왕후의 배려로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에 책록되기도 했으나, 이후 제수된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1488년 10월부터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간호를 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1489년 1월 22일 향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454년 12월 18일,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와 인수대비(한명회의 딸)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조의 첫 손주이자 장손이었으며, 성종의 친형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고, 문장에도 뛰어나 그의 시가 명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1457년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조부 세조의 보살핌 아래 궁중에서 계속 양육되었다. 1460년(세조 6년) 정의 대부(正義大夫) 월산군(月山君)에 봉해졌고, 1462년에는 중의대부가 되었으며, 1465년에는 흥록대부가 되었다.

1466년 8월 19일, 월산군은 병조참판을 지낸 박중선의 딸 박씨와 혼례를 올렸다. 박씨 부인은 월산군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혼례는 영순군 이부(永順君 李溥)의 집에서 친영(親迎)으로 이루어졌고, 부인 박씨는 처음 상원군 부인(祥原郡夫人)에 봉작되었다가 후에 승평부부인으로 개봉되었다.

예종 즉위 후인 1468년(예종 원년) 10월 8일 현록대부(顯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숙부인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세조의 장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약하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고, 동생인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했다. 성종 즉위 후 월산군은 월산대군(月山大君)으로 진봉되었다.

2. 2. 혼인

1466년 8월 19일, 9세의 월산대군은 박중선(朴仲善)의 딸이자 양천 허씨 부인의 딸인 박씨 부인과 혼인했다. 박씨 부인은 월산대군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2. 3. 왕위 계승에서의 배제와 이후의 삶

1468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논의되었다. 본래 세조의 장손이었던 월산대군이 유력한 후보였으나,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나이가 너무 어렸고, 월산대군 자신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1] 결국 그의 동생인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가 당시 권력자였던 한명회의 딸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월산대군은 이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생인 성종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2] 한때 한성을 떠나 전라도 깊은 산 속의 절에 숨어 지내기도 했으나,[1] 1473년 다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자신의 집 뒤뜰에는 풍월정을 짓고,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 북촌에 별장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보냈다.[1]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돌아오노매라.[1]

그러나 그의 평온한 삶 이면에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정희왕후는 월산대군이 혹시라도 불만을 품고 반발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에 책록했다.[1] 이후 문소전 제조(提調)나 종부시 제조와 같은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월산대군은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1]

그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시를 남겼으며, 그의 시는 명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1] 1476년에는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 기순(祁順)에게 시를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1] 그의 시 중 백여 편은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輿地勝覽),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실려 전해지며, 일부는 중국의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에도 수록되었다.[1] 1483년 봄에는 정희왕후, 어머니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호종하였고, 이때 전주에 들러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기도 했다.[1]

1488년 10월부터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간호를 시작했으나, 이로 인한 과로로 11월부터 병석에 눕게 되었다. 결국 두 달 뒤인 1489년 1월 22일 향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2] 성종은 처음에 공안(恭簡)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이후 효문(孝文)으로 바꾸었다.[1] 그의 묘는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와 후궁 김씨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마련되었으며, 묘비는 1498년(연산군 4년) 임사홍이 썼다.[1]

2. 4. 학문과 예술 활동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책 읽기와 시 짓기를 즐겼으며, 그의 시는 명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예종 사후 동생인 성종이 즉위하자 정치에서 물러나, 한성 자택 뒤뜰에 풍월정(風月亭)을 짓고 경기도 고양군에도 별장을 마련하여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 문소전 제조(提調)나 종부시 제조 같은 관직 제안도 사양하고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지은 시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1476년에는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 기순(祁順)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의 시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輿地勝覽), 《대동시림》(大東詩林) 등 여러 문헌에 100여 편이 실려 전해진다. 일부는 명나라에도 알려져 중국의 시선집인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에도 수록되었다. 사후에는 성종의 명으로 그의 시를 모은 《풍월정집》(風月亭集)이 간행되어 명나라에 보내지기도 하였다.

2. 5. 죽음과 사후

월산대군이 사망하자 봉상시에서는 시호를 공간(恭簡)으로 정했으나, 이후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개정하였다.

사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1리(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427번지 능골마을 견달산(見達山) 아래 정좌(丁坐)에 안장되었다.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묘는 그의 묘 뒤편에 있으며, 첩 원주 김씨의 묘도 근처에 있다. 그의 묘소는 원당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한다. 묘소 뒤편에는 증손 양원도정 이혜의 아들인 현손 이호인과 그의 두 부인(해평 윤씨, 성주 이씨)의 묘가 있고, 묘소에서 임좌(壬坐) 방향으로는 서자 덕풍군 이이 내외의 묘가 있다.

