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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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 혜공은 춘추 시대 위나라의 군주로, 위 선공의 아들이자 선강의 아들이다. 그는 형제와 이복형제를 모함하여 죽게 하고 태자가 되었으며, 기원전 700년 위 선공 사후 위나라 군주가 되었다. 즉위 후 송나라, 제나라 등과 연합하여 주변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정변으로 인해 제나라로 도망가기도 했다. 이후 제나라의 도움으로 복위했으나, 주나라 왕실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기원전 66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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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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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혜공 희삭 |
대수 | 제16대/제18대 |
호칭 | 공 |
왕조 | 위 |
재위 기간 |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
수도 | 조가 |
휘 | 희삭 |
시호 | 혜공 |
출생 | 불명 |
사망 | 기원전 669년 |
아버지 | 선공 |
어머니 | 선강 |
2. 즉위 전
위 선공과 선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선강과 공모하여 이복형 태자 급과 친형 공자 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2][3] 기원전 701년 태자로 책봉되었다.[1]
2. 1. 출생과 배경
위 선공과 선강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희삭(姬朔)이다.어머니 선강과 함께 이복형인 태자 급을 아버지 선공에게 참소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형인 공자 수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2][3] 이로 인해 기원전 701년(선공 18년), 희삭은 형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태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기원전 700년(선공 19년) 11월, 아버지 선공이 졸거하자 태자 삭이 위나라 군주로 즉위하였다. 이후 위 혜공으로 불린다.
그러나 혜공의 즉위 과정은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고, 이는 내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기원전 696년(혜공 4년) 11월, 혜공의 숙부인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이 태자 급의 억울한 죽음을 이유로 혜공을 공격했다. 이들은 태자 급의 동생인 검모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했다. 공격을 받은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
기원전 688년, 망명한 지 8년 만에 혜공은 제나라 양공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위나라로 돌아왔다. 그는 검모를 공격하고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을 살해한 뒤 다시 군주 자리에 복위했다.
2. 2. 태자 책봉 과정
위 선공과 선강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희삭(姬朔)이다.어머니 선강과 함께 이복형인 태자 급을 위 선공에게 참소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친형인 공자 수마저 죽임을 당했다.[2][3] 기원전 701년, 형 태자 급과 공자 수가 죽자 희삭이 태자로 책봉되었다.[1]
3. 즉위 후
기원전 700년, 아버지 위 선공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위나라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형 태자 급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 속에서 태자로 책봉되었던 과정[4] 때문에, 공자 수의 스승이었던 좌공자 설(洩)과 태자 급을 보좌했던 우공자 직(職) 등 일부 세력은 혜공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2][3]
즉위 직후인 기원전 700년 2월, 혜공은 아직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5] 송나라 편에 서서 제나라, 연나라와 연합하여 정나라, 노나라, 기나라 연합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배했다.[6] 이후에도 송나라를 도와 정나라를 공격하고(기원전 698년[7]), 정 여공 복위 시도에 참여하는 등 주변국과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재위 4년인 기원전 696년 11월, 혜공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의 숙부인 공자 검모(黔牟)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했다. 이로 인해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2][3]
8년 후인 기원전 688년(또는 기원전 687년[2][8]), 혜공은 제 양공의 도움을 받아 제후 연합군과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여 검모를 축출하고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을 살해하며 다시 군주로 복위했다.[2][8] 복위 후에는 주나라가 과거 자신을 축출했던 검모를 받아준 것에 원한을 품고[1] 주나라 내정에 간섭했다. 재위 25년(기원전 675년), 연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하여 혜왕을 몰아내고 왕자 퇴를 옹립하기도 했으나,[9][1] 이는 기원전 671년 혜왕이 복위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재위 31년인 기원전 669년 여름 5월에 사망하였고,[2][10] 아들 희적(의공)이 뒤를 이었다.
3. 1. 초기 통치와 주변국과의 관계
기원전 700년, 아버지 위 선공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그러나 선공 생전에 형 태자 급과 공자 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희삭(혜공)이 태자가 된 과정[4] 때문에, 공자 수의 스승이었던 좌공자 설(洩)과 태자 급을 보좌했던 우공자 직(職)은 혜공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2][3]즉위 직후인 기원전 700년 2월, 혜공은 아직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위후(衛侯)를 칭하며[5] 국제 문제에 개입했다. 당시 송나라는 정 여공의 즉위를 도왔으나 과도한 대가를 요구하여 정나라, 노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혜공은 송나라 편에 서서 제나라, 연나라와 연합하여 노나라, 정나라, 기나라 연합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배했다.[6] 같은 해 3월에야 아버지 위 선공의 장례를 치렀다.
