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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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략은 오나라의 장수로, 252년 동흥 전투에서 제갈각의 명을 받아 전단과 함께 동흥의 두 성을 지키며 위나라의 공격에 맞섰다. 이후 동해태수를 역임했으나, 279년 남해태수로 등장하는 유략이 본인과 동일인물인지는 불확실하다. 유찬의 아들로,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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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오의 장군 - 사일
사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초 교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궁을 보좌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합포 태수를 역임했으나, 손권에게 귀순 후 사휘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며 격변기의 사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동오의 장군 - 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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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유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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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留略 |
개인 정보 | 이름 미상 |
생몰년도 | 미상 |
국적 | 조위 |
관직 | |
최종 관직 | 산기상시 (散騎常侍) 태상경 (太常卿) |
봉작 | 남성 (藍城) |
가계 | |
아버지 | 유기(劉 Киє) |
형제 | 유정(劉楨) 유소(劉邵) |
자녀 | 유휘(劉휘) |
생애 | |
주요 활동 | 조위의 문인 태상경 역임 |
2. 생애
252년,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이 죽고 손량이 즉위하자, 위나라는 남군, 동흥, 무창 세 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유략은 제갈각의 명으로 전단과 함께 군사 1000명으로 동흥의 두 성을 지켰는데, 유략은 서쪽 성을, 전단은 동쪽 성을 지켰다. 호준과 제갈탄의 공격에 저항하였으나, 지형의 험난함으로 인해 위군은 두 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위군은 방심하여 잔치를 즐기다가 제갈각, 유찬, 여거, 당자, 정봉 등이 이끄는 오군의 습격을 받아 환가, 한종이 죽는 등 크게 패해 후퇴했다(동흥 전투).
오봉 2년(255년), 아버지 유찬이 좌장군의 직위로 수춘에서 전사했다. 그 후, 오나라는 광릉으로 진출을 꾀했고, 위위 풍조에게 축성을 명한 뒤(반년 후에 감군·도독 서주제군사에 임명), 오양을 광릉태수로, 유략을 동해태수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었으며, 결국 축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279년, 곽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살해된 남해 태수로 유략이라는 인물이 「손호전」에 등장하지만, 이 사람이 유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손준전」에 실린 유찬의 전기에도 동생 유평과 함께 부장으로 활약했다는 기록밖에 없어, 유략의 다른 구체적인 행적은 불분명하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며, 동흥 전투에서 비슷한 활약을 보인다.
2. 1. 동흥 전투에서의 활약
252년,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이 죽고 손량이 즉위하자, 위나라는 남군, 동흥, 무창 세 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유략은 제갈각의 명으로 전단과 함께 군사 1000명으로 동흥의 두 성을 지켰는데, 유략은 서쪽 성을, 전단은 동쪽 성을 지켰다. 호준과 제갈탄의 공격에 저항하였으나, 지형의 험난함으로 인해 위군은 두 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위군은 방심하여 잔치를 즐기다가 제갈각, 유찬, 여거, 당자, 정봉 등이 이끄는 오군의 습격을 받아 환가, 한종이 죽는 등 크게 패해 후퇴했다(동흥 전투).2. 2. 아버지의 죽음과 광릉 진출
오봉 2년(255년), 아버지 유찬이 좌장군의 직위로 수춘에서 전사했다. 그 후, 오나라는 광릉으로 진출을 꾀했고, 위위 풍조에게 축성을 명한 뒤(반년 후에 감군·도독 서주제군사에 임명), 오양을 광릉태수로, 유략을 동해태수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었으며, 결국 축성은 실패로 돌아갔다.2. 3. 그 후의 행적
252년, 손권이 죽자 위나라가 동흥, 남군, 무창 세 방면에서 쳐들어왔다. 유략은 전단과 함께 제갈각의 명으로 동흥의 두 성에 병사 천 명을 이끌고 버텼다. 유략은 동성, 전단은 서성을 맡았다. 위나라 장수 호준과 제갈탄이 성을 공격했지만, 지형이 험해 함락하지 못했다. 제갈각은 아버지 유찬과 여거, 당자, 정봉을 이끌고 방심하던 위군을 공격해 격파했다(동흥 전투).255년, 아버지 유찬이 좌장군 직위로 수춘에서 전사했다. 이후 오나라는 광릉으로 진출하려 했고, 풍조에게 성을 쌓게 한 뒤(반년 후 감군·도독 서주제군사에 임명), 오양이 광릉 태수, 유략이 동해 태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오지 「삼사주전」).
279년, 곽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살해된 남해 태수로 유략이라는 인물이 「손호전」에 등장하지만, 이 사람이 유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손준전」에 실린 유찬의 전기에도 동생 유평과 함께 부장으로 활약했다는 기록밖에 없어, 유략의 다른 구체적인 행적은 불분명하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며, 동흥 전투에서 비슷한 활약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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