1489년(성종 20) 2월 15일, 월산대군의 매장지 근방에 있던 옛 무덤들을 파내고 평탄화하는 작업 범위가 4백 보에 달하자 사헌부 지평 유경(劉璟)이 이를 문제 삼아 논핵하기도 했다.

월산대군의 신도비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의 명으로 임사홍이 비문을 작성하여 세워졌다.

묘소 근처에는 월산대군의 사당인 석광사(錫光祠)가 있다. 묘소 및 신도비와 사당 석광사는 원당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어 서로 나뉘어 있다. 사당 뒤쪽으로는 손자 파림군 이주 내외, 증손자 이성, 양원도정 이혜와 부인 죽산 박씨 등의 묘가 있다. 사당 입구 도로 건너편에는 전성부정 이리와 부인 고령 신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다. 현재 사당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으며, 전주 이씨 월산대군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월산대군의 시문집인 《풍월정집》(風月亭集)은 그의 사후 성종의 명으로 간행되었으며, 명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사후 그의 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연산군은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와 잠자리를 하던 중 꿈에 월산대군을 보고 불쾌하게 여겨, 내관에게 명하여 긴 쇠막대를 만들어 그의 묘 광중(壙中, 무덤 내부)에 꽂게 했다. 이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0]

3. 저술


  • 《풍월정집》

4. 가족 관계

'''왕가 전주 이씨'''


조카 : 제10대 연산군
조카 : 제11대 중종

'''외가 청주 한씨'''

'''처가 순천 박씨'''

  • 장인 : 박중선
  • 장모 : 양천 허씨 (허곤의 딸)
  • * 처남 : 박원종
  • * 처제 : 순천부부인 박씨 (제안대군의 부인)
  • * 동서이자 사돈 : 윤여필 (처제의 남편이자, 아들 덕풍군의 장인)
  • ** 처조카이자 조카며느리 : 장경왕후 (윤여필의 딸, 중종의 계비)


'''본인 및 직계'''

  • '''정부인 : 승평부대부인 순천 박씨''' (1455년 ~ 1506년 7월 20일) - 박중선의 딸. 자녀는 없었다. 연산군에게 강간당하여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 '''측실 : 부부인 원주 김씨''' (생몰년 미상)
  • * 서자 :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 1485년 8월 20일 ~ 1506년 3월 26일)
  • * 며느리 : 파평현부인 파평 윤씨 (생년 미상[11] ~ 1536년 1월 16일) - 윤여필의 딸
  • ** 손자 : 파림군 이주(坡林君 李珘, 1500년 ~ 1541년)
  • ** 손자 : 계림군 이유(桂林君 李瑠, 미상 ~ 1545년)[12]
  • ** 손자 : 전성부정 이리(全城副正 李璃, 생몰년 미상)
  • * 서자 : 이름 미상 (요절)

5. 관련 문화재

6. 대중문화 속의 월산대군

wikitext

연도방송사드라마배우
1994년KBS한명회임호
1995년KBS장녹수신귀식
1998년~2000년KBS왕과 비송호섭, 이인
2011년~2012년JTBC인수대비장희웅, 안현준, 위헌태, 이지오


7. 기타

월산대군의 장남인 덕풍군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덕풍군의 장남인 파림군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월산대군의 셋째 아들인 전성도정은 을사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 덕풍군의 둘째 아들인 계림군은 후사가 없어 성종의 서자인 계성군의 양자가 되었으나, 을사사화 때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월산대군의 후손은 파림군의 아들인 양천도정과 양원도정, 그리고 전성도정의 후손들을 통해 이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2] 웹사이트 바람처럼 살고싶다. 월산대군 묘(1488) https://goyangcity.t[...] 2012-03-06
[3]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5]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6] 웹사이트 [수도권]우면동 '월산대군 태실' 서울시 문화재 지정 https://www.donga.co[...] 2010-03-25
[7] 웹사이트 '월산대군 이정 태실(月山大君 李婷 胎室)'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 http://www.newswire.[...] 2010-03-24
[8] 웹사이트 월산대군사당 : 月山大君祠堂 https://memory.libra[...] 1989-12-29
[9] 웹사이트 월산대군사당 |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
[10]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http://sillok.histor[...]
[11] 문서 윤여필(尹汝弼)의 딸이자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언니. 덕풍군 내외는 이종사촌간이다.
[12] 문서 계성군(桂城君)의 양자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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