재위 2년(기원전 698년)에는 송나라가 정나라를 보복 공격하는 데 군대를 보내 원조했다.[7] 재위 3년(기원전 697년)에는 과거 위나라에 망명해 있던 정 소공이 정나라로 돌아가 복위하자, 송 장공, 노 환공, 진 장공과 함께 정 여공을 다시 복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인 재위 4년(기원전 696년)에는 채 환후까지 끌어들여 다시 정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혜공의 즉위 과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의 숙부이자 태자 급의 동생인 공자 검모(黔牟)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했다.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2][3]
8년 후인 기원전 688년(또는 기원전 687년[2][8]) 6월, 혜공은 제 양공의 도움을 받아 제후 연합군과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검모는 주나라로 쫓겨났고, 반란을 주도했던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은 살해되었으며, 혜공은 마침내 위나라 군주로 복위했다.[2][8]
복위 후 혜공은 주나라가 자신을 축출했던 검모를 받아준 것에 앙심을 품었다. 재위 25년(기원전 675년), 주나라에서 왕자 퇴(頹)를 지지하는 다섯 대부가 동주 혜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여 위나라로 망명해오자, 혜공은 이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남연과 함께 주나라를 공격하여 동주 혜왕을 온(현재 허난성 원현 남부)으로 몰아내고 왕자 퇴를 새로운 주나라 왕으로 세웠다.[9][1] 하지만 기원전 671년, 정나라의 도움으로 동주 혜왕이 복위하고 왕자 퇴는 살해되면서 혜공의 개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3. 2. 망명과 복위
기원전 696년 11월, 혜공의 숙부인 좌공자 설(洩)과 우공자 직(職)은 혜공이 형 태자 급의 죽음에 관여했다고[4] 원망하여[2][3]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태자 급의 동생인 공자 검모(黔牟)를 새로운 위나라 군주로 옹립했다. 공격을 받은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2][3]그로부터 8년 후인 기원전 688년 6월, 혜공은 제 양공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복위를 시도했다. 제 양공이 이끄는 제후 연합군은 위나라를 공격하여 공자 검모를 몰아냈다. 검모는 주나라로 도망쳤고, 반란을 주도했던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은 처형되었다. 이로써 혜공은 다시 위나라 군주로 복위할 수 있었다.[2][8]
기원전 675년, 주나라에서 다섯 대부가 왕자 퇴(頹)를 받들고 주 혜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반란을 이끌던 소자(蘇子)는 왕자 퇴를 모시고 위나라로 망명했다. 혜공은 과거 주나라가 자신이 축출되었을 때 공자 검모를 받아들였던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1] 왕자 퇴를 받아들였다. 나아가 연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하여 혜왕을 온(현재 허난성 원현 남부)으로 쫓아내고 왕자 퇴를 주나라 왕으로 옹립하는 데 가담했다.[9][1]
3. 3. 주나라와의 갈등
재위 4년(기원전 696년) 11월, 숙부인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은 혜공이 태자 급 살해에 관여한 것을 원망하여 혜공을 공격하고, 태자 급의 동생인 검모(黔牟)를 위나라 군주로 옹립했다. 이로 인해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해야 했다.[2][3]기원전 688년 또는 기원전 687년, 혜공은 제 양공의 도움을 받아 제후 연합군과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은 살해되었고, 축출된 검모는 주나라로 망명했으며, 혜공은 다시 위나라 군주로 복위할 수 있었다.[2][8]
재위 25년(기원전 675년), 주나라 내부에서 왕실 분쟁이 발생했다. 다섯 명의 대부가 퇴(頹)를 받들고 당시 주나라 왕이었던 혜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소자(蘇子)가 왕자 퇴를 모시고 위나라로 망명해왔다. 혜공은 과거 주나라가 자신이 축출되었을 때 망명했던 검모를 받아들여 숨겨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으므로, 망명 온 왕자 퇴를 받아들였다.[9] 나아가 혜공은 연나라와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했고, 혜왕을 온(현재 허난성 원현 남부)으로 쫓아낸 뒤 왕자 퇴를 새로운 주나라 왕으로 옹립했다.[9][1]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재위 29년(기원전 671년), 정나라의 도움을 받은 혜왕이 다시 복위하였고, 위나라와 연나라가 옹립했던 왕자 퇴는 결국 살해되었다. 이로써 위 혜공의 주나라 내정 간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3. 4. 죽음
재위 31년인 기원전 669년 여름 5월에 졸거하였다.[2][10] 혜공이 죽자 아들 희적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의공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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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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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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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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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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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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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춘추좌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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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춘추좌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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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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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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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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